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 3 장 영남지방의 선교
강원도의 남쪽이요 서쪽으로는 충청도 전라도와 접경했으며 북쪽에 태백산이 있어 지리적으로는 가장 좋다는 바로 영남지방이다. 태백산 북남 아래에 예안(禮安)이 있고 동으로 꺾어 서로 빠지면 안동(安東)이 있다. 상주(尙州) 동쪽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흘러 김해(金海)를 거쳐 바다로 빠지는데 이 강은 경상도의 중앙을 가로지른다. 강의 동쪽을 좌도라 부르고 서쪽을 우도라 부른다.
영남 지방에 있어서 최초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동경 대리점의 나가사까(長坂毅)에 의해서였다. 그는 한국내의 사정을 살펴보고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하여 성서(로스역 누가, 요한쪽복음)와 그밖의 문서를 가지고서 7월 23일 일본의 마관(馬關)을 출발하여 2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에 성서공회 지점을 설립함으로 한국의 전도 기회를 붙잡겠다는 의도였으나 그 활동이나 성과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그 후 1884년 4월 요코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톰슨(Thomson) 목사는 일본인 스가노(管野) 부부와 미우라(三浦)를 대동하고 부산에 왔는데 미우라는 곧 사임했으나 스가노는 정주하면서 성서 보급에 크게 힘을 썼다. 그의 성서 보급소는 장날이면 문에 깔아 놓은 돗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성서를 읽곤 하였는데 김양선 목사는 이것을 부산의 노천교회(露天敎會)라고 했으며 서간도 한인교회, 의주교회, 소래교회, 새문안교회에 이어서 로스역 성서를 통해서 세워진 5번째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했다. 스가노는 그가 1886년 사망하기까지 1250부의 복음서를 전파하였으나 그의 사망과 더불어 부산의 성서 보급소는 문을 닫고 말았다.
영남 지방의 선교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성의 장로교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이다. 그는 그의 모교회와 그 지역 지교회 협회의 협력으로 초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89년 10월 그의 누이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가 왔을 때는 이미 서울과 서북 지역은 다른 선교사들이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지역 개척 선교사로 일하기로 작정하고 그의 누이는 서울에 남겨둔 채 부산을 향하여 장거리 여정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부산에 도착하기 3일전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에 걸려 쓰러졌다. 그 때 부산에 머물고 있던 게일(J. S. Gale)이 급보를 받고 달려가서 데이비스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 왔으나 끝내 죽고 말았으며 그의 누이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1890년 4월 15일이었으며 『영남교회사』에서는 1890년을 “영남에서의 개신교의 시작”이라고 했고 김춘배 목사는 데이비스의 죽음을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첫 번째 순교라고 했다. 그런데 데이비스의 죽음은 마침내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관한 관심을 한껏 고조케 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계속 여러 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 경남 일대에서 선교 사업을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베어드선교사>)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서울 다음으로 부산을 중요 선교지로 지목하게 되어 1891년에 베어드(W.M.Baird, 배위량) 목사를 부산으로 파송하였다. 그 해 3월에 부산에 도착한 배위량 목사는 선교부 설치를 위하여 대지를 구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애태우다가 미국 공사 허어드(A. Heard)의 도움을 받아 부산진에 약 80평 대지의 한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1월에는 그의 부인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 당시 공관에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배위량 목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그 때 배위량의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도 함께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영남 최초의 부산교회(후에 부산진교회)의 시작이다.
부산진교회는 1894년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때 세례 받은 사람들은 심상현(沈相鉉)과 두 분의 한국 부인이었다. 그 후 심상현은 곧 사망하였으며 그의 동생 심상호(沈相鎬)가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이가 곧 심취명(沈就明)이다. 심취명은 1904년 5월 27일 호주 선교사로서 제1대 당회장이었던 왕길지(王吉志, G.Engels) 목사때 장로로 장립하여 최초 당회가 조직되었다.
부산진교회의 창립자인 배위량 목사는 1년 중 약 7개월을 집을 떠나 지방 순회에 종사하였다. 그 때 그가 순회했던 지역은 진주, 김해, 울산, 밀양, 동래 등 경남지방 뿐 아니라 상주, 안동, 경주 등 경북지방 그리고 전주, 목포, 공주 등지까지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1893년 1월 28일에 조직된 선교사 공의회에서 선교지 분할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충청, 전라도는 미 남장로교 선교부에, 경상남도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 이양되었음으로 그동안 부산에서 활약하던 북장로교 선교부는 부산을 떠나게 되었다. 참고로 제1회 경상노회 회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1년(辛亥) 12월 6일에 경상노회가 부산진예배당에 회집하여 소집장 왕길지 목사의 사회로 총회 명령에 의하여 제일회 노회를 조직하니 회장 왕길지 목사 서기겸 회계에 홍승한 목사이더라.
노회 의안(議案)으로는
선교사 15인 목사 2인 장로 15인이 출석하여 회무를 처리하다.
선교사 지경을 20구에 분하여 각기 전도케 하다. 경산 울산 기타 몇 교회에 피택장로 유함을 보고하다. 몇 교회에서 장로선택과 장로문답함을 청원함에 대하여 허락하다. 시년에 조사 피택자는 박덕일 김만일 이더라.
종전 조사로 근무하던 이순구 이영하 김공명 박영조 전치헌 이문주 김성도 김내언 서성오 김성삼 최일형 이윤조 서성숙 김낙순 송취영 곽경문 최경호 박경애 문덕일 학습문답 할권을 여하다. 학무위원 4인을 택정하다.“
실적위주의 선교정책을 폈던 미 북장로교선교부는 당시 부산보다 더 큰 도시였던 대구에 비중을 두고 배위량 목사를 대구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선편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서 배위량(裵緯良) 목사가 최초로 대구에 도착한 것은 1893년 4월 22일이었다. 그는 대구 종로에 임시 숙소를 정하고 선교사업을 시도했다. 이 때로부터 약 2년 동안 경주 상주 안동 등지의 지방 실정을 살피고 선교정책을 구상했다.
배위량(裵緯良) 목사는 1896년 1월에 정완식(鄭完植)씨 소유의 420여평 부동산을 당시 시가 435원 50전을 주고 매입하였는데 이것이 남성로 제일교회의 부지가 되었다. 이래서 경북 최초의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는 배위량 목사가 처음 대구를 방문했던 1893년 4월 22일을 교회 창립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구에 처음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1896년 배위량 목사가 서울로 옮긴 후 그 뒤를 이어 대구에 부임한 안의와(安義窩, J.E.Adams, 배위량 목사의 처남) 목사이다. 안의와 목사가 대구에 부임한 것은 1897년 11월 1일 이었으며 그의 조수 김재수(金在洙)와 함께 본격적인 선교사업에 착수하였다.
또한 그해 12월 25일 의사인 장인차(張仁車-W.O.Johnson) 선교사가 부인과 함께 대구에 옴에 따라 비로소 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때 교인은 안의와 목사와 부인(Nellie Dick) 아들(Edward) 임시보모(Marie Chase), 장인차 의사와 부인(Edith Parker), 어학선생 겸 조수인 김재수씨 등 7명이었다.
최초의 학습교인 서자명은 1899년 6월 23일 주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안의와 목사는 당회장 겸 서기였다. 그리고 최초의 장로장립은 1907년 6월 28일 김성호, 박덕일 두 사람이었으며 이것이 경북 최초의 당회 조직이었다.
(<안의와선교사>) 대구제일교회의 실질적 설립자인 안의와 목사는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경상북도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며 전도에 힘써서 많은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서양문물을 이 지방에 소개하여 그 공헌함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2004년에는 교회창립 110주년을 맞아 대구제일교회 110년사를 펴냈다. 현재 대구제일교회는 구 영남신학대학의 부지 3,642평 위에 건평 2,900평의 고딕식으로 건축하여 1994년에 입당하였다.
▲ 초기의 대구 남성정교회
그리고 제일교회에서 창설 및 분립한 교회는 사월, 침산, 서문, 남산, 중앙, 제일논공 등 22개 교회에 달한다. 또한 30년 전에 대구 선교회를 조직하여 그 일원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국, 인도네시아, 일본, 대만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후원하고 있다. 대구 선교위원회의 회원 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일, 남산, 삼덕, 대봉, 영락, 내당, 제2동촌, 중앙, 애락, 신암, 서남, 수성교회 등이다. 참고로 경북노회 제1회 회록을 보면,
“1916년(丙辰) 12월 27일에 경북노회 제1회가 남성정례배당에 회집하니 회원은 선교사 6인 목사 6인 장로 17인이었다.”
노회 의안은
“직원을 선정하니 회장 박영조 목사, 부회장 김영옥 목사, 서기 김충한 장로, 회계 정재순 장로이더라. 분립한 경남에 지금은 남북에 대립하였으나 구의를 회고하여 통일적 정신으로 영구 영합할 의미의 서신을 선송하다.
공천위원 보고에 의하여 공천 정사 규칙 전도 재정 학무 문답 검사 조사 시찰 각위원을 연조로 선정하다.
피택장로 이경욱은 안수하기 허락하다. 신학지원자 백남칠 이대영을 시취하여 입학천서를 여하다. 시년에 신학계속자는 서화선 엄응삼 강석진 김인옥 권주백 박영화 제군이러라.
시찰지방을 7구에 분하여 소재지 시무목사 장로로 주찰케 하다. 신학생 권영해 염봉남 이문주 김복출 이만집 임종하 김충한 박문찬 허일 유진성 배은희 최재교 제군 역시 취학하다.
전도부에서 울산지방에 전도인 파송하기로 보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