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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면 향토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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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다도면 향토사
제1장 나주시(羅州市) 역사
about 다도면 향토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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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2018.07.10. 02:38) 
◈ 제1장 나주시(羅州市) 역사
나주시는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3'∼126°54', 북위 34°53'∼36°03', 면적은 608.15㎢이다.
목   차
[숨기기]
 

1. 1. 개관

나주시는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3'∼126°54', 북위 34°53'∼36°03', 면적은 608.15㎢이다.
 
지질은 전역이 화강암 지대이다.
 
2018년 4월 현재 나주시 인구는 111,214명(남자 55,983명, 여자 55,232명) 새대수는 53,043세대이다. 행정구역은 1개 읍, 12개 면, 7개 행정동(34개 법정동), 446개 행정리(154개 법정리)가 있다.
 
우(58263) 전라남도 나주시 시청길 22(송월동)
TEL : 1577-7800 / FAX : 061-339-2896
 
나주시 symbol mark
 
나주시의 심볼은 나주의 뿌리 깊은 역사, 경제, 문화를 나이테에 담아 차별화를 시도했으며, 아래의 푸른 물줄기는 영산강을 의미하고 막힘없이 전진하는 나주시의 미래상을 표현 나이테가 가지는 2개의 원은 민과 관이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뜻이며 특산물인 "나주배"를 상징한다.
 
나주시의 꽃은 배꽃이다. 배는 역사적으로 나주의 대표적 명산물로서 꽃은 시민의 순결성을 표현하고 꽃잎이 다함께 피고 지므로 시민들의 굳은 의지와 단결심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인 영산강이 나주 시가지를 관통하여 지세를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은 나주평야가 전개되어 수로의 편이를 주고 있으며 동남과 서북간에 국부적인 산악이 기복하나 태반이 구릉과 평야로 연속되어 남북으로 연결한 남평, 금천, 다시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며 평탄한 구릉을 서로 연결하여 호남곡창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주시의 진산인 금성산(451m)이 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시가지는 물론 곡창지대인 나주평야를 그림처럼 한눈에 볼 수 있다. 화순군 여첩산에서 발원한 신탄천은 시의 동부를 흐르다가 구 나주읍에서 영산강에 합류하는데 도중에 남부 산지로부터 발원하여 북류하는 여러 계류(溪流)를 합한다.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26.7㎞ 거리에 위치하여 광주 산업권의 근교일 뿐 아니라 함평,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등 10개시군의 관문으로 교통의 중심지이고 예전부터 금성산의 산형이 서울 삼각산과 같다고 해서 소경(小京)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의병장 창의사문열공 김천일 선생, 조선의 석학 신숙주의 태생지임은 물론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로서 인걸지령을 증명해 주고 있다 .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빛가람동 일대에 한국전력공사, 한국농어촌공사,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이 이전되었다. 무안광주고속도로가 지난다.
 
영산강
 
 

2. 2. 자연환경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라남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이 댐은 작물 성장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수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한 국내 최대의 관개용수 댐이다. 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에는 붕어·잉어·뱀장어·날치 등 담수어족이 많아 낚시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지역이 되고 있다. 이들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가 발달되고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유역과 이 하천이 합류한 영산강 북안에 다시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크게 나주평야의 일부라 할 수 있으며, 총면적은 1,400ha에 이른다. 문평천을 가로막아 만든 백룡제라는 저수지가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 평야의 특색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3. 3. 역사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나주시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나주박물관 '남도의 고인돌' 특별전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마한 54개국
마한의 인구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며, 총 10여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추산한 총인구수는 약 50만 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감해국(感奚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건마국(乾馬國)
고랍국(古臘國)
고리국(古離國)
고비리국(古卑離國)
고원국(古爰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포국(古蒲國)
구로국(狗盧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구소국(狗素國)
구해국(狗奚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노람국(怒藍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막로국(莫盧國)
만로국(萬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수국(牟水國)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벽비리국(辟卑離國)
불미국(不彌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
비리국(卑離國)
비미국(卑彌國)
사로국(駟盧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소위건국(素謂乾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신분활국(臣濆活國)
신소도국(臣蘇塗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신흔국(臣釁國)
아림국(兒林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염로국(冉路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원양국(爰襄國)
원지국(爰池國)
일난국(一難國)
일리국(一離國)
일화국(日華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지반국(支半國)
지침국(支侵國)
첩로국(捷盧國)
초리국(楚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흥덕리·신촌리 일대와 다시면 회진마을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독무덤의 존재들이 주목된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비교적 강대한 정치권력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백제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안·남평·담양·낙안·곡성의 5군을 속군으로 거느렸는데, 여기에 현웅현이 남평으로 고쳐져 예속되었다. 또,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의 11현이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 속군·현들은 1172년(명종 2) 이후 점차 독립하거나 다른 지방에 이속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 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1950년대 나주 영산포
 
 

4. 4. 유물·유적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동강면 장동리, 공산면 봉룡리, 산포면 신도리 등 20여 곳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다시면 가흥리 늪지대에서 벼화분이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만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150여 곳에 1,2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중 왕곡면의 나주신포리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35호)을 비롯해 다도면 판촌리·마산리 지석묘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북방식 지석묘인 다시면의 신풍리지석묘에서는 석검과 채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세지면 오봉리·벽산리, 남평읍 동사리·교촌리의 것이 대표적이다.
 
나주 반남 고분군(羅州 潘南 古墳群, 사적 제513호)
 
고분으로는 다도면 마산리에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거대한 봉분을 한 고총 고분으로는 반남면에 나주신촌리고분군(사적 제77호)·나주대안리고분군(사적 제76호)·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제78호) 등의 옹관고분군이 있다. 석실고분으로는 다시면에 복암리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36호), 세지면의 나주송제리고분(전라남도 기념물 제156호), 반남면에 나주흥덕리석실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동강면·공산면·왕곡면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옹관고분에서는 금동관·금동시발·환두대도 등 신분을 상징하는 금속유물과 많은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복암리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관이 출토되었다.
 
 
성터로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진 다시면 신풍리의 나주회진성(羅州會津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7호), 반남면 대안리·신촌리의 나주자미산성(羅州紫微山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8호), 남내동의 나주읍성남문지(사적 제337호), 금성산성지 등이 있다.
 
신촌리의 나주자미산성(羅州紫微山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8호)
 
불교문화재로는 성북동의 나주동문외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보물 제49호), 과원동의 나주북문외삼층석탑(보물 제50호), 봉황면의 나주철천리칠불석상(보물 제461호)·나주철천리석불입상(보물 제462호), 경현동의 다보사대웅전·다보사석탑·다보사괘불탱(보물 제1343호), 대호동의 심향사(전라남도 문화재 제88호)·심향사아미타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심향사삼층석탑·불두사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남평읍 동사리의 석등, 세지면의 나주송제리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 다시면 가운리의 복암사이층석탑, 남평읍 풍림리의 죽림사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2호)·탑재·석불좌상·부도군, 다도면 마산리의 불회사대웅전(보물 제1310호)과 부도군, 봉황면의 나주만봉리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 운흥사의 부도군 등이 있다.
 
1917~18년 나주 반남고분 발굴 당시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대형 옹관
 
나주 회진성 (1986년 2월 17일 지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87호)
 
 

5. 5. 유교문화재

 
유교뮨화재로는 교동에 나주향교(전남 유형문화재 제128호)·나주향교대성전(보물 제394호), 남평읍 교원리에 남평향교(전남 유형문화재 제126호), 안창동에 미천서원(眉泉書院, 전남 기념물 제29호) 등이 있다.
 
그리고 금계동에는 우복룡(禹伏龍)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운 정수루(正綏樓, 전남 문화재자료 제86호)와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전남 문화재자료 제132호)가, 과원동에는 객사 건물인 나주금성관(羅州錦城館, 전남 유형문화재 제2호)이 남아 있다.
 
또한, 남산공원 내에 정렬사(旌烈祠), 남문동에 나씨삼강문(羅州羅氏三綱門, 전남 문화재자료 제91호), 석현동에 계간사(谿磵祠), 송월동에 금강사 등이 있다. 이 밖에 노안면 영평리의 설재서원(雪齋書院, 전남 문화재자료 제93호), 금안리의 경렬사(景烈祠), 다시면 영동리의 보산정사(寶山精舍, 전남 문화재자료 제131호)·무열사(武烈祠, 전남 기념물 제57호), 문평면 오룡리의 봉강사(鳳岡祠, 전남 문화재자료 제94호)·송재사(松齋祠)·거평사(居平祠)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성전 보물 제394호 ,나주향교
 
나주향교 전경(1920년대).
 
 

6. 6. 전통가옥

전통가옥으로는 다도면 풍산리의 홍기응가옥(洪起膺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1호)·홍기헌가옥(羅州洪起憲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65호)·홍기창가옥(羅州洪起昌家屋, 전남 민속자료 제9호), 덕동리의 홍기종가옥(羅州洪起宗家屋, 전남 민속자료 제10호) 등 풍산홍씨의 고가옥이 남아 있다. 남대동의 박경중가옥(羅州朴炅重家屋, 전남 문화재자료 제153호), 송월동의 최석기가옥(羅州崔奭基家屋, 전남 문화재자료 제158호), 문평면 오룡리의 나대용생가 및 묘소(羅大用生家·墓所, 전남 기념물 제26호)도 보존되어 있다.
 
나대용 묘소 (羅大用 墓所)
 
 

7. 7. 정자

정자로는 노안면 금안리의 쌍계정(雙溪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세지면 벽산리의 벽류정(碧流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봉황면 철천리의 만호정(挽湖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45호), 다시면 신풍리의 영모정(永慕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신석리의 창주정(滄洲亭), 문평면의 사벽정(四碧亭) 등이 유명하다.
 
 

8. 8. 비석군

비석으로는 다시면 가흥리의 최희량장군신도비(崔希亮將軍神道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53호), 과원동의 사마비(駟馬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가 대표적이다.
송월동에 왕건과 나주오씨에 얽힌 전설이 있는 나주완사천(羅州浣紗泉, 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 남평읍 풍림리에 남평문씨와 관련된 나주문바위(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2호) 등이 있다. 이 밖에 최희량임란첩보서목(崔希亮壬亂捷報書目, 보물 제660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영동의 전공민왕필염제신상(傳恭愍王筆廉悌臣像, 보물 제1097호)도 전한다. 등록문화재로는 금성면에 구 나주경찰서, 노안면에 나주노안천주교회가 있다.
 
비석군
 
 

9. 9. 천연기념물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는 수령 500년, 높이 6m, 둘레 2.4m의 반구형 동백나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고 큰 동백나무이다. 예로부터 사찰에는 화재 위험성이 높아 스님들이 절집 주변에 산불에 강한 상록성 동백나무를 심었다. 때문에 동백나무숲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 남쪽 지방에는 많다. 동백나무는 겨울에 강렬한 색상의 붉은 꽃이 핀 후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이 어딘가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애절한 슬픔을 담고 있어서 양화소록 등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 옛 사람들이 가까이 한 전통 꽃나무로 유래와 더불어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다.
 
유홍준 교수는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동백꽃은 반쯤 떨어져 갈 때가 좋다. 떨어진 동백꽃이 검붉게 빛바랜 채 깔려 있는데 밝은 햇살을 따라 반짝거리는 이파리 사이사이로 아직도 붉고 싱싱한 동백꽃 송이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 점점이 붉은 악센트를 가한 한폭의 명화를 연상케 한다”고 절묘하게 표현했다
 
동백은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 전체가 한꺼번에 통째로 떨어진다. 그 모습에서 남자에게 순결을 짓밟히고 타락한 여인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 꽃이 피고 바람이나, 벌, 나비 등 곤충의 도움 대신에 드물게도 동박새의 도움으로 수정된다.
 
금사정 동백나무는 1519년(조선 중종 14년)에 조광조 구명을 펼쳤던 태학관 유생 11명이 낙향해 금사정을 짓고 금강 11인계를 조직해 정치의 비정함을 한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심은 것이다. 그들은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로 동백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노거수 동백나무 단목(한 그루)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동백나무의 장관은 역시 꽃피는 계절이다. 이 동백은 1월에 조금씩 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초순이면 꽃이 반은 나무에 매달려 있고 반은 꽃이 싱싱한 채로 바닥에 떨어진다. (글·사진 성효심 정수사진대전 초대작가)
 
 
 

10. 10. 교육·문화

전 근대 교육기관의 출발은 나주목을 포함한 12목에 경학박사 등을 파견하여 자제를 교육케 했던 고려조 성종대로부터 시작하여 별도의 향학 진흥책을 도모한 인종이나 공민왕 대로 이어지는 교학의 오랜 전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조선 초기 이래 전라우도(全羅右道) 교육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온 나주향교는 교관의 품계나 성현을 모신 대성전의 규모면에서 호남 최대를 자랑한다. 건물 배치 양식에서 대성전 뒤로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배치,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를 취하였다. 『향교지』에는 건립연대가 1398년(태조 7)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조의 흥학책이 당대에 연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평읍 교원리의 남평향교는 1420년(세종 2)에 당시 남평현 동문 밖에 창건되었다가 1534년(중종 29)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 그 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들 두 향교는 향안(鄕案) 등의 자료에서 향촌의 여론수렴과 향강(鄕綱)을 수립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설립추세는 이 지역 유림세를 반영하여 1583년(선조 16) 서문밖 경현동에 창건된 경현서원(景賢書院)을 필두로 1590년 남평읍 서산리에 봉산서원, 1664년 죽봉사우(竹峯祠宇)와 월정서원(月井書院), 1678년 장연서원, 1688년 설재서원 등이 설립되었다.
 
1702년 송재사우(松齋祠宇)의 설립에 이어 서하사우(西河祠宇)·용강사우(龍岡祠宇)·창계서원(滄溪祠宇)·반계서원(潘溪書院)·미천서원·정렬사·금성사·영강사우(渶江祠宇) 등으로 연결되면서 탄탄한 유림 문화를 구축하였다. 이 중 사액서원은 경현서원·월정서원·정렬사 등 세 곳이다. 이들 모두는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 현재 대부분 복원되었다. 한편, 1601년(선조 34)경 입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안동 향약은 유교문화권의 지역공동체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11. 11. 근대교육기관

근대교육기관으로는 갑오개혁 직후인 1897년에 공립나주심상소학교가 세워진 것을 필두로 1906년에 사립 남평영흥학교(永興學校)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07년에는 나주소학교가 나주보통학교로, 1910년에는 영흥학교가 보조지정학교로 인가된 뒤 1911년 공립으로 바뀌어 식민지 제도권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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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1교 설치 정책이 완료되던 1938년에는 총 20개 교의 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있었다. 특히, 1920년에 반남학술강습소가 문을 열었다가 1925년에 폐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1920년대의 민중계몽에 의한 실력배양운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1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대학은 고구려대학교·동신대학교·광주가톨릭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공도서관, 나주배박물관, 시민회관, 사회복지관, 문화원 외에 실내체육관, 테니스와 사격장과 각종 문화복지시설이 있다.
 
남평공공도서관과 각종 비석들, 이곳은 예전 남평현 동헌 터였다.
 
 
 

12. 12. 민속놀이

나주 지방의 민속놀이로는 어른들의 놀이인 농악·소태우기,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즐기는 놀이인 줄다리기·씨름·고누·꿩치기·윷놀이, 부녀자들의 놀이인 강강술래·널뛰기·그네뛰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소태우기는 일년 벼농사 중 만드리(세벌논매기)를 끝낸 농군들이 흥겨운 들노래 가락에 맞추어서 행하는 놀이이다.
 
고누는 말판을 그려놓고 말이 앞으로 나가면 이기게 되는 놀이이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꼰’이라고 부르며, 곤지꼰·정자(井字)꼰·호박꼰 등 종류가 다양하다. 일명 장치기라고도 하는 꿩치기는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데,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각기 1.5∼2m 가량의 장대를 가지고 나무로 만든 공을 쳐서 적진에 들여보내는 놀이이다. 윷놀이는 정초에 행해지는 놀이로, 이 고장에서는 밤알만한 크기의 작은 나뭇조각으로 된 밤윷을 사용한다.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널뛰기 또한 정초·추석·단오 등의 명절에 많이 행해진다. 그 밖에도 아이들의 놀이인 제기차기·튕김질(땅재먹기)·비사치기(비석차기)·닷짝거리(콩주워먹기·공기놀이)·자치기 등이 있다.
 
가마니짜기 대회(1920년대)
 
 

13. 13. 설화

이 고장에는 역사상의 인물과 관련된 설화와 지명유래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반남면 신촌리에 전해지는 「벌명당전설」이 유명하다. 반남박씨의 시조 박응수(朴應洙)의 아들 의(宜)는 아버지가 죽자 지관을 불러 명당을 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지관은 명당을 잡았으나, 그 자리를 소개하면 천지조화의 비밀을 누설했다 하여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박의에게 거짓 명당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박의는 지관이 소개해준 거짓 명당을 버리고, 지관이 숨긴 명당을 택해 묘를 쓰고자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파고 있던 땅 속에서 커다란 벌이 솟아나와 지관을 쏘아 죽이고 말았으며, 반면 박씨의 집안과 후손은 날로 번성하였다. 그 뒤로 이곳을 벌명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강면 월송리에 전해 오는 「몽탄강전설(夢灘江傳說)」은 고려 말 왜구토벌에 나선 이성계(李成桂)가 꿈에 어느 노인의 계시를 받고 이 강을 건너 왜구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 뒤 꿈여울이라는 뜻에서 몽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불회사의 대웅전과 일봉암(日封庵) 전설은 고려의 국사 원진(圓眞)이 신라 때 창건한 불회사의 대웅전을 중건할 때의 이야기이다. 원진에게 은혜를 입은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의 중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 사이에 하루해가 저물고 말았다. 그러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때 원진이 기도했던 자리에 지은 암자가 일봉암이다.
 
이 밖에도, 옛날 어느 장군이 싸움터에 나가던 중 신을 삼아서 신고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는 다도면 덕동리의 「신틀바위전설」, 어느 효자가 선녀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병을 고치고, 어머니의 사후에는 선녀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일봉산의 「상여바위전설」, 검은 소 열 마리의 간을 지관에게 바치고 얻었다는 「명당전설」이 공산면에 전한다.
 
또, 인물에 관한 전설로는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이 등과 배에 ‘문(文)’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 장자연(長者淵) 가의 돌상자 속에서 태어났다는 「문바위전설」, 조선시대의 문인에 관한 「박상(朴祥) 이야기」, 임진왜란을 예언한 의병장 「김천일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나주문바위문암 전남민속자료 제32호, 1995년 12월 26일
 
 

14. 14. 전승민요

나주 지방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전승되는 민요도 들노래나 벼농사와 관련된 노동요가 주를 이루고, 종류별로도 잘 전승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모판을 만들기 전에 논에 물을 대면서 두레질을 하는데, 이때 「물두레질소리」를 한다. 「물두레질소리」는 육자배기 선율에 흥얼거리면서 혼자 부르는 소리도 있으나 대개 한 사람이 “하나요 둘이요……”하면서 세어나가면 상대편 사람이 “어이” 하면서 받는 소리를 한다.
 
모판에 뿌린 볍씨가 자라 이종할 때가 되면 모심기를 하기 전에 모판에서 모를 뽑아 한 단씩 묶는 ‘모찌기’를 한다. 이때 「모찌기소리」를 부른다. 이 지방의 「모찌기소리」는 긴소리와 자진소리가 있다. 둘 다 3분박 4박자로, 긴소리는 자진중중모리장단에 맞고 자진소리는 느린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첫새벽에 일어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오헤라 사뒤여” 하며 일정하게 받는데, 이는 긴소리나 자진소리나 같다. 「모찌기소리」의 선율은 두 소리가 다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모찌기가 끝나고 한 단씩 묶은 모단을 모심기할 논에 듬성듬성 던져놓으면 모꾼들이 들어가 주위의 모단을 한 단씩 들고 모를 심기 시작한다. 이때 ‘모방구’라고 하는 농악북을 치며 「모심기소리」를 한다. 이 지방의 「모심기소리」는 3분박 4박자로 느린자진모리장단에도 맞고 자진타령에도 맞는다. 이 소리는 리듬이 특이하여 ‘덩덕궁이장단’ 또는 ‘모방구장단’으로도 불린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울러보세 울러보세”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헤 헤 헤루 사뒤요” 하며 같은 장단에 받는다. 「모심기소리」의 자진소리는 속도만 빠를 뿐 긴소리와 같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으나 ‘꺾는목’이 심하지 않으며 「농부가」로 알려진 「모심기소리」와 조금 다르다.
 
옮겨 심은 모가 어느 정도 자라면 김매기를 하는데, 이 지방에서는 주로 열흘 정도 간격으로 세 번 김을 맨다. 초벌을 맬 때는 처음에 긴소리를 하고 끝에 「덜래기소리」나 「절사소리」로 빠르게 몰아 끝낸다. ‘긴소리’는 선소리꾼이 편한 가락으로 느리게 “불러보세 에헤에 이허히 불러불러 이십전에 배운노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일제히 “그렇지요” 하고 받는다. 다시 선소리꾼이 “아아 이히 히허 허허” 하는 구음을 하다가 낭송조로 “이십전에 배운노래 삼십안에 불러보세” 하면 일꾼들이 “아리시구나 오호이 헤헤 헤헤이 호어히 헤에아하 마뒤여” 하며 길게 받는다. 이 소리의 구성음은 ‘솔·라·레·미·솔·라’로 되어 있고 선율이 육자배기토리와 다르다.
 
두벌을 맬 때는 「절사소리」를 하는데, ‘두레굿’이라 하여 농악으로 반주한다. 이 지방의 「절사소리」는 2분박 5박자로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절사소리는 어디를 갔나”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같은 장단에 “어헐사하 저리시고나”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이루어진다.
 
두벌매기 때 주로 부르는 노래는 「덜래기소리」인데, 긴소리와 자진소리가 있다. 「덜래기소리」의 긴소리는 3분박 4박자로 중중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풍년이왔네 풍년이왔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오호 헤야 덜덜래기요”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하루종일 김을 매고 해질녘이 되면 「덜래기소리」 자진소리를 한다. 박자는 긴소리와 같으며 빠르기만 조금 빨라 느린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흥이났네 흥이났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이 “허야 허야 덜덜래기야” 하며 같은 장단으로 받는다. 「덜래기소리」의 구성음은 경토리와 비슷하나 선율의 특징은 육자배기토리와 같다.
 
세벌김매기는 ‘만드리’라고도 한다. 이때는 주로 「절사소리」를 하며 때로 「뜰모리」를 부르기도 한다. 「뜰모리」는 원래 전문 소리꾼들의 소리였는데, 이 지방에서는 김매기소리에 포함되어 불린다. 3분박 4박자로 중모리장단에 가깝지만 간혹 장단이 늘어나서 불규칙하게 박자를 이어가기도 한다.
 
선소리꾼이 한 장단 반에 “저건너 갈미봉 비몰아오네” 하고 메기면 일꾼들은 반 장단에 “어리사” 하며 받고, 선소리꾼이 다시 “우장 삿갓을 허리에 매고” 하며 한 장단 반에 메기면 일꾼들은 다시 “저리사” 하며 반 장단을 받는다. 선소리꾼이 두 장단에 “우장 삿갓을 허리에 매고” 하며 메기면 일꾼들이 “무슨 소린줄 네어헤 몰라 어리사 저리사 하하 저리사” 하고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경토리와 비슷하다.
 
저녁에 김을 다 매고 논둑에 올라서서는 「뜰모리」나 「돈들타령」을 부르면서 논다. 「돈들타령」은 「뜰모리」와 같은 전문 소리꾼의 소리이던 것이 이 지방의 김매기소리에 포함되어 불린다. 「돈들타령」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면서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3분박 3박자로 세마치장단에 맞지만, 간혹 3분박 4박자의 장단이 끼여 불규칙하게 장단이 이어진다.
 
선소리꾼이 네 장단에 “골골이 삼천석 실어를 갖고 영광의 법성 어에라 돈실러가 헤 헤에 에라 돈절인가 소식이 좋아 어어 어허 돈절인가” 하고 메기면 다른 사람들은 같은 장단에 “돈실러가세 돈실러가세 영광의 법성 어어에라 돈실러가 헤 헤에 에라 돈절인가 소식이 좋아 어어 어허 돈절인가”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은 육자배기토리와 경토리가 섞인 형태를 보여준다.
 
이 지방에서는 ‘만드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서 그해 벼농사에 장원을 한 집의 수머슴을 소에 태우고 놀면서 장원질을 한다. 이때 ‘에롱데롱’이라는 소리를 한다. 이 소리는 3분박 4박자로 느린중중모리장단에 맞는다. 선소리꾼이 한 장단에 춤을 추며 “풍년새 운다네 풍년새 울어” 하고 메기면 농군들이 같이 춤을 추며 한 장단에 “에롱데롱 기와자 좋네”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이 소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볏단을 지어 나르면서는 「등짐소리」를 한다. 이 소리는 자유리듬으로서 받는소리는 “상사뒤요 뒤요”로 일정하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15. 15. 산업교통

나주시를 관류하는 영산강을 따라 나주평야가 발달해 있다. 비옥한 토지와 기후, 수리가 농업에 적합해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지역에는 나주호·영산강이 있어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16년 기준 경지면적 21,959ha 가운데 논과 밭의 비율은 2:1이다. 2016년 기준 농가수는 10.327호로 나주시 전체의 20.1%이다. 경지정리는 11,500ha/89.7%에 이른다.
 
나주에서 생산되는 쌀은 옛날부터 품질이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7년 54,590ha, M/T를 생산했다. 특히, 영산강 간척지에서 생산된 동강면 간척미는 뛰어난 밥맛과 영양가로 품질인증을 받아 판매될 정도로 그 명성이 높다. 그 밖의 주요 농산물은 보리·조·수수·옥수수·콩·팥·고구마·감자 등이다. 또, 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일이 예로부터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특히, 배와 복숭아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과일류 외에도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원예와 채소재배가 성하여 인근의 광주와 목포 등의 도시는 물론, 서울·대전·부산까지도 출하되고 있다. 1977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머스크멜론은 맛과 향이 뛰어나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수출되어 농가소득의 증가에 도움을 준다.
 
또, 왕곡면에서는 특용작물로 생강이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나주시는 전국 제1의 배산지이며, 금천면·노안면·왕곡면·봉황면·세지면 등이 주요 산지로 손꼽힌다. 동수·오량·봉황 등 3개 농공단지가 1990년에 준공되었다.
 
한편, 군내에는 47개의 광구가 가동되어 납석·고령토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공산면 덕음금광에서 생산되던 은은 일제 때 이후 채굴되지 않았고, 금은 198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생산량이 거의 없다.
 
또한, 품질이 좋은 인초 돗자리의 특산지로서, 1986년에는 영산포에 한일합작으로 인초돗자리회사가 설립되어 연간 1억 원 이상의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수공예인 나주반(羅州盤)과 부채도 지방특산물로 제조, 판매되고 있다. 세지면에서 생산된 토하젓은 조선시대 궁중진상품으로 유명하다.
 
한때 영산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상류 광탄(廣灘)까지 거슬러 올라와 장어(구진포 장어)·숭어·명란(明卵)·해파리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의 축조로 예전과 같지 않다. 내수면 양식업으로 남평읍에 뱀장어와 미꾸라지 양식장이 있으며, 나주에 통조림공장이 있다. 중소기업 육성과 농가소득 보장의 일환으로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가동 중이다.
 
상업활동은 시장과 기존 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장으로는 2개의 상설시장과 10개의 정기시장이 있다. 한때 육로와 수운이 편리한 영산포시장이 유명했으나 1975년 영산강 하구언 축조로 목포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끊기고 육로교통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상설시장은 옛 나주읍의 중앙시장과 옛 영산포읍의 영생시장이다. 정기시장으로는 나주장(4·9일)·영산포장(5·10일)·동창장(2·7일)·반남장(4·9일)·공산장(1·6일)·동강장(3·8일)·다시장(3·8일)·문평장(1·6일)·남평장(1·6일)·봉화장(4·9일)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다시장은 맛이 좋기로 유명한 다시쌀을 거래하는 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평장은 소의 거래로, 반남장은 돼지의 거래로 유명하다.
 
 
 
 
호남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와 함께 개통되었다.
2009년 7월 24일 호남고속선 오송역 ~ 광주송정역 구간 착공.
2012년 5월 1일 전라선 KTX 고속 운행 개시.
2014년 6월 30일 수색직결선 개통으로 인천국제공항행 직통 KTX 운행 개시.
2015년 4월 2일 호남고속선 오송역 ~ 광주송정역 구간 개통.
2017년 1월 2일 호남고속철도 2단계 호남선 고속화 공사 시작
 
호남고속철도 나주역을 이용한 승객은 승차 294,835명이고, 하차 승객은 285,819명으로 총 580,654 명이다. 일평균 1,586명이다 (2016년 통계)
 
 
 
영산포역 연혁
- 1913년 7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개시
- 1951년 5월 3일 역사소실
- 1969년 12월 18일 구역사 준공
- 1984년 12월 30일 신역사 준공
- 2001년 7월 10일 폐역
 
‘나주 남평역사’ 등록문화재 제299호 2006.12.4. 지정.
 
영산포역의 수송 사진(나주 시민의 소리)
 
1940년대 통학기차의 모습(영산포)
 
나주 영산포 철도공원에 있는 증기기관차.
 
 
 

16. 16.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光州全南共同革新都市

Gwangju & Jeonnam Collective Innovation City
 
정부의 공기관의 지방분산정책에 따라 탄생된 혁신도시 중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공동으로 유치한 신도시이다. 통칭 ‘빛가람 혁신도시’라 불리며 빛가람이란 명칭은 2007년 공모전을 거쳐 선정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광(光, 빛)주와 영산강(江, 가람: 강의 옛 우리말)에서 따온 것이다.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에서 공동으로 유치했기에 원래 2곳으로 분산될 예정이던 기관이 같이 들어서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건설되었으며, 2014년 2월 24일 혁신도시 지역에 빛가람동이 신설되었다.
 
이 도시는 전남권에서 예외적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읍·면·동급 지역이다. 2014년 2월에 첫 입주민이 입주한 이후, 1년이 지난 2015년 2월에는 인구가 5,000명으로 증가하였고, 동년 9월에는 10,000명 - 16년 4월에는 15,000명, 동년11월에는 20,000명을 돌파하는 등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도 일일 평균 30~40명 가량 전입이 이어지고 있다. 2018년 4월 2일 기준 주민등록 기준 인구는 28,898명이다.
 
이러한 혁신도시의 인구 증가로 인해 나주시는 12년 만에 다시 인구 10만을 회복했고, 전라남도에서 이례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기초자치단체가 되었다. 2018년 4월 기준으로 11만 명이 넘어 매일같이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전력 전남 나주 본사 전경
 
한국농어촌공사 전경
 
 

17. 17. 미래의 나주시

나주시가 최근 내놓은 '나주 2025 미래발전 전략 수립 용역'에 따르면 나주 인구는 18만 명에 이르고, 3조3천억 원을 투자해 4만3천 개의 일자리 창출되며, 관광객 5백만 명 시대 도래의 청사진이 제시됐다.
 
'생태환경 도시 조성'과 '에너지산업'영향으로 인구가 많이 늘어, 로컬푸드 직매장 매출액이 27억 원에서 250억 원으로 상승하고, 귀농·귀촌 가구가 256가구에서 약 1,500가구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청년 저가 임대주택 2,500세대를 보급하고 교육만족도가 5%에서 50%로 증가 기대됐다.
 
또한 나주를 5개 권역으로 나눠 동부생활권인 남평읍, 산포면, 금천면, 빛가람동은 쾌적한 정주환경과 에너지 클러스터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서부생활권인 동강면, 공산면, 왕곡면, 반남면은 마한역사문화와 기업혁신지구로 집중 육성하며, 남부생활권인 세지면, 봉황면, 다도면은 스포츠 헬스투어 중심의 관광농업지구로 육성한다고 계획했다. 북부생활권인 문평면, 다시면, 노안면은 역사문화관광과 스포츠마케팅 지구로 지정하여 역사와 스포츠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중심생활권인 이창동, 송월동, 영산동, 영강동, 금남동, 성북동은 중심지원기능과 역사도시재생지구로 지정하여 집중 육성할 것을 제안했다.
 
혁신도시 개막,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 중앙부처 정책동향에 따른 변화에 의하여 나주시는 전국에서 으뜸가는 '시민과 소통하는 행복한 나주 '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나주시청
 
 

18. 18. 관광

나주시는 호남의 고도(古都)로서 목사골로도 불리며, 문화관광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동문 밖 석당간, 북문 밖 삼층석탑, 나주향교 대성전, 철천리의 칠불석상과 석불입상, 반남면의 고분군·사마교비·정수루·미천서원 등이 있다. 명소로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과 영산포 가야산 기슭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절벽이 영산강의 푸른 물과 장관을 이루는 앙암(仰巖)바위, 그 부근에 있는 창랑정(滄浪亭) 등이 대표적이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다시면의 구진포(九津浦)는 영산강의 명물인 장어로 유명하다.
 
금성산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고 단풍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우며, 녹차와 난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광주의 무등산과 남쪽으로 영암의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의 푸른물과 확 트인 나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기슭에는 다보사(多寶寺)를 비롯해 심향사·태평사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암자가 있다.
 
나주호와 불회사와 운흥사 등은 문화유적 답사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영산강 상류의 지석강에는 팔각정과 울창한 송림, 맑고 깨끗한 물이 어우러져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나주배박물관은 배의 재배단지인 금천면 석전리에 위치하며, 하얀색의 배꽃이 눈부시게 만발할 때면 장관을 이룬다.
 
 
 

19. 19. 음식

나주는 영산강에서 어획된 물고기로 만든 어팔진미(魚八珍味)와 남새로 만든 소팔진미(蔬八珍味)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나주의 토속음식으로는 원래 서민들이 즐기던 국밥이 ‘나주곰탕’이라 하여 새롭게 명성을 얻고 있다.
 
나주 영산포 홍어
 
나주 구진포 민물장어
 
 
남도에서는 홍어애를 넣어서 보리국을 끓였다. 홍어애보릿국은 나주지방의 대표적인 춘궁기 음식으로 겨우내 곡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을 때 아직 자라지 않은 보리 싹을 캐어서 국을 끓여 배고픔을 달랬다.
 
 
통배추김치에 새우젓국을 부어 만든 남파고택의 '반동치미는 무와 배추, 사과, 배, 생조기 굴, 청각 등 20여 가지의 재료가 들어가 독특한 동치미 맛이 난다.
 
 

20. 20. 역사 인물

 
1. 조한룡(曺漢龍, 1340∼1414)
조한룡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승려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세염(洗染)‧입록(立祿)‧청한(淸閑)‧도연(道衍)이다. 고려 시중(侍中) 조정통(曺精通)의 셋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조씨 집안은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복야(伏射)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으로 8대를 연이어 국가교육기관[國學]에서 학문을 탐구했는데 모두 태도가 독실하고 성적이 탁월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맏형 우태(右台:右議政) 조경룡(曺景龍)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어 1357년(공민왕 6)에 형 판서(判書) 조응룡(曺應龍)‧제 참의(參議) 조변룡(曺變龍)‧감사(監司) 조현룡(曺見龍) 등 5형제 모두 과거 급제하여 ‘조씨오룡(曺氏五龍)’이라 불렀다. 5형제는 경룡(景龍)· 응룡(應龍)· 한룡(漢龍)· 변룡(變龍)· 현룡(見龍)이다.
 
불회사 나한전 원진국사 영정
 
공민왕 4년(乙未: 1355)에 실시한 과거에서 경룡과 한룡이 다 같이 최고 점수를 받아 갑과(甲科)에 뽑히고 이어 공민왕 6년(乙酉, 1357)에 나머지 세 형제가 모두 높은 점수로 과거에 급제한. 임금은 “조씨집 다섯 용[曺氏五龍]이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니 고금에 드문 일이다.” 칭찬하고 쌀과 술, 고기 등을 하사하는 한편 3일간 풍악(風樂)을 잡히고 거리를 돌며 축하행진을 하게 했다.
 
조한룡은 처음 상서(尙書)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글을 옷자락에 쓰고, 고려 조정에서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이었던 서견(徐甄)과 함께 금천(衿川)에서 숨어 살다가 나라 망한 설움을 함께 가끔 시를 지어 망국의 한을 달래곤 했다.
 
이후 불교에 입문하여 세염선사(洗染禪師)의 법호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참의(參議)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황제로부터 보의장군(保義將軍)의 명예작위를 받았다. 이에 1404년(태종 4,甲申年)에 태종은 예조좌랑(禮曹佐郞) 계단(季摶)에게 명하여 봉황산(鳳凰山) 효자동(孝子洞)에 ‘여충선효(麗忠鮮孝)’라는 보의장군효자비(保義將軍孝子碑)를 세우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중이 되어 도갑산(道甲山)을 거쳐 불회사(佛會寺)로 들어가 1413년(태종 13) 2월 17일에 영남의 갑부 김상(金相) 집안의 시주를 얻어 불회사를 삼창(三倉)하고, 화순(和順) 만연사(萬淵寺) 법당을 중건한 후에 원정국사(元禎國師)의 법호를 얻었다.
 
1414년(태종 14)에 입적하여 세조대왕이 청간(淸簡)의 시호를 내렸다.
 
조한룡은 효자로 유명하여 왕이 그가 태어난 곳을 ‘효자리’라 이름짓고, 조선시대 세종때 여충선효(麗忠鮮孝)라는 ‘효자리비’를 세웠다. 1971년에는 그의 고향에 ‘충효사’라는 사우를 건립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창녕조씨오룡사적기(昌寧曺氏五龍事蹟記)』(1990)
全羅南道誌, 羅州郡誌, 朝鮮寺刹史料(상)
 
화순(和順) 만연사(萬淵寺) 대웅전
 
 
2. 나대용 (羅大用, 1556년 ~1612년)
 
나대용의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시망(時望)이다.
 
조선 명종 11년 7월 25일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서 태어났다. 선조 16년(1583)에 2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있다가, 32세 때인 1587년(선조 20)에 사직하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나대용은 자신이 거쳐 하는 방 바람벽에다 거북선의 설계도를 수없이 그려 붙여 가며 거북선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재목을 베어 왔고, 밤에는 거북선 모형을 제작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대용은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 수사(全羅左水營水使)로 있는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그동안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며 건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크게 기뻐하여 나대용 장군을 부관으로 삼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전구(戰具)의 준비 계획과 추진에 참여시켰다. 이에 임진왜란 때 거북선 3척을 처음으로 진수하였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충무전서(忠武全書)》 《난중일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대용은 발포만호진의 군관이 되었고, 거북선을 타고 당포해전에 처음 출전하여 왜군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등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항상 앞장을 섰다.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遊軍將)을 맡아 적선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유탄을 맞았으나 자신이 직접 칼끝으로 살에 박힌 탄환을 뽑아내며 분전했다고 한다. 부상을 당하고서도 사천해전과 한산도해전에 참가했고,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는 삼도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크게 일조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나대용을 장하게 여겨 조정에 아뢰기를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니 나대용의 공이 가장 으뜸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94년(선조 27)에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이 인정되어 강진(康津)현감으로 임명되고, 이후 금구(金溝)·능성(綾城)·고성(固城)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남해(南海)현령에 제수되어 성능이 우수하고 쾌속선인 해추선(海鰍船)을 만들기도 했다. 이듬해인 1611년(광해군 3)에는 경기도 수군을 관장하는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입은 부상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광해군 4) 1월 29일 향년 57세로 별세하였다.
 
▲ 나대용장군 생가 및 묘소 (羅大用將軍 生家 및 墓所)
지정번호 : 전남도 기념물 제26호
지정 : 1977년 10월 20일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472
규모 : 정면4칸, 측면1칸, 초가지붕
 
나대용의 생가는 남향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이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3km 정도 떨어진 산록에 있다.
 
 
 
3. 김천일(金千鎰, 1537년~1593년)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김윤손(金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이감(李瑊)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趙憲)과 호서 지방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에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해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해 전투 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양천(陽川) 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했고 매일같이 강화 연안의 적군을 공격했으며,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원릉(圓陵) 도굴 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하기도 하였다.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해 구휼하였다. 전투에서도 경기수사·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해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00여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健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4. 신숙주(申叔舟,1417∼1475)
 
신숙주는 태종 17년(1417) 음력 6월 20일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高靈縣)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申成用)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申德隣)은 전의 판서(典儀判書)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이었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선생은 세종 20년 (1438)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ㆍ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종 25년(1443) 통신사(通信士) 변효문(卞孝文, 1396~?)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치고 귀국 도중 대마도에 들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였다. 이후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중국 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려고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함께 유배 중이던 명나라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내왕하였다. 이 때 언어학자인 황찬은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세조와는 이전부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계유정난 과정에서도 세조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그는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여섯 분의 왕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을 비롯한 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
 
신숙주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동료 문인인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한탄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장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의미의 주자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申孟舟)·신중주(申仲舟)·신숙주(申叔舟)·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손이 된다.
 
신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 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와 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증 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시문(詩文)을 잘 지어서 묘사를 잘 하고 분방하였다. 그는 일찍이 탐진강과 영산강의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詩)와 부(賦)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初試)에 장원한 뒤, 복시(覆試)에도 장원하였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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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년(세종 24)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신숙주가 이에 뽑혔다.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琉球語)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書狀官兼從事官)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1443년에는 일본의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그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당시 죄를 짓고 만주의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갔다. 신숙주는 황찬을 만나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고, 이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신숙주는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신숙주선생묘(申叔舟先生墓), 경기도기념물 제88호
 
묘 소재지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 163번길 34-39로 봉분은 쌍분이며 무송군부인(茂松郡夫人) 윤씨와의 합장묘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1897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과 향로석, 그 앞에 장명등이 1기씩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하단 우측에는 이승소(李承召, 1422~1484)가 글을 지어 성종 8년(1477)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묘역의 하단 좌측에는 1917년 중건된 신도비가 있으며, 1971년 한글학회에서 세운 한글창제사적비가 위치하고 있다.
 
한글창제사적비
 
 
5. 백호 임제(林悌, 1549~1587)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겸재(謙齋), 본관은 나주이다. 남인의 당수 미수 허목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조선이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죽은 뒤 곡을 하지 못하게 했다. 저서로 <백호집> <사화가> 등이 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 선생의 문학사상 등을 기리고자 2013년 4월13일 건립한 백호문학관이 2014년 8월 전문박물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총사업비 33억원이 투입된 문학관은 대지 3천875㎡, 전체면적 387㎡, 지상 3층 규모로, 수장고와 집필실, 문학사랑방, 전시관을 갖추고 학예연구사를 확보하여 전라남도 실사를 거쳐 제2종 박물관(전남-제30호)으로 정식 등록했다.
 
상설전시관에는 백호 선생의 생애와 문집, 젊은 시절 복암사에서 공부했던 석림정사 현판 친필글씨, 선생의 문집인 겸재유고 복제본 등이 전시돼 있다.
 
 
6. 정가신(鄭可臣,1224~1298)
 
본관은 나주(羅州). 전라도 나주 출생. 초명은 정흥(鄭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정가신은 충렬왕∼충선왕대 주로 문한관을 역임하며 문장을 떨쳤고 외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들로는 정탁(鄭倬)·정전(鄭佺)·정길(鄭佶)·정엄(鄭儼)이 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여러 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5품)에 임명되었다. 1280년(충렬왕 6)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承旨)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충렬왕 16)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했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 정2품)에 임명되었다. 1294년(충렬왕 20)에는 원나라의 성종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을 통해 고려가 귀부한 연월을 물어오자 정가신이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충렬왕 22)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육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해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 종1품)에 임명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곧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별세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해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가 있어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과 같았다고 한다. 고려 왕건 5대조인 호경대왕(虎景大王)부터 제24대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찬집하였다.
 
정가신의 열전(列傳)이 『고려사』권105에 실려 있다. 충선왕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설재서원(雪齎書院)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93호이다. 쌍계정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안에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이 있다.
 
쌍계정, 사성강당(四姓講堂)
 
푸조나무, 400년, 고유번호(15-4-9-7), 2005.5.23. 보호수 지정
 
 
7. 정지(鄭地,1347~1391) 장군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초명은 정준제(鄭准提)이다.
 
충목왕(忠穆王) 3년(1347) 나주(羅州)에서 아버지인 이(履)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지는 19세 때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인 1366년(공민왕 15) 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으로 중낭장으로 전라도안무사로 발탁되었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하고, 이듬해 다시 영광·광주·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순문사가 되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우왕 9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정지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朴頭洋)에서 대치하였다. 정지 장군은 진포해전 관음포(觀音浦)대전-남해대첩에서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고 왜구를 대파했다. 관음포 해전은 3대첩의 하나이다. 이 때 최무선의 화포를 배에 장착을 처음으로 해 고려 수군의 획기적인 증강하는 계기가 이때 이루어진다.
 
고려말의 문인 정이오(1354~1434)는 시를 지어 정지를 칭송했다.
 
망운산 아래에서 바람에 가는 돛폭을 바라보니
작은 배들이 쉴 사이 없이 동서로 오가는구나
영웅이 남긴 그 날의 일일랑 묻지 마소
지금도 사람들은 나라 안에 제일의 공훈을 기뻐하노니
 
望雲山下望帆風 東去西來舟乍孟 通莫問英雄當日事 至今人喜說元功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참하였다. 이 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공으로 2등 공신에 봉해졌다. 1391년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나 광주에 내려와 스스로 호를 퇴암이라고 하고 은거하였다. 정지의 시가 동문선東文選에서 전하고 있다.
 
관아에서는 아직도 잔치를 벌이는 풍속이 있는데
동네 늙은이들은 여기저기서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일하는 관리들은 탁주와 닭고기로 나를 위로하면서 권하는 데
밤이 깊어 동계에는 남루한 옷의 늙은이들이 턱을 괸 채 졸고 있네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에는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 서있다. 남해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었다. 큼직한 자연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소박한 모습의 탑으로, 왜구로부터 남해지방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정지석탑(鄭地石塔 경남문화재 자료 제42호)
 
그 뒤 광주(光州)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별세하였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에 있는 사당 경열사(景烈祠)에는 고려 말의 무신 정지를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본래 경렬사는 1644년(인조 22) 지금의 동구 동명동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거되어 유허비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경렬사는 '정지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부터 현재의 위치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 완공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경내에는 사우, 내삼문, 외삼문과 유물관, 관리실, 경렬사 유허비, 유적정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사당 뒤쪽 언덕 위에는 정지의 묘가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방식의 예장석묘(禮葬石墓)로서 광주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광주광역시에는 광주역에서 농성동 광장까지의 도로를 정지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경열로(景烈路)라고 부른다.
 
보물 제336호 _ 정지장군 갑옷 (鄭地將軍 甲衣)
 
정지가 왜구를 물리칠때 직접 착용했던 갑옷이 후손에 의해 전해져 현재 보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지장군환삼(鄭地將軍環衫)이라 부른다. 여러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갑옷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정지장군연구」 ( 송정현 ,『호남문화연구』25,1997)
「고려말 정지와 최무선의 남해 관음포대첩」 ( 정의연 ,『경남향토사논총』Ⅵ,1997)
문화재청
 
8. 박순(朴淳,1523~1589)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박소(朴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박지흥(朴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박우(朴祐)이며, 어머니는 당악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사암 박순(1523~1589)은 나주 왕곡면 송죽리에서 개성부 유수 박우(朴祐)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광주 서모집에서 성장했다.
 
18세 때(154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어 화담 서경덕에게 수학하고 같은 문인 퇴계 이황과 사귀었다.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사암 박순의 영정, 옥병서원(玉屛書院)
경기도 향토유적 제26호,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박순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선조는 “영상의 사람됨은 송죽같은 절개요 수월같은 정신을 지녔으며 충용한 포부는 온화하고 우아한 천성을 이루었고 맑고 조심스러운 덕은 백옥이 은은히 문채를 떨치는 듯한 분이다”라고 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주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思菴集)』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전고대방(典故大方)
금성지(錦城誌)
사암집(思菴集)
『백사집(白沙集)』 (이항복)
 
 
9. 정개천(鄭介靑,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나주 출신. 아버지는 봉산훈도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씨(羅氏)이다.
 
곤재(困齋) 정개청은 선조 때의 학자로 1529년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 년간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 뒤 산에서 나와, 서울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나주 곡강촌(나주시 동강면)으로 옮겼고, 1570년경에는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에 엄담(淹潭)에 윤암(輪巖)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지만, 수차의 관직 제수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 때 이의 처리과정상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국문을 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평범하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함평 엄담에 건립된 뒤 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으로는 서경덕(徐敬德)과 박순의 이름이 거론되며, 문생들이 400여 명에 달한다.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나덕현(羅德顯)·나덕원(羅德元)·안중묵(安重默)·최홍우(崔弘宇)·정식(鄭湜)·유양(柳瀁)·윤제(尹濟)·정지함(鄭之諴) 등 당시 호남지방의 유력한 가문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주목된다. 그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역사, 역학, 산수, 약학 등 폭넓은 학문을 익혀 저술한 『우득록(愚得錄)』은 국가 경영의 전 분야에 걸쳐 해박한 그의 지식과 경륜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자산서원(紫山書院)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6호로 《곤재 우득록(愚得綠) 목판》, 시비
 
자산서원은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鄭大淸)을 배향하고 있다. 정개청이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616년 건립하였다. 1678년 조정으로부터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설(復說)을 되풀이하였다.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하였고 8·15해방 이후 1957년에 복설된 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정개청 문집 《곤재 우득록(愚得綠)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오막집 한 시렁에 가득한 책만 읽다가
백년도 한 인생 반이 흘렀네
마음 위에 품은 뜻은 현성의 일 뿐인데
세상사람 귀현함을 바라봄이 없소이다.
 
곤재 정개청 선생의 詩 20여 수가 전해오며, 위에 작품은 한국명시 100선에 실렸으며 그의 성품을 잘 나타낸 가작이다. 일생 동안 책만 읽다가 인생의 절반을 보냈는데, 그가 바라는 것은 공자 같은 성인이었다고 전해온다.
 
정개청의 『우득록(愚得錄)』은 334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본편 3책, 부록 1책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1681년(숙종 7)에 허목이 지었다. 본편 3책 중 1~2책은 성리제설(性理諸說)과 서기(序記)가 수록되어있고, 3책에는 상소·제문·서(書)·습유(拾遺)가 실려 있다. 『우득록』의 각판작업은 곤재의 필초본이 숙종에게 보여져 1689년 왕의 특명으로 시작되어 1692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부록은 숙종 29년(1703)에 이뤄졌다. 현재 남아 있는 『우득록』각판은 모두 48판에 불과하여 원래의 총 판수(108매)의 반 정도만 보존되어 있다.
 
부록 상권에는 정개청의 세계와 사실(事實), 하권에는 행장과 허목이 쓴 곤재전(困齋傳)이 수록되어 있다.
 
허목 초상 (보물 제1509호)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현종실록(顯宗實錄),숙종실록(肅宗實錄),기언(記言)
우득록(愚得錄)
 
 
10. 최희량(崔希亮, 1560∼1651)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할아버지는 영릉참봉(英陵參奉) 최영(崔瀛)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최낙궁(崔樂窮, 1506~1579)이다. 큰 체구에 용모가 뛰어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혀 1594년 무과에 급제하고, 당시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 고흥군)으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조37년(1604)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후 최희량(崔希亮)의 시호가 무숙(武肅)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남긴 『파왜보첩』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로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으며, 유저로는 『일옹문집』이 전하고 있다.
 
(崔希亮 壬亂關聯 古文書 - 捷報書目) 보물660-1호, 1979.07.26. 지정
 
 
▲나주 최희량 장군 신도비
종 목 : 전남도 기념물 제53호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369
지정일 : 1981년 10월 20일
규 모 : 높이 280㎝ 비신 높이 245㎝ 비 너비 118㎝
 
 
이 비는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큰공을 세운 최희량 장군의 묘역 근처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비 제목은 해서로 “증병조판서무숙공수성최일옹신도비”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덕은 송치규”인데, 여기에 후일 송치규의 현손인 송지헌이 기록한 “추기”가 첨가되어 있다. 그 “추기”에 기록된 광무 5년(1901) 8월이 곧 이 신도비의 건립 연대이다.
 
그리고 건립자는 최희량 장군의 8세손 참봉 귀한, 9세손 기춘, 기정, 10손 우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 형태는 자연석의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파왜보첩』 보물 제660호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국립나주박물관
1589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흥양(興陽, 지금의 전남 고흥군) 현감으로 있던 일옹(逸翁) 최희량(崔希亮)이 쓴 문서이다. 내용은 전쟁의 성과에 관한 것으로,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과 전라도관찰사에게 보낸 문서와 회답으로 받은 문서를 한데 모은 것이다. 싸움의 현장에서 작성한 것이며,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 보내는 당시의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26㎝, 세로 37㎝이며, 첨산승첩(尖山勝捷)·양강승첩(楊江勝捷)·고도승첩(姑島勝捷)·첨산승첩(尖山勝捷)·남문승첩(南門勝捷)·헌괵주첩(獻馘奏捷)·남당승첩(南堂勝捷)'7매와 전함보첩(戰艦報牒) 3매를 합해 모두 10매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도관찰사지인(全羅道觀察使之印),' '봉사지인(奉使之印)'이 있다. 끝에는 조명정(趙明鼎)·오재순(吳載純)·양주익(梁周翊) 등이 쓴 제발(題跋)이 붙어 있으며, 교지(敎旨)·시호망(諡號望) 등의 고문서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들은 원래 따로 흩어져 있었는데, 최희량 후손인 최기정(崔起廷)이 19절지로 배접하여 하나의 첩(帖)으로 만들었다. 표지에는 최기정이 쓴 '최일옹파왜보첩원본(崔逸翁破倭報捷元本)'이라는 글씨가 해서(楷書)로 씌어 있다.
 
 
교지 보물660-2호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국립나주박물관
최희량(崔希亮)에게 내린 임명교지(任命敎旨) 5건, 증직교지(贈職敎旨) 2건, 최희량(崔希亮)의 부인양씨(夫人 梁氏)에게 내린 증직교지 2건이다.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興陽,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현감으로 있던 일옹(逸翁) 최희량(崔希亮, 1560∼1651)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왜적을 격파한 전과보고 문서이다.
 
시호망단자 보물660-3호
소재지: 전남 나주시 국립나주박물관
 
 
11. 김태원 (金泰元,1870~1908)
 
김태원은 조선 말기의 항일의병장이다. 호는 죽봉(竹峰). 본관은 경주.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별명은 김준(準), 김참봉이었다. 의병장 김율(聿)의 형이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그는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일본군 호남 의병토벌대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때 담양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소(湖南義所)’라고 부대이름을 바꾸어 일진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을 처단하였으며,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다. 1908년 3월 장성(長城)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적 30명을 사살하였으며,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魚登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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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죽봉 김태원 장군 동상
 
광주의 죽봉대로는 광주 서구 농성광장부터 북구 운암고가까지 1.95km의 거리이다. 장군이 일본군의 불리한 군력에 맞서서 계속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장군의 굳건한 신념에 있었다. “병은 정예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거느린 부하는 30~4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예주의를 지켰고, 훈련에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부하인 조경환과 오성술, 전해산이 의병장이 되어 호남의 의병을 계속 이끌었다.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 나주 남산시민공원
 
김태원 의병장이 아우에게 보낸 시
 
 
12. 안성현(安聖鉉, 1920~2006)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안성현은 전라남도 나주 출생이며 고조부는 안광묵(安光默), 종증조부 안경수(安駉壽, 1853~1900)는 대한제국, 조선왕조의 개화파 정치가이고, 종조부 안국선(安國善, 1878.12.5.~1926.7.8.)은 대한제국, 조선왕조의 신소설 작가로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을 발표했다.
 
아버지 안용승(安龍承, 1903~미상)을 따라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도호 음악대학교에서 테너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한 뒤에는 항도여중, 광주사범학교, 조선대 등에서 교편을 잡고 작곡가로 활동했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 〈엄마야 누나야〉가 유명하며, 목포의 항도여자중학교(목포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인 1948년에 동료 교사 박기동이 작사하고 안성현이 작곡한 〈부용산(芙蓉山)〉도 널리 불린다. 이 노래는 박기동이 병으로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며 가사를 쓴 곡으로 가락도 서정적이지만, 구전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호남 지역 조선인민유격대 대원들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안성현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고,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들이 모두 월북하면서 이후 안성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6년 4월25일 사망 당시 북한 《문학신문》의 부고 기사에 따르면 지휘자, 작곡가, 연구사로 일하며 민족음악 발전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남한에 부인 성동월씨와 1남1녀가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김소월 시, 안성현 곡
 
제7회 나주안성현국제현대음악제가 2017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빛가람혁신도시 전력거래소 다슬홀, 나주문화예술회관, 안성현음악홀, 그리고 영산포 원각사에서 다섯 가지 주제로 열렸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시작’을 기치로 2004년부터 음악활동을 펼쳐 온 (사)문화공동체 무지크바움(대표 조기홍)는 “전라도 정도 천년을 기념하고 미래 천년을 시작하는 의미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첫날인 10월 19일에는 혁신도시 전력거래소 다슬홀에서 피아노 사중주 전문연주단체인 ‘앙상블 컨시언스’의 연주로 슈만과 브라암스의 피아노 사중주와 김선철 작곡의 피아노 사중주를 위한 ‘부용산’이 연주되었다.
 
22일에는 안성현음악홀에서 강윤숙 재즈트리오와 독일 아코디언 연주자 필립 에라코비치의 재즈&아코디언 연주가, 23일에는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 독일 앙상블 S201의 다양한 독일 현대음악이 펼쳐졌다.
 
24일 5대의 피아노에서 만들어지는 웅장한 피아노 앙상블 연주회가 10명의 피아노 꿈나무들의 연주, 영산포 원각사에서 기타와 미디어아트의 무대로 2명의 기타리스트 서만재, 전장수와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씨가 함께 무대를 꾸몄다.
 
이번 음악제는 나주 남평 출신 작곡가 ‘안성현’을 기리기 위해 그가 작곡한 ‘부용산’을 주제로 김선철 작곡의 피아노 4중주를 위한 ‘부용산’, 부용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나석주의 7인 연주자를 위한 ‘침전’, 그리고 성용원의 다섯 대 피아노를 위한 ‘부용산 아라리’ 등 다양한 창작곡이 선보였다.
 
“천년고도 나주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이 공동작업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이를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보며 세계적인 예술가들과의 유대관계를 가지고 21세기 나주를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음 시키는 발판을 놓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주 지석강변에 있는 안성현 선생 노래비
 
목포여고(옛 항도여중) 교정에 세워진 부용산 노래비
 
 
13. 김철(金哲, 1890~1969)
 
3.1만세운동에 앞장 선 독립운동가. 본관 김해, 본명은 복현(福鉉), 호는 하산(何山), 한말의 창의사 창곤(蒼坤)의 다섯째 아들로 1890년 10월7일 나주시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창곤은 단발령에 항의하여 1896년 2월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을 규합 동헌을 습격해 참서관 안종수와 순검 2명을 처단하고 악질관리들을 가두는 한편 의병들을 규합하여 북상을 준비하다가 국왕의 해산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후 일본군에 처형당한 지도자적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 광주로 이거하여 광주에서 성장 활동하였다. 3.1운동의 조직을 위해 최흥종(崔興琮)장로와 함께 전남과 광주대표로 선임되어 서울에 올라가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광주로 돌아와서는 국기열(鞠琦烈), 강석봉(姜錫峰), 한길상(韓吉祥), 김강(金剛), 최한영(崔漢泳), 남궁혁*南宮赫)등 동지들을 규합하고 평소에 교유하던 삼합양조장팀이란 독립운동단체와 합세하여 사전에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고 광주 작은 장날인 3월 10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이 운동의 주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그냥 돌려보내라. 내 이름은 김철이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테면 해봐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김복현은 이때부터 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난 후에도 감시를 피해 나주, 전주, 목포, 영암 등지에서 암암리에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일정에 다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단식투쟁 끝에 풀려났다. 1933년 2월 큰아들 재호(在浩)를 중구에 보내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시키고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의 외동딸과 결혼시켰다. 재호는 1938년 산서성(山西城) 염석산(閻錫山)부대에서 항일전쟁에 크게 공을 세웠다. 하산(何山)은 50세 되던 해에 영암 신기리에서 광복을 맞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고, 전준이 해산된 뒤 인민위원회에서도 부위원장 직을 맡았으며, 46년에는 신민당 전라남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군성의 탄압과 내부의 분파 투쟁에 염증을 느껴 이선으로 물러났으며,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고 고문을 맡아 마지막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5.16군사 쿠데타 이후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4. 나상집(羅相集, 1870~1910)
한말 의병장. 이름은 성화(成化), 호는 학산, 상집은 자이며 나주 왕곡면 신포리 방아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1907년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을 규합, 전수용(全垂鏞)·김동신(金東臣) 등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한말의 풍운에 항상 나라를 걱정하고 토적보국(討賊報國)을 꾀하다가 1908년 삼향(현재 무안군 삼향면에서 기병하였다. 그리고 삼향과 반남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분소를 습격하여 초병을 참살하고 총검과 탄환을 노획했으며, 나주읍에 있는 적의 초소를 습격하여 초병을 교살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는 등 크게 전과를 올린 뒤 왕곡면 신포리 학산 계곡에 무기 제조창을 설치하여 이문선(李文善)으로 하여금 창과 칼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적을 봉의산(鳳儀山)으로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고 우군을 모두 집합시키니 4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추대에 의해 주장(主將)이 되고, 부장(副將) 정인민(鄭仁珉), 호군(犒軍) 정두면(鄭斗勉)), 도집사(道執事) 양재룡(梁在龍), 종군(從軍) 안낙삼(安樂三), 도서기(都書記) 양준호(梁俊浩), 운량(運糧), 신학경(辛學敬), 이교민(李敎珉)등으로 부대를 편성, 나주읍에 있는 일본군의 본영을 공격하여 대전과를 거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막원에서 지원 오던 일본군과 마주쳐 전투 중 부상을 당하였으나, 일본 병사 십여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에 일본군 본영은 3개 연대 병력을 동원하고 야포를 쏟아대며 공격하였는데 결국 나상집은 부하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1910년(융희 4) 광주 옥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말 의병투쟁은 을미사변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만행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폭발해 그 이듬해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펼쳐진 항일독립전쟁이었다. 항일투쟁에는 양반 유생 군인 승려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일제는 의병 토벌을 위해 1907년부터 이듬해까지 육군 9개 사단에서 선발된 9개 연대와 기병 1개 연대를 포함한 6개의 특수부대까지 동원했고, 1909년에는 보병 2개 연대를 증파했다. 1907년 12월부터 1년 동안 일본 경찰이 의병 토벌에 관여한 것만 봐도 의병 토벌 1천976회, 사망자 5천721명, 포로 1천81명에 이르렀다.
 
남한대토벌 작전에 항전한 호남항일의병장, 1909년, 독립기념관 소장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송병문, 오성술, 이강산, 모천연, 강무경, 이영준
 
 
 
15. 나월한(羅月煥, 1912 ~ 1942)
 
나월환(羅月煥, 1912년 10월 14일 ~ 1942년 3월 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송죽(松竹)이다. 나주에서 태어난 나월환은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고 군관학교 교수와 중국군 헌병장교로 근무했다.
 
1939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고, 잡지 한국청년을 발행했다. 후에 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어, 나월환 선생은 제5지대장 및 정모제5분처 주임위원직에 있었다.제5지대 대원을 파견시켜 공작을 하면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의 교육 감독 및 지원을 했던 나월환은 1942년 변절자 박동운 등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4년 9월 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나월환 선생을 2014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내달 1일부터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관련자료 16점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29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1912년 10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건너가 박열과 교류하며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받아들였다. 이후 1930년 중국 상하이로 간 선생은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 군사훈련을 받은 뒤 중국군 헌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적 능력을 키워갔다.
 
또 1939년 11월에는 류저우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충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했으며 ‘한국청년’ 발행과 ‘아리랑’ 연극 공연 등을 통해 한중공동항일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고 그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해 오자 선생은 합류를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됐고, 선생은 제5지대 대장 등을 맡아 일본군 점령지역을 무대로 첩보 및 유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을 환영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16. 이항발(李恒發, 1891~1957)
 
이항발의 별명은 이시우(李時雨)로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1918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사회운동을 벌이다가 1919년 4월 징역 2년형을 받았고, 그해 10월 전라북도에서 이채우(李採雨)·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잡혀 조사를 받았고, 그 뒤 계속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1921년 2월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22년 7∼11월에 조선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4회에 걸쳐 노동대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조선인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제에 대하여 격렬한 항일강연을 하였다. 1923년 1월 조선노동대회에 가입하여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유노동자조합을 조직하고 상임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1924년 10월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연락부를 담당하였고, 1926년 1월 경성노동회의 상무위원으로 무안군의 소작권쟁의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급파되었으며, 그해 2월 이래 전라남도 나주자유노동조합 및 나주농민조합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 위원, 1930년 11월 신간회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나주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원 약 200명을 규합하여 사회주의운동을 목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7월 조선청년동맹과 중앙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활약하던 중 잡혀 1933년 4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34년 10월 출옥한 뒤 사상을 전향하였고, 1936년 2월 사상전향자 친일단체인 백악회(白岳會)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백악회를 확대 개편하여 조직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검사장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행적을 남겼다.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실이 드러나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친일단체 부문에 포함되었다.
 
대법원 특별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2015년 4월 23일 이항발의 손자가 국가를 상대로 "서훈취소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동아일보』 (1922.9.4,10.10,10.15)
광주지방법원판결문(光州地方法院判決文)」 (1933.4.8)
「경성지방법원판결문(京城地方法院判決文)」 (1921.2.15,1923.1.16)
 
'전남 영산포 선거유세(48.5.8)'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나주 초대 제헌국회의원 당선은
나주갑 이항발(李恒發) 무소속,
나주을 김상호(金尙浩) 한국민주당
 
 
17. 김만애(1907~1982)
 
김만애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샛골나이 초대 기능보유자이다.
나주 샛골나이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소재지인 동당리 일원에서 직조되고 있는 전래의 고운 무명베를 일컫는 말이다. 샛골은 이곳 동당리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고 나이는 길쌈을 뜻하는 말이다. 샛골나이라는 명칭은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당시 복식사학자 겸 민속학자인 석주선(1911~1966) 박사가 붙인 이름으로 일반적으로는 셋골 세목이라고 알려져 있다.
 
시어머니와 함께 목화씨를 골라내는 김만애 기능보유자(1964.7.4. 지정)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문헌에 백첩포(白疊布, 白氎布)로 명명된 면직물을 고구려와 신라에서 제직하고 중국에 예물로 보낸 기록이 있어 한반도에서의 면의 재배와 제작의 역사도 거의 2,000여 년을 상회함을 알 수 있다.
 
심연옥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는 면직물의 기원·전래와 관련, “문익점이 면 종자를 유입하기 전에 국내에서 면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며 “면직물문화 발상지인 인도나 목화 재배에 적합한 아열대 환경이었던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 전래돼 우리 풍토에 맞게 품종을 개량해 토착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의 사서 “<한원(翰苑)>에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는 구절이 나오고,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경문왕조(869년)에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布)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당시 백첩포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직물은 아니며 외국과의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등 극히 귀하게 사용된 직물이었는데, 고려 시대로 가면서 생산량이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충남 부여 능산리의 6세기 백제 절터에서 나온 백제산 직물 분석 과정에서 1999년 조사 당시 유적 저습지에서 목기류와 함께 나온 직물 덩어리(폭 2㎝, 길이 약 12㎝·사진)가 국내 최고의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장인의 아들인 최석보 옹의 솜타기 시연
솜타기는 활중의 진동으로 부드러운 솜을 만든는 과정이다.
 
 
18. 노진남(1932~2017)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보유자
노진남 선생은 1932년 5월 1일 전남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에서 7남매 중에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을 돌보며 모친의 어깨너머로 길쌈을 배웠으나, 혼인 이후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인 故 김만애 보유자로부터 본격적으로 무명짜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74년 시어머니인 김만애 선생의 보유자 지정과 함께 전수교육생으로 선발되어 1980년에 전수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1982년에는 보유자 후보로 선정되고, 1990년 10월 10일 ‘나주의 샛골나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노진남은 무명짜기 기술을 김홍남 선생( 전수교육조교) 등에게 전수하고 ‘나주의 샛골나이’의 전통 계승과 보급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꽃은 / 단 한 번 핀다는데 / 꽃시절이 험해서
채 피지 못한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 한 생애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 번 /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 피워가는 꽃 /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슬프도록 환한 목화 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 세상이 따뜻하다면 /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앙상한 뼈마디로 메말라가며 /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 그대 따스하라
- 박노해 시인의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보유자
【향토】 다도면 향토사 (2018)
• 책을 펴내며
• 제1장 나주시(羅州市) 역사
• 제2장 나주시 읍면
【작성】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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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