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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마포구 서울특별시 마포구 정보
서울특별시 마포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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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마포구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마포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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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마포구의 역사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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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서울의 관문 마포나루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는 곳, 바로 그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이 마포이다. 3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먼저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더욱이 서울의 도심에서 중서부 10∼15리 거리에 위치한 마포구는, 수륙 교통의 요충지가 되는 하항(河港)을 차지하기 때문에, 서울의 관문으로서 또한 방어상 요충지가 되어서 군사적으로 많은 침해를 겪어왔다.
 
지정학적으로 마포 연안은 삼국시대부터 쟁패의 혈전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정묘호란, 여러 차례 양요 때마다 수도 방어상 가장 중요한 방어지가 되었다. 특히 구한국 말기의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때에는 프랑스와 미국 군함이 마포 서강 연안에 침입하였으며, 임오군란(1882) 전후의 일본군 침략 때도 가장 중요한 나루가 되었다. 또한 구한국 말기에는 한때 증기선이었던 용산호(龍山號)와 삼호호(三湖號)가 인천과 마포 사이를 운행하였으나, 근대 철도 교통이 개통(1899. 9. 18)된 후부터 한강의 조운(漕運)이 쇠퇴하게 되었다. 더욱이 6·25 이후 휴전선이 한강하구를 막게 된 이후부터 배 교통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김포∼인천, 김포공항에 직통하는 간선도로인 마포로, 양화로, 성산로의 개통으로 육상 교통상 요로가 되고 있다.
 
◈ 망원정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별장(별서 : 別墅)을 지은 것은 세종 6년(1424)의 일이다. 그 이듬해 세종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의 삶을 걱정하여 이곳에 들렀을 때 마침 단비가 내리므로 기뻐하며 정자(亭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명하여 글씨를 써서 내리었다. 세종은 그 후 자주 희우정에 나와서 농정(農政)을 살피고 수전(水戰)연습을 관람했는데 어떤 때는 대포를 발사하는 등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면서 신하는 물론 세자와 대군으로 하여금 희우정에 올라 관람케도 하니 이 희우정 부근은 명승지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의 훈련장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후 성종 15년(1484)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크게 고치고 정자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쳐 지었다. 망원정의 이름은 ‘정자에 오르면 산과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멀리 잘 바라볼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 이후 역대 왕들은 세교(망원, 합정, 성산, 서교지역)에 나와 농사 작황을 시찰하는 한편 수전연습을 관람하여 성시를 이루었으며 명나라 사신들도 망원정에 올라 시문을 읊은 이들이 많았다. 연산군때는 망원정을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크게 확장하고 이름도 ‘수려정’으로 고쳤으나 그 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다시 망원정으로 변경하였다.
 
◈ 마포형무소
마포형무소는 1912년 9월 3일 마포구 공덕동 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과 서울지방검찰창 서부지청 자리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신설됐다. 이 때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기존의 경성감옥(1907년 설치)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당시 경성감옥(마포형무소)은 기결수만을 수용하던 곳이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감되기도 했다.
 
1923년 5월5일 ‘감옥’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형무소’란 이름이 붙게 되고, 남녀 분리 수감으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자 수형자가, 이곳 경성형무소에는 무기수와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가 수감되어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항일독립투쟁 기간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치르며 순국하기도 했다.
 
경성형무소는 해방 후 1945년 11월 21일 서울소재 형무소가 1개로 통합되면서 ‘서울형무소’ 지소로 운영되다 이듬해 3월 28일 ‘마포형무소’로 승격되었다. 곧이어 6·25를 맞게 되는데 서울에 최초로 진입한 북한전차부대는 제일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좌익범들을 풀어주고 우익의 주요인사들을 색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던 마포형무소는 1963년 9월 3일 교도소 직제개편으로 마포교도소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곧 모든 시설과 수용인력이 안양교도소로 이관되면서 마포형무소는 문을 닫게 된다. 안양교도소로 이관 후 빈터로 남아 있다가 경서중학교가 들어섰고 1992년 경서중학교는 강서구로 이전되었고, 지난 1994년 서부지원과 서부지청이 들어섰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1994년 이곳에 ‘이곳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유적지’라는 표석을 세웠다.
 
◈ 마포 전차
종점 기미년 3·1운동 때 낮에는 파고다 공원에서, 밤에는 서대문 방향의 마포 전차 종점에서 다시 모여 만세를 불렀다. 현재 마포구 마포동 140번지 대로변에 3·1운동 기념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이하응(李昰應) 과 아소정(我笑亭) 터
아소정 터는 고종황제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머물렀던 아흔 아홉칸짜리 별장 ‘아소정’이 있었던 곳을 말한다. 지금의 염리동 동도공업고등학교 자리에 현재 터만 남아있는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머물며 자신의 일생이 덧없음을 후회하며 스스로 비웃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이곳의 내력은 기구하고 사연도 깊다. 늙고 병든 대원군은 1898년에 망해가는 조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고 이곳 아소정에 안장됐다. 이 때문에 아소정은 ‘국태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7년 대원군 묘는 파주 대덕리로 옮겨졌다가 1966년에 다시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천묘되었다. 주인이 없어진 아소정은 조선 총독부 소유로 있다가 1953년에 동도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개교 당시 아소정은 교실로 사용되었는데 2,000여명의 학생을 수용할 만큼 컸었다. 그러나 6·25동란 때 불탄 서대문구의 봉원사 대방(염불당)을 짓기 위해 이전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불당마저 소실되었다.
 
조선말기 일세를 풍미했던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허무함을 한탄했던 곳 아소정.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는 운동장으로 변했고 구석 한켠에 초라하게 서있는 안내판에서 세월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
1517(중종 12)∼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奇人)으로 『토정비결』의 저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土亭), 현령 치(穉)의 아들이며, 색(穡)의 후손이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한강의 마포강변(현재 마포구 토정동 마포주차장 부근)에서 흙담 움막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았으며, 그로 인하여 ‘토정’이라는 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기이한 행동과 예언, 술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 등에 달통하였다. 그가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일년(一年)의 신수(身數)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많아져서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주민의 추천으로 포천(抱川)현감이 되었으며, 재임 중에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고 미리 대비하여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어 1578년에는 아산(牙山)현감에 임명되어 걸인과 기민(饑民)·노약자의 구호에 힘썼으며,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고, 숙종 때인 1713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토정비결』과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있다.
 
◈ 박세채(朴世采)
현석동의 동명은 이곳 소동루에 살았던 박세채(朴世采)의 호에서 연유한다. 박세채(1631∼1695)는 조선 중기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며, 그의 가계는 고려말의 명문세족 충신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당쟁이 가장 치열하고 호란을 겪었던 격동기였으므로 그러한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는 사승(師繩)관계를 맺게 되었다. 1675년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 동안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은 박세채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 기간 중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輔編)』『심학지결(心學支結)』 등을 지었다.
 
1680년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를 거쳐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박세채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를 이루게 되었다. 즉『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輔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을 저술하였다.
 
박세채의 입장을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 입장과 탕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하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박세채는 위의 저서 외에도 『제의정본(祭儀政本)』『백록규해(白鹿規解)』『우계속집(牛溪續集)』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와 『문집』 70권을 남기고 있다. 그가 살았던 소동루는 현석동 77번지 강변도로 옆 언덕에 위치했다고 한다.
 
◈ 한백겸(韓百謙)
상암동은 실학의 선구자인 한백겸이 1608년 이후부터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원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동(休岩洞)에서 비롯되었으며 수상리는 수이촌(水伊村)이 변한 것이라 하는데, 한백겸은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물위치(수이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백겸이 상암동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은 동생 준겸(浚謙)이 이 곳의 북쪽 수리(數里)되는 곳에 농토를 가지고 살면서 이 마을 북쪽 산록의 밭을 형인 그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곳에 살게 된 것이라 한다. 백겸은 물 좋고 산수 좋은 곳에서 만년을 보낼 생각을 하고 수이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고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구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그 마을에서 옮겨가지 않고 오래 살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백겸(1552~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며, 호는 구암(久菴)이다. 그는 민순(閔純)에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의리에 관한 연구에 힘써 문경논맹(文經論孟)에도 정통했다. 그는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 보았고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동국지리지?H는 『한서』의 조선전과 『후한서』 고구려전, 읍루전, 삼한전 등에서 4군과 고구려의 여러 성, 백제국도, 신라소경지(新羅小京志), 고려제경(高麗諸京) 등에 관한 기사를 뽑고, 간간히 필자의 의견을 붙여서 지은 역사지리책이다.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아들 교흥(敎興)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사적
◈ 양화나루·잠두봉 유적 제399호, 합정동96-1 외 25필지
 
■ 기념물(시지정)
◈ 망원정지 제9호, 합정동 457-1외 1필지
 
■ 민속자료(시지정)
◈ 정구중가 제17호, 용강동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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