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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세계 문화유산 11번째)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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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세계 문화유산 11번째) 둘러보기
● 남한산성(南漢山城)은
●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에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해동 지도의 남한산성
 
● 남한산성은 원성과 외성, 옹성, 4대문, 암문, 치, 장대, 포루, 수구, 단, 묘, 공해, 정, 사찰, 제당 등 많은 시설물과 행궁이 있다.
남한산성 성곽이 1963년에 국가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이후, 수어장대로 불리는 서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를 비롯해 숭열전(동 제2호), 청량당(동 제3호), 현절사(동 제4호), 침괘정(동 제5호), 연무관(동 제6호), 지수당(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장경사(동 제15호), 망월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개원사지(동 제 119호)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남한산성 행궁이 사적 제480호로 지정, 2012년 복원을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 남한산성은 성곽둘레길을 비롯해 곳곳에서 서울 송파지역과 성남, 하남시 등이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서문 옆의 연주봉 옹성(甕城)이 꼽힌다.
옹성은 통상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성벽을 둘러싼 이중 성벽을 말하는데, 남한산성 옹성은 적을 3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설치됐기 때문에 바깥쪽으로 돌출돼 있다.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서문 옆에 있는 이 옹성은 둘레가 315m로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을 통과하면 들어갈 수 있다.
팔당과 한강 수계, 남산, 아차산, 하남시, 서울 송파지역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장경사신지옹성도 둘러볼 수 있는데, 나머지 제1, 2, 3 남옹성은 보수 중이라 차단돼 있다.
 
 
 
 
●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데,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으며, 동 · 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 · 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다.현재 원성은 남쪽과 북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전체 8,888m의 옹성(甕城) 과 3,213m의 외성(外城) 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길이는 1만 2355m에 이른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막돌쌓기를 하였는데, 높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돌을 아래에 쌓고 작은 돌을 위로 쌓았으며, 성벽은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3∼7m이다.​
 
 
 
 
● 임금이 한양을 나와 머무르는 행궁은 여러 곳에 있었다. 하지만 남한산성 행궁에는 북한산성이나 수원 화성 등 다른 행궁에는 없는 특징이 있다.
바로 한양으로 치면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과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이 있다. 그만큼 남한산성의 역할이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좌전은 복원됐고 우실은 정비될 예정이다. 특히 행궁 내행전 뒤의 재덕당 옆에는 반석(磐石)이라고 새겨진 큰 돌이 있다.
 
 
 
 
● 동문은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쪽에는 가로 31센티미터, 세로 16센티미터의 철린으로 보강했다.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으로 남문은 정조 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남문 밖에는 성남시에서 보호수로 지정 한 약 35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한산성 성곽 준공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 및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는 군사 지휘소로 적의 움직임을 살피고 군사 지휘를 하는 장대를 말한다. 현재 산성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장대로 2층 누각이다.
수어장대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동남쪽 모서리 사이에 회색 매바위가 있다. 매바위는 남한산성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李晦)가 험악한 지세와 시공문제 때문에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하게 되어 참수형에 처할 운명이 되었는데, 이회가 절명(絶命)하려는 순간에 어디에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람들이 매가 있던 곳에 가보니 바위에 매 발자국이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이회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매가 증명해주었고 억울하게 죽은 이회의 혼을 기리기 위해 청량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80세 되던 해에 남한산성을 방문하고 비석 옆에 기념식수한 40~50년생의 전나무가 있다.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수 있게 되어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장경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 망월사는
남한산성 내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화엄경, 금솥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 스토리 탐방 코스 : http://nhss.ggcf.kr
 
● 남한산성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걷는 코스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지만 구간구간 샛길이 많아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특히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북문에 이르는 2.8 km 구간은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이다​.
 
 
 
 
● 옛 사진들
한남루 : 행궁 정문
 
 
 
숭렬전 : 백제 온조시조 모시던 곳
 
 
 
수어장대
 
 
 
연무관 : 훈련소
 
 
 
침괘정 : 무기제작소
 
★ 대중교통은 지하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려 남한산성까지 가는 버스 52번, 9번 버스를 이용합니다.
 

 
※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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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