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궁예왕
옛날에 왕은 부인을 여럿 두었다. 궁예가 왕이 되니 욕심이 많아져서, 또 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몇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여우는 사람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러한 여우가 궁궐로 들어오니 그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비는 병이 나 드러누웠다. 왕이 용한 의사들을 다 불렀으나 병이 낳지 않았다.
궁에서 그런 일이 나니 이름 좀 알릴까 하고, 별 사람이 다 모여들었다. 한 사람이 ‘나는 잘 알지는 못하나 맥쯤은 안다’고 하니, 옆에 있던 사람이 ‘그럼 궁중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가 하는 말이 ‘병은 아닌데 꼭 사람 고기를 먹어야 나을 병’이라고 하였다. 또 ‘꼭 열세 살, 열네 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유방을 먹여야 한다’고 하며, ‘좀 힘들겠다’고 했다. 옆의 사람이 말했다.
“아! 힘들게 뭐가 있어.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뭐가 힘들어.”
그래서 왕명이라면서 여자 하나를 빌려다가 가슴을 딱 베여 먹이니 왕비의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이럭저럭 여섯 달이 지났는데, 왕비가 또 아프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꾸 여자아이를 잡아 먹이니, 4,5년이 지나자 사람이 무척 줄게 되었다. 그것도 꼭 열세 살, 열네 살 된 여자아이를 갖다 먹여서, 그때부터 일곱 살, 아홉 살에 시집가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집만 보내면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왕건이 가만히 보니까 사람을 다 죽이고 나면 나라가 없어질 것을 염려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궁예가 군사를 데리고 도망을 쳐서 여기에 있는 궁예성(포천군 창수면 중리)으로 왔다. 이 당시에 왕건에게 쫓겨 올라오면서 군사를 많이 데리고 왔기 때문에, 거기서 쌀 씻은 뿌연 물이 왕건 군사가 있는 곳까지 흘러내려 갔다고 한다. 거기에 성을 쌓는 동안에도 왕건이 자꾸 쳐들어오니, 궁예는 성만 쌓아 놓고 그곳에 하루만 머물고는 그냥 또 쫓겨갔다.
왕건이 또 계속 쫓아와서 도망간 데가 운천구에 있는 용해라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울음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울음산 저쪽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함) 울면서 한탄을 했다. 그 결과 한탄강이 생겼다고 한다.
왕건은 궁예를 잡을 수 있었지만, 잘못해서 그 사람보다 더 난 사람이 날까봐 죽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추방시켰다. 궁예가 도망갈 때, 남자들은 돌을 져다주고 여자들은 돌을 날라와, 사람들이 그 돌멩이를 쌓아놓고 던졌다. 그래서 강원도 복개(철원에서 삼십리쯤 되는 곳에 위치)라는 곳에서 돌무덤에 묻혀 죽었다.
그런데 왕건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역적이 된 궁예는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후에 고종 때 일본이 을사조약을 맺자고 하며, 만주를 침범해 그것을 나누자고 했다. 고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을사조약을 맺었다. 이 때 일본이 한국을 빌려달라고 해서, 서로 의형제를 맺은 것과 같으니 승낙을 했다. 그러자 일본은 인천, 부산, 원산으로 군사를 데리고 들어와 무기를 확보했다. 그 뒤에 일본이 서울에서 원산까지 경원선을 닦는데, 철로가 복개를 지나면 길이 조금 구부러지고 능선을 끊으면 좀 가까웠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닦자, 일본인이 자꾸 이유 없이 죽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어떤 한 노인이 말했다.
“거기 끊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 앞에 그래도 일개 왕의 무덤이 있는데, 아무리 역적으로 죽었지만 거길 끊는 데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너희가 죽을 수 밖에 없지.”
이 소리를 마을 사람들이 듣고, 그 중 한 사람이 일본인에게 고자질했다. 그러자 순경들이 나와서 그 노인을 붙잡으니까, 그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면서 말했다.
“길을 그렇게 닦지 말고 그 앞으로 다시 재어서, 거기에 제사를 지내야 당신들이 잘 닦을 수 있습니다. 길을 다 닦고서 한 번 제사를 또 지내십시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돼지를 잡고 제사를 지내고 길을 닦으니, 사고 하나 없이 원산까지 철도를 놓을 수 있었다. 기차가 서울부터 개통을 하는데, 복개라는 언덕에 와서는 올라가질 못했다. 그때 다시 노인의 말이 생각이 나서, 궁예왕의 무덤 앞에다 제사를 지냈다. 한 번 절을 하고 일어나니까 잔에 부어 놓은 술이 없어졌다. 절하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술이 없어지니까, 또 한 잔을 부어 놓고 절을 했다. 그랬더니 또 부어 놓은 술의 반이 줄었다. 계속해서 술 석 잔을 다 올리니 맨 끝의 잔은 그냥 흔들리기만 하였다. 제사를 다 지내고 나자, 노인이 음력으로 시월 보름날이면 잊지 말고 제사를 지내주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본인에 의해 후대에 와서 궁예왕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궁예왕은 역적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제사를 못 얻어먹고, 일본인이 기차를 개통하는 바람에 제사를 얻어먹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번 지냈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또 기차가 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본인들은 8·15 해방 전까지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김한길, 남, 창수면 중리, 1995. 8. >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