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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집옥재(集玉齋)를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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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종로구(鍾路區) # 집옥재 # 팔우정 # 협길당
【문화탐방】
(2022.11.20. 10:41) 
◈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를 둘러보고.
경복궁 후원의 집옥재(集玉齋)와 팔우정(八隅亭) 및 협길당(協吉堂)을 개방해 다녀왔습니다.
경복궁 후원의 집옥재(集玉齋)와 팔우정(八隅亭) 및 협길당(協吉堂)을 개방해 다녀왔습니다.
 
 
▼ 집옥재
복도로 연결된 3채의 집옥재(集玉齋, 청나라 풍 건물), 협길당(協吉堂,전통 건물), 팔우정(八隅亭, 팔각 누각) 건물은 1876년 창덕궁 함녕전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1891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 사신 접견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893년 8월 1일

집옥재(集玉齋)에서 각국 공사(公使)를 접견하고 이어 사찬(賜饌, 왕이 내려준 음식)하였다.

1893년 8월 6일

집옥재(集玉齋)에 나아가 일본 공사(日本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1893년 8월 27일

집옥재(集玉齋)에서 오스트리아 사신〔與國使臣〕 로제트 비르게본〔洛蕊特畢格勒本〕을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1894년 3월 25일

집옥재(集玉齋)에 나아가 미국 공사(美國公使) 실〔施逸 : Sill, John M.B.〕 을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1896년 8월 31일

집옥재(集玉齋)에 모신 어진(御眞)을 경운궁(慶運宮) 별당(別堂)에 이봉(移奉)하라고 명하였다.

1891년 경복궁 집옥재는 고종이 당시 선진문물 수입국이었던 청나라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우리나라 궁궐 전각으로 기존의 경복궁 전각과 다른 형태로 화려한 장식에 벽돌 같은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과거 사진
 
 
 
집옥재(集玉齋, 보물을 모아 놓은 곳)의 현판은 중국 북송(北宋) 때 서예가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 주원장이라고 적혀 있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글씨가 왜 여기에 있나 착각하였다.
 
▼집옥재 주련
灑潤含膏 雲氣多壽(쇄윤함고 운기다수)
玉樹凌霄 雲煙煥采(옥수능소 운연환채)
西山朝來 致有爽氣(서산조래 치유상기)
太華夜璧 人聞淸鐘(태화야벽 인문청종)
寶花留硏 筆墨生香(보화류연 필묵생향)
稱物納照 鏡心彌光(칭물납조 경심미광)
천정에 새겨진 화려하고 정교한 연꽃무늬와 섬세한 꽃 조각은 감탄이 나올만합니다.
 
 
 
‘보물을 모아 놓은 곳’이란 뜻을 가진 집옥재 건물에는 4만여 권에 이르는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서양의 기계 문명, 과학 서적 등이 포함되어 있어 왕의 서재라 합니다. 그 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책은 장식용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많은 책을 고종은 과연 제대로 읽고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學而不思則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논어(論語)·위정(爲政)>
집옥재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정조의 물음에 대한 정약용의 시험 답안지'등 다양한 유물들을 볼 수 있고 각 방에는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역사서에서부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번역본 등 된 평소 읽기 힘든 여러 종류의 책(약 2500권)과 독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답니다.
 
 
집옥재 용마루의 용(龍)도 경복궁 다른 전각에서 본 용과는 다릅니다. 조선에서는 용의 머리를 얹어 놓는데 집옥재는 몸을 휘감고 올라가는 용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옥재를 지키는 돌짐승은 영락없는 조선식으로 동글동글 주먹코에 헤벌쭉 웃는 얼굴, 조선 특유의 해학미가 느껴지는 조각 기법입니다.
 
 
 
▼ 팔우정
팔우정은 팔각형 지붕을 가진 정자로 전통적인 한국의 정자는 창호를 두지 않으며, 정자 마루에 앉아서 바깥 경치를 감상하면서 연회를 보는 것이 보통이나, 외벽에 유리창문을 두고 있으며, 내부는 서재 같아 지금의 카페처럼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연회를 베푸는 용도의 정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과 같은 용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집옥재의 서편에 위치하며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협길당
협길당은 'ㄱ' 자로 되어 있으며 아궁이와 굴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협길당의 내부는 대청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옥의 특징을 잘 살린 건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9_4mIMcALkM
고종은 아관파천(1896년) 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경복궁 집옥재 대신 덕수궁에 1899년 준공된 옛 전각(수옥헌)은 서양식 1층 황실 도서관 건물이었으며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다이(J.H. Dye)가 설계하였다. 1901년 화재로 수옥헌이 전소되자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A. I. Sabatin)의 설계로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1904년 4월 14일 덕수궁 대화재가 일어나자 고종황제가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기고 이름을 중명전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나의 생각
조선 궁궐인 경복궁에 청나라 양식의 건물이 있으니 눈에 익숙하지 않다. 물론 구한말 무기공장이었던 번사창(飜沙廠.금융연수원 내))과 흥선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 별당(석파랑 내)에 청나라 양식의 건물이 남아있다.
고종이 어려운 구한말에 많은 돈을 들여 엄청 화려하게 집옥재를 짓고 많은 책을 갖춘 것이 과연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길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본은 조선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데 고종은 부국강병책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하니 망국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1868년

경복궁 다시 세움(재원 부족으로 당백전 발행)

1873년

건청궁과 향원정 건립

1876년

창덕궁에 집옥재 건립

1882년

임오군란(군인에게 봉급 미지급으로 인함)

1887년

건청궁에 경호 목적으로 전등 설치

1891년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옮김

출처: 경복궁 관리소, 문화재청, 문화유산 채널, 위키백과, 유튜브, 문화유산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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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보기
경복궁(景福宮) 종로구(鍾路區) # 집옥재 # 팔우정 # 협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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