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례현 / 물어고개
고려 말엽이었다. 해주, 충주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을 거쳐,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까지 봉해졌던 성여완(成汝完)이, 난세를 피하여 이곳 ‘왕방산(王方山)’ 아래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등극하게 된 이성계가 지금의 신북면 심곡리와 신읍리 사이에 가로놓인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씨 조정에 입조(入朝)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이 고개를 예를 갖추어 찾아온 고개라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재’는 ‘문례현’의 와전(訛傳)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성여완이 우거했던 ‘왕방산(王方山)’은 왕이 찾아온 산이라 하여, ‘王訪山’이 옳을 테지만, 이조의 모든 문헌에는 이태조를 격하하는 것을 기하여, ‘訪’자 대신 음이 같은 ‘方’자로 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설도 있다.
또 일설엔 근년에 ‘독곡’선생이란 분이, 어느 날 ‘문례현’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후유! 이 고개가 아직도 얼마나 남았을꼬? 아니 이 고개 이름이 무슨 고개인고?”
하면서 자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물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抱川郡誌, 1984. >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