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 6 장 초기 울릉군 지역의 교역자
1) 홍승한(洪承漢) 목사, 선교사 - 1917년 순행
호는 온암(溫庵)이며, 평북 의주에서 1881년에 출생하여 일찍이 교인이 되었고, 신학문의 전당인 숭실대학에서 공부한 뒤 교원생활을 하였다. 1907년부터 평북 철산군에서 조사로 활동하던 중 1908년 방효원 목사의 여동생 방승희와 결혼하였으며, 1909년 철산군 백량면 영동(嶺洞)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다. 191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4회)하였으며, 이듬해 9월 대구부에서 개최된 조선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위임목사로 5년간 시무하였다. 남성정교회 재임시에 평양에서 활동하던 길선주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홍목사는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연속으로 총대로 참석했을 뿐 아니라 총회 전도국 위원, 정치위원, 재단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7년 9월 1일 경성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6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됐다. 그때 회장 한석진 목사, 서기 장덕로 목사, 회계 찰스 클락(곽안련) 선교사가 각각 선출됐다. 당시 홍 목사는 경상도지역 선교거점인 대구교회에서 성도 500명을 목양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북장로회 조선선교부의 3대 선교거점은 평양과 서울, 대구였다. 지역별 대표 선교사는 평양 사무엘 모펫(마포삼열), 서울 호레이스 언더우드, 대구 에드워드 아담스(안의와)였고, 한국인 목사는 평양 길선주, 서울 차재명, 대구 홍승한이었다. 1917년 7월에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교회 순행목사로 울릉도를 순행하였으며, 그해 겨울 중국 산동(山東) 선교사로 총회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이주하여 먼저 파송된 방효원(方孝元) 목사와 1년 후에 재파송 된 박상순(朴尙純) 목사 등과 함께 중단되었던 산동선교를 재개하였다. 1921년에는 남경에서 개최된 중국 장로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산동선교의 현황을 보고하고 중국교회의 협조를 촉구하기도 했다. 1922년 선교지역을 분할할 때 그는 즉묵(卽墨)지방을 담당하여 즉묵선교회 회장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이르러 본국 교회가 재정적인 이유로 산동선교를 축소하게 됨에 따라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귀국후 평북노회로 귀환하여 선천남교회 목사로 부임하였고 1928년 철산읍교회로 전임되어 4년간 봉직하였다. 이후 북만주 선교에 종사하였고 해방후 월남하여 부산 괴정동에 잠시 거주하였으며, 그후 경기노회에서 목회하다가 1958년 2월 1일 78세의 일기로 서울에서 소천하였다. 장례는 서울 동신교회에서 집례되었고 장지는 망우리이다.
2) 서성오(徐聖五) 목사 - 1918년 순행
1901년경부터 전도인으로 경북지방 전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아담스(J. E. Adams - 안의와)의 조사로 경산, 울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에는 그의 전도로 경산군 송림교회, 경주 장산교회, 영일군 흥해교회 등이 설립되었으며, 1906년에는 맥팔랜드(E. F. Mcfarrand
-맹의와)의 조사로 영일군 일대를 전도하여 영일군 대도교회(1906년), 괴동교회(1907), 대곡교회(1908) 등 여러교회 설립에 기여하였다. 이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8회)하였으며, 1916년 2월22일 제12회 경상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해 6월 12일 경산 사월교회에서 위임목사가 되었다. 경산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경산 일대의 4개 교회를 돌보았고 1918년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 순행목사로 울릉도를 순행하였다. 이때 당초 노회의 울릉도순행은 정재순 목사로 공천되었으나 다른 사고로 서성오 목사로 변경되었다. 1919년 3.1 운동시 경산군 만세시위운동을 교인들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1924년 이후 그는 지병으로 무임목사로 지내며 투병하였고 결국 1927년경 지병으로 경북노회에 시무 사임하였다.
3) 김병호(金炳鎬=金福出) 목사 - 1920년 순행
1883년 김천군 아포읍 송천동에서 부친 김점용과 모친 김성녀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1901년 17세때 김천 송천동에 선교사가 와서 전도할 때 예수를 영접하였으나 문중의 핍박을 받아 1904년에 문중에서 쫒겨나 대구로 와서 선교사를 따라 다니며 전도하기 시작 하였으며 이무렵 포항 대도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1905년 포항지역에 와서 맹의와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였으며, 1908년 24세 때 선교사의 중매로 신명학교 출신 이신희와 결혼하였다. 이때 대구에서 최초로 서양식 결혼식을 하였다. 1909년 계성학교에 입학 하였으며, 1912년 계성학교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울릉도를 방문하여 3개월 동안 전도하였다. 1914년 3월 15일 계성학교를 졸업(3회)하고 1915년 평양신학교 입학하였으며, 1917년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조사로 청빙되어 시무하는 동안 1919년 3.1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사전 예비 검속에 걸려 독립만세를 부르지도 못하고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으며, 이듬해에 독립군자금 모금을 위한 독립공채판매에 가담하여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192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13회)하고 그해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6월 27일 경북노회에서 파송된 정재순 목사와 맹의와 선교사가 목사 위임예식을 거행하여 포항교회 1대 당회장으로 담임목사가 되었다. 1923년 포항영흥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포항지역 교육에도 힘을 쏟았으며, 1925년 포항교회를 사임하고 경북노회 전도목사가 되었다. 1927년 청도 풍각교회, 1940년 경산 사월교회, 1944년 포항 발산교회, 1948년 김천 송천교회, 1950년 경산 부직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52년 반야월교회에 시무하여 1958년까지 시무하였으며, 그해 대구 불로동으로 이사하여 1961년 도동교회를 개척하였다. 1966년 이신희 사모(권사)의 소천으로 대구에 거주하는 아들(은식)의 집에서 지내다가 1970년 6월 13일 86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삼덕교회 묘지에 묻혔다. 자녀는 4남 3녀를 두었으며, 손자 김대위 목사는 현재 서울 선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4) 박문찬(朴汶燦) 목사 - 1921년 순행
1875년 5월 25일 경북 경주군 강서면 옥산리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예수를 영접한 후 같은 동리의 박천필 등과 열심히 전도하여 1907년 괴동(槐洞)교회(현 대송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영수로 시무하였다. 1911년 조사가 되어 연일군 칠포, 흥해, 대전, 조사, 하옥교회 등지에서 시무하였으며, 1916년 흥해읍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면서 192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13회) 한 후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흥해읍교회의 담임목사로 4년간 시무하여 전체 9년간을 시무하였다. 1921년 경북노회의 울릉도 순행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1922년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24년 대구남성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5년까지 시무하였다. 이때 박덕일 목사의 『경북교회사』 편집에 대한 교열목사로 이문주 목사, 염봉남 목사와 함께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영천읍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이때 토지매수를 위하여 울릉도교회를 두번째로 순행하였다. 1929년 경북노회장으로 다시 피선되었으며, 그 후로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학무국장, 전국 주교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경북 흥해 명신소학교(明新小學校), 안강 영경학교 및 대구 명도학원(맹아학교- 대구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1930년 1월 경남노회 소속 부산진교회로 목회지를 옮겼으며 1934년 7월 2일 소천 하였다. 후손은 양아들 박순석(朴順碩) 목사가 있으며, 박순석 목사는 해방후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사위인 이영식 목사의 아들 이태영 박사는 대구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5) 김성로(金聖魯) 목사 - 1922년 순행
김성로 목사는 김해 김씨 김기호(金基浩)의 장남으로 1882년 9월 15일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출생했다. 1908년 경북 김천 파천교회에 출석하면서 집사가 되었고 이후 평양신학교를 졸업(제10회?)하고 1917년 9월 9일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고령읍교회를 비롯한 현풍 구읍교회 등 10개처 교회를 부해리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1920년 6월까지 시무하였다. 김성로 목사는 경북지역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고, 특히 병고치는 은사로 유명하였다. 1920년 6월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이해에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22년 3월 15일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춘기 울릉도교회 순행목사로 울릉도 각교회를 돌며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새로 믿기로 작심한 자가 백여명, 병고침을 받은 자가 30명이며, 교회 수리비를 위한 연보가 150원이었고, 도동교회에서는 세례와 성찬식을 거행하였다.(기독신보 1922. 8. 9) 1925년 황해노회로 이명하여 황해도 안악지역에서 시무하다가 함경도 길주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김목사님은 평생을 구령사업에 힘썼으며, 부흥목사로 3,500여명의 결신자와 울릉도 고도를 포함하여 112개교회에서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그후 신앙서적 저술과 저서를 남겼으며, 1951년 2월 5일 용인(龍仁) 고매리(古梅里)에서 소천하니 향년 70세였다. 그의 묘는 고매리에 있었으나, 1970년 9월 28일 포천군 소홀면 이동리 동신교회 장지에 이장되었다. 그는 독자이나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며 모두 전문학교를 수학시켰다. 아들은 약슬(約瑟), 영환(永煥), 경환(慶煥)이며, 손자는 진웅(辰雄), 덕웅(德雄), 낙웅(樂雄)이 있다. 그의 장남 약슬은 장서가로서 1913년 5월 9일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했다.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연희전문에서 수학한 다음 한때 교육계 투신했다. 원래 천성이 온후하였으며, 특히 국학연구에 전심전력하였으며 평생에 수집한 만여권의 귀중한 서책을 고대(高麗大學校)에 기증하고 19711년 6월 29일 서울 창신동에서 59세로 소천하여 포천군 동신교회장지에 묻혔다. 막내딸인 김순애는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여 5섯살 때 길주교회에 시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함북 길주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어 가곡 ‘그대 있음에’ ‘4월의 노래’ 등 수십곡을 작시작곡 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음악을 작곡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음대교수로 재직하였고 2007년 5월6일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소천하였다.
6) 김영옥(金泳玉) 목사 - 1924년, 1927년 순행
1871년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부소미리(扶蘇美里)에서 출생 하였으며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솔내교회에서 언더우드(H. G. Underwood-원두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사기』에 의하면
“1893년 선교사 무어(S. F. Moore)가 열성적으로 매일같이 서울에서 노방전도에 힘썼는데 당시의 조사는 김영옥과 천광실 이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사로 황해도 일대에서 시무하였다. 그 후 강원도 철원에서 교역하였고 다시 원주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나 선교지 분할정책에 의해 강원도지방이 감리교구역이 되자 경북 안동으로 가서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동시에 1911년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4회)하고 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9월에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안동성경학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동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중강진을 비롯한 국경지방을 수차례 내왕하였다. 이로 인해 적발되어 중강진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한 이후에는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관련되어 일제에 의해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경안노회를 창립하고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1930년 제18회, 1935년 제28회 노회장을 역임했다. 이밖에도 경안노회 산하에 여러 개의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1940년 1월 안동교회 6대 목사로 부임하여 안동교회에서 두 번씩이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미군정 당시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임되어 김규식 의장을 비롯하여 각 분야의 건국의 기초입법작업시 청원징계 부분을 맡아 참여하였다. 이때 김용모(金溶模)로 개명된 이름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경안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6.25사변 직후인 1952년 별세했다. 그는 교인들과 유대 관계가 각별하여 인정 많은 목사로 알려져 있고 특히 그의 가문은 목회자의 가문으로 25년 동안 교도소의 형목으로 교화사업에 몸바친 아들 김은석 목사는 경산 사월교회에서 출생하여 일본 나고야에서 독립운동을 한 바 있고 한때 중국 남경으로 망명도 했다. 김은석 목사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손이 서울 연동교회 원로목사인 김형태 목사님으로 3대가 목사로 보기 드문 교역자의 가문을 이루었다.
7) 조기철(曺基哲) 목사 - 1925년경 순행
1912년에서 1913년까지 대구 계성학교 임원으로 근무했으며, 1918년 포항 대도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면서 괴동교회, 서촌교회 3교회를 겸하였다. 1922년 하양교회 조사로 시무 중에 192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18회)하였으며 그해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하양지방 6개처 교회를 위철치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맡아 시무하였다. 1925년 7월 15일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르 순행하였다.(울릉도교회 교적부 시세일자로 추정) 1926년 1월 17일부터 1933년 9월까지 대구 동호교회(현 반야월교회)에서 8년간 시무하였고, 1937년 4월부터 1949년까지 다시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12년간을 시무하여 반야월교회 100년 역사에 두 번에 걸쳐 시무한 사역자였다.『하양교회 80년사』에서도 “조기철 목사는 일찍이 조사 때 하양지방으로 부임해 와서 15년간 9개처 교회를 맡아 더운 여름과 추운겨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부는 것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자갈밭길, 진흙길, 언덕길과 차가운 금호강의 강물을 건너면서 순회하여 전도와 목회생활로 그 좋은 젊은 한평생을 주님 자취를 따르는 고행의 길을 말없이 걸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의 업적은 1935년 12월 17일 동산성경학교에서 개최된 제34회 경북노회 동북시찰회 보고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와촌면 박사동교회는 예배당 12칸을 반양식으로 건축하였사오며, 하양면 남하동교회는 예배당 신축하기 위하여 연보한 결과 430여원에 달하였사오며, 진량면 봉회교회에서도 대지 350평 건축 6칸의 교역사택을 건축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그후 조기철 목사는 1944년 4월에 시작된 ‘시온산 제국’(후에 시온산장로교회)에 가담하여 내각구성원 9명중 문부대신에 내정되어 있었다.
8) 허 담(許 澹) 목사 - 1926년, 1938년 순행
1886년 8월 7일 경북 영일군 송라면 허씨 집단촌 조사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성장해서는 향리에서 한문사숙을 설립, 15년간 한문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일찍이 개화를 하여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장래를 내다본 선각자였고 독립운동가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고 이나라를 식민지화하려고 할때인 190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기독청년회관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910년 돌아왔다. 마침 원산에서 온 동아기독교(침례교회의 전신) 전도인 이명숙(李明淑)이 조사리에 와서 전도하여 그를 비롯해 허만(許滿), 허동(許涷)형제와 이명서 등이 믿게 되어 1913년 조사리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11년 공주에서 열린 제 6회 대화회에서 총찰(總察-개척전도인의 통솔책임자) 직분을 받아 강원도 울진 구역에서 순회 시무하였다. 1912년 안대벽, 전치규와 함께 교사직을 받아 원산 본부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이종덕 목사가 펜윅의 뒤를 이어 2대 감목으로 지명된 것이 교단의 분열을 가져오자 그는 장로교회로 옮길 결심을 하게 되었고 허만 등 형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5년 2월 자신을 지지하는 30여 교인들과 함께 영일군 송라면 조사리에 별도의 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1916년에는 조사리에 진명(進明)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대구성경학교(大邱聖經學校)에서 성경 강습을 받던 중 3월 8일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세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진명학교도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목회에 뜻을 두어 1920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19회) 하였으며, 그해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로서 첫 임지는 경북 청하(淸河) 지방의 교회와 경주읍 로동(路東)교회(현 경주제일교회)였으며, 1926년에는 경주읍 계남학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도 같이 병행하였고, 이해에 3월 17일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순행목사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1927년 맹의와 목사와 함께 경주로동교회 동사 목사로 위임되었다. 1931년 경북 현풍(玄風)교회로 전임하였고 그해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33년부터 경주읍교회를 비롯한 경주 중앙지방 교회를 담임하였다. 1936년 경북노회에서 경동(慶東)노회가 분립될 때 박영조(朴永祚) 목사 등과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회, 2회 및 4회 경동노회 부노회장으로 수고하였다. 1938년 10월 15일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두 번째 울릉도교회 순행목사가 되어 울릉도교회를 순행하면서 울릉도교회 최초로 연합당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노회의 순행결과 보고서에는 “10월 16일 장흥예배당에서 울릉도교회 최초로 2명(허경, 이종운)의 장로장립식을 주례를 하였고, 아울러, 울릉도 7개처 교회 도중연합당회를 조직하였다”고 하였다. 1940년 경동노회 5대 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2세 교육인 것을 깨달은 그는 1945년 10월1일 경주읍 서부동에 일본인이 쓰던 사찰을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불하받은 뒤 중등교육기관인 경주문화교육재단을 설립하였고 1949년 문화(文化)중학교로 발전시켰다. 그의 본래 계획은 경주에 신라(新羅)대학까지 설립하는 것이었으나 대학설립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경주시내 유일한 기독교학교인 문화중․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50년 6.25사변을 계기로 동아기독교의 후신격인 침례교회로 복귀하여 1951년 경주에 동경침례교회(현 경주침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56년에는 한국침례회 총회 교육부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침례신학교 교무과장이 되었고 후에는 부교장이 되어 신학교육에 종사하다가 1972년 7월 15일 소천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9) 이희봉(李喜鳳) 목사 - 1929년 순행
이희봉 목사는 1893년 경북 금릉군 아포면 덕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후 교역에 뜻을 두어 선교사 부해리의 조사가 되었다. 1901년 선산 죽원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였고, 1903년 이중회와 함께 김천 덕계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선산 오가교회, 선산읍교회, 1905년 선산 습례교회, 1906년 김천 대양교회, 복전교회, 1907년 예천 괴당교회, 1908년 김천 인의교회, 능치교회, 1909년 선산 도산교회, 칠곡 숭오교회, 1910년 선산 청산교회, 상주 서정교회를 교역하였다. 1910년에 상주 서정교회(현 상주교회)에서 보성의숙을 개설,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을 가르쳤다. 또한 1912년 칠곡 왜관교회, 1913년 선산 도산교회, 월호교회, 구미강동교회, 칠곡 남율교회, 구미 옥계교회, 상주 금흔교회, 화산교회, 오리원교회, 1914년 의성 청산교회, 상주 석산교회, 사산교회, 화산교회, 오광교회, 서정교회를 섬겼고, 1915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제9회)를졸업하고, 1916년 경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상주 서정교회(상주시민교회)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1917년에 선산 죽원교회와 상주지방 11개 교회를 선교사 방혜법의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그 후 1918년 경북노회장(3-4회)을 지냈고, 1921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대구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가 주도하는 자치운동(自治運動)에 관여하였다가, 교인들의 반대로 사면하였다. 또한 1922년 계성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9년에는 그 후 상주 남문밖교회를 개척하였고, 이해에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순행목사가 되어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1931년 송천교회 담임목사, 왜관교회 담임목사, 1937년에는 상주읍 교회와 남문밖교회가 합병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37년 6월 4일 65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10) 권영해 (權永海)목사 -1930년 울릉도 순행
1888년 8월 12일 경북 영일군 포항면 상원동 44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6월 계성학교 제1회생으로 졸업하였으며, 졸업후 1914년 구미 옥계교회, 1915년 선산읍교회, 칠곡군 황학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조사로 시무하는 기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6월 평양장로회신학교(제10회)를 졸업하고, 1917년 6월 21일 제2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6월 18일 제4회 경북노회에서 진평교회(현 구미 강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옥계교회, 상림교회 등 3개처 교회의 시무허락을 받아 시무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당시 진평교회 담임목사로 독립만세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상백(李相柏), 이내성(李乃成) 등과 함께 3월 12일에 동민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약속한 3월 12일이 되자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동민에게 배포하고 동리 곳곳에 불을 붙였으며 오후 8시에는 뒷산에서 300여명의 동민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그 후 이곳 민중들의 항일 저항의식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만세운동계획을 다시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2백 명의 동민과 더불어 뒷산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 3일 포항읍교회(현 포항제일교회)에 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27대 및 28대 경북노회 부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해 8월 31일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평생을 구령 사업에 헌신하다가 1949년 6월 23일 62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1) 유진성(兪鎭成) 목사 - 1931년 순행
1879년 1월 27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화전리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신하여 1904년에 세례를 받았고 1913년부터는 교역에 뜻을 두고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했으며 1915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교회 조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곧 성주일원의 만세시위운동의 주동자로 활약하였다. 그해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면, 각동리의 기독교인과 교회지도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3월 30일에는 유림측 지도자 송희근과 만나 기독교측과의 공동전선을 합의하였다. 마침내 거사당일 장터에 집결한 유림측과 달리,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기독교인들을 집결시키고 양쪽에서 동시에 만세시위에 들어가니 일반 주민들도 크게 호응, 시위인원은 3천명을 넘어섰다. 일경은 이를 무력탄압,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5, 6명의 사상자를 내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또한 유진성을 비롯한 주모자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그는 일단 피신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경상남북도 일원에서 군자금모금과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신문』배부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20년 8월 의성읍교회 김충한 목사와 독립운동 관계로 접촉하다 일경에 발각되었고 곧 합천에서 체포되었다.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곧 재판에 회부되어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대구와 진주형무소에서 복역,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후 신학에 뜻을 두었고 1925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19회)하였다. 1927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경북 약목, 금릉, 청도 등에서 교역하였다. 특히 김천의 황금정교회, 지좌동 복전(福田)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였다. 그후 왜관교회에 7대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31년 7월에는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지역의 순행목사가 되어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1932년 신령 왕산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1936년에는 제35대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도에 김천 송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해방 후인 1949년 4월 18일 청도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의 두아들 정순(正淳- 청도 신읍교회 원로목사), 석순(신암동 은천장로교회 목사)이 교역의 대를 이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독립유공자로 추대하였다.
12) 이태학(李泰鶴) 목사 - 1933년 순행
이태학 목사는 1890년(고종 27년) 3월 2일 경북 의성군 산운면(현 금성면) 수정리 200번지에서 이장두(李章斗)와 이송월 사이에서 2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착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18세까지 한학공부를 하였고, 23세에 금성 영신학교를 수료하였다. 이어 계성중학교에서 사범과를수료하고, 대구성경학교에서 다시 3년 동안 공부하여 1919년부터 조사가 되어 의성 산운교회, 군위 선곡교회에서 교역하였다. 1919년 3월 1일 경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서울에 들렀는데, 이때 서울의 3․1만세시위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대구에 내려와 대구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3월 7일 성경강습생에게 경성에서 전개되는 운동 상황을 말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3월 8일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주동이 된 대구 만세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고 이때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등 주모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에는 경주 옥산교회, 1922년에는 의성 탑리교회, 1923년에는 영천 원동교회, 자천교회, 보현교회, 신녕교회, 우천교회, 포항 성법교회, 대곡교회를 교역하였고, 1924년에는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1927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21회)하고 그해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청송 구산교회, 영천 신령교회, 대구 동인교회, 중부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34년에는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35년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33년 7월 18일부터 경북노회에서 울릉도순행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내 8개처 교회 순행과 전도강연, 문답을 하였고 도동으로 돌아와 5일간 사경회를 한 순행기록을 노회에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1938년 대구 원대교회에 부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달성군 현풍교회를 시무하였다. 1948년 4월 2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4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57년 현풍교회에서 은퇴한 후 혈압으로 1년간 고생하시다가 1962년 3월 27일 대구 대명동에서 73세로 소천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고 유해는 대전국립묘지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애국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 의성 산운리에 애국지사 남교 이태학 목사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의 자녀는 장남 명직, 차남 은식(한인교회 집사, 사회사업가), 장녀 순옥(대구중부교회 권사), 차녀 순남(서울신광교회 권사), 삼녀 순기(교사)가 있다.
13 강신창(姜信昌) 목사(1886-1972) - 1934년 순행
1886년 12월 23일 경북 영주군 평은면 천본리 내매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내매 마을은 진주강씨 집성촌으로 18가구가 살던 작은 마을로 내매교회가 세워지고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와 장로들을 배출하였는데 목사는 강신창 목사를 포함하여 강신명 등 13명에 이르며, 장로는 강재원을 비롯하여 모두 36명이 배출되었다. 강목사는 1909년 영주 내명학교에 입학하면서 안동에 있는 지신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선교사 웰번(A. G. Welbon -오월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로 영주 내매교회 서리집사로 시무하였고 1913년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하여 대구 신정교회 서리집사로 있었다. 1918년 계성학교를 졸업(3회)하면서 대구부 청년친목전도회 전도인으로 피선되어 달성 등지에서 전도하여 새신자 20명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조사로 임명받아 경주지방 5개처 교회를 시무하던 중 3.1독립만세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0년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와,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21년 고령지방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4년 성주읍교회와 지방교회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2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1기)하고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4년 경북노회의 울릉도교회 순행목사로 파송되어 7월 13일부터 8월 1일까지 울릉도 교회를 순행하였다. 이때 순행한 교회수는 7개처, 입교인수 56명, 총교인수는 195명으로 노회에 보고하였다. 1935년 경북노회 전도목사로 1년간 시무하였고, 1938년부터 대구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41년부터 17년간 대구 원대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57년부터 대구 원광교회(현 노원교회)를 설립하고 시무하였으며, 1964년 이후 대구제이교회 원로목사로 있었다. 1972년 3월 20일 대구에서 별세하였으며 경북노회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1956년 경북노회에서 성역 30년 이상 근속표창을 받았다. 아들 석교(錫敎)는 대구 서남교회 원로장로(안동 일직남부초등학교 교장 역임)로 있으며, 손자는 대구서남교회 장로(성구, 현구)로, 군포 산본교회 목사(윤구)로 시무하고 있다. 총회 50년사에는 강목사와 아들, 손자 3대가 계성학교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14) 이문주(李文主) 목사 - 1936년 순행
이문주 목사는 1884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오사리에서 이상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0년 합천면 죽배동 한문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894년 14세의 나이에 배상백의 장녀인 망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7세 때 중추원 의관으로 근무하다가 뜻하는 바가 있어 장사에 뛰어들어 대구 서문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사를 하던 어느 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1905년 5월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에서 출석하여 안의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9년 성경학교에서 1년 과정을 수료졸업하고 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9년 선산 오가교회, 노상교회, 죽원교회, 괴평교회, 상주 석산교회, 사산교회, 영주 대평교회를 전도하여 설립하고, 1910년에는 김천 대양교회, 선산 백자교회, 칠곡 황학교회, 1912년에는 구미 상모교회, 칠곡 죽전교회, 김천 동부교회, 1913년에는 칠곡 승오교회, 복성교회, 1914년에는 선산 습례교회, 칠곡 남율교회, 구미 옥계교회, 1915년에는 김천 죽원교회, 오가교회, 백자교회, 구미 상모교회, 칠곡 왜관교회, 1916년에는 김천 능치교회, 선산 습례교회, 1917년에는 칠곡교회, 대구 침산교회를 교역하였다.
그는 191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제11회)를 졸업하고, 그해 경북노회(3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칠곡 신동교회, 구미 상모교회, 1921년에는 상주 서정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1924년 4월 3일에 대구남산교회에 임시목사로 청빙되었고, 그해 12월 21일 위임목사로 1945년 5월까지 시무하였다. 1929년 경북노회장(제25회)을 역임하였고, 1937년 대구제일교회서 개최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1945년 6월 19일 숙환으로 소천 하여 교회장으로 동명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손으로 장녀는 미국 거주하고 있고, 차녀는 새문안교회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문주 목사는 천성이 온화하시고 전형적인 한국 선비였다. 교계에서도 그를 성자로 불렸다. 1936년 12월 손녀 은식이 죽은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인 토지 2천 수백평(논 1,578평, 밭 730평)을 교회에 헌납하였다. 또 그의 아들 덕성(상해임시정부 상임위원, 3·1만세운동 참여,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혜성단’ 참여, 독립운동지 『신한별보』제작배포)이 중국에서 조선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39세로 상해에서 사망을 하였다. 그의 자녀와 함께 4대 모두가 애국자로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한복을 입으셨고 양복은 일본으로 갔을 때 한번 입으셨는데 그때 넥타이를 매지 못해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하물며 목사님’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는 설교 중에 ‘하물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을 하였다. 또 그는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에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직하고 순진한 목사이었다.
15) 박영조(朴永祚) 목사 - 1937년 순행
1874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내영(來英), 영조는 그의 자(字)이다. 한학을 수학하고 1909년 산운교회와 의성 비봉교회의 조사로 시무하였고 1915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8회)하였다. 이후 목사안수를 받고 1916년 김천 황금정교회를 시무하면서 초대 경북노회장을 역임했다.
3.1운동 당시에는 경주로동교회를 담임했는데 경산군 사월교회 김기원(金基源) 목사, 윤기효 박문홍 영수와 함께 경주지방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 1920년 2월 22일 대구 남산교회 제 4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고, 1921년 12월에 창설된 대구 교남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장으로 활약했다. 1923년 3월, 당시 대구남성정교회 목사인 이만집과 함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노회 및 교회의 지배 감독을 정면 거부하는 이른바 「교회자치선언」사건에 관련하여 동년 3월 6일 경북노회 제1회 별노회에서 이만집과 함께 정직되자 그달 18일 남성정, 남산정 양 교회의 노회반대파(자치파) 교인들과 이만집 박목사 등은 「자치선언문」과 「약법14조」를 발표하고 경북노회를 탈퇴했다. 박목사는 남산정교회가 찬반양론이 되므로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과 함께 덕산동에 덕산정교회를 설립했으나, 1927년 교회와 함께 경북노회에 복귀했다. 1927년 흥해읍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35년 청하읍교회, 1937∼1940년 고령읍교회에서 시무했다. 제31회 경북노회장(1933년), 초대 경동노회장(1936년)을 역임했으며, 어도만(魚塗萬 Erdman. Walter c.) 선교사의 개인 어학선생을 지내기도 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하양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57년 경북 영천군 화산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시무했으며, 2년 후인 1959년 4월 6일 경북 영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박목사는 경북노회의 초대 노회장과 경동노회 초대 노회장을 역임한 주역이며, 1960년 4월 경동노회에서는 박목사의 공로를 치하하여 공로목사 묘비를 건립했다. 장녀 신의(信義)는 여전도사로 영천제일교회에서 17년간 시무하다 별세했고 차녀 삼득(三得)은 권사로 대구중앙교회에 출석하였다.
16) 김광수(金光銖) 목사 -1938년 순행
1892년 경북 경주 내남면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식민정치에 대한 반발심 및 노예생활을 초탈하려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32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27회)하고 그해 목사가 되었다. 졸업 전에는 전도사로 경주 불왕사(佛旺寺)지방을 순회하면서 시무하였다. 졸업 후에는 평서노회 요촌(腰村)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33년 4월에는 경북 김천의 황금정(黃金町)교회에서 시무했다. 1936년 일본의 와카야먀(和歌山) 한국인교회 목사로 부임했다가 일제의 압박으로 1938년 5월 2일 귀국했고 경북 포항(浦項)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그리고 그해 경동노회장에 피선되었고 이듬해인 1939년에 다시 재선되었다. 그해 경동노회의 울릉도교회 순행목사로 파송되어 8월 9일부터 8월 21일까지 2주간 울릉도 교회를 순행하고 당시의 울릉도교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기록하여 순행결과를 노회에 보고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6년도에 장로회신학교 상무이사로 시무하였다. 1947년 4월 20일 동호교회(반야월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그해 경북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53년에는 대구신학교를 창립하여 교장으로 봉직했다. 그해에 또한 계명기독대학(계명대학교 전신) 인사부 부장, 동대학 이사, 1959년에는 계명기독대학 이사장(3대)을 지낸바 있다. 특히, 그는 한국 농촌교회와 농촌사회 향상에 몰두했다. 그 후 1965년 1월 9일 성주 소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한 후 1967년 5월 21일 사임하였다.
17) 강만호(康萬浩) 목사 - 1940년 순행
경북 의성군 산운에서 출생하였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대영성서공회 권서인으로 성경전서 2권, 신약구약 130권, 단권 6,006권 등 6,138권을 판매하였다. 1915년 산운교회 집사, 1916년 영천 보현교회, 의성 청로교회, 청송 수락교회, 구산교회, 1917년 의성 운산교회 조사, 1918년 의성 제오교회, 청송 수락교회, 구산교회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19년 대리교회를 시무하였고, 산운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20년 군위 매성교회, 문덕교회, 의성 산운교회, 1921년 군위 선곡교회를 시무하였으며, 1923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17기) 하였다. 1924년 1월 11일 경북노회 제15회시 목사안수를 받고 그 다음날 의성 산운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1934년 의성 빙계교회 시무, 1936년 1월 25일 안강교회에서 위임 목사로 1942년 12월까지 시무 하였다. 1940년 8월 1일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순행목사가 되어 8월 29일까지 약 한 달간 울릉도를 체류하면서 교회를 순행하였다. 울릉도 순행중에는 십일조회를 조직하고 1주일간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때에 울릉성경통신과 졸업식을 주관하고 도중교회 제직회를 개최하여 제직을 임명하는 등 울릉도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애썼다. 8. 15일에는 태하교회당에서 강목사의 주례로 태하교회 임부춘(林富春)씨 장로장립, 현포교회 허정석(許貞錫)씨 집사안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남서동교회가 교인이 없어 폐지하고, 성미를 열심히 할 것과, 교회마다 재정문부를 비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1947년 4월부터 1949년 2월까지 구미 강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 후 청송 수락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8) 정해규(鄭海奎) 목사 - 1941년 순행
1926년 경주 건천교회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32년 경주, 감포 지방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으며, 1936년 다시 건천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제31기) 하였다. 1938년 경주중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39년 12월 7일까지 시무하였다. 1940년부터 영천 우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1941년 8월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순행목사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면서 서북면전도회원들의 모습과 천부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1949년 11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인동교회(현 강동중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 양화석(梁華錫) 목사 - 1942년 순행
1902년 11월 8일 경북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404번지에서 부친 양재근 장로와 모친 최옥금 집사 사이에서 4남 3 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일곱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가 일찍이 1907년부터 예수를 믿어 고향에 상낙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1915년 14세 때 경북 안동읍교회에서 세운 계명학원에 입학하면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 되었다. 1920년 평양 숭실학교를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소천 때문에 가정을 돌보기 위해 대구 계성학교로 전학하여 1921년 졸업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을 하던 중 1922년 3월 임성례와 결혼하였다. 목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26세의 청년으로 1926년 4월 마침내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길고도 험한 목회의 길에 입문한다. 그는 신학의 요람인 전통의 평양신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에 몰두하였고 복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면서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언제나 가슴을 적셨고, 복음만이 이 민족의 소망이라는 믿음으로 신학에 전념하였다. 1930년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문경지방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점촌, 농암, 과목 등 여러 교회를 개척했고, 1932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6기)하였다. 1933년 6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34년 1월 예천읍교회에 부임하여 5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며 1938년 12월까지 5년간 시무하였다. 1939년 1월에 경주노동교회(현 경주제일교 회)에 부임하여 1949년 5월 27일 대전으로 이사할 때 까지 10년을 시무하였다. 1942년 8월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순행목사가 되어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특히 이시기는 전쟁에서 막바지에 몰린 일본이 신사참배를 끈질기게 강요하던 때였고 이를 반대한 양목사는 1945년 7월 29일 끝내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1945년 12월 17일에서 12월 19일까지 경주노동교회에서 개최된 제11회 경동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해방후 경동노회를 복구하는데 노력하였으며, 1946년 경동노회 12대, 1947년 13대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대전중앙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하였으며, 대전신학교(야간)를 설립하는데 공헌하였으며, 이자익 목사가 은퇴함으로 대전신학교 2대 교장이 되었다. 양목사는 통합과 합동이 분열될 때인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69년 11월 은퇴하여 1970년 2월 27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곳을 다니며 목회를 열중하다가 1987년 1월 31일 미국에서 소천하였다.
20) 박순석(朴順碩) 목사 - 1943년 순행
1904년 2월 18일 경북 영일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계성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재학시 계성기독청년회 임원이 되어 체육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졸업후 화봉교회 조사로 시무하면서 장로로 임직되어 겸하였다. 그 뒤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6년부터 1943년까지 8년간 기계교회(현 기계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기계제일교회 73주년사에는 ‘일제말기에 일본의 기독교 박해로 어린 아들(정인)이 물고문을 당하는 등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핍박을 받고 항일투사로 활동중 해방되어 초대 제헌국회 국회의원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43년 7월 29일 흥해읍교회(현 흥해중앙교회)에서 1949년 5월까지 시무하여 아버지 박문찬 목사(1916년 시무)에 이어 부자간에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43년 9월 12일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의 순행목사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영일갑구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고 3대, 4대 국회의원에 자유당으로 당선되어 자유당 원내부총무, 자유당경북도당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박목사에 대해서 포항 대송교회 100년사의 기록에는 “박순석(朴順碩) 목사는 박문찬 목사의 양아들로 장로를 거쳐 목사가 되게 한 일은 대송교회의 큰 자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1) 주낙서(朱洛西) 목사 - 1944년 임시 시무
902년 10월 15일 경북 의성군 구천면 용사동 390번지에서 부 주전탁과 모 김대분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12월 5일 소호영의 장녀 소록이(蘇祿伊)와 결혼 하였다. 1922년 청산교회를 설립하여 집사와 영수로 시무하였고 1924년 용사동교회의 조사로 시무하였다. 1928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2회)하고, 1929년 1월 상림교회(선산 장천면)에서 시무하면서 1929년 5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9년 10월에 고향교회인 용사교회(현 구천교회)에서 1935년까지 시무하면서 부흥회 인도를 많이 하였는데 찬송가 ‘울어도 못하네’ 곡에 맞추어 가사를 개작하여 부른 찬송이 당시 유명하였다고 전하며 가사는 “불지옥은 어떤가 캄캄하기 짝이 없고, 풀무 불꽃 말마라 몇 천배가 뜨거워, 견딜 수가 없네 애통비통 절통타, 목 말라도 물한점 찾아 볼수 없으니, 아이고 내 팔자야” 이다. 1935년에는 구미 옥계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6년 울산 병영교회에서 제8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37년에는 상주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2년 대구 서남교회에 부임하여 1944년 2월까지 시무하는 동안 일제말기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탄압이 최고조에 달할 때 신사참배 거부로 주일예배를 마치면 바로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더 이상 대구에서 목회를 할 수가 없어 잠시 울릉도로 들어가 있기로 하여 홀로 울릉도에 입도하였다. 울릉도는 이미 노회에서 순행목사로 파송된 목사들의 울릉도 순행 결과 보고를 통하여 울릉도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944년 5월경 울릉도에 들어와 저동교회(현 울릉동광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고 1944년 8월 13일 울릉도의 도중교회 당회장이 되어 도중 6개처 교회를 순행하며 당회를 개최하고 성례를 베푸는 등 왕성한 목회활동을 하였다. 그해 12월 12일 야간에 북면 현포교회에서 당회를 개최하고 다음날 홍문동에 있는 천부교회의 순행을 마치고 저동교회로 귀가하기 위해 나리령(나리장재, 798m)을 넘을 때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동행했던 오우석 조사와 백만술 영수와 함께 눈에 묻혀 순교하였으며 13일만에 발견된 이들의 시신중 주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나이 45세였다. 묘소는 저동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87년 6월 이장하여 경북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 선산에 소록이 사모와 합장 되었다. 유족으로 장녀 분애(紛愛)는 영천 고지교회 권사로 시무 후 소천 하였으며, 차녀 영애(永愛)는 대구남산교회 권사로 시무후 은퇴하여 대구에서 거주하고 있다. 장남 성영(聖塋)은 대구신광교회 장로로 임직중 소천 하였으며, 자부 신영화(申榮花) 권사는 구미에서 고아원(삼성원)을 운영하고 있다. 손자 경찬은 조부에 이어 목사로 대전 대덕한빛교회 부목사로 시무중에 2007년 9월 16일 지병으로 45세에 소천 하였다.
22) 박장동(朴章東) 목사 - 1946년 순행
1910년 8월 17일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4월 일본 대판 자유감리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 3월 졸업하였으며, 대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4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청하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6년 9월 16일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여 울릉도 5개처 교회를 돌아보며 학습, 세례문답과 아울러 세례를 베풀었고, 각 교회의 집사와 권사를 임명하였다. 이때 군청을 방문하여 군수를 만나 일제강점기 강탈해간 천부교회당을 지어 줄 것과, 소실된 도동교회를 위하여 원조해 줄 것을 약속받기도 하였고, 현포교회에서 일주일간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27일간 울릉도에 체류하고 화물선을 타고 포항으로 나갈 때 풍랑을 만나 2일간 바다에서 표류되어 배멀미와 배고픔으로 고행을 심하게 하였으며, 구사일생으로 포항항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48년 경주 구정교회 담임목사, 1954년 자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56년 4월부터 1962년까지 하양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62년부터 1966년 10월까지 칠곡 왜관읍교회 제19대 목사로 시무하였고, 1966년 경북노회장에 피선되었다. 이해에 대명교회에 부임하였다. 1972년에는 대구 대현교회 초대목사로 시무하였으며, 대한장로회 신학교 이사장으로도 취임하였다. 경북노회 제60회 총회에서 재판국장에 피선되었고. 1976년에는 대한장로회신학교 교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1977년 경북노회 제62회 총회에서 다시 재판국장에 피선되었고, 대구신학교 운영이사장에도 취임하여 목회자 양성에 혼혈을 기울였으며, 1979년도에는 교장 직무대리로도 봉사하였다. 1984년 1월 12일 대현교회를 사임하고 그해 3월 15일 75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다. 박목사의 아들 박 은(朴 殷)은 서울 영동제일교회 장로로써 도서출판 「지평서원」의 대표였으며, 1968년에 모 신문사 신춘문예 시(詩)에 당선되어 시인(詩人)으로 등단한 문재(文才)였다. 현재는 손자 명규가 도서출판 지평서원의 대표로 있다.
23) 김경만(金景萬) 목사 - 1947년 순행
1933년부터 1934년까지 광주제일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으며,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판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36년 8월 4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대판성결교회는 지금으로부터 6년전 대판시 동정천구에서 셋집을 얻어 가지고 예배를 보아오던바 불편이 많음으로 신자들과 목사 김경만(金景萬)씨의 노력으로 수일전에 새 예배당이 낙성되어 지난 1일부터 5일까지 신교회당에서 성결교회경성성서학원장 이명직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여는 동시에 5일 오전에 수백명 신도들이 집회하여 이명직 목사 주례로 성대한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다.” 고 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 오사카에 파송된 성결교회 선교사의 보고에도 “오사카성결교회는 김경만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때 138명의 신도가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하고 있다. 1941년 4월 경주교회(현 경주중부교회-성결교회)에서 제9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이때를 기억하는 경주중부교회 윤행일 장로는 “김경만 목사는 일본 대판성결교회에서 우리교회로 부임하신 인자하시고 카이젤 소매를 하신 일본풍 조선신사로 멋진 분이셨는데 특히 주일학교에 너무나 관심을 많이 가지셨고 설교 하실 때는 일본역사나 예화를 자주 인용하시었으며 사모님은 일본인으로 도시꼬 였다.” 고 증언하고 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경주 건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7년 경동노회의 울릉도순행목사로 파송되어 7월 10일부터 8월 10일까지 1개월 동안 울릉도 교회를 순행하였는데, 순행보고서에는 울릉도의 지리적 현황과, 당시의 인구수, 교회수와 교인수 등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특히 “울릉도중교인들은 목사를 심히 갈망하여 명년도에는 목사를 청빙하려고 예산을 편성하고 준비중에 있으며, 금반 노회시에는 기어코 전도목사 1인을 파송하시어 고도 울릉도에 천국이 건설되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여 주심을 바라고 기도하나이다.” 라고 하여 울릉도에 거주할 목회자를 파송할 것을 호소하였다.
24) 이장영(李章榮) 목사 - 1948년 시무
1884년 9월 9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 34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창동교회(현 안강제일교회)에 6개월간 출석 하다가 교회가 집과 거리가 먼 관계로 유영회 영수 이연우, 신학주 집사와 함께 기계면 사산교회(현 내단교회)를 설립하고 영수로 시무하였다. 1926년 6월 1일 경북노회에서 조사시취 합격하여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32년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였다. 1947년 12월 10일 제13회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 후 1948년 2월 13일 울릉도 도동교회에 부임하여 1958년 10월까지 10년 8개월을 시무한 후 은퇴하였으며, 이 목사님이 울릉도에 정착하여 목회를 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동안 경동노회에서 울릉도에 매년 파송하던 순행목사제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으며, 해방이후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아 교회가 강제로 철거되고 교회가 없어 가정에서 예배드리고 또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간도로 피난을 떠난 교인들로 울릉도교회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교회재건과 부흥을 위해 힘써 노력하였고 울릉성서신학교 운영으로 울릉도 교회의 목회자 양성에 혼신을 다하였다. 1963년 8월 26일 안강에서 80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임일선 사모와 장남 이규호 목사(구정교회 원로목사), 차남 이규성, 삼남 이규갑이며, 손자 이종일(상도중앙교회) 목사가 3대에 걸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장남 이규호 목사는 1999년 8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역임하였다.
1) 황경선(黃敬善) 조사
황경선 조사는 경산군 고산면 출신으로 사월교회의 영수로 있었으며, 1906년 영천군 북안면 명주동교회가 설립되면서 조사로 시무하며 동도, 신녕, 성내, 평천, 조곡 6교회를 겸임하였다. 1908년 포항교회가 맹의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면서 그는 포항교회 조사가 되었고 아울러 전지교회도 겸임하였다. 이후 경산 사월교회의 장로로 장립하였다. 1910년 포항 괴동교회 조사로 시무하였고 그 뒤 동호교회의 조사로 시무하였다. 1911년에는 칠포교회에서 조사, 1916년 경주군 내칠교회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1917년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 경북노회의 울릉도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울릉도 5개처 교회를 겸하였다. 이때 도동교회에 안식교로 넘어갔던 교인 10인이 다시 돌아오도록 하였고 예배당도 다시 짓는 등 노력하였다. 1918년 경북노회에서는 울릉도지역 선교를 위하여 다시 울릉도교회에 1년간 파송하였다.
그후 포항교회
2) 김병두 (金秉斗) 조사
김병두 조사는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부호리 부호감리교회 교인으로 대한성서공회 권서인(勸書人)이었다. 그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호리 마을은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일제의 행정동명 제정시에 원덕면 호산리에 편입되어 마을명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부호감리교회는 교인들이 없어 폐지되고 1905년경 그는 신앙의 불모지인 울릉도에 들어와서 성경 등 신앙서적을 파는 권서(勸書)를 통하여 북면 나리마을에 주의 복음을 전파하여 울릉도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어서 남면 장흥교회와 저동교회, 도동교회가 잇달아 설립하는데 역할을 주도하였다. 『경북교회사』에는 “울릉도에 나리교회 설립되었다. 이전에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부호교회 감리교인인 김병두가 울릉도 북면에 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니 울릉도 나리동 함영수, 함철수가 믿고 이웃사람 장호범에게 전도하여 전 가정이 합심하여 믿음으로 그 집에서 예배 처소로 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고 있어 울릉도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된 구체적인 과정을 엿볼수 있다. 이후 김병두는 울릉도 전도인으로 또한 대한성서공회의 권서인으로써 계속 활동하였으며, 1917년 3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황경선(黃慶善) 조사가 울릉도교회 전도인으로 경북노회의 파송을 받아 시무하고 돌아가자 조사가 없는 울릉도교회의 형편을 감안하여 전도인 김병두를 성서공회와 노회 전도국이 협의하여 성서공회의 일은 사면하고 봉급 매월 10원으로 울릉도 교회의 조사로 세워 시무케 하였다. 조사가 된 김병두는 울릉도 6교회를 순행하며 열심히 시무하였다. 1918년 경북노회에 보고된 김병두 조사의 전도형편은 “10개월동안 전도한 리수는 2천여리며, 신자는 10명을 얻었고, 그에게 전도를 받은 자는 1,300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그는 울릉도 전역을 다니며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1919년 저동교회 출신 변선욱 조사가 동산성서학원을 수료하고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고향인 저동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게 됨에 따라 김병두 조사는 장흥교회의 조사로 시무하였다. 1920년 6월 11일 김병두 조사는 노회에 등원하여 언권허락을 받아 울릉도교회의 잔약한 상태와 일반 주민들의 가련한 생활형편을 일일이 설명하여 노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감개하여 이로 인하여 울릉도교회 건축을 위하여 건축비용 1천원 예상중 노회석상에서 회원들이 248원을 연보하게 되었다. 1920년 가을에 김병두 조사는 갑자기 별세하였고, 그해 김병호 목사가 울릉도교회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노회에 보고함으로 노회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가족에게 위문편지와 위문금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3) 울릉도인 최초 교역자 변선욱(卞善旭) 조사(助師)
1919년 울릉도인으로 최초 교역자이다. 저동교회(苧洞敎會) 출신으로 저동교회의 최초 교역자이기도 하다.
변선욱 조사는 1894년 5월 5일 부 변태완(卞台完-草溪人)과 모 박상동(朴上洞-密陽人)의 사이에서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변태완은 1848년 3월 25일생으로 경남 김해지역에서 울릉도에 희귀 약초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1900년대 초 일가족을 거느리고 울릉도 저동(苧洞)마을에 정착하여 농업을 생업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1915년경 경남선교사 매견시(梅見施)목사가 울릉도 교회의 순행 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중(島中) 5개처 교회(장흥, 도동, 저동, 천부, 현포)를 순행할 때 저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영수와 집사를 임명하게 된다. 이때 변조사의 아버지와 온 가족이 처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였고 집회 기간중에 매견시 목사는 청년 변선욱의 인물이 매우 영민함 보고 부친에게 장남을 교역자로 양육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 받은 뒤 울릉도 순행을 마치고 육지로 떠날 때 함께 동행하여 대구동산성경학원(현 영남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매견시 선교사는 경상노회의 파송으로 1910년부터 1917년까지 5차례에 걸쳐 울릉도 순행목사로 험한 뱃길도 마다않고 입도하여 울릉도교회 설립 초기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선교사다. 변조사는 동산성경학원에서 3년간 수학을 한 뒤 귀향하여 1918년 저동마을 서한실(徐漢實)의 딸 서복순(徐福順 -達成人)과 혼인하였다. 1919년에 경산군 사월교회 조사로 시무하면서 금곡교회를 겸하였고 이후 경북노회의 공식적인 파송으로 고향교회인 저동교회의 최초 교역자가 됨과 동시에 울릉도중 6교회의 순행조사가 된다. 경북교회사에는 “1919년 변선욱 조사가 저동교회에서 열심 시무하는 동안 여전도회와 십일조회를 조직하고 영수 송지수(宋地守)를 대신하여 강명진(姜明進)을, 집사 강명진을 대신하여 정태일(鄭泰一)과 강인달(姜仁達) 박기호(朴基昊) 한영옥(韓永玉)을 피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초기 저동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등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그 해 장남도 출생하였다. 1920년에 태하교회가 설립될시 그곳을 순회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여름에 경북노회에서 파송된 박문찬 목사가 입도하여 도중교회 순행시에 동행하여 나리교회에서 함께 부흥회를 개최하였고, 이 해 말경부터 도동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1921년에는 장흥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영수 송원수가 울진으로 이거함으로 해서 김종달로 교체 임명을 하였다. 이후 도동교회에서 도사경회를 개최하여 교회의 사정이 어렵고 힘든 사정을 설교하자 일반 성도들이 눈물로 동정하여 120원의 헌금이 바쳐져 예배당 신축을 경영하였다. 또한 평리교회(현 현포교회)를 순행하여 김종헌을 권찰로 임명하고 장흥교회에서 재직사경회를 개최하여 30원의 헌금이 모아졌다. 1922년에는 김성로 목사가 순행하여 울릉도의 교육을 위해 변조사와 협의하고 울릉도청과 교섭하여 평리교회 내에 기독교교육을 위해 영신사숙을 설립하여 50여명의 학생이 신학문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하였으며, 50여명 전원이 예배에 참여하여 교육과 선교를 겸하여 실시하였다. 이무렵 고령군 삼대동교회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함’과 같이 라는 성경말씀을 따라 울릉도교회를 위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연보를 보내왔다. 1924년 영천교회(현 영천제일교회)로 초빙되어 울릉도에서 온가족이 육지로 이거하였고, 영천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영천 고지교회 등 6교회의 순행조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 6월에는 청하교회(현 청하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는 동안 장로로 임직 받았으며, 1936년 11월 23일 경동노회가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되어설립회의를 할 때 장로회원으로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경동노회 초대 총대 3인(목사 박영조, 선교사 안두화, 장로 변선욱)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출된다. 이 무렵 이미 경동노회에서도 매우 유능한 장로로 인정받고 있었고 많은 교회에 초청되어 부흥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경북노회록과 경동노회록에는 변선욱 장로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특히, 노회 개회시에 찬송가 인도를 한 기록과 경동노회 제2회, 제3회 회기의 회계로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1950년대에는 장남 변성학 장로와 함께 부자(父子)가 함께 장로로 활동하여 경동노회 소속교회들 가운데 귀감이 되었고 1958년 10월 12일 지병으로 65세의 나이에 소천하여 경주제일교회 동산에 안장되었으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변성학 장로는 1919년 6월 12일생으로 변선욱 조사가 저동교회에 시무할 때 출생하였으며, 6세때 영천교회로 부임하는 변조사를 따라 육지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교육열과 신앙훈련으로 장성하였으며, 관공서의 공무원으로 포항시청 사회계장 등 여러 계장보직을 거쳐, 연일교육청 서무계장, 포항교육청 행정과장, 경주문화중고등학교 서무과장을 지냈다. 1950년 1월 15일 청하제일교회에서 장립집사로 피택된 후 이듬에 1952년 포항북부교회(현 포항기쁨의교회)에서 30세의 나이로 경동노회 최연소 장로로 장립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후 경동노회 회록서기 10회와 경동노회 노회장으로도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1960년도에 경동노회가 경주 문화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창립이사회가 발족될 때 초대 이사로 부례문 선교사 등과 함께 선출되어 상무이사겸 서무과장으로 임명되어 봉사하였으며, 참고로 부례문 선교사는 1957년 1월 경동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도 열성적으로 봉사하였는데 총회 부회록서기 1회, 회록서기 9회를 역임하였으며, 1963년 3월 3일 포항북부교회에서 경주제일교회로 이명하여 시무장로로 활동하다가 1989년 12월 9일 원로장로로 추대되어 은퇴하였다. 장로님의 슬하에는 3남 4녀를 두었으며, 큰딸(변화자 장로)은 서울 장석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고, 큰아들(변홍철)은 미국 텍사스주에 이민하여 한인교회 장로로 봉사하고 있으며 큰아들의 손자(변은진- 애니 변 목사)는 이민 2세대로 귀국하여 온누리교회(하용조 목사시무) 영어설교 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변영철)은 대구 남광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는 등 슬하에 7남매를 모두 잘 양육하여 장로 5명, 권사 4명, 안수집사 1명, 손자 목사 1명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4) 오우석(吳宇錫) 조사
오우석 조사는 1909년 9월 9일 경북 영일군 봉산면(지행면) 서촌리 457번지에서 부 오병학(吳秉鶴) 영수와 모 김조촌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친 오병학은 영일 장기읍성에서 거주하면서 예수를 영접하고 서촌읍교회의 영수로 있었으나 해주오씨 마을 문중에서 서양귀신을 섬긴다며 멍석말이를 당하는 등 심한 핍박을 받고 일가족 모두 쫓겨나 경주 인동교회의 영수로 지냈다. 오조사는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일찍이 예수를 믿었으며 아버지에 이어 인동교회의 영수가 되었고 1933년 25세때 이성희와 혼인하였다. 그후 대구성서학원을 수료하고 조사가 되었다. 1939년에 7월 울릉도 현포교회 조사로 부임하면서 포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올 때 세살의 장남(오성덕)이 배멀미를 심하게 하여 현포에 도착하자마자 휴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때 천부교회를 겸하여 시무하였으며, 이듬해 1940년 경주로 나가 강동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1942년 다시 도동교회의 조사로 청빙을 받아 1944년 10월까지 시무하였다. 이때 대구서남교회에서 일제의 기독교 핍박을 피해 울릉도로 피신해온 주낙서(朱洛西) 목사와 경주 조양교회에서 저동으로 이주해온 동향인 백만술 영수가 저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어 저동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며 함께 전도하고 지내면서 고향 경주로 돌아기로 하였으나, 현포교회에서 당회가 개최되자 아들이 묻혀 있는 마을인 현포교회를 마지막으로 다녀올 결심으로 주목사를 수행하여 현포교회로 갔으며, 현포교회와 천부교회를 순행한 후 지름길인 성인봉 능선인 나리장재를 넘어 오던중 폭설에 묻혀 주낙서 목사와 백만술 영수와 함께 1944년 12월 12일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으며, 당시 부인은 경주 인동에서 셋째아들이 태어난지 8일만이었고 산후조리중에 장례에는 올 수 없어 오조사의 어머니가 울릉도에 들어와서 울릉도로 먼저 시집와서 도동교회 출석하고 있던 여동생(오영자 사모)과 함께 저동교회 오기수 집사댁에서 여러날을 지내며 13일만에 눈구덩이에서 발견된 오우석 조사의 장례를 치렀고 저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오우석 조사는 1939년에 현포교회에 조사로 시무하고 경주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1941년 다시 울릉도로 들어온 것은 손아래 동서인 박성식 조사가 도동교회에 시무하고 돌아가자 박성식 조사의 주선으로 도동교회에 시무조사로 오게 되어 다시 울릉도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박성식 조사는 이때 도동교회 이성규(李星奎) 집사(전매서장)에게 오우석 조사의 여동생(吳英子)을 중매하였다. 오우석 조사의 유족으로 동생 오의석 장로는 칠곡 왜관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차남 오정웅 집사는 1940년 현포교회에서 출생하여 현재는 경주 강동교회 집사로 있고, 삼남 오흥수 집사는 춘천 성산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2009년 12월 12일 순교자들의 순교일에 맞추어 울릉동광교회는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에 대한 순교비를 교회 앞에 세웠고 묘지를 새롭게 단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1) 매견시(梅見施-James. Noble McMackenzie) 선교사
매견시 선교사는 영국 스코틀랜드 유 섬(the Isle Ewe)에서 1865년 1월 8일 출생했다. 그는 18세 때인 1882년 무디 부흥집회에서 목회자의 소명을 갖게 되었고,1891년 존 모트의 연설을 듣고 나서 학생자원자(Student volunteer)로 서원했다. 894년 12월 7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뉴헤브리즈(현 바누아투 공화국-남서태평양지역)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선교지에서 15년을 섬겼다.
그의 아내는 1908년에 흑수열병(Black-water fever)으로 선교지에서 사망했고 이듬해 자신도 질병으로 물러났다. 그 후 매견시는 1909년 5월 곧 바로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비록 해외선교위원회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재정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에게 일 년간 사례비 없이 섬길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즉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그의 열정에 감동해서 ‘어린이선교단’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한국으로 파송했다. 그는 45세의 나이로 1910년 2월 21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먼저 부산에 간호사로 와 있던 매리 켈리(Marry Kelly) 선교사와 1912년 2월 10일 재혼했고 부산에서 총 29년의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5년 울릉도교인 모습>) 매견시 목사는 부산,동래,기장,울산,온양, 울릉 지역을 순회하였고 지역교회를 보살폈다. 1912년에는 20개의 교회를,1916년에는 52개 교회를 관할 했으며, 그는 울릉도를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였다. 울릉도는 1910년부터 1916년까지 자기 관할 하에 있었다. 『경북교회사』에는 1910년 10월, 1912년 3월, 1915년 4월, 1916년 10월, 1917년까지 5차례나 울릉도를 방문한 기록이 보이며 이로 인해 울릉도교회는 초기 매견시 목사로 인하여 교회의 기초가 다져 지게 되었다. 1915년에는 부인 메리 캘리 선교사도 임신중이었음에도 함께 울릉도를 순행 하였으며, 이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그는 울릉도를 순행중 각 교회를 순행하며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자기가옥을 봉헌하여 설립했던 도동교회의 김성서(金聖瑞)가 1915년 모든 교인을 데리고 안식교로 넘어가자 교회를 다시 찾고자 관청(울도청)을 방문하여 문부를 확인하니 이미 교회는 안식교로 넘어가 김성서의 명의로 되어 있어 권리회복을 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했으며, 또한 교회의 직원을 임명하는 등 울릉도교회들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매견시 선교사는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을 순행할 때는 자신의 방문이 한국인에게 누가 될까 하여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1912년 5월부터 부산의 감만동에 있는 나환자요양소 상애원의 원장을 맡게 되었다. 상애원은 원래 미북장로회가 호주장로회와 함께 운영했으나 1916년부터는 호주장로회가 완전히 단독으로 운영을 하였다. 나환자들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대중들에게 ‘천형(天刑)’으로 알려졌고 치료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매견시 목사는 나병환자를 만지며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사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1912년에 상애원에는 54명의 환자가 있었으나, 1916년에 1백50명,1926년에 4백50명, 그가 은퇴할 때인 1937년에는 6백명으로 증가했다.
▲ <매견시 목사 가족>
▲ <1940년의 매견시>
부산 상애원은 1928년까지 4천2백60명의 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했다. 그러나 입소를 원하는 환자들이 점점 늘어갔고 상애원 입구에는 나환자촌이 형성될 정도였다. 매견시 목사는 겨울철에 입원을 원하는 환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라고 진술했다. 그가 신앙양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상태가 나쁜 환자들을 선택하여 입소시키는 것이었다. 매견시 목사는 1913년에 멜번의 투락교회와 존 매크레이 목사의 도움을 받아서 여성환자들을 위한 숙소를 건축했다. 1920년에 호주인 머레이 여사(Mrs Murray)가 전재산을 헌납하자 '머레이관'을 건축했다. 그는 1926년에 나병원을 세웠고 1934년에 새로운 건물병원을 지었다. 매견시 목사는 꾸준히 공부해서 1931년에 국가시험을 치루고 지역의사 자격을 획득했다. 매견시 부인 켈리는 나환자 부모들의 아이들을 격리시켜 기르기 위해 1919년에 '미감아의 집'을 세웠다. 1931년에는 18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환자들의 대부분은 복음을 영접했다. 그들은 입소한지 6개월이 지나면 대개 글을 읽고 신약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1921년 초 상애교회에는 1백11명의 세례교인과 40명의 학습자들이 있었고 1931년에는 2백34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환자들은 놀랍게 변화했다. 1919년 많은 재감자들이 입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기들은 퇴원하여 4~6개월간 구걸하면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매견시 목사는 그들에게 재입소를 약속했다. 그는 나병 치료의 성공은 믿음,기름,노동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5년에 대풍자유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환자들의 사망률은 평균 25%에서 15%이하로 줄어들었고 1923년에는 2.3%로 줄어들었다. 그는 재감자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체력을 보강하도록 했다. 재감자들은 자신들의 숙소와 교회를 스스로 건축했다. 매견시 목사와 다른 나환자 선교사들은 나병의 전염방지와 환자치료를 위한 해결책을 총독부에 건의했으나 총독부는 1917년 소록도에 수용소를 짓고 비인간적인 강제수용을 하였다. 매견시 목사에 대한 지역교회와 주민들,나환자들의 존경심은 대단히 깊었으며 그들의 성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애원 식구들은 1930년에 매견시 목사 한국선교 20주년을 맞이하여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비를 부산의 좌천동에 세웠고,한국 사역 25주년에는 수개월 동안 준비한 철제기념문을 세웠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전도자를 파송하면서「매견시 기념전도사」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 매견시목사는 74세 때인 1938년 2월 18일 부산을 떠났고 이듬해 6월 30일에 선교사직에서 공식 은퇴했다. 1940년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호주의 이민정책,백호주의를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1956년 호주 양로원에서 92세로 사망하였다. 두 딸 헬렌 펄 맥켄지(한국명 매혜란)와 캐서린 맥켄지는 부모의 뒤를 이어 1952년 한국에 와서 부산에 일신병원을 세우고 청춘을 한국의 어머니와 신생아들을 위해 바치다가 헬렌 펄 맥켄지는 지난 2009년 9월 18일 호주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매견시 그는 진정 선교의 사람이었고 그 가족은 대를 이어 한국을 사랑했다.
2) 위철치(魏喆治 - George. H . Winn) 선교사 - 1922년, 1923년 순행
1882년 7월 14일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시(市)에서 출생 하였으며, 1905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시 옥시덴트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1908년 5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09년 1월 미국북장로교 동양선교국의 파송으로 조선선교사로 내한하여 경남 부산선교부에 부임하였고 1913년부터는 경북노회 소속으로 경북지방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1915년 영일군 송라면에 조사교회를 개척한 이래 1923년 영일군 생지교회까지 영일, 영덕, 청송, 의성 등지에 17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1918년 9월 1일 대구 계성학교 제4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1919년 12월 31일까지 재임하였다. 1922년에 경북노회 파송으로 울릉도교회를 순행하였다. 이때 장흥교회에 순행하여 이종안(李鍾顔)을 영수로, 김재권(金在權), 김인조(金麟漕)를 집사로 임명하였다. 1923년에 다시 경북노회의 울릉도교회 순행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를 순행하였으며, 1924년에 계성학교 영어담당 교원으로 일하다가 1925년 3월 31일 의원면직하고 서울선교부로 임지를 옮겼으며, 1929년에 다시 대구선교부에서 선교사로, 1937년 다시 서울선교부로 옮겨 활약하다가 일제말기 기독교 박해시 강제추방 당했으며, 해방후 재 내한하여 활동하였다. 1948년에 한국 선교사를 은퇴하고 귀국하여 1963년 6월 18일 미국 아리조나주 투스콘에서 별세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Blanche Essick, 1883~1955)은 그보다 1년 먼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가 결혼했는데 이후 남편을 도와 선교동역자로서 일하다가 같은 해(1948년) 은퇴하였으며, 1955년 6월 24일 폴로리다주 폴크시티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Paul R. W.)은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가 되어 일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3) 라의온(羅義溫- William M. Lyon) 선교사 - 1935년 순행
미국북장로교 소속 한국 선교사이며, 1923년 9월 16일 부인(Lyn Lorene Jones)과 함께 내한하여 대구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특히 교육활동에 치중하여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대구 계성학교의 공업반을 맡아 지도하였다. 1926년 선교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실기 공업교육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마련하여 교육의 내실을 기했다. 1932년과 1933년에 경산 사월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1935년 4월 21일 경북노회의 파송으로 울릉도교회 순행목사가 되어 울릉도교회를 방문하였다. 일제말기 에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외국 선교사 강제추방시 한국을 떠나 남미의 칠레에서 선교하였으며, 해방 후에 다시 내한하였고 1950년 6.25사변 당시 일본으로 일시 피신하여 1951년 6월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전란후의 선교사업에 주력하였다. 1952년 11월에 부인이 내한하여 합류하였다가 1953년 5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4) 부례문(副禮文- Raymond Provost) 선교사 - 1957년 방문
(<부례문 선교사> <부인 부마리아>) 부례문 선교사는 1948년 미군 기자로 입국하여 종군기자로 활동 하였으며, 미군기자 활동을 마치고 출국하여 1953년 다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어 재입국하여 서울선교부와 대구선교부에서 활동하였다. 선교사로 와서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 박사는 "부례문 목사님! 당신은 처음에는 총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가지고 오셨군요"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부목사는 프린스톤에서 공부를 하였고, 한국에서는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도 하였다. 한국에 19년간을 지내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일들을 했다. 그는 대구선교부의 교육사업에 주력 하면서 경동노회의 선교사로 활동 중에 1957년 1월 16일 울릉도를 방문하여 경동노회에서 지원하여 운영되는 울릉성경학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직접 찾아와 독려하였다. 특히 경주의 문화중․고등학교가 6.25 전쟁이후 경영이 어려울 때 경동노회가 재개교를 위해 인수하면서 재정지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61년 12월 18일 경주 문화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 2월까지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 뒤로도 경동노회 산하 각교회를 돌보며 수천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기금을 전달했고 특히, 고아들을 기숙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의 장학기금으로 공부한 학생들 중에는 목사, 박사, 교수 등 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어 그들은 한결같이 목사님의 도움에 감사해 하고 있다. 은퇴하신 후에는 경동노회에서 노회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학생들의 장학기금 마련을 위해 미국의 교회들을 돌며 기부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계속하셨다. 오히려 미국보다도 한국과 한국인을 더 사랑하였고, 1997년 2월 18일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해 10월 15일 그의 유해는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교정에 안장하여 한국의 흙으로 돌아가셨다. 부례문 선교사의 부인 부마리아(Provost, R. C. Mariella) 여사는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한국 선교사 거주지에서 생존(89세)하고 계신다. 부마리아 여사는 부모가 일제시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함에 따라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전주예수병원과 대구동산병원 등에서 간호사로 활동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환자와 전쟁고아들을 돌봐왔으며, 한국에서 은퇴후 미국으로 돌아와 이곳에 정착했다. 현재 그녀의 집 정문에는 ‘부례문’이란 한글 명패가 걸려 있다. 그녀는 2009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1960년 경주 문화중고등학교를 재개교 시키는 등 교육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한글 이름이고 내이름은 부마리아”라면서 “2008년 11월 한국을 방문했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늘 한국을 사랑할 것이며 가슴에 새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와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했던 그녀는 은퇴 후에는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 이란 단체에 가입해 북한돕기에 나서고 있다.
▲ <경주문화중고등학교에 교정에 있는 부례문 선교사의 묘비>
5) 오천혜(吳天惠- Woeth, George. C.) 선교사 - 1964년, 1967년 방문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부친이 2대째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활동 중에 있었으므로 그는 부친의 임지인 중국 산동성에서 1923년도에 출생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북캐롤라이나주립대학 및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며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기 위해 예일대학교에서 한국어 과정을 수료하였다. 1954년 9월 북장로교선교부 파송으로 부인(한국 명 오인수 - Louise Maxwell)과 함께 내한, 곧 경북 대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6.25사변 이후 전화가 휩쓴 이땅에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계명기독대학 강사로 출강하면서 계명대학 재건에 적극 헌신하였다. 계명기독대학 창립축하 및 학장·교수 취임식에서 부교수로 취임, 15년 동안 근속하였으며 1966년 2월 협동학장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 9월부터 1967년 3월까지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교장으로도 봉사하였는데 당시의 교장인 부례문(副禮文-Raymond Provost) 선교사가 교사건축자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대리 선교사로 배치되었고 문화중․고등학교 교장도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부례문 선교사가 울릉도를 방문한 후 울릉도에 기독교 교육에 대한 계획을 전해 들은 오천혜 선교사는 1964년 2월 1일 울릉도 저동침례교회 예배당을 이용하여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고 1966년 3월 30일 사립우산중학교로 변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울릉도를 방문하였다. 그후 사립 우산중학교는 1971년 1월 1일 공립중학교로 전환하여 고등공민학교 설립부터 함께 동역한 한영철 장로가 2대 교장을 맡아 모두 인계되었다. 우산중학교 교정에는 오천혜 선교사의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우산중학교 설립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그는 선교사업 일선에서 물러나 가족계획사업에 투신, 미국인구협회 한국사무소장으로 취임하여 정부 가족계획사업 고문, 유엔인구활동기구 한국주재대표(1973년)를 겸임하였다. 그는 매년 50만 달러 상당의 가족계획 사업계획안을 감독하였고 NCC애육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활약하였으며 세브란스병원에 가족계획상담실을 설치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975년까지 이일에 전념하면서 『이상적인 가정』,『기독교와 인구문제』,『인구폭발과 인류의 장래』 등을 저술하였으며, 그동안 21년간의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1975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자녀는 남매(David G,;Evelyn N.)를 두었다.
▲ <우산중학교 교정 공적비>
5) 구의령(具義寧- William Grubb) 선교사 - 1981년 방문
1933년 미국 오하이오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구의령(具義寧-William Grubb, 월리엄 그럽) 선교사는 미국 롱비치 시립대와 칼텍을 졸업했다. 대학에서 기상학을 전공한 그는 2차대전에 기상전문관으로 참전했으며, 전쟁 이후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독실한 크리스챤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2차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일생을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 뒤 1947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던 뵐켈(한국면 옥호열) 선교사로부터 동방의 작은 나라에 대해 전해 들었다. 뵐켈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의 성령운동을 소개하면서 한국은 미국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다며 그럽(구의령)에게 한국으로 갈 것을 권했다. 또 뵐켈 선교사는 한국에서 놀랍게 역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 성령 충만했던 그럽은 한국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마칠 무렵 장로교선교부에 선교사 신청을 했다. 한국을 선교지로 정한 그는 예일대 극동아시아 언어학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에서 한국어 구사능력이 놀라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럽 선교사가 한국으로 온 것은 1954년 전쟁의 상흔이 방방곡곡에 배어 있던 시절이었다. 선교부 실행위원회가 그에게 배정한 선교지는 대구였다.
그가 대구에서 시작한 것은 교육선교사업이었다. 계명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협동교목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또 영남신학교의 전신인 대구장로교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세계 언어를 알아야 세계를 품는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전쟁의 상처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태지만 언젠가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주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심어 주었다. “처음 부임 했을 때 한국 상황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헐벗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비전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구의령이라고 불렀다. 옳을 의(義), 평안한 령(寧)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다.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한 것은 평생 반려자 루이스 그럽을 만났기 때문이다. 한국명 서수복으로 더 알려진 루이스 그럽(서수복- Louise Grrubb)은 1930년에 태어났으며 1952년 남편보다 앞서 한국에 왔다. 6.25가 한창이던 당시 전쟁환자 재활 프로그램을 위해 선교사를 자원, 전쟁터를 오가며 모험을 감행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미국 최고명문 스탠포드대 및 예일대에서 수학과 물리치료를 전공한 재원중에 재원이었다. 역시 독실한 신앙가문에서 태어난 루이스는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기도했고, 헐벗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결심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가려할 때 모두 일부러 사지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한국인들을 위해 일할 것을 원하신다.”며 한국행을 강행했다. 한국으로 오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의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대구, 서울 등 전국에서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특히 사지절단 환자가 많아 의족과 의수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선교사가 유명한 루벤 토레이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벤 토레이 선교사는 한국에 예수원을 만든 대덕천(아처 토레이)신부의 아버지이다.
구의령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루이스 선교사를 만났다. 사실 그것은 재회였다. 이들은 프린스턴 신학교 재학중 한 파티에서 학생 신분으로 잠시 만난 적이 있다. 스쳐가는 만남이었기에 큰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루이스는 월리엄으로부터 한국에 대해 소개받았다. 당시 루이스는 온통 중국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월리엄을 한국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 예비 선교사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독신의 두 선교사는 다시 한국에서 만난 뒤 서로의 사역에 대해 깊이 신뢰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차 사랑을 키워나갔다. 어느날 월리엄 선교사가 “함께 한국을 사랑하고 품고 나가지 않겠소?”라며 프로포즈 했다. 물론 루이스 선교사의 대답은 “예스”였다. 이들은 1955년 6월 연동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은 미국장로교 선교회 축제였다. 대천에서 연희를 갖던 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모두 연동교회로 올라와 이들의 결혼을 축하했다. 주례는 루벤 토레이 박사와 켐밸(감부열) 선교사가 공동으로 담당했다. 결혼식을 마친 이들은 바로 대천해수욕장에서 계속된 연회에 참석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정책 회의로 시작되었다. 결혼이후 부부는 대구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얼리엄 선교사는 지속적으로 교육과 말씀 사역을 진행해 나갔다. 많은 제자들이 생겼고,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를 키워 나갔다. 루이스 선교사는 남편을 내조하는 한편, 독자적인 사역도 펼쳤다. 당시 한국의 병원들은 그녀의 의학적 기술을 전수 받기 원했다.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그녀가 특별히 기억하는 장소는 대구의 애락원이다. 과거 나병이라고 불렀던 한센병 환우들이 집단 거주하는 특수 요양소이다. 루이스 선교사는 1965년부터는 대구 애락원의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간호사로 사역했다. 당시 애락원에는 1,200명에 달하는 환우들이 생활했다. 사실 한센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천형에 걸렸다며 외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루이스 선교사는 환우들을 부둥켜안고 기도하며 그들 영혼의 치료를 위해 노력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인간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치유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닌가요, 한국 애락원에서 경험은 내게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60년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가난을 극복하고 곧 부흥하기 시작했다. 독재정치에서 민주정치로 변화하는 격변기를 지켜보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도 경험했다. 한국의 발전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가 가장 감격스러워하는 것은 한국이 1만명 넘는 선교사들을 세계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하나님이 축복하고 선택한 나라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살아있는 주님의 땅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반드시 구름같이 허다한 한인 헌신자들이 세계에 나가 주의 피묻은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사을 말이죠.”
한국에서 38년을 살면서 자녀를 세 명이나 두었고 1992년 이들 부부는 한국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트 가든으로 갔다. 그곳은 미국 장로교가 운영하고 있는 은퇴 선교사들의 쉼터로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며, 지금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한국인과 지낸 루이스선교사를 찾아간 기자가 물었다. “과연 선교란 무엇인가요?” “선교란 주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한국 땅에 보냈습니다. 한국에서 지낸 시절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모데후서 1장 7절 말씀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우리는 한국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복을 좋아하여 한국에서 한복을 많이 입었고 미국에서도 자주 입는다고 했다.
▲ <대구 대명동 구의령 선교사가 거주하던 집>
▲ <한복을 입은 루이스 선교사 우측 끝>
구의령 선교사는 대구에 거주하면서 가창 냉천리에 있는 주암산수양관(기도원)을 관장하였고 대구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도 사역하여 영어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대구, 경북지역의 어려운 가정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특히, 장애우 학생들을 돕는데 헌신하였다.
울릉도에는 1981년 8월 3일부터 현포교회에서 개최한 울릉시찰 학생회 연합회 학기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두 아들과 함께 방문했다. 이때 백성흠 목사도 함께 들어왔으며, 백성흠 목사는 1983년 경북노회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