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 5 장 울릉군의 복음전래
경상북도 동해 가운데 있는 울릉군은 동경 130°54′북위 37°29′에 위치해 있으며 총면적은 72.83㎢이다. 울릉읍과 서면, 북면을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인구는 현재 1만명 정도이다. 울릉도와 뭍을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은 137㎞ 떨어진 강원도 삼척군의 임원항이나 조선시대부터 뭍과의 거래는 주로 울진군 죽변항 이었으며 그 거리는 140㎞이다. 그후 일제시대부터 포항에서 여객선이 운항되어 포항이 오랫동안 울릉도를 출입하는 관문역할을 하였으며 거리는 217㎞이다. 1996년부터 여객과 차량, 일반화물을 동시에 선적할 수 있는 대형여객선(2,400톤) 선플라워호가 3시간의 운항으로 육지와 매우 교통이 가깝게 되었다.
울릉도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예로부터 우산국-우릉-무릉-울릉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져 왔는데 섬 내에 고분에서 출토되는 출토품과 횡혈식 석총 등을 볼 때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울릉도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역사 자료로서는 위지동이전 옥저조(245년, 고구려 동천왕 19년)에 그 기록이 있으며, 보다 확실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실직주(삼척), 하슬라주(강릉)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목우사자를 실고와 보이며 “항복하지 않으면 짐승을 풀어 밟아죽게 하겠다”고 하여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우산국의 백길(白吉), 토두(土豆) 두 사람이 고려조정을 방문하여 공물을 바치고 정위, 정조 등의 벼슬을 하사하였다는 기록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농경생활을 할 수 없을 때 고려조정에서 이원구를 보내어 울릉주민에게 농기구를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 주민이 계속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울릉도에 여진족과 왜구들의 침범이 잦아지자 조선 태종때 울릉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어야 한다는 여론을 황희(黃喜)정승(당시 공조판서)의 건으로 울릉도민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하여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 숙종 19년(1693년)에 동래어부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에 고기잡이 하러 갔다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거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왜선을 쫓아버리고 일본에 가서 담판한 결과 왜선의 침입을 금지시키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기 수토제(搜討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섬의 희귀수목과 연안의 풍부한 수자원을 탐낸 왜선들이 다시 노략질을 하게 되자, 울릉도에 사람이 사는 것이 섬을 지키는 것이라 판단한 고종은 1882년에 중앙관리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조사케 하였는데 이때 울릉도에는 조선인 142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78명이 벌목을 하고 있음을 적발하였다. 울릉도를 조사한 이규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척령이 반포되었고 1883년에 첫 개척민 16가구 54명의 개척민이 태하동에 내림으로써 울릉도의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민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곡식과 종자, 총포, 어선 등을 지원하였고 면세조치를 하였다. 이후 매년 울릉도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여 1900년경 인구는 약 3천명에 이르자 내부(內部-중앙관서)에서 우용정(禹用鼎)을 다시 파견하여 울릉도의 실정을 조사하도록 하여 보고된 자료와 건의에 따라 도장제를 폐지하고 강원도의 27번째 군으로 하여 울릉도를 울도군(鬱島郡)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으며 군청소재지는 태하동으로 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였다. 이때 초대군수는 배계주(裵季周)로서 서울 상도교회 출신 교인이었으며, 성경에 손을 얹고 찍은 사진자료가 있다. 1903년에 부임한 심흥택(沈興澤) 군수도 상도교회 교인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울릉도에서 기독교인으로써의 행적은 남아있지 않다. 1907년 울릉도는 정부의 관할 구역을 강원도 관할에서 경상남도로 옮긴 후, 다시 1914년 경상북도로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남, 서, 북으로 개편하였다. 이는 여객선의 운항에 따라 관할 구역이 바뀌게 되었다. 부산항에서 여객선이 울릉도에 래왕하게 됨에 따라 강원도에서 경남으로 관할지가 변경되고, 포항항에서 여객선이 취항하게 됨에 따라 경북으로 관할 구역이 변경된 것이다. 1915년 칙령 제66호로 제주도와 함께 도제실시로 도사(島査)를 두고 치안, 교육, 행정을 겸하여 오다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미군정하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됨으로써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라 울릉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울릉도의 인구 변동추이를 보면 1949년에 14,000명, 1970년에 23,000명, 1975년에 29,500명, 1983년에 19,000명, 2003년 9,000여명, 현재는 10,7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배계주 군수>) 울릉도의 생업은 주민의 50%가 수산업에 종사하고 수산물 생산량의 97%가 오징어로서 과거 오징어에 의해 인구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울릉도의 형성된 마을은 24개리로써 나리마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안선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그중 저동은 30톤급 어선 1,500척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어업 전진기지이다. 저동항은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적인 울릉도를 방문하여 울릉도 주민의 삶에 대한 애환을 알게 되었고 적극적인 지원을 함으로 울릉군은 ‘파도를 막자! 길을 뚫자!’는 구호아래 대역사가 시작되어 저동항방파제는 13년 만에 1980년 4월에 준공했으며, 일주도로는 2002년 저동에서 섬목까지 39㎞를 완공하여 울릉도 전역에 자동차가 래왕하게 되었다. 울릉도의 관문은 울릉읍 도동리이다. 도동항은 포항과 여객선이 왕래하는 군청소재지로써 행정,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1982년 11월 택시가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현재 차량은 4,000여대에 이르며, 울릉도관광의 시작과 종점이 되며, 숙박과 식당 등 관광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강원도 묵호항에서도 여객선이 래왕하고 있으며, 2005년부터는 일반인들이 독도를 관람할 수 있는 여객선도 취항하여 연간 2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해마다 울릉도를 찾아와 울릉도와 독도는 관광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1909년에 “울릉도 나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강원도 삼척군 부호 감리교우 김병두가 래전복음하야 함영수 등 수인이 인가귀도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설립하니라.”고 기록함으로 울릉도의 교회 역사가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그 다음 줄에 계속해서 “울릉도 장흥교회와 저동교회, 도동교회가 성립하다. 차 삼교회는 감리회 교우 김병두가 전도 설립한 자라. 예배당을 각자 성립하니 도동교회 김성서는 자기 가옥을 예배당으로 봉납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울릉도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된 과정이다. 당시 강원도 지역은 선교사들의 선교지역 분할정책으로 이미 캐나다 감리교회 선교부 지역에 있었으며, 강원도에서 들어온 권서인(勸書人) 김병두(金秉斗)의 복음전도에 의해 울릉도에는 최초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울릉도는 행정구역이 경남관할 지역이 되자 경남은 호주선교부의 선교지로써 울릉도는 호주선교부의 선교지가 되었다.
이 4개처 교회를 위하여 권서가인 김병두 전도인의 열성적인 활동도 있었지만, 경상노회에서는 울릉도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호주에서 온 선교사 매견시(枚見施 James Noble Mackenzie,1865∼1956)목사를 파송하였고, 매견시 선교사는 울릉도지역을 자기 관할하에 두고 1910년부터 1917년까지 5차례나 울릉도를 순행하여 초기 울릉도지역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였다. 매견시 선교사는 영국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유 섬이 고향으로써 무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의 사명을 서원하여 선교사가 되었고 남서태평양 바누아투(Republic of Vanuatu)에서 15년간 선교활동을 하던중 부인이 풍토병으로 사망하자 호주선교사로 지원하였고, 호주에서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부산으로 왔다. 그는 부산에서 나환자를 돌보며 부산, 기장, 울산, 온양, 울릉도 지역을 다니며 선교에 힘썼다.
울릉도의 개척민들은 화전으로 밭을 일구며 어업에 종사하는 등 생업을 위하여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울릉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자 힘든 삶을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복음을 받아 들였고 처음 교인들은 혈연으로 이루어 졌으며, 육지에서도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입도함으로써 교회는 점점 교인들이 늘어가게 되었다. 울릉도교회 설립 초기에 교역자를 모실 형편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울릉도지역의 까지 교역자로 올 인재가 부족하여 매견시 선교사가 세운 영수들이 교회를 인도하였다.
1916년에 경상노회에서 경북노회가 분립되면서 울릉도교회는 경북노회 소속이 되었다. 1917년 울릉도 전도를 위하여 경북노회 전도부는 황경선 조사(黃敬善)를 파송하였고, 이후 권서인 김병두를 조사로 세워 시무케 하였다. 그리고 매년 순행목사를 파견하여 성례(학습, 세례)와 교회직원을 임명하고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여 신앙을 고취시키며 독려하였다.
당시 울릉도 순행은 포항항에서 배를 타고 26시간 이상 소요되는 험한 뱃길이었으며 또한 배멀미를 감당해야 하는 힘든 여행으로써 누구나 선 듯 섬을 방문하기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매년 순행은 계속되었고 때로는 노회에서는 선교사를 순행목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경동노회 창립기념사진>
(<주낙서 목사>) 1936년 11월 15일 경동노회(慶東老會)가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되어 창립총회를 가짐으로 울릉도교회는 경동노회 소속이 되었고 순행목사도 경동노회에서 파송되었다. 1938년도에 허담(許澹)목사가 순행목사로 입도하여 현포교회 허경(許坰), 장흥교회 이종운(李鍾雲) 두 사람에게 장로 장립 안수를 함으로 첫 장로가 탄생되어 울릉도중교회 연합당회가 조직되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등 기독교탄압을 피하여 대구서남교회에서 울릉도에 온 주낙서(朱洛西) 목사가 도중(島中)교회 연합당회장(1944. 8.13)이 되어 울릉도교회를 돌보며 각교회를 순행하였다. 그는 1944년 12월 12일 북면 현포교회와 천부교회를 순행하고 나리 장재를 넘어 저동교회 (현 울릉동광교회 전신)로 귀가하던 중 폭설에 묻혀 동행하던 오우석 조사, 백만술 영수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울릉도교회 연합당회장으로 4개월간 시무하면서 당회7회, 성례 3회 15명을 베푸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도 순행목사는 계속되었으며, 1947년 김경만(金景萬) 목사가 울릉도를 순행하였을 때 울릉도 교회는 “교역자 시무를 위한 예산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울러 래년부터 교역자를 파송하여 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며, 순행후 경동노회에 보고함으로써 노회는 1948년 2월 도동교회에 이장영(李章英) 목사를 파송하여 울릉도에 담임목사가 시무하게 되므로 노회의 울릉도 순행제도는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1960년경에는 고신측 교역자인 황상규 전도사가 천부교회에 부임하여 고신측 교리를 가르치며 “고신파는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정통파고 통합측은 신사참배를 한 용공이다”는 교리를 설파함으로 천부교회와 저동교회가 분립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 천부교회에서 분립된 교회는 천부중앙교회이며, 저동교회에서 분립된 교회는 신흥교회이다.
1970년경에는 저동교회에 소천섭 강도사가 부임하여 이단인 구원파(일명 깨달음파)교리로 교인들을 이끌고 감으로 교회는 분열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미 소천섭 목사는 포항중앙교회에서 구원파 교리를 몰래 가르치는 등 무리를 일으키자 방출되어 울릉도에 들어 왔으며 울릉도에서도 물의를 일으킨 후 안동 국곡교회로 가서 그곳에서도 이단화로 이끌고 감으로 1974년 경안노회에서 제명되었다. 이 무렵 통구미교회도 장종호 전도인이 구원파교리를 가르쳐 교회가 분열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후 울릉도 교회는 성장을 거듭하여 10개(도동, 옥천, 통구미, 남양, 태하, 현포, 천부, 원천, 저동)의 교회가 되었으나, 1981년 애그니스 태풍 래습으로 원천교회(본천부)는 복구되지 못하고 천부교회에 합병되어 현재는 9개교회가 선교에 힘쓰고 있다. 2009년 4월 28일 울릉도 선교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총회에서는 총회장 김삼환 목사님과 임원 전원이 울릉도를 찾아와 울릉도 선교100주년기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이후 도동, 간령, 천부, 동광교회가 개교회별로 100주년 감사예배를 드렸다.
1938년 울릉도중교회 연합당회록 서문에는 “동해 창파에 애립한 울릉도에 주의 복음이 전파되야” 라고 기록하였듯이 울릉도의 기독교 역사는 어려운 풍파를 잘 견뎌 내고 이제 100년의 역사위에 선교 1세기를 맞았으며, 현재 울릉도에는 장로교 통합측 9개 교회, 고신측 3개 교회, 합동측 4개 교회, 침례교 17개 교회, 감리교 2개 교회, 순복음 1개 교회, 해군전대 임마누엘교회 까지 37개처 교회가 선교 2세기를 맞아 울릉군의 일만여 주민의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선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