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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 제 15 장 부 록
올해는 울릉도에 주님의 복음이 전해진지 90년 되는 해이다. 1909년에 울릉도에 첫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서 울릉도 시찰회에서는 `울릉도 기독교 90년사'를 발간했다. 그 책을 받아본 나의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첫 목회지로서 젊음을 바친 기록과 사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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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15 장 부 록
 
 
 

1. 울릉도교회 선교100주년 관련 기사 및 방문기

 
1) 안대옥 목사 울릉도 방문기
 
『울릉도 선교90년사』 발간기념 울릉도 방문기
한국기독공보 [2252호] 1999년 12월 18일 (토)
 
올해는 울릉도에 주님의 복음이 전해진지 90년 되는 해이다. 1909년에 울릉도에 첫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서 울릉도 시찰회에서는 `울릉도 기독교 90년사'를 발간했다. 그 책을 받아본 나의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첫 목회지로서 젊음을 바친 기록과 사진이 고스란히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울릉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50년 5월14일 6.25전쟁이 나기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35세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평범한 전도자로 울릉도 저동교회란 작은 교회에 가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교인이 십여 명에 불과했으나 점점 부흥해서 1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나는 전도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 결국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다.
 
나는 울릉도에서 12년간 목회를 하다가 사정에 의하여 울산과 부산에 나와서 목회를 계속하다가 정년 은퇴를 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첫 목회지 울릉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내 나이도 84세의 고령인데 과연 뱃길을 감당해낼까 처음에는 염려도 됐지만 자녀들과 상의한 끝에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울릉도에서 출생한 넷째 아들 기성목사와 다섯째 아들 기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등 두 아들이 동행하기로 했다. 넷째 자부와 손녀 손자도 같이 가게 되었다.
 
11월21일 주일 오후에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울산 공항에 내렸더니 이전에 울릉도에서 첫 시찰장을 하신 이장영 목사님의 아들인 이규호 목사(현 총회장)가 어떻게 알고서 승용차를 보내줘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하룻밤을 잔 뒤 경주중앙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창선 목사가 포항 여객선 터미널까지 승용차로 태워 주었다.
 
오전 10시에 선플라워호를 탔는데 날씨가 좋아 3시간 만에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울릉도에 들어갈 때에만 해도 천양환이라는 발동선을 타고 24시간이나 걸렸으니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비의 섬 울릉도'라 새겨진 큰 간판이 서있는 도동항에 내리니 남양제일교회 임종훈목사와 장로님 일행이 마중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항구에서 가까운 선창장여관에서 짐을 푼 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날 오후 2시쯤 저동(현재는 도동3동이라고 함)에 있는 동광교회 김영암 전도사의 안내를 받아 첫 목회지였던 작은 모시개(小苧洞)에 들렀다. 아이들이 태어난 옛 사택은 양옥으로 탈바꿈했다.
 
11월23일 울릉도 방문 이틀째 되는 날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 10시부터 울릉도를 일주하는 유람선을 탔다. 두 시간 동안 섬일주를 하는데 경치도 좋았지만 마을 곳곳에 십자가가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것인데 풍어제때 아무도 제주를 맡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섬 일주를 마친 후 오후에는 남양제일교회 임종훈 목사의 안내로 천부제일교회에 갔다. 방문 사흘째인 11월24일에는 도동제일교회에서 점심을 했다. 마침 포항에 나갔던 울릉도 시찰장 오규환 목사가 들어와서 함께 점심을 했다. 오목사는 본시 울릉도에서 출생하고 울릉도에서 자라서 내가 울릉성경학원 원장을 할 때 입학해 첫 졸업생이 된 뒤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됐다. 오목사는 그동안 울릉도를 떠나지 않고 울릉도 9개 교회를 잘 돌봐 왔다.
 
이날은 수요일이라 수요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는데 오목사가 시무하는 동광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했다. 이 교회의 전신이 바로 내가 첫 목회를 했던 저동교회다. 그런 만큼 이날 설교는 감회가 남달랐다. 1950년에 와서 첫 설교를 했는데 거의 50년이 된 뒤인 1999년 막바지에 다시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게서 세례를 받고 내 주례로 결혼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한 권사님은 내 주례로 결혼을 했는데 수요예배를 마친 후 시원한 오징어 내장국과 감자떡을 차려줘 맛있게 먹었다.
 
방문 나흘째인 25일 아침은 어제 저녁을 대접한 권사님이 자기집으로 초대해 함께 했다. 내가 울릉도 목회할 때 결혼 주례를 서줬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에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아침 식사후 남양제일교회 임종훈 목사가 봉고차를 가지고 와서 옥천제일교회와 간령교회를 방문, 예배를 드렸다.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남양제일교회 장로님이 염소를 한 마리 잡아 교회 교인들과 함께 풍성한 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11월26일. 이날은 울릉도를 떠나기로 예정된 날인데 날씨가 흐리고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침은 간령교회에서, 저녁은 통구미교회에서 대접을 받은 뒤 남양제일교회 금요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임목사가 숙소까지 바래다 주고 자정 가까이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임목사는 이번에 울릉도 기독교 90년사를 정리한 실무자이다. 11월27일 토요일 마침내 배가 뜬다는 것이었다. 울릉도는 주님께서 허락해야 들어오고 허락해야 나간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월요일에 들어와서 토요일에 나가도록 일정을 짜놓은 듯했다. 넷째 아들이 주일예배를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오후 4시에 배가 출발한다기에 도동항에 나갔더니 여러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전도사님이 나와 주셨다. 이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배에 오르니 한 주간의 일들이 마치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나눈 일들이 마치 천국생활을 한 것 같았다.
 
안대옥/ 은퇴목사· 전 울릉도 저동교회 담임
 
 

 
2) 독자투고 신문기사
 
울릉도 첫 목사, 주낙서(朱洛西) 목사
한국기독공보 2008년 10월 29일 (수) 임종훈 / 남양제일교회 목사
 
올해는 울릉도에 처음으로 교회가 설립된 지 99주년이 되는 해이다. 울릉도에 선교를 위해 공식적으로 방문한 전도자는 영국성서공회 소속의 매서인이었던 김병두(金炳斗)씨였다. 그는 원래 감리교 소속이었기 때문에 울릉도는 처음에 감리교가 세워졌으나(1909년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1907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1914년) 행정구역이 이관됨으로 선교지 분할의 약속 때문에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로 소속이 바뀌게 되었다.
 
또한 울릉도에 처음으로 목사님이 오셔서 성례식을 베푼 것은 호주 선교부 소속이었던 매견시(梅見視-J. N. Mackenzie) 목사였다. 그는 1910년 2월에 한국주재 호주선교사로 내한했다. 특히 1913년과 1915년 1916년 세 차례에 걸쳐 경상노회의 파송을 받아 울릉도의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시무하게 되었다(도중당회록 참조)굨 이후로 28년 동안은 한국 목사님들이 계속 순행목사로 오셨는데 1944년 8월에는 주낙서(朱洛西) 목사님께서 대구 서남교회에서 목회 하시다가 울릉도의 첫 목회자로 파송을 받아 오시게 되었다.
 
금년(2008년) 12월 12일은 울릉도에서 목회하시다가 순교하신 주낙서(朱洛西) 목사님과 오우석(吳宇錫) 조사님 그리고 백만술(白萬述) 영수님이 순교하신 지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본인은 울릉도에서 목회하면서 교회 역사를 연구하던 중에 앞에 기록한 세 분의 순교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분들의 순교 60주년을 돌아보면서 이 글을 통하여 울릉도에서 순교하신 세 분에 대한 내용을 알리고, 그 분들의 순교정신을 되새기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944년 12월 10일 당시 울릉도 6개 교회 연합 당회인 도중당회(島中堂會)의 당회장으로 현포교회를 방문하시고 허정석(許貞錫) 장로댁에서 밤 10시 20분에 제8회 당회를 시작하셨는데 찬송가 460장을 인도 합창하고 회장이 기도한 후 성경 디모데후서 2장 1절을 낭독한 후 '그리스도의 정병(丁兵)의 고난에 극복'이란 문제로 설명한 후에 허정석 장로 기도함으로 개회하니 참석회원은 목사 주낙서(朱洛西-본문에는 神本洛西), 장로 임부춘(林富春) 허경(許坰-본문에는 松川坰) 허정석(許貞錫-본문에는 松川貞錫)이었고 서기가 전회록을 낭독하니 착오가 없음으로 채용키로 가결하다."
 
 
도중당회(島中堂會)를 마치고 이들은 12월 12일(음력 10월 28일) 현포동(玄圃洞)에서 출발하여 홍문동(紅門洞)을 거쳐 나리동(羅里洞)을 지나 장재(또는 나리령羅里嶺-해발 798m)를 넘어 저동쪽으로 30~40m를 못가 눈에 묻혀서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울릉기상대 적설량의 기록을 보면 12일-12mm,(확인해야 할 부분, 120mm가 아닌지, 그리고 기본으로 적설량은 센티미터로 기록하는 것 아닌지) 13일-250mm, 14일-255mm가 내렸기 때문에, 현포동(玄圃洞)에서 출발할 때는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나리동 장재에 이르러서는 눈이 허리에 찰 정도로 많이 내렸다고 한다. 장정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눈이 왔기 때문에 세 분은 서둘러서 장재를 넘어 저동쪽으로 갔으나 얼마를 못가서(30~40m) 힘이 너무 들기 때문에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사람(백만술 영수)이 빨리 내려가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먼저 내려갔고(상황을 추측해서), 두 사람(주목사와 오조사)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있다가(발견 시 자세) 순교하였다. 그러나 먼저 내려간 백영수도 조금 내려 가다가 순교하였다.
 
 
북면(北面) 현포동(玄圃洞)에서 출발한 주목사님 일행이 저동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은 오우석(吳宇錫) 조사의 매부인 이선규씨(후에 목사로 시무, 은퇴후 서울에서 생활)였다. 그 때 울릉도에는 경방단원(울릉군청에서 운영하는 청년 예비군)이 있었는데, 이 경방단원들과 함께 시신을 찾기 시작하였지만 그 때는 이미 현포동에서 주목사님 일행이 떠난 지 13일 후였다. 허정석 장로님(현 포항장성교회 출석)의 증언에 의하면 주목사님이 도동에 오시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허장로님이 교인 7명과 함께 시신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 때 함께 간 사람들은 저동교회 서재경 영수와 서호진 조사, 태하교회 이학락 집사, 현포교회 손남춘 성도 등 7명이었다고 한다. 출발지인 홍문동(紅門洞)에서부터 장재에 이르고, 장재에서 눈이 많이 온 까닭에 나무로 눈(雪)을 찌르면서 5일 만에 찾았는데, 두 사람은 장재 정상에서 30~40m 떨어진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있었고 한 사람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온 까닭에 나무를 엮어서 시신을 그 위에 얹어서 운반하였다고 하니 그 당시의 상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장례식은 허정석(許貞錫) 장로님이 집례하셨다고 하며 오우석 조사와 백만술 영수의 무덤은 지금도 저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주낙서 목사님의 무덤은 이장(移葬)하여 경북 선산군 도개면 청산리에 사모님과 합장되어 있다.
 
 

 
3) 울릉도 선교백주년 관련기사
 
'복음의 바람 이 땅에 불어온다'
울릉도선교백주년, 도내 어린이 위한 소아암재단 및 백주년기념관 건립 포부
한국기독공보[2700호] 2009년 04월 02일 (목) 정보미 기자jbm@pckworld.com
 
 
"울릉군을 성시화(聖市化)합시다!"
 
울릉도가 북적인다. 동쪽 외딴 섬에서 성도들을 보살피며 조용히 목회하던 목회자들이 선교 백주년을 맞아 일어나고 있다. 그 움직임은 지난 2007년 현실로 나타났다. 그해 10월 2일 울릉동광교회(김중원목사 시무), 울릉도 3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릉군 성시화운동본부'가 발족됐다.
 
그간 잠잠했던 울릉도 목회자들은 경북 및 포항 성시화운동본부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힘입어 울릉군을 성시화 운동본부로 만들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주민 10명 중 3명이 크리스찬일 정도로 기독교 복음화율이 높은 울릉도. 선교 백주년의 시동이 걸리고 나서 이 움직임은 최근 더 활발해지고 있다. 오는 28일 저녁 선교백주년 부흥집회, 29일 기념대회를 앞두고 울릉도는 지금 들뜬 분위기다. 한 주 앞선 16일부터는 울릉군청이 도내 행사로 제3회 산나물축제도 열어 봄을 맞은 울릉도에 관광객도 유치한다.
 
하지만 백주년을 맞았어도 현지에서의 선교적 과제는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먼저 당장 내년부터 도입되는 선교 2세기의 일꾼을 키울 수 있을만한 대상자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울릉도의 인구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울릉군의 인구는 지난 1992년 1만2천4백62명에서 최근 1만1백68명(2008년 통계)으로 10여 년간 2천여 명 감소했다. 한 울릉군 주민에 따르면 전교생 40명 되던 분교도 학생수가 4명밖에 남지 않는 등 아동 청소년이 없어 학교가 통폐합되고 실정이다.
 
때문에 현지 교회들에는 대부분 아동부와 유치부가 없어진지 오래다. 이는 울릉군 또한 일반 농어촌지역처럼 젊은층이 도시로 떠나며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울릉군 한 목회자는 "학생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육지로 나가는 것이 소원이다. 고등학교 진학도 육지에서 하고 싶어한다. 도내에 대학이 없으니 대학생이 되면 섬을 떠나고, 또 이곳에서 젊은이들을 수용할 만한 기업이나 일자리가 없으니 한번 나가면 거의 돌아오지 않게 된다"고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또 높은 복음화율에 비해 믿음의 열기가 미지근한 것도 극복해야할 난관이다. 울릉군선교백주년기념대회장 이은희목사(울릉시찰장ㆍ통구미교회)는 "전체적으로 인구가 줄고 있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지만,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약하다는 것이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분명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드리는 교인이긴 한데, 성령체험이나 구원의 확신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는 울릉군 도심을 벗어날수록 더욱 심화되는 현상"이라며 이 때문에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힘이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먼저 무릎꿇고 회개하며 각성해야 한다며 성령의 바람만 불면 인구이동이나 젊은층 감소 요인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울릉교인들의 영적회복을 위해 백주년을 맞은 본교단을 중심으로 먼저 자성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환으로 포항남노회 울릉시찰회는 이번 선교 백주년 기념 사업을 울릉군 주민들에게 본이 되기 위한 것들로 설정했다. 우선 도내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암재단을 만드는 것. 울릉도는 청정지역이라 주민들에게서 암 등의 중대한 질병이 희박하게 나타남에도 불구 최근 울릉동광교회(김중원목사 시무)의 한 아동에게서 골육종이라는 질환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울릉도선교백주년위원장 김중원목사는 "백주년 기념을 맞아 울릉도 교회가 선한 일을 해야할 때가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면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주님 말씀처럼 긴박한 사태를 대비 및 지원하기 위해 재단을 구축하려고 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울릉군선교백주년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울릉지역을 선교의 도구로 활성화 시키기 위해 기념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세미나 등을 유치하며 육지 목회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꿈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동제일교회(최승호목사)에서 부지 1천평을 기증하며 기념관 내에는 선교 백주년의 주역 김병두, 주낙서목사 등의 자료를 전시한 선교박물관, 세미나실, 게스트룸, 사회봉사관 등을 구비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울릉군선교백년사 집필 및 기념화보집 제작 △울릉군선교백주년 기념비 건립 등의 사업이 추진 계획중이다.
 
울릉시찰 교역자들은 현재 매달 월례회를 갖고 목회의 고충을 나누며 협력기도에 힘쓰고 있다. 강사초빙이 어려워 계획적이 아닌 관광 겸 휴가나 연구차 울릉도에 들르는 신학자들이 있을 시 임원회를 긴급 소집해 신학 목회 전도 분야의 세미나를 가져왔다.
 
겉으론 수려하고 화려한 섬 울릉도, 하지만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차단된 그곳에서 오늘도 울릉도 전역 복음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백주년을 맞은 울릉도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건 한국교회의 따뜻한 관심과 응원, 그리고 사랑이다.
 
 
▲ 올해로 선교 1백주년 맞은 울릉도가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통구미교회(이은희목사 시무) 위로 석양이 지고 있다
 
 

 
4) 울릉도 선교백주년 관련기사
 
복음의 능력 울릉도를 덮다.
예장통합 선교 100주년기념대회 및 연합부흥회
크리스챤연합신문 2009-04-29 오후 4:25:40 김종열 기자
 
신비의 섬 울릉도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년. 향후 100년 울릉도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총회장 김삼환 목사) 울릉군 선교 100주년위원회(대회장 이은희, 준비위원장 김중원)는 28~29 일 양일간 울릉동광교회와 도동제일교회에서 연합부흥회와 기념대회를 갖고 울릉군 복음화의 기수가 되기를 다짐했다.
 
통합총회 임원을 비롯해 총회 독도수호대책위원과 포항남노 회 관계자, 울릉시찰 교회 성도 등 400여 명 이 참석한 가운 데 열린 이번 기념대회는 100주년 기 념 연합부흥회를 시작 으로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울릉시찰 300만 성도운동 전진 등의 순으로 진행 됐다.
 
<기념대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총회장 김삼환 목사.대회>
 
대회장 이은희 목사는 대회사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축복의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영토수호자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울릉선교 100주년을 맞아 은혜와 사랑 의 100년을 감사하며 시련을 넘어 축복의 땅으로 우 리 모두 한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자”고 말했다.
 
총회장 김삼환 목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 는 제하의 설교를 통해 “지금은 한국교회가 복음화를 이룰 때”라면서 “복음화의 놀라운 능력이 울릉도를 덮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특히 선교 2세기를 바라보며 울릉도민들의 눈물과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했다.
 
 
<‘시련을 넘어 축복의 땅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선교대회는 선교 1세기를 되돌아 보고 선교 2세기를 향해 재도약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한편 울릉군 선교는 1909년 김병두 씨에 의해 시작돼 현재 38개 교회 3240명의 성도로 성장했다. 또 울릉도선교100주년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으며 현재 위원회가 조직돼 연구하고 있다.
 
 

 
 

2. 사진자료

 
 
[울릉도 100년역사 4개회 담임목사]
 
[성인봉과 나리령이 보이는 저동항]
 
[2009.4.29 총회 독도영토수호대책위원회 독도방문]
 
독도수호대책회장 김의환 목사 독도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3. 울릉선교100주년 첫 순교자 「주낙서」 목사

 
1944년 울릉도 순교자 주낙서 목사, 오우석 조사, 백만술 영수
 
울릉동광교회의 전신인 저동교회는 1909년 4월경 경북 울진군 원덕읍 부호리 부호감리교우인 김병두씨가 울릉도 북면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최초로 나리교회를 설립하고 연이어 남면 장흥교회, 도동교회, 저동교회를 설립하였다는 「경북교회사」의 기록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근거하며 저동교회의 설립과정이 ‘김병두의 전도로 도봉기가 믿고 자기집을 수리하여 예배처소로 정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한다.
 
그 뒤 1912년부터 경남 선교사 매견시 목사의 여러 해를 걸쳐 울릉도 순행으로 울릉도 교회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저동교회는 폭설에 의해 전복되고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며 1919년에는 경북노회에서 파송된 최초의 교역자 변선욱 조사가 시무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경 대구서남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시던 주낙서(朱洛西) 목사는 1943년경부터 신사참배강요 등 일제의 탄압으로 경북노회는 사실상 해체되는 시기에 주일설교를 마치고 나면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을 여러번 받는 등 탄압을 받다가 울릉도로 피신하게 되고 저동교회(현 울릉동광교회)에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1944년 8월 13일에는 울릉도중 7개처교회(천부교회, 현포교회, 태하교회, 도동교회, 간령교회, 남서동교회, 저동교회)의 연합당회장이 되어 울릉도내 여러교회를 순행하며 연합당회 7회와 성례식 3회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중 안타깝게도 북면지역 교회(현포교회, 천부교회)를 순행하고 저동교회로 돌아오기 위해 지름길인 성인봉 능선인 나리령(일명 나리장재 789m)을 넘을 때 동행 하였던 오우석 조사, 백만술 영수와 함께 갑자기 내린 폭설에 의해 순교하였다.
 
당시의 순교 상황에 대해서는 울릉도 교회의 연혁에도 보이며 구전으로도 전해왔으나, 최근 순교현장과 장례에 참여 하였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증언자들은 저동지역 순교장소 부근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거주하는 주민 박봉근씨와 오분남 권사, 김태중 집사 등과 오우석 조사의 여동생 오영자 사모(경기도 고양시 거주, 87세)와 1944년 9월 10일 주낙서 목사로부터 장로장립 안수를 받았던 허정석 장로(2008년 소천) 등의 증언이다. 또한 주낙서 목사님께서 순교 하기전 마지막 연합당회를 개최한 기록인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울릉도당 제8회록」을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기록에는
 
「소화19년(1944년) 12월 10일 야(夜 )10시 20분에 본당회가 제8회로 송천정석(許貞錫) 장로 사택에 회집하여 당회장 신본낙서(朱洛西)씨가 찬송 460장을 인도 합창하고 회장이 기도한 후 성경 디모데후서 2장 1절을 낭독한 후 그리스도의 정병(丁兵)의 고난에 극복이란 문제로 설명한 후 송천정석( 허정석) 장로 기도함으로 개회하니 참석회원은 여좌(如左)하더라. 목사 신본낙서(주낙서), 장로 임부춘(林富春) 송천경(許坰) 송천정석(허정석) 전회록을 서기가 낭독하니 착오가 무함으로 채용키로 가결하다....(이하 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순교하기까지 증언을 통하여 정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4년 12월 10일 밤 11시 20분경 울릉군 북면 현포리 허정석 장로댁에서 도중당회(島中堂會)를 마친 주낙서 목사 일행은 허정석 장로 사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12월 11일 오전 현포를 출발하여 나리분지로 가는 길목인 홍문동마을에 있는 천부교회에 도착하였다. 천부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백만술 영수의 처가댁(천상근 집사)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지름길인 성인봉 능선인 나리령(일명 나리장재羅里嶺-해발 798m)을 넘기 위해 나리마을에 도착하여 고갯길을 오르기전 민가에 들렀다. 그때 백만술 영수는 목화씨앗을 조금 얻어 호주머니에 넣고 출발하였으며, 출발한 시간은 오후 4시경으로 약간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민가 주인이 재를 넘는다는 이들에게 “날도 곧 어두워지고 눈도 내리기 시작하는데 위험하니 가지 말고 자고 가라고 만류하니 일행은 내일 저동교회에서 중요한 일이 있어 꼭 가야한다며 길을 재촉하더라”는 이야기를 이들이 눈속에 묻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찾아 나선 허정석 장로에게 했다고 한다.
 
주낙서 목사님의 일행이 현포에서 출발하여 저동교회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3일이 지난 후였다. 당시 울릉도 전역에 대설이 내려 걸어 다닐 수가 없었고 통신시설도 없어서 저동교회 교인들도 주목사님 일행이 사망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눈이 많이 내려서 돌아오시지 못하시고 현포나 천부에서 전도하시면서 눈길이 뚫였을 때 돌아오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흘 뒤 주목사님 일행이 현포를 출발해서 나리장재를 넘어 저동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저동교회 교인들이 목사님 일행이 실종되었음을 알고 교회 중직자들과 젊은 청년들이 저동에서 나리장재 방향으로 눈길을 헤치며 찾아 나섰고 북면 지역에서는 허정석 장로 외 7명이 나리마을에서 나리장재로 찾아 나섰으나 3일간을 수색을 하여도 찾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눈이 녹으면 찾기로 하여 철수하였다.
 
실종 된지 13일 째 되던 날에 저동마을에 거주하는 청년 박명환이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장작을 팔아 연명을 하기 위하여 나무를 베러 나리장재 부근에 갔을 때 나도밤나무가 수북히 서있는 곳에서 흰눈 속에 검은 천조각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어서 헤어진 옷을 기워 입으려고 천조각을 잡아당기니 눈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시신이 딸려 나오자 놀라서 황급히 마을로 내려와 저동교회에 신고하였다. 저동교회 교인들이 다시 출동하여 시신이 발견된 곳으로 가보니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던 오우석 조사였다. 오우석 조사가 가장먼저 발견되고 주변에서 주낙서 목사님의 시신도 발견하였는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얼어 있었다고 했다. 맨 나중에 찾은 백만술 영수는 오우석조사가 숨진 곳에서 약 200m 아래지점인 저동 윗마을 가까이에서 발견 되었는데 주변에 목화씨앗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백만술 영수가 사망한 지점이 마을과 가까이에 있음을 보고 셋중 나이가 가장 젊어서 아마 조난되었음을 교회에 알리려고 먼저 내려 간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했다.
 
세 사람의 시신은 나무를 베어 엮어서 만든 썰매로 운구하여 저동교회 전종한 집사의 마당에 모셔졌고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예배는 주낙서 목사님으로부터 3개월전 장로장립 안수를 받았던 현포교회 허정석 장로가 집례 하였고 세 사람은 저동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그 후 세분의 묘소는 저동교회 교인인 오기수 집사가 자기 부친의 묘가 바로 옆에 있었고 주낙서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인연으로 관리를 도맡아 오던중 주낙서 목사의 묘소는 1987년 여름 둘째 사위인 이희근 집사가 울릉도에 들어와서 이장을 하여 경북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 선산에 있던 소록이 사모의 묘에 합장하였다.
 
묘소를 관리해 오던 오기수 집사는 1995년경 노환으로 소천하여 오우석 조사와 백만술 영수의 묘는 관리 되지 못하여 방치되었고 후손들이 찾아왔으나 나무가 자라고 풀숲이 되어버린 묘소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 사실상 묘소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두 묘소는 10여년이 흘러 울릉동광교회 창립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수소문 끝에 당시 사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저동 주변 사람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고 저동교회에서는 붉은 벽돌로 봉분을 새롭게 단장하고 묘비를 세웠고 교회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지난 2009년 12월 13일에는 이 세분이 순교한 날짜에 의미를 맞추어 교회창립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고 순교비를 교회 앞에 세워 이들의 순교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제막행사를 가졌다.
 
[울릉동광교회 앞 순교비]
 
[저동공동묘지의 순교자 묘소]
 
 
작성자 : 울릉동광교회 김기백 장로
【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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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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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