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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
2022년
  2022년 10월
2022년 10월 14일
서울 동묘의 420년 된 운룡도(雲龍圖)와 230년 된 비석(碑石)
2022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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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 서울 동묘(----東廟) 종로구(鍾路區)
【여행】
(2022.10.23. 23:42) 
◈ 서울 동묘의 420년 된 운룡도(雲龍圖)와 230년 된 비석(碑石)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 142호)에 다녀와 적고 있습니다. 1601년 동대문 밖에 삼국지의 영웅 관우 사당인 동관왕묘(동묘로 약칭)를 세워 제례를 지내고 보수하고 국왕이 다녀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 142호)에 다녀와 적고 있습니다. 1601년 동대문 밖에 삼국지의 영웅 관우 사당인 동관왕묘(동묘로 약칭)를 세워 제례를 지내고 보수하고 국왕이 다녀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785년 정조는 숙종, 영조, 사도세자(경모궁, 장조) 및 본인의 글과 글씨를 새긴 비석 2개를 남겼습니다. 이번 동관왕묘 방문 때 우연히 보게 되어 그 비석에 대해 자료들을 어렵게 찾아 정리해 봅니다.
정전안의 관우상뒤의 일월오봉도 병풍에 못박은 벽에 국내 최대 사이즈이며 400년 넘은 운룡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2013년에 있어 확인하여 보니 너무 생생해 깜짝 놀랐습니다. 이는 1910년 경 북관왕묘 유물이 옮긴 뒤 동관왕묘가 폐쇄되었기에 방치하였고 보이지 않는 곳이라 훼손없이 보관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동관왕묘에 대한 다른 자료는 이미 포스팅했습니다.
 
▼동관왕묘의 정전(正殿)은 중국풍보다 조선의 느낌이 더 강하다.
 
▣ 동관왕묘 연혁
1601년(선조 34) 명나라 요구로 동관왕묘를 건립하고 유성룡(柳成龍)은 그 본말(本末)을 적었고 허균(許筠)은 선조의 명을 받아 현령 비문(顯靈碑文)을 지었다. 국왕 선조는 타의에 의해 지은 사당(廟)이므로 동관왕묘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지만 명나라 사신이 오면 관왕묘에 들리는 관례 때문에 이들이 남긴 수십 개의 현판과 주련은 아직도 걸려있다.
1612년 (광해군 4) 6월에 처음으로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고 2월 경칩과 9월 상강에 관원을 보내 제례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엄히 수호하라고 했다.
1691년(숙종 17) 2월 17일에 정릉 행차 후 동관왕묘에 들렸고(국왕으로 첫 방문) 보수하라고 지시하였다.
1692년(숙종 18) 9월 15일에 관우를 경모(景慕)하는 시(詩) 두 편을 지어 하나는 무안왕묘(관왕묘)를 시제(詩題)로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안왕묘를 지나다가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은 것이니 목판에 새겨 하나씩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1695년 10월 초순에 관왕을 칭송하는 무안왕묘비명을 짓다.
1703년에 정전을 해체 보수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관왕묘에 대한 의식을 읍례(揖禮)에서 배례(拜禮)로 바꿨다.
1739년(영조 15) 6월 9일에 동관왕묘(東關王廟)를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1743년 8월 20일에 방문해 숙종의 시를 차운(次韻)해 짓고 목판에 새겨 걸게 했다.
1746년 8월 22일에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 여섯 글자를 친히 써서 동관왕묘·남관왕묘 두 묘(廟)에 걸었다.
1752년에 사도세자가 방문하고 무안왕묘비명에 적힌 시를 보고 차운해 시를 지었다.
1759년(영조 35) 11월에 능행(陵幸) 후 관왕묘에 들러 갑옷을 갖추고 군례(軍禮.군대 예식)를 행하다.
1761년(영조 37) 8월 25일에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방문해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고, 어필(御筆)로 "만고 충절(萬古忠節)·천추 의열(千秋義烈)"이라고 써서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에 게시(揭示)할 것을 명하였다.
1780년(정조 4) 4월 13일에 영우원(永祐園, 사도세자의 묘로 수원으로 옮기기 전 이름)에 친제(親祭)하고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1785년(정조 9) 11월 15일에 사조(四朝 숙종, 영조, 장조, 정조)가 친히 지은 글을 새긴 무안왕묘(武安王廟) 비석을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각각 세웠다.
순조는 10여 차례, 헌종은 1차례, 철종은 4차례 동관왕묘에 다녀갔다.
1871년(고종 8)에 보수, 1833년 북관왕묘와 1902년 서관왕묘를 추가로 세웠으며 1900년(광무 4) 기존의 동관왕묘비석을 다시 새겼다.(왕의 존칭 변경으로 다시 새김)
1908년 "향사 이정"에 따라 서울의 동묘, 서묘, 남묘, 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를 폐지하고, 서묘와 북묘는 폐사시키며 동묘, 남묘 및 지방 묘는 해당 관청에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관리할 방법을 정한다.(1910년 소장물은 동묘로 이관했지만 고종이 1887년 세운 북관왕묘비는 현재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6년에 동관왕묘를 보물 237호, 1963년에 보물 142호로 지정하였다.
▣ 420년 전의 운룡도(雲龍圖)
동관왕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정전내 중앙 관우상 뒤에 못으로 박은 일월 오봉도 병풍 속에 감춰진 운룡도는 지금은 안 보이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너무나 색감이 좋고 생생해 깜짝 놀랐습니다.
운룡도는 높이 275㎝, 폭 495㎝로 목재 벽을 감싼 모시 위에 먹으로 선을 그리고 안료로 채색했다. 5색(黃·朱·靑·白·玄)의 용 아홉 마리가 구름과 뒤엉켜 있으며, 발가락(톱)은 왕과 같은 5개이다.-2013년 2월 20일 중앙일보 사진
5색은 방위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붉은 색, 북쪽은 검은 색, 그리고 가운데는 황색으로 표시한다.
 
 
 
 
 
▣ 정조대왕이 비석을 동무와 서무에 각각 세웠다.(1785년)
사조(四朝: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가 친히 지은 글을 새긴 무안왕(武安王,관우)사당의 비석을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각각 세웠다.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두 개씩의 비석을 각각 세우고 숙종(肅宗)께서 지으신 글과 영조(비석에는 영종이라 표시)께서 지으신 글을 하나의 비석에 합하여 새기고, 경모궁(사도세자의 묘호)께서 지으신 글과 내가 지은 글(정조)을 하나의 비석에 합하여 새겼다.
 
숙종께서 지으신 글(1692년 9월 15일)은 바로 관왕의 도상명(圖像銘)인데 숙종의 글씨로 써서 만든 족자(簇子)가 동관왕묘에 봉안(奉安)되어 있기 때문에 받들고 와서 그대로 본떠 새긴 것이다.
영조(1746년 8월 23일)께서 지으신 묘기(廟記)는 쓰신 글씨로 집자(集字. 모은 글자)한 것이다.
경모궁께서 지으신 글은 숙종께서 지으신 관왕의 도상명(圖像銘)의 운자(韻字)를 따서 지은 것인데 이 또한 경모궁께서 쓰신 글씨로 집자한 것이다.
나도 삼가 숙종께서 지으신 시의 운을 따서 묘비명(廟碑銘)을 지었다. 모두 규장각(奎章閣)에서 그대로 베껴 써서 올리게 하였다.”
하고, 이어 봉상시(奉常寺)에 보내어 신령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의 악가(樂歌), 전작(奠爵)하고 헌작(獻爵)할 때의 악가로 삼게 하였다. -1785년 11월 15일 (정조 9)-

구 분

숙종(19대)

영조(21대)

사도세자(장조)

정조(22대)

원래 영종(英宗)(1890년 변경)

장조의황제

(1899년 추존)

원래 정종(正宗),

정조선황제(1899년 변경)

출생과 사망

1661~1720

1694~1776

1735~1762

1752~1800

재위

1667~1720

1721~1776

1776~1800

왕릉 위치

서오릉 내 명릉

동구릉 내 원릉

수원 융릉

수원 건릉

▣ 서무의 비석(숙종+ 영조)
 
서무의 북쪽 끝 칸에 위치한 비석은 숙종과 영조의 글과 글씨로, 앞면의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이라고 전서로 쓴 전액과 행서의 본문은 숙종의 글과 글씨이며, 뒷면의 “顯靈昭德武安王廟”(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해서의 비액과 가벼운 흘림이 있는 해서체 본문은 영조의 글과 글씨입니다.
숙종은 관우의 용맹과 충절을 찬양한 글이고, 영조는 동·남의 관왕묘를 세우고 신앙을 갖게 된 연혁을 새겼습니다.
■ 비석에 새긴 숙종의 글과 글씨(1695년 10월 초순)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 / 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
肅宗元孝大王宸章 /숙종원효대왕신장
歲在乙亥冬十月上浣題 / 을해년(숙종 21, 1695) 겨울 10월 상완(上浣)에 쓰다
予歷觀前史英雄豪傑之事 有時乎出爲國效力者 不特止於一二人矣 然而精忠大節 卓然拔萃 昭昭如日月 凜凜若秋霜 閱事蹟而拊髀 曠百世而相感者 豈有如
武安王也哉 於乎 當漢業之傾隤 仗大義於草萊 偕劉張而結誼 刑白馬而爲誓 一心如丹 只在帝室 破黃巾而滅呂布 渰七軍而連捷書 使鄴中之老賊 至欲遷都 以避其鋒者 莫非
王之威武也 天不助順事乃大謬 蒙遜之詭計得售 江東之鼠輩鴟張 月暈麥城 禍慘臨沮 迢思千載之下 未嘗不衋傷心而切齒痛恨於碧眼紫髥也於乎 歷代雖遠 我慕愈切 爰圖厥像于缣之中 丹鳳臥蠶 宛若生面 戟髥綠袍 望如風動 坐看春秋 氣象淸肅 眞可謂 萬古之英傑歟 遂以銘之曰
내가 지난 역사에서 영웅호걸들의 일을 두루 살펴보건대, 시대마다 세상에 나와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한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으나,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가 드높아 일월처럼 빛나고 추상처럼 늠름하여, 그 사적을 읽으면서 허벅지를 치고 백세 뒤에서도 감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어찌 무안왕과 같은 분이 있었습니까.
아, 한(漢)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때를 당하여 초야에서 대의를 지켜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결의하고서 백마를 잡아 맹세한 일편단심 오직 한 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황건적을 격파하고 여포를 멸하고, 위(魏) 나라의 칠군을 익사시키고 연이어 승리를 거두어, 업땅의 노적(曹操)으로 하여금 예봉을 피하기 위해 천도하려고까지 하게 한 것이 모두 왕의 위무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선인을 돕지 않아 일이 크게 잘못되어, 여몽과 육손의 간사한 계획이 이루어지고 강동의 하찮은 무리들이 활개를 쳐서 맥성(麥城)이 함락되고 임저(臨沮)에서 참혹한 화를 당하셨으니, 아득한 천년 뒤에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 벽안자염(碧眼紫髥 : 손권을 지칭)에게 이를 갈며 통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 연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나의 추모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여, 이에 비단에 왕의 초상을 그리니, 봉안에 와잠미는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세 갈래 수염에 녹포 입은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고, 앉아서 춘추를 읽는 모습은 기상이 맑고 엄숙하였으니, 참으로 만고의 영걸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 합니다.
山岳間氣 산악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난 영웅이라
蓋世英雄 드높은 기개(氣槪) 세상을 뒤덮으셨네
出自蒲州 포주(蒲州)에서 나와
從事陣戎 군진(軍陣)에 종사하실 때
祭告天地 천지(天地)에 고하고서
三傑誼同 세 영웅 결의하셨네
力扶帝室 힘을 다해 한실(漢室)을 도우며
仗義秉忠 의리와 충성을 굳게 지킨
丹心炳炳 일편단심 밝게 빛나서
可格蒼穹 하늘을 감격(感激) 시키셨네
千里赤兔 천리를 달리는 적토마와
八十靑龍 팔십 근 짜리 청룡도가
盖亦應時 때 맞추어 나오니
到底望風 가는 곳마다 소문만 듣고도 도망쳤지요
眞烈丈夫 참으로 열렬한 대장부라
如虎如熊 범과 곰처럼 용맹하셨네
達朝明燭 밤새도록 촛불 밝히고서 춘추(春秋)를 읽으시니
大節彌崇 큰 절개 더욱 높으셨고
斬將五關 다섯 관문 수문장(守門將)의 목을 베니
威名日隆 위엄과 명성 날로 드높으셨네
不遠長程 먼 길을 멀다 아니하고
尋訪二公 두 분을 찾아가서
果然會合 과연 서로 만난 것은
出至誠中 지성의 발로(發露)이셨네
乃偕諸葛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密勿從容 힘을 다해 주선(周旋)하여
坐鎭荊襄 형주(荊州)와 양양(襄陽)을 진압하고
屢樹膚功 누차 큰 공을 세우셨네
漢業幾復 한 나라 기업(基業) 거의 회복하였으나
事不心從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將星一隕 장성이 한번 떨어지니
齎志無窮 품은 뜻 펴지 못해 무궁한 한(恨) 남기셨네
顯聖玉泉 옥천사(玉泉寺)에 현령(顯靈)하여
魂誅賊蒙 영혼이 여몽(呂蒙)을 죽이시니
毅魄所在 굳센 혼백 계시어서
明靈則通 밝은 영혼 유명(幽明)을 관통하셨네
於焉緬懷 아아 옛일을 회상하니
有淚沾胸 눈물이 흘러 가슴을 적시네
遺像之圖 유상을 그린 것은
寔由予衷 나의 작은 정성이네
瞻仰起敬 우러르니 공경하는 마음 일어
恨不遭逢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介以景福 큰 복을 내리시어
永佑吾東 우리나라 길이 도우소서
▶숙종이 지은 글과 詩
동관왕묘에 처음으로 방문한 국왕은 숙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종은 관왕묘 방문과 의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국왕 중심의 권력을 재구축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①숙종의 사당을 보수하라는 비망기(備忘記)
숙종은 정릉에 행차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동관왕묘에 들렀다. 선조가 남관왕묘에 들렀을 때처럼 이때에도 국왕이 관우에게 어떤 예를 행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이 되었으며,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참관 자체를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충의(忠義)를 일찍부터 아름답게 여겼다며 반대를 물리치고 관왕묘에 들어가 관우에게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숙종은 관왕묘의 참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1691년(숙종 17) 2월 27일-
아! 무안왕(武安王, 관우)의 충의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드문 것이다. 이제 한번 들러서 유상(遺像)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武士)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본디 한때의 즐거운 관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충의를 더욱 힘써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또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가 파손된 곳은 해당 관서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 가운데에 내가 멀리 생각하고 경탄하는 뜻을 갖추도록 하라.
숙종은 자신이 관왕묘를 찾은 까닭을 관우의 충의를 높이고 장수들로 하여금 그의 충의를 본받아 왕실을 지키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숙종은 관우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충절의 이념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관왕묘를 건립한 뜻이 애초 이러한 데도 잡인들이 출입하고 행인들이 아무렇게나 구경하여 훼손되었다고 관리(守直官)
들을 꾸짖고 관왕묘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② 관우를 경모하는 시 두 편을 지어 목판에 새겨 하나씩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어두도록 하였다.-1692년(숙종 18) 9월 15일-
내 평소 수정공(관우)을 사모함은 生平我愛壽亭公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높아서이네 節義精忠萬古崇
광복에 마음 쓰다 몸이 먼저 갔기에 志勞匡復身先逝
천추에 열사 눈물 마음속에 가득하네 烈士千秋涕滿胸
동쪽 교외 일이 있어 옛 사당을 지나다가 有事東郊歷古廟
들어가 유상보니 숙연하고 맑네 入瞻遺像肅然淸
이번에 공경하는 마음 더욱 절실하니 今辰致敬思逾切
바라건대 우리나라 만세토록 편안케 도와주소서 願佑吾東萬世寧
■1746년 8월에 영조가 쓴 비석은 높은 담으로 비명만 찍혀 탁본을 찾아 갈음합니다. 1900년 중각본을 보면 영종 현효 대왕 어제어필(英宗顯孝大王御製御筆)에서 영조 현효 대왕 어제어필(英祖顯孝大王御製御筆)로 바뀌었을 뿐이다.
 
顯靈昭德武安王廟 현령소덕무안왕묘
英宗顯孝大王御製御筆 영종현효대왕 어제어필
國都漢陽東南有 關王廟 一則在崇禮門外 歲丁酉 皇朝欽差東援諸將 因其王之顯靈助戰 各捐物力營建 而我聖祖 亦助費而成 工訖 親臨以拜 一則在興仁門外 歲庚子 萬曆神宗皇帝 以四十白金 付撫臣萬世德命立祠 聖祖命有司 又建於此 而皇朝賜其扁號曰 顯靈昭德王關公之廟 其由俱載國乘 其後 我聖考 歷臨是廟也 下詢儀節 而侍從之臣 以揖禮爲請 最後以再拜爲定 尊慕忠義之聖德 藹然於絲綸 而繼述穆廟臨拜之盛禮 猗歟至哉 小子嗣服之後 遵昔年之聖意 始行再拜禮於東南廟 而逮于柔兆攝提南呂之月 省陵而回 又爲歷拜于南廟 此非特興感也 意盖深矣 因其興慨偶閱故事 乃知皇朝賜號 不勝匪風下泉之心 整衣盥手 書以顯靈昭德武安王墓八字 鐫揭於東南二廟 仍爲躬詣 二廟 臨拜而瞻揭 於戱 事雖一擧 追感則三 其一 使皇朝昔年賜號 不泯於來世 而追憶壬辰再造之恩 遙望中州 涕泗沾襟 其一 興感武安王炳日月之忠義 又惟往歲 助天將而護我國 其一 幾百年之 後 追踵聖祖故事 復行其禮 反顧凉德 追慕彌切之中 怵然惕然 而又於此有餘意 何則 今因此擧 謄 覽欽差陶通判良性所撰碑 又盛稱關王武勇 而不及於忠義大節 末乃以文宣武安對擧爲二 無乃陶公 之意 或未深思而然歟 於戱 武安王忠義 亘于萬古 武安王之前 罕有若武安王者 武安王之後 亦罕 有若武安王者 文武 本無二致 況忠義乎 子夏曰 事君 能致其身 吾必謂之學矣 以此觀之 忠與義 非學而何 且關王 好讀左氏春秋 雖過五關之時 不輟其讀 噫 左傳由於麟經 王嘗好讀此 豈非尊王慕聖 而陶公之譬喩文武者 抑又不爲周思而然歟 後之人 以今予此擧 若曰 尙武而然 則非予起感欽慕之本意也 不可不略引陶公碑記中言 以示予意而懸揭 小註之中 有漢二字 其豈濶看乎哉 於戱 揄王忠義大節之意 專在於此二字 噫 一隅靑丘 尙有皇朝 亦如唐宋以後 漢之一字 在於此廟 隨事興懷 不能自耐云爾
歲 皇朝崇禎紀元後百三年 八月中旬後三日 謹識
국도(國都) 한양의 동쪽과 남쪽에 관왕묘가 있다. 하나는 숭례문밖에 있는데, 정유년(선조 30, 1597)에 명나라 조정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이 왕이 현령하여 전쟁을 도운 일로 인해 각각 물자를 출연하여 지은 것이다. 우리 성조(聖祖, 선조)께서도 비용을 대어 도왔으며, 완공된 뒤에는 친히 거동하여 배례를 행하셨다.
하나는 흥인문밖에 있는데, 만력(萬曆) 경자년(선조 33, 1600)에 신종 황제가 백금 40근을 무신(撫臣) 만세덕에게 주어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니, 성조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또 이곳에 세우게 하셨다. 명나라에서, 「현령소덕왕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는 편호(현판)를 내렸는데, 그 사유는 국승(國史)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 후에 우리 성고(聖考.숙종)께서 이 묘에 차례로 거동하시어, 의절을 하문하시니, 시종하는 신하가 읍례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재배예로 결정하시어, 충의를 존모하는 성덕이 성대하게 윤음(법령)에 나타나고, 목묘(穆廟,선조)께서 납시어 배알하신 성대한 예를 계술하셨으니 아, 지극하셨도다.
소자가 즉위한 뒤에 옛날 목묘의 뜻을 따라 비로소 동묘와 남묘에 재배례를 행하였고, 병인년(영조 22, 1746) 8월에 능(陵)을 살피고 돌아올 때 또 남묘에 들려 배례하였으니, 이는 감회가 일어서일 뿐만이 아니라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일어나는 감개로 인해 우연히 고사(옛일)를 열람하고서야 명나라의 사액임을 알고는 명나라를 그리는 마음 금할 수 없어서, 옷깃을 여미고 손을 씻고서,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여덟자를 써서 현판을 만들어 동묘와 남묘에 걸게 하고, 이어 몸소 두 묘에 나아가 배알한 다음 현판을 바라보았다.
아아, 일은 비록 한 가지를 거행했으나 추모하는 감회는 세 가지이다. 그 하나는 과거에 명 나라가 내린 편호(현판)를 후세에까지 인멸되지 않게 하고,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재건해 준 은혜를 생각하며 멀리 중국을 바라보노라니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던 것이고, 그 하나는 무안왕의 일월처럼 빛난 충의에 감동하고, 또 옛날 명나라의 장수를 도와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 것이고, 그 하나는 몇백 년이 지난 뒤에 성조의 고사에 따라 다시 그 예를 행하고서 나의 부덕을 되돌아보며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한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도 미진한 생각이 있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지금 이 일로 인해 중국 사신 통판 도양성(陶良性)이 지은 비문을 보건대, 관왕(關王)의 무용(武勇)만을 성대하게 칭송했을 뿐, 그 충의(忠義)의 큰 절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말미(末尾)에는 문선(文宣 :공자)와 무안(武安)을 대거하여 둘로 만들었으니, 이는 도공(陶公)이 혹 깊이 생각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 무안왕의 충의는 만고에 뻗혔으니, 무안왕 이전에도 같은 이가 드물었고, 무안왕 이후에도 무안왕 같은 이가 드물었다. 문과 무가 본래 두 가지가 아닌데, 하물며 충성과 의리이겠는가.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면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하였으니, 이 말로 보면, 충성과 의리가 학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관왕은 좌씨춘추읽기를 좋아하여 다섯 관문을 통과(오관돌파)할 때에도 좌전(左傳)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 좌전은 춘추에서 나왔으니, 관왕이 이 책 읽기를 좋아한 것이 어찌 왕을 존경하고 성인(聖人)을 사모해서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도 도공(陶公)이 문무(文武)로 비유한 것은 치밀하게 생각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후세 사람이 오늘 나의 이 일을 가지고서 만약 무(武)를 숭상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감동을 일으켜 흠모한 본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도공 비문 중의 말을 인용하여 나의 뜻을 드러내어 판각(板刻)해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소주(註釋)가운데 유한이라는 두 글자를 어찌 넓은 의미로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아, 왕의 충의의 큰 절개를 드러내는 뜻이 오로지 이 두 글자에 있다. 아, 천하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우리나라에 오히려 황조(皇朝)가 있는 것이 마치 당송 이후로 한(漢)이라는 한 글자가 이 관왕묘에 있는 것과 같다. 일마다 감회가 일어 스스로 견딜 수가 없노라.
황조(皇朝) 숭정(崇禎) 기원후 103년(영조 22년, 1746) 8월 23일 삼가 기록하다.
▣동무의 비석(사도세자 + 정조)
 
동무의 북쪽 끝 칸에는 네모진 화강암 받침에 지붕 모양의 지붕돌(옥개석)을 얹은 비석이 무안왕묘비(武安王廟碑,무안왕은 관왕의 또 다른 이름)다. 178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앞면에는 사도세자(1735~1762)가 짓고 쓴 글이 있고 뒷면에는 정조(1752~1800)가 짓고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사도세자(경모궁)은 관왕묘 및 관우의 찬양문, 정조는 관우의 용맹과 충의를 찬양한 글이다.
사도세자의 글씨는 가벼운 흘림체의 행서이고 정조의 글씨는 또박또박한 해서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글자마다 정중한 무게가 실려 있으며 분위기가 매우 닮아 있어 야릇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가 전서체로 쓴 무안왕묘비명
몸돌(碑身)은 오석(烏石)에 높이 228cm, 폭 100cm, 두께 50cm이다.
1752년에 사도세자(경모궁)가 짓고 1785년 정조가 비석에 새겨 세웠다.
왕은 어필(御筆)이라 하고, 왕세자는 예필(睿筆)이라 표시합니다.
아래 오른 쪽 비석은 다시 새긴 중각본(重刻本)을 탁본(拓本. 문자나 부조를 종이에 모양을 뜬 것)한 것으로, 이유는 고종이 1899년 사도세자( 장조)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하고 1900년 6월(음력)에 중각했습니다. 경모궁 예제예필(景慕宮睿製睿筆)에서 장조의황제 어제어필(莊祖懿皇帝御製御筆)로 글쓴이만 변경되었을 뿐이다.-중앙박물관 자료-
 
 
武安王廟碑銘
경모궁 예제예필(景慕宮睿製睿筆)에서 장조의황제어제어필(莊祖懿皇帝御製御筆)로 바뀜
天地鍾英。鼎氣雄雄。功蓋萬禩。威耀八戎。盱衡載籍。侯莫與同。偏裨子雲。卒伍老忠。桃園盟血。直盤皇穹。恩兄義君。首腹譬龍。所征无敵。海內靡風。曁亦我旅。伊貔伊熊。載揚豐烈。爲漢之崇。若唐若宋。罔不致隆。皇朝秩典。爵視王公。逮我宣祖。肇祀國中。衮繪九章。有儼睟容。廟楣有刻。兩聖紀功。小子式欽。先志是從。我銘作歌。以詔无窮。不奮董筆。斬權戮蒙。恭惟冥庥。遂感而通。誕聖顯靈。大德鐫胷。歲一精禋。帕首甲衷。靈如地水。若朝暮逢。冀垂英顧。祚我大東。歲壬申謹撰。
천지의 영기모여 / 天地鍾英
큰 기운 당당도 해라 / 鼎氣雄雄
그 공로 만년토록 압도하고 / 功蓋萬禩
그 위엄 팔융에까지 빛나네 / 威耀八戎
눈 치켜뜨고 온 서적 뒤져봐도 / 盱衡載籍
관공같은 이 없어라 / 侯莫與同
자운(子雲)을 부장으로 삼고 /偏裨子雲
노장 황충(黃忠)을 막하에 두었네 / 卒伍老忠
도원에서의 맹세는 /桃園盟血
솟구쳐 하늘에 서렸고 /直盤皇穹
은의로 맺어진 형이요 임금 /恩兄義君
그 임금의 수족 같았소 /首腹譬龍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 없어 /所征无敵
천하가 바람 앞에 풀이었소 /海內靡風
더불어 후(侯)의 군사들도 /曁亦我旅
맹수처럼 용감했네 / 伊貔伊熊
비로소 큰 공을 드날리고 /載揚豊烈
한(漢) 나라를 우뚝히 세우셨소 /爲漢之崇
당나라도 송나라도 /若唐若宋
모두들 높여 받들었네 /罔不致隆
명(明) 나라에서의 벼슬 등급 /皇朝秩典
왕공(王公)과 대등했소 /爵視王公
우리 선조(宣祖) 임금님께서 /逮我宣祖
처음으로 도성 안에서 제사하니 /肇祀國中
구장(九章)을 수놓은 곤룡포 /袞繪九章
위엄있는 얼굴 / 有儼睟容
사당 기둥에 새겨진 글은 / 廟楣有刻
선대의 두 임금의 공을 적은 것 /兩聖紀功
소자도 경의를 표해 /小子式欽
선대의 뜻 따르리라 /先志是從
내 이 뜻을 노래로 새겨 /我銘作歌
영원히 전하노라/以詔無窮
동호(董狐)의 직필 아니 쓰고도 /不奮董筆
손권과 여몽을 죽인 것은 / 斬權戮蒙
아마도 후(侯)의 신명이 /恭惟冥庥
감통(感通)한 결과리라 /遂感而通
거룩하고 높은 신령 /誕聖顯靈
큰 은덕 가슴에 새기고 /大德鐫胸
해마다 한 번 제사하니 /歲一精禋
머리에 띠매고 갑옷 입은 채 /帕首甲衷
신령이시여 지하의 물이 /靈如地水
수시로 만나듯이 /若朝暮逢
관공의 영령 나리시어 /冀垂英願
우리나라 복 주소서 /祚我大東
歲壬申 謹撰 임신년(壬申年 ; 1752)에 삼가 지음
■정조가 쓴 비석은 담장이 높아 비명(무안왕묘비명)만 찍혀 탁본을 찾아 올립니다.
글과 글씨는 경모궁(사도세자)가 지은 무안왕묘비명에 차운(次韻,남의 시운을 써서 시를 지음)하여 정조가 1785년 세웠습니다.
정조의 무안왕묘비명 중각본 탁본(1900년 제작, 장서각 소장,아래 오른쪽)은 글쓴이(당저신장當宁宸章에서 정조선황제신장 正祖宣皇帝宸章으로)만 바뀌었다.
 
 
武安王廟碑銘
당저 신장 홍재(當宁 宸章 弘齋)
상제 곁에 계시는 왕 / 王在帝傍
굳센 정신 영웅의 기백으로 / 魄毅神雄
적색 말에 시퍼런 칼 들어 / 赤驥翠鋩
오랑캐를 말끔히 소탕했네 / 廓掃蠻戎
판향(한 묶음의 향) 들고 와 머리 조아리기 / 瓣香拜稽
그러지 않을 사람 누가 있으랴 / 萬方攸同
우리가 처음 제사 모시는 것도 / 誕我肇祀
그 충절 때문만은 아니라오 / 匪直尙忠
날을 가려 제물 차리고 / 粢牲練日
징소리 북소리 하늘을 울리면 / 鐃鼓殷穹
기를 앞세우고 옥 소리도 요란하게 / 九旒琅璆
구름을 가르고 용을 타고 / 決雲駕龍
황홀하게 금방 사이에 / 怳兮儵兮
숙연한 바람이 일면 / 肅然有風
신이 내려오신 것이라 / 神之降矣
하괴성(河魁星)이 빛을 발하며 / 河魁熊熊
우리와 영감이 통하고 / 歆我肸蠁
우리의 정성에 감동하시리 / 格我欽崇
영원히 못 잊을 큰 은혜 / 永懷駿惠
참으로 그보다 더할 수 없어 / 洵莫與隆
그 기상 태산과 같고 / 像配光嶽
서열은 공후(公侯)를 능가하지 / 秩邁侯公
그리하여 돌을 다듬어 / 麗牲有石
사당 안에 세웠는데 / 于廟之中
이어지는 제례로 / 承承奎壁
그 모습 더욱 빛나리 / 載烈象容
화저에서도 수구에서도 / 華渚壽丘
만년을 두고 그 공로 칭송하리니 / 於萬頌功
신은 복을 내릴 것이며 / 神兮錫嘏
귀서도 모두 따라 / 龜筮叶從
나라 전체가 오복을 누릴 것이고 / 邦享五福
민간에는 사궁이 없으리 / 民無四窮
세상이 판탕하던 시절에는 / 顧瞻靡騁
하늘도 땅도 깜깜하더니 / 玄黃晦蒙
한줄기 바람 번개에 / 一指風霆
명암이 뒤집혔다네 / 顯庥冥通
뜰을 둘러선 개사들 / 環庭介士
가슴에 땀이 젖고 머리털 치솟아 / 竪髮沾胷
번쩍번쩍 위아래로 오르내리니 / 剡剡上下
속마음 아니 시원한가 / 弗遐皦衷
신이 이르러 오면 / 神之迪矣
마치 손잡고 만나는 것 같아 / 如相攀逢
이 하늘 땅이 다하도록 / 地久天長
우리나라에서 영원히 지내소서 / 永食吾東
내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을사년 동짓달에, 이를 찬하고 또 전서로 써서 태상시(太常寺)에 넘겨주고, 이것으로 영신(迎神), 송신(送神) 그리고 전헌(奠獻)의 악가(樂歌)로 쓰도록 하였다. -한국고전 번역원
출처: 능허관만고(사도세자 문집),홍재전서,장서각,한국데이터베이스,국립 중앙박물관,고전번역원,종로구청, 문화재청,서울특별시,『서울금석문대관』제3집, 2000. pp.3-12. ,구글, 중앙일보,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문화유산채널,해동성적지,네이버,나의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국사편찬위원회
 

 
※ 원문보기
관우(關羽) 서울 동묘(----東廟) 종로구(鍾路區)
【여행】 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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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