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백운 계곡과 선비 모임
경기도 포천군 이동에 가면,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흰구름이 머물다 가는 고개’라고 부르기도 하고 ‘맑은 물 계곡’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 이 고개에는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하늘에 닿을 듯 깎아지른 고개는 험하고 구불구불하여 웬만한 사람은 찾는 이 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 양평 화서 선생으로부터 많은 공부를 하던 김평목 선생이나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 곳 계곡을 매우 사랑하여, 1년에 한 번씩 이 곳에 모여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탁족놀이를 즐겼으며, 새 소리, 바람 소리를 벗삼아 시도 짓고 글씨도 쓰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맑은 물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중암 김평목 선생이나 면암 최익현 선생은 모두 포천 출신의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양평에서 화서학파를 이루고 제자와 후학을 기르던 화서 이항로 선생은 특히, 포천 출신의 김평목 선생과 최익현 선생을 사랑하였으며, 두 제자들도 학문의 길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의 사정은 결코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선비들이 1년에 한 번씩 중암 김평목 선생이 즐겨 찾는 계곡에 모여 나라 걱정도 하고 시회를 갖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중암이 주관하는 이 시회는 음력 5월 단옷날의 모임이었고, 늘 맑고 밝은 햇빛이 계곡 안을 가득히 비추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하루 전날까지도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가도, 시회가 열리는 날이면 구름도 걷히고 바람이 멎는가 하면, 한낮에는 멀리서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며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곳 계곡에는 양주, 포천, 양평, 가평, 연천 등 다섯 고을 선비들 300여 명이 모여들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중암과 면암이 돌아가시자 열흘간이나 비가 내려 선비들의 슬픔을 더했으며, 특히 이 곳 계곡을 왜놈들이 어찌 알고 찾아드는 날이면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계곡은 물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근 작은 연못이나 산정 호수가 넘쳐 연못 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물난리를 겪었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술을 좋아하는 놀이패들이 술꾼 30여 명과 기생들을 데리고 계곡으로 놀이를 왔었다고 합니다.
이 놀이패들은 맛난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수레에다 싣고, 기생들은 울긋불긋한 오색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까지 입고는 계곡의 김평목 선생이 지은 정자에까지 이르러 짐을 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만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맑고 드높던 하늘이 금방 흐려지고 먹구름이 뒤덮이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잠시 후, 계곡은 흙탕물로 뒤덮이고 큰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리더니, 큰 바위들이 놀이패와 기생들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몸을 피한 놀이패들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마을에 들어선 놀이패들은 마을 사랑방을 찾아 노인장을 만나 의논하기로 하였습니다.
“노인장, 문안 여쭈옵니다.”
“누구신가? 못 보던 얼굴들인데…….”
“네, 지금 막 이 곳에 도착하여 놀려던 놀이패입니다.”
“놀이패? 놀이패라니?”
“네, 이 곳 계곡의 물이 하도 맑고 그 물소리가 청아하며 경치 또한 절경이어서, 이렇게 기생들까지 데려와 재미나게 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이 고약한 놈들 같으니……!”
인자한 모습의 노인장은 금방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화를 참지 못하며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네 이놈들!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기생까지 대동하고 와서 소란을 피우려 하느냐? 바로 여기가 조선조 말 충신 면암과 중암이 노니시던 곳이란 말이다. 어찌 너희같이 한가한 한량들의 발길로 더럽히려 드느냐?”
노인장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습니다. 비와 천둥 번개를 피하고 머물렀다 갈 것을 청했던 놀이패들은, 그만 젖은 옷자락을 끌며 허겁지겁 마을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몇 날이 지났습니다. 그 날은 비는 오지 않았으나 흐리고 우중충하였습니다. 이 날의 모임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계곡의 소식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예정된 모임이라 하는 수 없이 계곡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활짝 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남녘에는 흰구름이 떴다가 계곡을 따라 오르더니만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시회를 주관하던 모임의 우두머리가 마을 노인을 찾았습니다.
노인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멀리서 옛친구가 찾아온 듯 사랑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오더니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어유, 어서 오십시오. 어젯밤 잠자리에서 꿈을 꾸었는데, 선생을 반겨 모시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분부를 받으셨다니요? 노인장을 처음 뵙는데 무슨 말씀을…….”
노인의 말은 또렷하였습니다.
노인이 잠자리에 들자, 노인의 선조이신 중암 김평목 선생이 꿈에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내일 시를 쓰는 시인의 시회가 열릴 테니 불편함이 없이 반겨 모시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계곡으로 사라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암 선생이 우리를 어찌 알고…….’
감탄한 시인들은 중암 선생의 후손들의 환대를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이름도 없던 이 계곡을 백운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이 백운 계곡 입구에는 중암 선생의 비석이 계곡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김창종, 『소금집 딸』, 한국독서지도회, 1995>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