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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과 죽음의 역사를 보다..
2015년 8월 14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추천 : 0
(2019.11.21. 19:07) 
◈ 피와 눈물과 죽음의 역사를 보다..
광복절 70주년을 맞이하여 8월 13일 강서도서관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가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보고 포스팅한다. 이곳에서 말로 듣던 일제의 교묘하고 악랄한 고문 수법과 만행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잔혹한 일을 죄책감과 거리낌 없이 저지른단 말인가? 천인공노할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 수탈과 치욕을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고, 왜 나라를 잃었는지 제대로 알며 알면서 실행하지 못한다면 또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준다.
광복절 70주년을 맞이하여 8월 13일 강서도서관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가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보고 포스팅한다. 이곳에서 말로 듣던 일제의 교묘하고 악랄한 고문 수법과 만행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잔혹한 일을 죄책감과 거리낌 없이 저지른단 말인가? 천인공노할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 수탈과 치욕을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고, 왜 나라를 잃었는지 제대로 알며 알면서 실행하지 못한다면 또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준다.
 
\na-;▼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정문
 
 
 
\na-;▼전시관
 
 
 
 
\na-;▼서대문형무소 모형도
 
 
\na-;▼1908년과 1934년 사진
 
 
 
 
\na-;▼ 1919년 태극기 목판
 
 
\na-;▼ 5,000여 장의 수형기록표로 만든 추모의 공간
 
 
 
 
 
 
\na-;▼일제 침탈과정
 
 
 
\na-;▼의병 전쟁
 
 
 
 
\na-;▼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은 1911년에 일어난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단순한 모금활동에 불과한 안명근의 체포사건을 1910년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미수 사건으로 조작하여 그 빌미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윤치호, 전덕기 등 신민회 간부 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대거 투옥시켰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na-;▼3.1 독립선언
 
 
\na-;▼의열 투쟁
 
 
\na-;▼수갑
 
 
\na-;▼족새
 
 
\na-;▼머리에 쓰는 용수와 수갑
 
 
\na-;▼체포,이송
 
 
\na-;▼ 임시구금실
 
 
\na-;▼지하독방
 
 
\na-;▼영상 증언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고 이병희(여, 1918~2012년)지사는 영상 증언을 통해“재연한 고문은 고문도 아니다. 비행기고문, 물고문은 수시로 받았다”며 “더 심한 고문은 자손을 끊으려고 하는 고문이다. 남자의 성기에 막대를 꽂았고, 여자의 성기는 막대기로 휘저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그랬다”고 증언했다. 또 그는“추위와 외로움에 싸워야 했지만 독립운동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na-;▼여자 독방
 
 
\na-;▼남자 독방
 
 
●고문 방법은 무려 72종에 달했는데 자행된 고문은 잔인하고 몹시 교활하였다. 고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 최대의 효과를 노린 의도에서 자행됐다.
ⓐ 천자에 매달 경우 새끼 줄에 붕대를 감아 팔이나 어깨를 묶기
ⓑ상처의 회복이 가장 빠른 입속에 막대기를 쑤셔넣기
ⓒ여러 날 굶긴 후 그 앞에서 만찬 벌이기
ⓓ손가락 사이에 철봉을 끼우고 손끝을 졸라맨 후 천정에 매달고 잡아당기기
ⓔ대나무 못을 손톱과 발톱 사이에 박기
ⓕ가장 추운 날 옷을 벗긴 후 수도전에 묶고 찬물을 끼얹어 얼음기둥 만들기
ⓖ온몸에 기름칠한 후 인두나 담배불로 지지는 방법
ⓗ입을 벌리게 하고 막대기로 석탄가루를 쑤셔 넣어 기절시키기
ⓘ수염의 양 끝을 서로 묶은 후 빠질 때까지 잡아당기기 등
 
\na-;▼ 고문 자료들
 
 
 
 
\na-;▼취조실
 
 
\na-;▼손톱 찌르기 고문
 
 
\na-;▼물고문
 
 
\na-;▼ 못이 나온 상자 안에 사람을 넣고 흔드는 고문
 
 
\na-;▼벽관으로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사람이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고문
 
 
\na-;▼옥중 생활 기록
 
 
\na-;▼옥중일지(일기)
​백범일지에서 옥중 생활(1911.1~1914.7)을 묘사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na-;▼여운형이 감옥에서 얻은 병 5가지
 
 
●의식주(衣食住)
 
\na-;▼의류 및 복장으로 겨울철에 동사자(얼어 죽는 사람)가 많았다.
 
 
 
 
\na-;▼밥찍는 틀로 등급별로 지급양을 차등하여 지급한다.
 
 
\na-;▼지급 기준/1끼
 
 
틀 밑에 토막을 넣아 식사양(콩50%,좁쌀30%,현미20%)이 줄게 퍼준다
 
 
\na-;▼주거공간인 감방
 
 
\na-;▼감옥 관리실
 
 
\na-;▼ 3개(10,11,12옥사) 감시대
 
 
 
간수 감시대에 서서 바라보니 3개 옥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na-;▼ 안내문과 12옥사
 
 
 
 
 
 
\na-;▼먹방으로 하루 종일 빛이 차단된 2.3㎡(0.7평)
 
 
 
 
\na-;▼옆방과 벽을 두드려 의사 전달하는 타벽 통보법(옛날 모르스 부호처럼 연락함)
 
 
 
 
\na-;▼지금의 비상벨 처럼 위급한 상황에 알리는 도구
 
 
\na-;▼감방
​ 8명이 누워도 좁을 만한 방에 30~40명의 애국지사를 막무가내로 수용했다.
 
 
 
 
 
 
 
 
\na-;▼ 강제 노역
 
 
\na-;▼벽돌공장
 
 
\na-;▼방적
 
 
\na-;▼여옥사(女獄舍)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이 배고픔과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화 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류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옥사했는데 이틀 후 이화학당 프라이어 월터 교장이 서대문 감옥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거부하였다. 그러자 류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는 위협과 강력한 항의로 일제에게 시신을 인도받았다.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 학당에서 시신을 인계받아 정동 교회에서 간략한 장례 의식을 거행하고 수레에 실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 유관순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팜플릿
 
 
 
 
 
 
\na-;출처: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민족문화대백과,유튜브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조선 백자 강연을 듣고
• 피와 눈물과 죽음의 역사를 보다..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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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