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고재완의 지식창고 문화재·역사·전
문화재·역사·전
2022년
  2022년 11월
2022년 11월 19일
2022년 11월 13일
왕과 함께 한 경로잔치 앨범. 1719년 기해(己亥) 기사계첩(耆社契...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추천 : 0
1719년 기로소(耆老所) # 기해 기사계첩
【역사평론】
(2022.11.14. 20:31) 
◈ 왕과 함께 한 경로잔치 앨범. 1719년 기해(己亥) 기사계첩(耆社契...
이화여대 "조선 왕실 기록화" 강좌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이화여대 "조선 왕실 기록화" 강좌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기사(耆社,기로소)란 원래 70세 이상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문관(文官)을 우대하는 뜻에서 만든 모임이다.
임금은 신하들과 달리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태조 이후 어느 임금도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1719년 숙종(1661~1720)이 59세를 맞이해 입소한 것은 300년 만의 국가 경사였다. 숙종이 아직 60세까지 1년 남았는데 기로소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한 것은 이미 다리가 저리고 안질 때문에 글씨를 또렷하게 볼 수 없을 정도의 건강 상태 때문에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키고 입소를 서두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다음 해 돌아가셨는데 참고로 27명 조선 임금 중 환갑을 넘긴 왕은 태조(74세), 정종(63세), 광해군(67세), 숙종(60세), 영조(83세), 고종 (67세)으로 6명이지만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60세, 1394년 ), 숙종(59세, 1719년), 영조(51세, 1745년), 고종(51세, 1902년) 4명뿐이다.
ⓑ 기해(己亥) 기사계첩(耆社契帖.행사 결과 보고서)은 1719년(숙종 45) 4월 17일, 18일에 경덕궁(현재 경희궁) 경현당에서 있었던 경로잔치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으로 1720년 12월에 숙종 사망(1720년 6월) 후에 완성되었다.
ⓒ이 모임은 숙종이 59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친히 참석한 자리였으며, ① 이유(李濡 ), ②김창집(金昌集),③ 김우항(金宇杭),④ 황흠(黃欽), ⑤최규서(崔奎瑞), ⑥강현(姜鋧), ⑦홍만조(洪萬朝), ⑧이선부(李善溥), ⑨정호(鄭澔), ⑩신임(申銋), ⑪ 임방(任埅) 등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최규서는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의식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계첩에 초상화도 싣지 못하였다. 모두 12부를 만들어 1부는 기사의 관청에서 보관하고 11부는 참석한 중신들이 1부씩 나누었다고 한다.
☞己亥耆社帖(기해기사첩) 11인

이름

관직

품계

나이

李濡(1645~1721)

大匡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정 1품

75세

金昌集(1648~1722)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정 1품

72세

金宇杭(1649~1723)

大匡輔國崇祿大夫 行 判中樞府事

정 1품

71세

黃欽(1639~1730)

輔國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兼 知經筵事

정 1품

81세

崔奎瑞(1650~1735)

輔國崇祿大夫 行 判敦寧府事 兼 弘文館提學

정 1품

70세(불참)

姜鋧(1650~1733)

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정 2품

70세

洪萬朝(1645~1725)

正憲大夫 行 龍驤衛司直

정 2품

75세

李善溥(1646~1721)

正憲大夫 行 義興衛副司直

정 2품

74세

鄭澔(1648~1736)

正憲大夫 漢城府判尹 兼 知春秋館事

정 2품

72세

申銋(1639~1725)

正憲大夫 議政府右參贊 兼 知義禁府事 同 知經筵 成均館事

정 2품

81세

任埅(1640~1724)

資憲大夫 知中樞府事

정 2품

80세

ⓓ표지, 숙종이 내린 글, 서문과 발문,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참석자들의 초상과 직접 쓴 축시(祝詩)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일 뒤에는 서사관(書寫官) 이의방(李義芳), 화원(畵員) 김진여(金振汝) 등 5명의 명단이 있어 이 화첩의 제작 배경과 제작자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궁중 예술가들이 최고급 재료를 써서 제작한 궁중행사의 공식 기록 그림으로서 조선 후기 문화의 품격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 300년 넘은 原本 書誌(국보 325호) 개요

이름

己亥 耆社契帖(54면)

재질

지(紙) / 비단에 채색

크기

세로 52cm x 가로 36cm(전체), 세로 44cm x 가로 68cm(그림)

화가

화원(畫員) 김진여(金振汝, 1675~1760) 외

기타

*국보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풍산 홍씨 소장본

*보물 : 이대 박물관 소장본, 개인 소장본, 삼성미술관 리움 및 연대 박물관 소장본

▣ 계첩(契帖)을 소개합니다.
 
▼서문(序文) -임방-
 
 
▼숙종대왕 어제(肅宗大王御製) 景賢堂錫宴時
 
▼어첩 발문(御帖 跋文) -金楺(김유, 1653~1719)-
 
 
"기영회(耆英會)는 고례(古禮)가 아니지만 실로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에 계승하였으므로 이를 거행한 자는 셀 수가 있을 정도이나, 군주(君主)가 신료(臣僚)와 더불어 결사(結社)하였다는 것은 대개 듣지 못하였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창업(創業)하신 지 3년이 지난 1394년에 보령(寶齡)이 60세가 되었다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굽혀 나아가셔서 친히 서루(西樓)의 벽(壁) 위에 어휘(御諱.임금의 이름)를 쓰시고 사등총(紗燈寵)으로 보호하게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1592년의 임진란 때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고(故) 의정신(議政臣) 심희수(沈喜壽)·김육(金堉) 등의 선생안(先生案)의 서문(序文)과 고(故) 부원군(府院君) 유근(柳根)이 지은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几杖)을 하사(下賜)하였을 때의 서문(序文) 가운데 그 말이 갖추 기록되어 있는데, 심희수·유근·이원익이 모두 임진란(壬辰亂) 전에 벼슬살이했던 사람들이니, 이는 반드시 자세하고 확실하여 허망(虛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하시고도 신성(神聖)하심이 태조(太祖)와 똑같이 부합(符合)하셔서 즉위(即位)하신 지 45년이 되는 기해년에 보령(寶齡)이 또한 59세가 되셨다. 그래서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 애일(愛日)하는 정성으로 여러 번 태조(太祖)의 고사(故事)를 쓰도록 청하였으나 성상께서는 일부러 겸양(謙讓)하시며 차지하지 않으셨는데, 마침 전(前) 직장(直長) 이집(李楫)이란 자가 상서(上書)하여 청하였고, 춘궁(春宮)께서도 전과 같이 간절하게 아뢰었다. 그리고 연신(筵臣) 또한 이를 말하니, 성상께서 헤아려 실록(實錄)을 상고하도록 기꺼이 명하셨는데, 돌아와서 실상(實狀)이 없다고 말하자, 성상께서 이에 말씀하시기를, ‘믿을 만한 사책(史冊)에 증거가 없는데 경솔하게 거행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그만두도록 하라.’고 하셨다.
종신(宗臣)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과 동선군(東善君) 이병(李炳) 등과 연잉군(延礽君.영조) 등이 모두 먼저 소장(疏章)을 올려 증거를 끌어대어 매우 상세하게 말하기를, ‘국초(國初)의 사첩(史牒)에는 누락(漏落)된 부분이 많으므로, 오늘날에 준거(準據)할 수가 없습니다. 선조(宣祖) 말년(末年)에도 일찍이 이를 본받아 육순(六旬)을 기다려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하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으니, 또 족히 증거를 삼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태조의 성대한 일과 아름다운 자취를 좇아 본받지 않으신다면 장차 세상에서 영구히 민멸(泯滅)될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그 말에 감동하셔서 마침내 시행하도록 윤허(允許)하셨다. 이에 예부(禮部)의 신하가 건의(建議)하기를, ‘마땅히 한 첩자(帖子)를 만들어, 춘궁(春宮)께서 친히 태조(太祖)의 존호(尊號)와 몇 년 몇 월 며칠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쓰고 그 아래에 우리 전하의 존호와 몇 년 몇 월 며칠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쓰고 나서 승지(承旨)에게 의장(儀仗)을 갖추어 본소(本所)에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성상께서 이를 옳게 여기셨다.
예부의 신하가 다시 건의하기를, ‘마땅히 고묘(告廟)하고, 모름지기 경축(慶祝)해야 합니다.’ 하자, 성상께서 또 이를 옳게 여기셨다. 3백 년 동안 두 번 있는 성대한 의식을 이제 흔쾌하게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천지(天地)는 은혜를 베풀어 도우시고 신민(臣民)은 기뻐 뛰며 만세(萬世)에 태평(太平)할 것이니, 이제부터 유신(維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이 분수에 넘치게 태사(太史. 나라의 법규法規. 기록을 맡은 벼슬) 의 관직에 있다 하여 발문(跋文)을 지어 전말(顚末)을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고 두려워 떨며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 이 일을 한 번 거행하심으로 해서 삼선(三善, 부자父子의 도道, 군신君臣의 의義, 장유長幼의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니, 뜻을 이어받아 일을 계승하는 것이요, 노인(老人)을 공경하고 존숭하는 것이요, 상하(上下)가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이미 거행하신 법을 따라 선조(宣祖)께서 미처 미치지 못하셨던 뜻을 이루셨으니 효(孝)가 이보다 클 수가 없고, 고귀하면서도 낮출 수 있고 존귀하면서도 굽힐 수 있으니 공경함을 이보다 숭상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고서 팔방에 널리 은혜를 베푸시니 인자하심이 이보다 성대할 수는 없습니다.
효(孝)로 교회(敎誨)하여 친척(親戚)을 친애(親愛)하는 도리가 번창하게 하시고, 경(敬)으로 교회하여 영구히 이어질 풍속(風俗)을 일으키시고, 인(仁)으로 교회하여 화락(和樂)한 습속(習俗)을 이루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두세 대부(大夫)가 과인(寡人)에게 나이 많은 이를 공경하도록 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이에 미치니 장차 천하(天下)가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유우씨(有虞氏. 순舜 임금을 이름)는 덕망(德望)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고, 하우씨(夏禹氏)는 관작(官爵)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으며, 은(殷)나라 사람은 부(富)를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고, 주(周)나라 사람은 친족(親族)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으니, 천하(天下)에서 노인을 존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 노인을 존경하는 뜻을 대개 이에서 체득(體得)하셨는데, 우리 전하께서도 진실로 이를 준수(遵守)하였으니, 전성(前聖)과 후성(後聖)께서 그 도리가 모두 같습니다. 더욱이 몸소 삼선(三善)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교회(敎誨)하셔서 백성들이 이를 본받게 되었으니, 춘대수역(春臺壽域,盛世)이 영원 무궁하기를 삼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다리겠습니다. 이것으로 발문(跋文)을 씁니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가 짓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썼다.】 -숙종실록-
▼참석자 명단
 
 
▼御帖奉安圖(어첩 봉안도,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에서 기로소로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 장면)
숙종의 기로소 입소 행사는 1719년 기해년 2월 11일에 치러졌다. 기로소 입소 행사는 경희궁 흥정당에서 제작한 어첩[御帖.기로소(耆老所)에 보관하는 임금의 입사첩(入社帖)으로 생년월일, 어명(御命), 입사 연월일(入社年月日), 아호(雅號)를 기록함]을 기로소에 봉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어첩 봉안은 기로신(耆老臣 ) 7명이 참여한다. 기로소는 한성부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오늘날 광화문 교보빌딩과 KT 본사 빌딩 사이쯤이다.
 
▼崇政殿進賀箋圖(숭정전 진하전도, 1719년 2월 12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기로신들이 숙종에게 축하의 글을 올리는 장면)
어첩을 봉안하고 다음 날인 2월 12일에 임금은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기로신 7명이 임금의 기로소 입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하전(進賀箋)이 경희궁(慶熙宮) 숭정전(崇政殿)에서 열린다. 원래는 경덕궁이라 했지만 이름이 바뀐 경희궁은 광해군이 1616년에 완공해 이후 이궁(離宮)으로 사용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숙종이 이곳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바로 옆 건물인 융복전(隆福殿)에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숙종이 즉위한 곳은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이고, 1707년(숙종 33)까지 지낸 곳 역시 창덕궁이었는데 1707년 7월 26일 숙종은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고, 50세 기념 진연(進宴)부터는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에서 거행한다. 그래서 숙종의 기로소 입소 축하 인사 자리도 숭정전에서 마련된 것이다.
 
▼景賢堂錫宴圖(경현당 석연도, 4월 18일, 경희궁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에게 양로연의 형식으로 내려준 연회 장면)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고 나서 2개월 후인 4월 18일에는 숙종이 기로신들에게 잔치를 베푸는데 이것은 경희궁 경현당에서 열린다. 이날 참여한 기로신은 모두 10명이었고 당연히 왕과 세자도 참석했다. 기로신은 모두 11명이었지만 최규서만 사직하고 고향에 가 있어 10명만 참석했다.
 
▼경현당 정면 3칸 문을 모두 떼어내고 건물 앞에 흰 차양(천막)을 쳤다. 경현당 앞에 나무판을 넓게 깔아 가설무대를 만들었는데 이를 보계(補階)라 한다. 보계에 오르는 나무 계단은 좌우에 하나씩 있고 아래에는 두 개가 있다. 경현당 안에는 정면에 임금의 찬탁(饌卓)이 반만 보이고,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풍도 마찬가지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숙종에게 제조(提調)가 술잔을 바치는 장면이 있고, 임금 왼쪽에는 세자의 찬탁과 돗자리가 있는데 세자 역시 보이지 않는다. 임금이건 세자건 그림에 표현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대 가운데에서는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무동(舞童) 둘이 양손을 들고 춤이 한창이다. 이 양쪽으로 녹색 단령을 입고 사모를 쓰고 머리에 꽃을 꽂은 기로신들이 앉았는데 임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넷, 오른쪽에 여섯이 앉았다. 이는 이날 10명의 기로신 가운데 정 1품이 모두 4명이었다는 것을 알면 자리 배치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4명 가운데 마지막 1명은 3번째 기로신과 자리를 좀 떨어져 앉았다. 앞의 기로신 3명은 모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품계이고, 4번째 기로신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다. 즉 정 1품에서도 상계와 하계로 나뉘는 것이다. 오른쪽의 여섯 명은 자리 간격이 차이가 없는데 모두 정 2품이기 때문이다.
 
▼3 줄로 선 악공의 배치를 보면 맨 앞은 현악기 군, 다음이 관악기 군, 마지막이 타악기 군으로 서양의 오케스트라 악기 배치와 비슷하다. 무동과 처용무인들은 모두 5방 색(청, 백, 적, 흑, 황)으로 옷을 입었다
 
▼奉盃歸社圖(봉배 귀사도, 4월 18일. 기로신들이 임금이 하사한 사기로소(賜耆老所) 글자를 새긴 은 술잔을 받들고 음식과 술을 가지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 장면)
 
▼耆社私宴圖(기사 사연도, 4월 18일. 기로소로 돌아온 기로신들의 잔치 장면)
잔치를 마친 기로신들은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가지고 기로소로 돌아와 2차로 연회를 연다. 그들의 자제들도 함께 실내에 앉아 있다.
 
▼처용무인(處容舞人)들이 자신의 옷 색깔에 해당하는 방위에서 춤추고 있다. 중앙은 황색,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이다.
 
▼마당 한 켠에서 악공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백발의 두 노인이 보이는데 맨발에 지팡이(명아주?)를 짚은 오른쪽 노인은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은 듯 보이지만 흥에 겨워 있고, 왼쪽 노인은 양팔을 얼쑤 하며 신이 났다. 기로소가 노인을 공경한다는 경로사상의 상징 장소라면 조정(朝廷)의 가장 높은 관료들의 잔치에 두 백발노인이 자유롭게 노는 장면은 더욱 흥겹다.
 
▼좌목(座目, 서열을 적은 명단으로 직책, 성명, 나이 등을 적는다)
 
 
▼이유(李濡 1645~1721, 大匡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정 1품, 75세)
 
▼김창집(金昌集, 1648~1722,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정 1품, 72세)
 
▼김우항(金宇杭, 1649~1723, 大匡輔國崇祿大夫 行 判中樞府事, 정 1품, 71세)
 
▼황흠(黃欽, 1639~1730, 輔國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兼 知經筵事, 정 1품, 81세)
 
▼강현(姜鋧, 1650~1733, 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정 2품, 70세)
 
▼홍만조(洪萬朝, 1645~1725, 正憲大夫 行 龍驤衛司直, 정 2품, 75세)
 
▼이선부(李善溥, 1646~1721, 正憲大夫 行 義興衛副司直, 정 2품, 74세)
 
▼정호(鄭澔, 1648~1736, 正憲大夫 漢城府 判尹 兼 知春秋館事, 정 2품, 72세)
 
▼신임(申銋, 1639~1725, 正憲大夫 議政府 右參贊 兼 知義禁府事 同 知經筵成均館事, 정 2품, 81세)
 
▼임방(任埅, 1640~1724, 資憲大夫 知中樞府事, 정 2품, 80세)
 
▼축시 등
 
 
 
 
 
 
 
 
 
 
 
 
 
 
 
 
 
▼監造官, 書寫官, 畫員
계첩 제작을 감독한 관리[監造官] 고정삼(高挺參)과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 이의방(李義芳) 외에도 그림을 그린 5명의 화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박동보(朴東普, 1663~1735 이후), 장득만(張得萬, 1684~1764), 허숙(許俶, 1688~?) 등은 모두 어진 도사(御眞圖寫)에 참여한 경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
 
▣ 참고 자료
▼경희궁 경현당
 
▼기로소 위치
기로소는 한성부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오늘날 광화문 교보빌딩과 KT 본사 빌딩 사이쯤이다.
 
▼기로소 영수각 건물 모양
기로소 건물 형태를 가늠해 볼 자료를 찾아봅니다. 영조는 51세에 기로소에 입소(기사 경회첩) 후 경상도 의성 고운사(義城 孤雲寺)에는 어첩을 봉안한 건물을 짓도록 했다. 왜 고운사가 선택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실과의 오랜 인연으로 짐작된다. 고운사의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은 서울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靈壽閣)을 본떠 지었다고 전한다. 몇 해 뒤에는 고운사 건물 이름을 "기로소 봉안각"으로 고쳤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1902년 51세 때 영조의 예를 따라 기로소에 들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덕수궁에서 진연(進宴)을 열었으며 고운사 기로소 봉안각을 수리하고 새롭게 단장해 건물 이름을 "연수전(延壽殿,현재 보물 지정)"으로 바꿨다.
 
연수(延壽)는 연년익수(延年益壽)에서 나온 말로 사람의 수명을 더 오래 늘려감을 말한다. 그러기에 출입문은 수명이 만세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만세문(萬歲門)이라 했다고 한다. 대한 제국이라고 선포해서 천세문(千歲門) 대신 만세문(萬歲門)이라고 적을 수 있었다.
연수전은 솟을 3문 형식의 정문인 만세문과 사방에 담장을 두어 사찰 내의 다른 구역과 구분되는 독립된 구획을 이루고 있다. 3단의 다듬은 돌 석축 위에 건물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한가운데 자리한 중앙 칸을 어첩(御帖) 봉안실로 삼았고 둘레에 툇간을 두었다.
 
유교국가에서 사찰 안에 기로소를 만들고 어첩을 봉안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왕의 무병장수를 바라고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사찰(자복 사찰)에 각종 혜택과 지원해 주었다.
출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민족문화대백과,탁현규,조선왕조실록.문화재 사랑, 문화유산채널,불교신문
▣제26회 노인의 날(2022.10.2)에 장수 지팡이 지급
올해 100세를 맞으신 어르신 2,398명에게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대통령 내외의 축하카드와 청려장(장수지팡이)을 전달했다.
청려장[靑藜杖,푸를 청(靑), 명아주 려(藜), 지팡이 장(杖)]은 명아주라는 풀로 만든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로서, 본초강목 등에 중풍예방,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원문보기
1719년 기로소(耆老所) # 기해 기사계첩
【역사평론】 문화재·역사·전
•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를 둘러보고.
• 왕과 함께 한 경로잔치 앨범. 1719년 기해(己亥) 기사계첩(耆社契...
• 서울 동묘의 420년 된 운룡도(雲龍圖)와 230년 된 비석(碑石)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역사평론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