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궁예왕 3
궁예가 가평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친 뒤 왕건의 공격을 막아내다 이 산에서 죽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궁예의 무덤은 철원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고 한다. 삼방역이라는 곳인데 궁예가 나무에 기댄 채 미동도 않자, 왕건의 수하들이 확인한 결과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죽음조차 서서 맞이한 그의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궁예와 관련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여러 개가 전해진다. 강사골, 티나무골, 보라골, 서렁골이 그것이다.
강사골은 강한 군사를 배치한 데서 유래하고, 티나무골은 대전투의 치열함에서, 또 보라골은 왕건의 군사를 견제하려 했음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마지막으로 서렁골은 나라가 망했음을 궁예의 군사들이 한탄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궁예가 해동궁을 세운 후 어렵게 쇠기둥을 세웠는데 드나들 때마다 만지면서
“야! 이 기둥은 천년 만년 썩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궁예가 신하들에게 무슨 이유로 이 쇠기둥을 세웠느냐고 물으니, 간신이 대답하였다.
“왕께서 이 쇠기둥처럼 썩지 않고 천년 만년 군림하시라고 지었습니다.”
궁예가 그 간신을 둘도 없는 부하라고 여기면서, 그 사람 말을 신임했다. 하루는 궁예가 그 간신에게
“그럼 내가 천년 만년 왕 노릇을 하려면, 천년 만년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천년 만년 살 수 있느냐?”
라고 물으니, 간신이 대답하였다.
“왕께서 새로운 처녀 장가를 자꾸 드시면 그 젊은 사람의 기를 타서 천년 만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포천, 철원 일대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다 끌어다가 궁녀로 삼았다. 궁예가 쇠가 아닌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결국은 간신의 말만 믿고 포악한 정사를 하던 궁예는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에게 크게 지고 나서 도망을 가다가 하연리, 지연리라는 데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농부들이 가래질을 하다 말고 가래로 도망가는 궁예를 찔러서 죽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근처의 난전터 역시 궁예가 나라의 망함을 한탄해 하면서 정성스레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 이현문, 70세, 남, 화현면 화현리, 2000. 9. 22. >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