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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 제 10 장 울릉도교회 교적부
울릉도교회 교적부는 천부제일교회(소장자 이춘태 장로)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938년 울릉도 도중(島中)교회 연합당회가 구성된 이후 연합당회 차원에서 1941년도(소화16년)에 각 교회별로 작성되어 1949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기록된 것으로써 당시 울릉도 7개처교회(장흥교회, 저동교회, 도동교회, 현포교회, 태하교회, 남서교회, 천부교회) 교인들에 대한 신상명세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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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 10장 울릉도교회 교적부
 
 

1. 울릉도교회 교적부 해제

 
울릉도교회 교적부는 천부제일교회(소장자 이춘태 장로)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938년 울릉도 도중(島中)교회 연합당회가 구성된 이후 연합당회 차원에서 1941년도(소화16년)에 각 교회별로 작성되어 1949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기록된 것으로써 당시 울릉도 7개처교회(장흥교회, 저동교회, 도동교회, 현포교회, 태하교회, 남서교회, 천부교회) 교인들에 대한 신상명세이다. 교적부는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씨명, 주소, 본관, 년령, 신급, 생년월일, 소속교회, 출생지, 현교직명, 가족관계, 직분, 유아세례, 학습, 세례 경력과 시세일자, 주례목사명, 적요, 사유란 등 매우 상세하게 작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관계로 년호는 명치, 대정, 소화 등 일본식 년호가 사용되었으며, 성명은 일제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작성되었으나, 창씨개명 이전의 본래의 이름인 구명도 함께 적혀 있다.
 
또한 교적부에는 시대에 따라 경상도노회, 경북노회, 경동노회에서 울릉도 순행목사로 파송된 목사님이 매년 들어와 울릉도 도중교회를 순행하며 부흥집회 인도와 교회 직원(영수, 집사, 권찰 등) 임명과 성례(세례, 학습, 유아세례)를 베풀었던 년월일, 주례목사 성명이 기록되어 있어 초기 울릉도 교회의 교세와 교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며, 1944년에 입도한 주낙서(朱洛西) 목사님은 세례를 베풀고 직접 기록하였던 필적도 엿볼 수 있다.
 
울릉도 순행목사는 노회 전도부에서 매년 순행목사를 정하여 파송하였으며, 초기에는 춘기와 추기 한해에 두 번씩 파송한 적도 있었고, 선교사들도 파송되었다. 그나마 노회의 재정이 부족할 시는 파송을 하지 않았다. 일제시기에는 대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나 교역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마다 목회자가 시무하는 것도 아니어서 목사 한 분이 여러 교회를 맡아 시무하는 형편이였고, 조사(助師)도 마찬가지로 성서학원을 수료하면 여러 교회를 맡아 시무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사조차도 볼 수 없는 교회는 교회 내에서 영수(領袖)를 세워 교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울릉도는 육지와 동떨어져 더욱 열악하였다. 도중 각 교회별로 교역자를 모실 수 있는 재정형편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울릉도까지 배정될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노회전도부에서 월삭(사례비)을 지원하여 울릉도 전도를 위하여 간간히 조사를 보내어 도중교회를 돌보도록 배려하고 있었으나, 조사는 성례(학습, 세례, 유아세례 등)를 베풀 수도 없으며, 직원 임명(집사, 권찰 등)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노회에서는 매년 순행목사를 파견하여 울릉도 각 교회를 돌며 부흥회 인도와 성례를 베풀고 치리와 교회행정을 수행하였다. 순행기간은 보통 3주간이나 작게는 2주, 많게는 4주간을 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울릉도 순행을 마치고 돌아가 노회에 순행보고를 통하여 울릉도 실정을 알게 되고 또한 울릉도에서 화재나 눈이 많이 내려 재난을 당할 때 구제금을 연보하여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교적부는 이러한 울릉도 순행목사들의 기록사항을 통하여 순행한 목사와 순행년도를 파악할 수는 있으나, 노회록의 자료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최초 교회설립 시부터 각교회별로 교적부를 비치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1938년 울릉도중교회 연합당회가 성립된 이후인 1941년도에 처음으로 교적부가 작성되었고 각 교회별로 시세일자가 교인들의 진술에 의해 작성되었던 것으로써 이는 학습일과 세례일자, 본인에게 세례를 베푼 목사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 오랜 시간이 흘렀거나. 나이가 드신 분들과 어린이들은 정확한 년도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어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도 자기의 학습일과 세례일자 등을 정확히 기억하는 성도는 많지 않다.
 
교적부 중에서도 호주선교사로 경상노회에서 파송된 매견시 목사는 「경북교회사」에 1910년부터 1917년까지 5차례나 자원하여 울릉도를 순행하였는데 울릉도지역이 경북노회 소속으로 변경되자 순행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 교적부에는 1927년 10월15일 남서교회 송소남(송광수의 딸)이 매견시 목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어 매견시 목사가 이때 울릉도에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현포교회 연혁에서도 1927년도에 매견시 선교사가 현포교회를 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매견시 목사의 나이는 63세 정도의 고령이나 울릉도교회 설립 초기 5차례나 방문하여 기초를 확립하였던 교회들에 대한 애정으로 울릉도교회가 잘 부흥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맡은 선교지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적부가 작성된 시기가 일제말기 신사참배 강요 등 기독교 탄압으로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전 가족이 만주로 이거해 간 기록들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천부교회의 허만(許萬) 영수와 장흥교회 이종운(李鍾雲)장로의 가족들이다. 이들 두 교회는 일제말기 일본의 2차대전 막바지에 교회를 군용막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징발하여 강제철거 하였고 교회철거과정에서 강력히 항거하였던 교인들이 주재소에 끌려가 심한 매질 등 고초를 당하고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되자 정든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북간도로 피난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갔던 것으로 친척들이 증언하고 있다. 또한 죄를 범한 교인들에 대한 치리내용도 기록되어 있으며, 신앙을 버린 자에 대해서는 낙심(落心)이란 표기를 하였고 침례교회(당시 동아기독교) 교인과의 혼인으로 출가한 기록과 이미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이명해온 자들의 기록들도 보인다.
 
금번 울릉도기독교 100년사 발간에 교적부의 쪽수가 많아 낱장을 일일이 첨부할 수가 없어 교회별로 도표를 만들어 표기하였으며 아울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화 하였고 생년월일 등 모든 년도는 서기력으로 환산하여 표기하였다.
 
 
 

2. 도중교회 각 교회별 교적부

 
1) 장흥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2) 저동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3) 도동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4) 현포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5) 태하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6) 남서동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7) 천부교회
 
도표 제외 (교적부)
 
 
 

3. 교적부 사진자료

 
<1941년 울릉도교회 교적부 표지>
 
 
<교적부 내용>
【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 제 9 장 초기 도중교회 당회록
• 제 10 장 울릉도교회 교적부
• 제 11 장. 1. 포항남노회 울릉시찰회 연표
(2024.06.23. 12:2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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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