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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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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식 자료
4. 문헌에 나타난 위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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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23.02.01. 17:36) 
◈ 4. 문헌에 나타난 위례성
우리나라 역사 속에 백제의 건국이 중국의 여러 문헌에 소개가 되어 있지만 그 중에도 지금부터 약 1300년 전의 ‘위서’와 ‘북사’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면 ‘위서’에 기록된 백제전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모두 옮겨 실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목   차
[숨기기]
 

1. (1) 위서(魏書)와 북사(北史)

 
우리나라 역사 속에 백제의 건국이 중국의 여러 문헌에 소개가 되어 있지만 그 중에도 지금부터 약 1300년 전의 ‘위서’와 ‘북사’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면 ‘위서’에 기록된 백제전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모두 옮겨 실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북사 백제전이 첫머리에 백제의 건국을 [始立國于 帶方故地(시립국우 대방고지)]라고 밝히고 있다. 즉 백제는 대방땅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다.
 
대방(帶方)이란 BC 108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설치했던 진번군(眞番郡)이 있었던 지방으로 지금의 멸악산맥 북쪽 자비령 이북의 땅이다. 대방의 남한계선이 어디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황해도 남쪽까지로 끌어내려 한강(漢江) 이북까지를 말하고 있으므로 다산(茶山)도 백제의 첫 서울인 위례성을 한강 북쪽인 서울 정릉동에 비정한 사실이 있다.
 
이 시대는 중국 본토에서 밀려오는 한문화의 영향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현존하는 기록은 없어도 이미 한문이 도입되어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믿어진다. 예를 들어보면 대방태수(帶方太守)의 명(銘)이 있는 묘비(墓碑)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도 당시의 한자 사용의 척도를 어느 정도는 알 수있다.
 
대방은 BC 82년 이후 요동지방의 실력자였던 공손씨(公孫氏)가 동방의 여러 군현을 장악하고 있을 때 지금의 황주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때는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랜 뒤이므로 주변의 여러 부족들이 저마다 결속되어 한의 세력에 저항하기로 하고 어느 경우는 한의 막강한 세력에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중국의 세력이 한반도의 서북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더구나 그들 세력이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었던 대방의 땅에서 백제가 건국하였다. 그것도 동일지방의 부족이 아닌 북방 부족의 무리가... 과연 주변의 부족들은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백제가 건국된 해는 BC 18년이다. 이 무렵의 황해도 지방은 어떠했을까. 한사군(漢四郡)의 종주국인 전한(前漢)이 멸망한 것은 AD 4년이므로 백제가 대방고지에 건국한 것은 한나라의 멸망보다 22년 앞서는 일이다.
 
한동안 강성했던 한나라도 이제는 서서히 그 세력이 약해지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주변의 토착세력이 강력하게 결속되어 저항을 할 때라고 보면 먼 북쪽의 졸본지역에서 이곳까지 남하하였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일행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며 임진강과 예성강을 건너 다시 남쪽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때 한강의 남쪽에는 강력한 마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육로(陸路)보다도 바다를 통하여 강화해협을 빠져나와 서해안의 어딘가에 올라 ‘직산위례성’에 이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몇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백제가 대방고지에 건국을 하고 그 해인 BC 18년에 곧바로 남쪽으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황해도의 일각에서 수년을 머무르다가 옮겨온 것인지는 뒤의 역사의 복원(復元)편에서 밝히고자 한다.
 
 
 

2. (2) 삼국사기

 
‘서력기원 전 후라는 시기는 우리나라로서는 굉장한 태고(太古)이며 아직 무슨 석기시대에 있었던 것 같이 생각을 가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삼국의 건국연대에 관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당시의 일반적인 정세나 고고학(考古學)적 자료 특히 풍납동(風納洞)의 토성 발굴에서 나타난 백제초기의 문화 수준이나 토기상으로 보아 삼국의 건국은 BC 1C나 AD 1C경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우리들은 삼국사기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임을 버리고 사료로서 다시 한번 과학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이상의 글은 김원룡 박사의 ‘삼국시대 개시에 관한 일 고찰’의 일부다. 백제가 건국된 BC 18년을 아득하게 안개 속에 묻혀 있는 태고의 원시사회(原始社會)로 보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쓴 글이라고 본다. 앞에서도 짧게 밝혔지만 이때는 한자(漢字)가 이미 들어와 상류층에서는 이미 사용의 폭도 넓었을 것이며 언어와 문자의 활용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일행은 거주지(居住地)가 만주이다. 중국의 발달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한반도에 들어오는 문화의 관문구실을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미 중국문화에 젖어 있었고 한자의 사용도 하였을 것으로 보아 태고의 신비(神秘)처럼 바라보아서도 안될 것으로 본다.
 
1145년에 편찬이 완료된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이를 주도하여 엮어 가면서 방대한 서적을 참고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견문을 들었으며 실제 답사도 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편찬된 삼국사기에 영향을 끼친 책자가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1145년 이전의 작품이다.
 
그것은 통일신라 때의 사서(史書)이거나 지지서(地志書)이다. 삼국사기 첫머리에 나타나고 있는 ‘위례성’은 이것으로 보아 고려 이전의 기록에 이미 적혀 있었다고 본다면 현존하는 책자가 없을 뿐이지 위례성에 대한 기록은 이미 3국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사서(史書)에 위례성을 논한 것은 삼국사기가 가장 먼저이다. 여기에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의 시조조(始祖條)를 실어서 백제의 건국과정과 위례성이 우리고장의 직산 지방이었음을 확인하여 본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惑云朱夢 (백제시조온조왕 기부추모 혹운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는 추모이고 또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의 건국 설화가 모두 전설적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시조는 그렇지 않으며 계통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고구려나 신라의 건국설화는 란생설(卵生設)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백제의 건국설화는 그와는 다르다. 뚜렷하게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를 밝혔다. 이와 같이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 계통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와서 살았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쪽으로 옮겨온 그들은 고구려의 영토권 내에서 벗어나 그보다도 훨씬 남쪽에 건국한 사실이다.
 
이들이 북방계의 부족임을 증명할 만한 사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에 있는 층단식 적석총의 구조 형태가 압록강 부근의 즙안지방의 적석총 형태와 같다. 이들 고분은 모두 북방식 고분 형태로 남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고구려에서 벗어난 사실은 그들 일행이 건국을 위한 이동이 아니고 부왕인 주몽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사실 때문에 일종의 망명행각이라고 본다. 망명의 행각중에 대방의 고지에 그들이 세운 백제도 낙랑과 마한 사이였을 것으로 보며 많은 북방의 이동 민족과 한사군에 항거하는 토착세력과 이들이 합세하여 강력한 해양국가를 건설하고 주변과 투쟁하면서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던 기성세력의 반발로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는 물길을 통하여 남하한다.
 
 
[遂與烏干馬黎等 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수여오간마려등 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십신과 더불어 남쪽으로 길을 떠났고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뜻이다.
 
 
일행과 함께 남하했던 열사람의 신하들은 온조를 포함한 십제공신(十濟功臣)을 말한다.
 
열사람의 신(臣)을 정확하게 밝히면 온조(溫祚),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전섭(全聶), 조성(趙成),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등이다. 이중 왕족인 비류, 온조는 부여씨(扶餘氏)로 오늘날의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아홉분의 성씨 중에 다섯분의 성씨는 현재에 전해지고 나머지 네분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도에 변성이 된 것으로 본다.
 
현전하고 있는 다섯 성씨 중에 전섭(全聶)과 조성(趙成)도 온조와 함께 남하했다가 이곳 직산지방에서 백제건국에 큰 공적을 남기고 인근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개국공신 조성은 경양군(慶陽君)에 피봉되었고 전섭은 환성군(歡城君)에 피봉된 것을 보면 경양과 환성은 모두 직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지방명이다. (경양은 경양포로 오늘날의 아산만의 일각이고 환성은 천안의 옛 지명이기도 하며 천안시에서 서남향에 있는 풍세면 일대를 이른 말이다.)
 
온조를 보필하고 백제건국에 큰 공을 세운 조성은 명문가인 직산조씨 시조로 백제대장군이며 개국공신의 수공신(首功臣)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직산지방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의 묘소는 직산의 성산 사동(蛇洞)에 있다고 한다. 1985년 직산조씨의 문중에서 신도비(神道碑)를 시조가 정착했다는 직산면 군동리에 세운 바 있다.
 
앞에서 밝힌 직산지방이 위례성이었다는 사실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편 천안 전씨(全氏)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전섭(全聶)은 관계에서 물러나 지금의 천안군 풍세면에 우거하며 살았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이 지방에 군거하고 있으며 세계(世系)를 62세(世)로 백제건국과 연대를 거의 같이 하면서 시조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워 그의 온조왕 보필의 공적과 백제건국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씨와 전씨 양가의 시조가 이곳에 머물러 누대를 살아왔으며 봉군의 작위를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과 위례성의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있으며 ‘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임을 의심할 바 없게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직산 조씨의 시조 경양군 조성과 천안 전씨의 시조 환성군 전섭의 봉군에 관해서 알아본다. 봉군(封君)이란 국가가 공신이나 훈신에게 내리는 작위의 하나로 대개 봉군을 받는 사람이 사는 지방명을 붙이거나 아니면 특수한 업적에 따라 짓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 두 분의 봉군은 지명을 따라 내려진 것으로 오늘날의 경양포와 천안지방이다. 십신이 온조와 더불어 백제건군의 작업을 할 때에는 BC와 AD가 교체되는 아득한 시기이다. 약 2000여년 전에 과연 봉군이라는 제도가 있었을까 하면서 걱정하는 이가 없지 않다. 허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김원룡 박사의 말을 다시 빌려 추려보면 “삼국의 초기를 신비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류와 온조가 많은 부족을 이끌고 남하하기 이전의 생활 근거지는 분명히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다. 즉 만주의 졸본강 유역을 가르킨다. 그것도 중국문화가 펼쳐진 곳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안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 주변에도 그것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때다. 전한(前漢)이 건국되어 한참 전성을 누리다가 이제 멸망의 사양길을 걷는 때인지라 공(公)과 공(公)이 숱하게 많이 봉해졌음을 사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지역에 살던 그들이 봉군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들이 건국하기 수백년 전부터 중국의 영지 안에서는 봉군 행각이 있었음을 덧붙여 둔다.
 
또 한편으로는 봉군의 작위는 후손들이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나는 봉군행각은 고려시대에 와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천안(天安) 전씨(全氏) 전섭(全聶)의 후손이나 직산(稷山) 조씨(趙氏)의 후손들이 려조(麗朝)에 와서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진 것으로 보는 이도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그들(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山)에 올라 가히 살 수 있는 땅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조(溫祚王條) 앞의 글에서 이미 대방고지 입국우(帶方故地 立國于)가 밝힌 바와 같이 이미 건국하였다는 백제인지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번째의 도읍지를 구하는 일이 되었지만 첫 번째의 도읍지는 황해도(黃海道)지방의 어느 곳에서 남하(南下)하여 오는 과정에 건국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일정한 지역을 도읍지(都邑地)로 정하고 머물렀거나 정부를 구성할 만한 힘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도읍지인 위례성은 삼국사기의 위에 적힌 구절(句節)로부터 시작된다.
 
한산(漢山 : 오늘날의 서울, 경기 지역)땅에 다다른 비류와 온조일행은 안성천변(安城川邊)을 타고 부아산(負兒山)에 올라서 도읍지로 적합한 땅을 찾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아악(負兒嶽)을 조선시대의 초기 석학(碩學) 서거정(徐居正)이나 경서에 밝았던 조선후기의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또 경기도 광주지방을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주장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남(河南 : 한강남쪽)에서 부아산(負兒山)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한강의 북쪽 하북의 북한산(北漢山)에서 찾았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을 삼국사기의 기록인 부아산(負兒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같은 사실을 모든 문헌이 그렇게 실었다.
 
“부아산(負兒山)은 인수봉(仁壽峰)의 옛 이름이라고” 또 한산(漢山)에는 부아산(負兒山)이라는 산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부아산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용인군에 부아산이 존재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부아산은 용인군의 기흥읍(器興邑) 지곡리(芝谷里)와 남리와 서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역사는 사료에 의하여 복원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도 없고 또 사료의 내용이 변경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새롭게 개척되어 가고 발굴되어 잘못된 옛것을 바로 이끌어 가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도리이다. 부아악(負兒嶽)을 인수봉(仁壽峰)에 비해서야 되겠는가. 서거정(徐居正)도 정약용(丁若鏞)도 잘못된 학설을 말했다.
 
간단한 반론으로 만약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이 부아악(負兒嶽)이라면 한강이 인수봉의 북쪽에 있어야 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에 남한은 한강의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북대한수(北帶漢水 : 북쪽으로 한강이 띠를 둘렀다는 뜻)]가 남대한수(南帶漢水)로 고쳐써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한산(漢山)의 중심지는 경기도 광주다. 삼국사기지지에 보면 “한산군 금광주 영현이금이천현 금용구현 (漢山郡 今廣州 領懸二今利川縣 今龍駒縣 : 한사군은 오늘날의 광주다. 광주에는 두 고을의 속현이 있는데 하나는 ‘이천현’이고 또 하나는 ‘용구현’이다. 이 구절로 보아 용인이 한산땅에 있는 부아산(負兒山)이 틀림없다.
 
만주지방의 고구려 땅을 남쪽으로의 길을 떠났던 비류와 온조는 건국공신인 구신과 더불어 대방고지를 떠나 해로(海路)를 통하여 미추홀(아산군 인주면 밀두리)에 도착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가 되는 안성천(安城川)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이곳 부아산에 올라와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도읍으로 정할 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찾은 곳이 바로 위례성(직산지방)이다.
 
삼각산의 인수봉이 부아악이라고 주장하였던 서거정은 약 600년 전의 사람이라 한산땅에 부악악이 있었던 것을 몰랐다.
 
하지만 오늘날의 석학이며 사학계(史學界)의 원로(元老)들이 아직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74년 ‘학술원지’에 발표한 ‘위례성고(慰禮城考)’에 한산땅에서 그런 산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잘라 말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역사지리학자인 우락기는 ‘역사지리’의 ‘백제위례성고’에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하여 부아악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러면서 위례성은 경기도 광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만 하였다.
 
사학계의 원로나 석학들이 용인에 부아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광주 위례성설을 주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며 이제 부아산을 찾아 나서 본다.
 
용인군의 부아산 위치를 정확하게 말하면 용인민속촌을 들어서는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지곡천(芝谷川)이라는 작은 내가 흐른다. 지곡천은 민속촌의 중앙부를 흘러내리는 산간 계곡의 물로 신갈쪽으로 서남간에 이른다. 이 내를 건너는 지곡교를 넘어 지곡리를 향하하여 약 6km가량 남쪽으로 버스길을 따라 가면 지곡리의 상동부락인 ‘사기막골’에 이른다. 부락의 동쪽 끝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약 1km쯤에 높이 솟아 있는 아기 업은 모습의 부아산이 보인다. 아기 업은 모습 그대로 부아산이다. 산의 정상에는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펑퍼짐한 곳이 있고 오르는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동경(東經) 120° 10′ 북위(北緯) 37° 14′의 지점이다. 동쪽으로는 용인읍 남리이고 서쪽으로는 기흥읍 서리이다. 이곳 부아산에서 안성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안성읍의 서운(瑞雲)과 공도(孔道) 지방까지를 위례성의 범위 속에 속했다고 보면 십신(十臣)이 올라 도읍지를 찾았다는 부아악은 분명히 이곳이다. 또 부아산이라는 엄연한 명칭이 붙어있는 산이 있는데 여기서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을 찾지 않고 하북(河北)땅의 북한산의 제1봉인 인수봉을 터무니 없이 부아산에 비정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이곳 부아산을 올라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눈 끝에 펼쳐지는 경기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았다고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경기도 안성과 이웃하고 있는 용인 이동면(二東面 : 부아산의 남쪽 기슭)에서는 수년 전에 많은 백제 초기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촌로들의 입을 빌어 들었다. 또 부아산 서쪽 지곡리쪽에서 오르다가 옛 도요지를 발견하고 ‘사기막꼴’이라는 동이 이름을 새삼스럽게 하였다.
 
북한산의 인수봉을 부아산이라고 처음 밝힌 사람은 서거정이다. 그는 한강에서 이백리나 떨어져 있는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두에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라고 수정하였음.) 그 설을 그대로 이어 받았던 정약용은 ‘인수봉’ 근처인 서울의 북동쪽(정릉일대)을 위례성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서울의 세검동이나 면목동 등지를 가리키고 있다. 모두가 타당치 않은 주장이다. 이제 부아산의 위치와 지명을 확실히 밝힘으로써 삼국사기의 기록인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이 용인의 부아산임을 증명하였고 아울러서 비류와 온조 일행이 십신과 더불어 바라고보 도읍지로 정했다는 위례성은 틀림없는 ‘직산위례성(입장)’인 것을 다시 한 번 못박아둔다.
 
① 북대한수(北帶漢水)   ② 동거고악(東據高嶽)
③ 남망옥택(南望沃澤)   ④ 서조대해(西阻大海)
 
북쪽으로는 한강이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나타나는 직산위례성에 대한 지형을 방향별로 기록한 것이다. 온조왕을 보필하던 십신이 위와 같은 말을 한 곳은 부아산의 정상에서이다. 도읍지로 지목된 직산위례성(입장)으로 그들은 자리 옮겨 도읍지를 만들면서 위와 같은 지형지세를 논한 것이다.
 
①의 북대한수는 지리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동으로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이 연속하여 높은 봉우리를 만들어 솟아 있는 “남으로는 평택평야와 안성평야로 이루어지는 경기평야가 펼쳐지고 서쪽으로 남양만엣 아산만에 이르는 큰 바다에 박혀있다.” 이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것은 1145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본기가 완성된 것은 그보다 2~3년쯤 앞당겨 볼만하다. 또 편찬자인 김부식이 자기 스스로 ①②③④의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참고했던 많은 고서(古書)에서 얻은 글을 옮겨 쓴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묘청의 난이 평정된 10년이나 뒤의 일인지라 김부식은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었으므로 밖의 출입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눈이나 손으로만 쓴 글이지 결코 발로 쓴 글은 아니다.
 
 
 

2.1. [북대한수(北帶漢水)]

 
십신(十臣)이 온조에게 위례성의 지형지세를 설명하고 도읍지로 알맞은 곳이라 주장한 말 중의 첫 번째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고 개국을 하였다가 후에 백제로 국호를 고쳐 불렀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윗글 북대한수다. 물론 광주를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비정하고 있는 설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만 직산위례성을 초도(初都)로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때까지 일반적으로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앞서 밝힌 부아악을 북한산으로 볼 때 북한산에서 직산까지는 2백여리나 되는데 어떻게 그곳이 도읍지로 알맞은 곳이라고 하였는가? 다시 말해서 바라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을 어떻게 망하거지지(望河居之地)라고 하였는가, 그러므로 북한산에서 바라보아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보았다면 경기도 광주라는 주장이다. 경기도 광주가 북대한수로 알맞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광주를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통설이다.
 
6백년 전에 직산에 와서 제원루(濟源樓 : 옛날 지금의 직산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졌던 누각)의 루기(樓記)를 썼던 서거정은 처음에는 직산위례성을 부인하다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할 때에 많은 서적을 읽고 참고해 보니 역시 직산이 온조왕이 세운 백제의 첫 서울임에 의심할 바 없다고 처음의 고증을 뒤엎고 새롭게 직산 위례성설에 생각을 함께 하였다. ‘서거정’의 처음 주장을 살펴보면 부아산을 북한산으로 확정지어 놓고 볼 때 의심이 가는 점이 많아서 그렇게 고증한 것이요 뒤에 방대한 서적을 두루 살펴보고 광주위례성설을 부정한 것은 문헌에서 고증을 얻었기 때문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앞의 것은 지형학적 고증이요, 뒤의 것은 문헌에서 얻은 고증이라고 하겠다.
 
사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귀중한 것이다. 더구나 문헌에서 얻은 사료는 귀중한 것이어서 거의가 믿을 만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두계 이병도 박사는 그이 논문 ‘위례고(慰禮考)’에서 서거정의 주장을 이렇게 평하였다. 서거정은 “정당하게 의심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전래의 구설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서거정같은 대석학이 전래되는 전설에 혹(惑)하여 자기의 고증을 반복할 까닭은 없다. 그가 두루 읽고 참고하였던 방대한 서적이 무엇무엇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전하지 않는 책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 총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서적만 20만권을 불태워 없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은 직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에 의심이 없다고 하였으나 조선 말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서거정의 직산위례성설을 논박하면서 서울의 동쪽 오늘날의 정릉지방을 위례성리고 주장하였으나 이것 또한 두계선생에 의해서 잘못 비정되었음이 밝혀졌고 또 밝혀진 그 학설도 요즘에 많은 공박을 받고 있다.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남쪽으로 옮겨 왔던 9공신이 간한 ‘북대한수’는 부아산을 기점으로 하여야 옳다고 보낟. 직산위례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온조에게 주청한 말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용인에서 한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또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위례성을 기점으로 보았을 때) 천안시 입장에서 안성을 거쳐 이천까지는 생각보다도 가까운 곳이다. 이천을 옆으로 끼고 도는 강이 바로 한강이다. 북한산에서 광주를 바라보고 북대한수라고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광주(廣州)를 첫 서울로 주장하는 광주군 신장읍 지방을 잠시 살펴본다.
 
이곳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많이 합일되는 지방이다. 특히 북대한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이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이 뚜렷하고 그 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궁궐터는 분명히 백제왕궁의 옛터로 확인되었다.
 
궁지(宮趾)로는 너무 협소한 듯 하지만 금단산을 진산으로 춘궁리 앞에 펼쳐지는 작은 들(광주군 신장읍)은 한 나라의 수부(首府)로는 알맞은 곳이다. 눈앞에 흘러가는 한강이 수로교통을 돕고 동쪽으로 높이 솟은 준령들이 자연의 방패로 인간 활동에 매우 알맞은 곳이다.
 
더구나 남한 산성쪽에서 흘러 내려온 크고 작은 내는 농사에 알맞고 지금도 논과 밭에서는 많은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농사에 불편을 줄 정도라는 말로 보아 백제의 서울이었던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수부(首府)를 지키기 위하여 이웃에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을 쌓은 것을 보아도 백제의 수도였음에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이곳이 위례부락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위례라는 말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백제가 처음 수도로 정했다는 위례성은 아니다.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BC 5년에 서울을 옮겨 갔다는 한산(漢山)이다. 옮긴 뒤에도 옛 서울(직산 위례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위례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경기도 광주군의 백제 도읍지는 직산위례성에서 옮겨진 두 번째의 도읍지로 개로왕 때까지의 수도라고 보아야 옳다.
 
 
 

2.2. [동거고악(洞據高嶽)]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에서 위례성의 지형지세를 설명한 것중에 두 번째 일컫는 말이다. 위에 밝혔던 경기 광주지방이나 충남 직산이 모두 이글에 꼭 알맞은 지형들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지세가 일반적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현상이라 어디서나 나타나는 형세이지만 직산위례산 인근 지방은 윗글 동거고악에 맞추어 만들어 놓은 지형과 같다.
 
한반도의 척추산맥인 태백산맥에서 한가닥의 지맥이 갈려 영서지방을 이루고 그 줄기가 뻗혀서 꾸불꾸불 감돌다 충주의 탄금대를 만들고 서쪽으로 더욱 뻗어 안성 지방에 이른다. 뭉쳐진 산의 기세가 주먹같이 솟아올라 청룡산을 이루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다 위례산을 만든다. 앞으로는 망망대해 아산만과 경기평야를 굽어보며 뒤로는 내륙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그리면서 그 남쪽에 다시 불끈 솟은 성거산을 빚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 목천(木川)의 진산인 흑성산이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이 태산준령이 이어진 위례산의 서쪽 기슭에 도시를 세우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했다. 위례산의 서쪽에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는 가히 한나라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당이다. 여기가 바로 위례성이다.
 
온조가 세웠다는 하남 위례성이다. 이 위례성에 살던 백성들에 의해서 쌓아진 것이 ‘위례산성’이다. 평지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이 갑작스러운 적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항진하였던 곳이다. 직산지방(위례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지형임을 설명한다. 이곳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평야다. 남서북의 어느 쪽에서 적군이 침입하여도 피할 곳은 오직 동쪽뿐이다. 북쪽은 경기도 오산에서부터 직산까지는 산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낮은 야산은 있으나 이렇게 낮은 구릉에 전쟁을 수행하는 성을 쌓을 수는 없기 때문에 먼 동쪽의 위례산을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서쪽으로도 마찬가지다.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평야에는 위례성민에게는 바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낮은 언덕과 같은 산지는 있어도 성민이 웅거할 만한 성지는 없기 때문이다.
 
백제는 300m 이상의 고지대에 성을 쌓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300m 이상의 산지에는 백제성이 있지 않다.”고 어느 학자가 주장한 사실이 있다. 경사가 급하게 올라선 산이라 산의 중턱에 성을 쌓고 적군과 싸울 수는 없다. 식량과 전쟁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산의 정상에 쌓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또 전쟁에 패전하여 백성들이 도망을 친다하더라도 산너머의 도로를 이용하였다고 보면 위례성이 산의 정상부분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동거고악이라는 위례성 지방의 지세 설명은 아주 정확하게 타당한 구절이라고 본다.
 
 
 

2.3. [남망옥택(南望沃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위례성을 지형으로 설명한 세 번째의 글이다.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직산을 지나 남쪽으로는 경기평야의 남단이다. 잠시 윗글과 경기도 광주의 이성산성 지방의 춘궁리와 비교를 해보자. 춘궁리의 남쪽은 남한산성이다.(경기 광주를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주장하는 대목 중 가장 맞지 않는 글이다.) 신장의 남쪽은 험한 산지다. 더 남쪽으로는 용인 지방으로 연결되어 산지가 연속된다.
 
즉 광주산맥의 중심부분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남망옥택이라고 하겠는가. 옥(沃)은 기름진 옥토, 즉 넓은 평야지대를 말함이요, 택(澤)은 소택(沼澤)을 말함이니 풍부한 물을 가르킨 말이다. 그러나 광주의 어느 곳에서 보아도 남쪽으로 펼쳐지는 들은 없다. 굳이 옥택(沃澤)을 찾는다면 지금의 성남시와 잠실쪽을 가리키는 이는 서망(西望)이나 북망(北望)이지 남망(南望)일 수는 없다. 광주산맥이 연속되는 낮은 구릉사이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들은 볼 수 있어도 넓은 들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부아산의 남쪽이나 직산의 남쪽에 펼쳐지는 들은 참으로 넓다. 여주와 이천을 빠져나온 들이 다시 내려가 아산 땅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평야는 가히 일국의 도읍지로 이보다 더 적합할 수는 없다. 택(澤)은 못으로 물을 뜻함이니 오늘날의 평택지방이다. 동쪽의 태산준령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한데 모여 큰 못을 이루어 농사짓기에 알맞음을 나타낸 말로 직산위례성설을 더욱 굳게 하여 주고 있다.
 
 
 

2.4. [서조대해(西阻大海)]

 
삼국사기의 위례성의 지세를 설명한 것 중에서 마지막의 구절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우리나라의 지형은 어디서 보아도 서조대해다. 서쪽으로는 넓은 바다에 막혔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직산지방이나 광주 춘궁리지방 모두 공통된 지형이다. 그러나 광주지방보다 직산지방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은 위례산의 산성에 서서 서쪽을 보면 멀리 서해(아산만)가 한눈에 든다. 성환 북쪽을 지나는 안성천이 평택들을 지나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것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바라다 본 그대로 서조대해다. 광주의 남한산성이나 이성산성에서 서해까지는 백여리를 가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직산위례성쪽에 삼국사기의 글에 훨씬 접근하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문(序文)에 나타난 위례성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지형 및 지세와 지명에 대하여 부설(附設)하였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위례성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아보면서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2.5. □ BC 17년(온조왕2 조에)

 
말갈연아북경 모인용이다허 의선병적곡위단수지계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許 宜繕兵積穀爲担守之計
말갈은 우리의 북쪽경계에 연하여 있으며 그 사람들이 용맹하고 꾀가 많으니 마땅히 군사를 정비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이들을 막는 계책을 세워야 하겠다.
 
말갈족에 대한 경계는 건국 초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BC 17년경 백제의 북쪽(오늘날의 황해도와 경기도의 남쪽)은 말갈족의 거주 지역은 아니다. 아직도 한(漢)의 세력이 영향을 받던 지역으로 건국한지 1년이 지나지 않는 백제가 그 지역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으며 동북쪽의 강원도 지방으로 오늘날의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이 말갈의 거주지역으로 본다. 그들이 직산지방에 침입할 수 있었던 길은 대략 두 가지로 하나는 직산의 북쪽인 원주쪽에서 안성지방으로 오는 길과 또 하나는 원주지방으로부터 오늘날의 충북의 영서지방을 거쳐 진천, 죽산 지방으로 오는 길이다. 이와 같은 길로 삼천여의 말갈족이 직산에 침입하여 온 기록으로 타당하다. 만약에 말갈의 위치를 삼국사기 그대로 북쪽으로 본다면 예성강 이남까지 영향을 끼쳤던 낙랑과 대방의 세력은 무엇인가? 위 기록에 나타나는 위례성은 분명 직산이다. 온조왕이 건국하고 아직은 천도를 하기 이전의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2.6. □ BC 11년(온조왕8 조에)

 
말갈적삼천래위위례성 왕폐성문불출 경순 적량진이귀 왕간예졸 추급대부현일전극지 살노오백여인
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釜峴一戰克之 殺盧五白余人
말갈족 삼천여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므로 왕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10일이 경과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병을 뽑아 거느리고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이기고 오백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위의 기록은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나타나는 위례성에 대한 기록이다. 또 3천여의 말갈족이 침입한 곳은 광주지방이 아니고 직산 위례성이다.
 
 
 

2.7. □ BC 6년 (온조왕13 조에)

 
왕도노구위남 오호입성 왕모훙 년육십일세
王都老嘔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위례성에 늙은 암여우가 남자로 변시하였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가 61세로 돌아갔다.
 
백제의 도성인 직산위례성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외침인 전쟁이나 아니면 내란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사건으로 왕은 서울을 한산(광주지방)으로 옮기고자 그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한산으로 이사시킨 사실이다.
 
 
 

2.8. □ BC 6년 (온조왕13 조에)

 
추칠월 한산하립책 이위례성민호
秋七月 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칠월에 한산 아래에 나무로 울타리를 세우고 위례성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5개월 전에 직산위례성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서울을 한산으로 옮긴 사실이다. 윗글에서 광주지방을 위례성으로 보았다면 위례성에서 위례성으로 옮기는 사실인데 굳이 한산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2.9. □ BC 2년 (온조왕17 조에)

 
낙랑래침 분위례성
樂浪來侵 焚慰禮城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는 삼국사기의 세 번째 기록이다. 위의 사실은 BC 5년에 한산으로 천도한 뒤의 사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례성은 직산위례성이다. 서울을 옮긴지 3년만에 있었던 사건으로 서울을 옮기느라 분주했던 틈을 타서 쳐들어 왔던 사건이다.
 
윗글에서 말갈이 아니고 낙랑이 침입한 사실은 온조왕 재위 기간에 없었던 일이다. 이는 지극히 타당한 글로서 백제의 북쪽에는 낙랑이 있었던 사실을 알아두어야겠다. 낙랑이라 하면 한사군의 하나로 지배계층은 한족이고 피지배계층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낙랑이 쳐들어온 사건은 한족이 침입한 사실로 말갈족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전국에 위례라는 말이 있는 곳은 직산지방 뿐이다. 위례산, 위례성 등지가 바로 그곳이다. 필자는 여러 차례 광주의 남한산성 근처와 이성산성 지방 그리고 한강변의 방이동 또 가락동, 풍납동 등지로 위례의 흔적을 찾았으나 어디서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최근에 지은 위례초등학교니 위례마을로 가는 길이니 하여 교명이나 길이름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직산 위례성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부터 위례다. 그보다 이전에 이미 위례라고 하였을 것이다.
 
 
 

2.10. □ AD 18년 (온조왕36 조에)

 
추칠월 축탕정읍성
秋七月 築湯井邑城
 
윗글로 보아서 탕정이란 오늘날의 아산군 탕정면을 이르는 말로 오늘의 온양온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직산 위례성과 탕정성의 거리는 약 10km로 매우 가까운 거리다. 온조왕은 직산위례성을 견고하게 하기위해 서남간에 있는 탕정성을 탄탄하게 쌓은 것으로 안다.
 
 
 

2.11. □ AD 23년 (온조왕41 조에)

 
발한인동북제부락 십오세이상 수영위례성
發漢人東北諸部落 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한강 동북쪽의 여러고을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축하였다.
 
이상의 기록도 한산으로 천도한 이후의 사실이나 한강 남쪽의 어디에서도 위례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충청남도 연기군의 향토사학가 김재붕(金在鵬)씨는 AD 371년(근초고왕26)의 기록에 ‘이도한산(移都漢山)을 들어 백제가 직산위례성으로부터 광주지방으로 옮겨 간 것은 이때이며 온조가 건국한 BC 18년부터 AD 371년(근초고왕 때)까지 389년 동안 직산이 백제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며 지금도 계속 지표조사에 여념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위례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8대 책계왕의 기록이다.
 
 
 

2.12. □ AD 286년 (책계왕)

 
왕징발정부 즙위례성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왕은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김재붕씨의 학설대로라면 위에서 지적한 위례성이 틀림없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을 굳힐 까닭은 없다. 직산위례성이 수도(首都)였던 기간이 BC 18년에서 AD 371년까지 389년간이나 계속되었다면 약 400년의 정치도시로서의 어느 정도의 면모는 갖추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리 아득한 옛날이라고 하지만 40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다. 더구나 문물제도가 완벽치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상류계급)은 북쪽에서 옮겨온 발달된 문화 속에서 살다온 사람들이다. 더구나 왕권이 절대시 되던 때로 약간의 제도적인 구색이 맞았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도성의 성곽이나 성문 또 궁궐은 있었을 것으로 보며 제단이나 종묘 등 부대시설에 있어서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한나라의 수부(首府)였다면 몇 천의 인구가 살았으며 많은 가호(家戶)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 당시의 와당이나 초석 등 아니면 거주지의 일부라도 발견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직산위례성의 400년설에 첫째가는 의심이다. 현재 지표상에 몇 가지 사료가 나타나 있는 것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BC 18~BC 5년까지의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지표조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나 그간 수거된 사료가 매우 드물다.
 
기원을 전후한 이때는 이미 철기문화가 크게 발달되었던 때이며 아울러 수도작문화(水稻作文化)가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때로는 정복사업도 활발하게 일어났으므로 많은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어야 옳다고 본다. 허나 그렇지 않다. 앞으로 지표조사가 활발하게 전개되리라고 생각되며 이미 충남대학이나 영남대학에 의하여 1차의 지표조사가 끝났다. 발굴결과가 지면을 통하여 발표가 되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성곽의 일부를 찾아내고 사산성곽(蛇山城郭)이니 목지국(目支國)의 성곽이니 하여 임의대로의 발표는 있었어도 아직은 정확하지 못하다 계속된 지표조사가 있을 것으로 본다.
 
위위 즙위례성(楫慰禮城)은 이와 같은 주장으로 직산위례성이다.
 
 
 

3. (3) ‘한국사(韓國史) 및 진단학보(震檀學報)

 
위례성으로 확정되고 있는 직산지방은 현재의 천안시 직산면 일대와 성환읍 그리고 성환읍에서 북쪽으로 약 5~6km 지점까지 또 동쪽으로 성거읍과 입장면에 이르는 2개읍과 2개면의 광활한 지역을 마한(馬韓)의 읍락국가(邑落國家)이며 진(辰)의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의 옛터로 한국사 및 진단학보에 발표되었던 두계(斗溪)의 논문(삼한문제의 신고찰)에서 직산위례성과 관계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직산은 전설상 백제초기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일러오는데 직산위례성만은 근세 이래 선비들의 비판거리가 되어 지금은 대개의 학자가 부인한바 되었으며 나도 역시 백제의 위례성은 실상 지금의 직산이 아니라 한강유역의 땅으로 최초의 것은 한강 이북의 서울 부근 강남으로 천도한 이후의 도읍지는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의 땅이라고 생각되니 나의 견해의 기초는 다산(茶山)의 ‘위례성고(慰禮城考)’에 있으므로 그것을 읽어 주기 바란다. 이와 같이 직산은 백제의 고도 하남위례성의 소재지가 아니라면 그 전설은 후세에 와전 혹은 만들어진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으나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곡절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그러나 곡절은 단순하다고 생각된다. 직산지방이 백제의 첫 서울이 아니더라도 백제이전 오랫동안 역사를 가지고 있던 한강이남 제1의 옛도시로 저명하였던 것이 뒷날 그곳이 백제에 공취되어 주객이 전도된 것을 후세에 와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남(河南) 제1의 고국(古國)을 든다면 진국(辰國.마한)에 비할 나라가 없으니 직산지방은 옛 진국의 정치적 중심지(마한 전기의 수도)로 추정함에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단, 주의할 것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직산은 충남 천안시의 일개 면명 또는 일개 지명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아니하나 옛날에는 직산면을 비롯하여 성거읍, 입장면, 성환읍을 포함한 하나의 현(縣)이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직산은 옛 직산현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 : 백제건국 이전 한강 남쪽에 성립되었던 부족국가)의 정치적 중심지가 해안지방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직산지방이야말로 실로 이 사실에 해당되는 곳이다. 지금 그 지리를 살펴보면 직산 및 그 부근의 땅은 동남으로 성거산을 등지고 서북으로 성환과 평택의 큰 들을 바라보면서 서해에서 가장 깊은 아산만에 임하고 성거산 및 안성지방에서 시작되는 여러 갈래의 물길은 이 평야에 모여들어 서쪽으로 흘러서 시작되는 여러 갈래의 물길은 이 평야에 모여들어 서쪽으로 흘러서 아산만에 드니 소위 안성천이 이것이다. 안성천의 하류 쪽은 비교적 땅이 넓어서 선박의 통행이 성황 하였음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고 평택 동쪽으로는 내폭이 좁아 배가 다니기에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그 동쪽까지 선박의 출입이 있었던 모양이다.
 
진국의 도읍이 직산지방의 어느 지점에 해당되는지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성거산에는 위례성의 성지가 남아 있고 직산 고을에는 사산성의 유적이 남아 있으나 이들은 모두 삼국시대 혹은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 쌓았던 것일뿐더러 확실히 난시에 필요했던 산성이요 평시에 사람들이 살던 도성이 아니므로 지금 생각하는 대상의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직산에서 북쪽으로 4km쯤 되는 곳에 도하리(都下里) 혹은 도감리(都監里)라는 부락과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되는 곳에 안성천이 합류되고 그곳에 안궁리(安宮里) 혹은 궁리(宮里)라는 마을이 있고 또 평택군 진위면 부용리에 평궁리(坪宮里), 신궁리(新宮里) 등의 마을 이름으로 보아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부락에서 아직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부락명은 필연 심상치 않으며 아주 오래된 유래와 역사를 가진 듯하니 안성천 유역이 진국시대인 마한의 궁궐이나 도시가 있던 곳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까지 ‘도(都)’자나 ‘궁(宮)’자가 붙어 있는 마을이 많은 것으로 본다.”
 
이상은 진단학보에 발표된 논문 중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위 논문의 일부분을 들어가면서 직산위례성과 관계있는 부분을 다시 재론하여 볼까 한다. 감히 한국의 석학들의 논문을 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고장 향토사와 관계되는 부분이기에 의견을 밝혀볼 뿐이다.
 
먼저 위 논문 중에 위례성은 삼국시대나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축성이라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본다. 한 개의 성채를 놓고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 초까지로 연대측정을 하였으니 약 1000년의 연대를 고증한 셈이다. 심하게 말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뜻이 아닌가한다. 역사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 같으면 1세기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겠지만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것을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위례성의 축성에 대하여는 필자의 사견을 말하기보다는 86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에 계시는 우리나라 고고학계 거장이 위례성을 장시간에 걸쳐 답사를 마치고 백제초기의 축성법에 의하여 조성된 성임을 밝혔다. 전문가에 의하여 고증된 것이므로 위례성의 축성 연대에 대하여는 재론을 하지 않기로 하고 뒤에 유물, 유적 편에서 다시 밝히기로 한다.
 
또 위례성은 난시에 필요한 산성이요 평시에 사람들이 살던 읍성은 아니다. 고로 위례성은 백제의 도성과는 관계가 없고 고려(考慮)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앞에서 밝혔다. 현재 남아있는 위례산성은 위례성에 속해 있던 산성이다. 필자도 두계의 논리와 같다. 500여미터나 되는 산위에 도읍을 두엇을 까닭이 있겠는가. 두계 선생께서도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논한 논문에서도 똑같은 논평을 하였다.
 
직산지방을 사산성(蛇山城)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부터다. 이때 불리어진 사산성 이전에는 위례성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직산위례성에 대하여 연구나 조사를 하였다면 읍성이니 산성의 이야기보다는 좀 더 발전시켜 읍성과 산성의 거리가 그렇게 멀 수가 있겠는가에 착안을 했어야 옳다고 본다. 성으로 바뀐 뒤에도 바뀌기 이전의 위례성으로 불리었을 뿐이고 처음부터 산성은 아니었다.
 
또 안성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도(都)’자 ‘궁(宮)’자가 붙어 있는 동명은 마한초기의 중심지로 비정되어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학설로 등장되어 있으나 이것도 필자의 억설일지 모르나 백제초기(BC18~BC5)에 이루어진 동명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정시대 중추원의 촉탁으로 있던 오하라(大原利武)씨는 다음 두 가지 고증으로 된 학설을 내놓았다. 하나는 위략(魏略)에 ‘승대선 입진한(乘大船 入辰韓)’의 구절로 보아 오늘날 황해도의 한 모퉁이에서 큰 배를 타고 경기만의 서해를 통하여 아산만으로 들어서 진(辰)의 서울이었던 지금의 직산지방으로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며 한군현의 하나였던 낙랑과 진국의 교역의 중심지로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발달된 낙랑문화와 진의 후진문화가 교차되는 곳으로 꼽았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직산지방을 진국의 수도로 본 오하라씨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도하리, 안궁리, 신궁리 등이 있으며 안성천의 대하(大河)가 이들 마을을 관통하여 수운(水運)에 편리하고 수리(水利)에 인간 활동이 편한 곳임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증으로 직산지방이 목지국의 도읍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위에서 밝힌 두 가지가 모두 절대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다만 추측이라면 직산지방과 여건이 비슷한 곳은 서해의 남부지방에는 많다. 그 첫째가 광주다. 한강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고 지명도 궁자나 도자가 붙은 곳이 많다. 예를 들어보면 춘궁리, 성내리, 이성산성, 한산성 등이다. 전북의 익산지방도 그렇다. 금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큰 배가 진한에 들 수 있고 넓은 들과 낮은 구릉은 인간 활동에 매우 편리하고 문물의 교역지로도 알맞은 곳이다. 뿐더러 고분이나 유물 등이 더욱 고증을 두텁게 하고 지명도 왕궁리(王宮里), 고도리(古都里) 등으로 보아 진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 곳으로 본다. 또 예산의 삽교지방이다. 무한천과 삽교천의 수운을 이용하여 예당평야에 이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진국의 맹주국인 목지국의 수부(首府)로만 보아오고 비정했던 직산을 백제의 첫 서울로 바꾸어 봄직도 하다. 진국의 성립과 백제 건국의 연대 차이는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성천 주변에 산재해 있는 옛 마을은 백제가 이곳(위례성)에 건국하고 난 뒤의 이름으로 보아도 좋다고 본다. BC 4~3C경 한강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 곳에 북방의 발달된 문화를 지닌 이동집단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발달된 언어와 문자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 봄직도 하다. 또 예로부터 바닷가나 냇가에 인류가 생활한 사실은 기본적인 이야기이며 발달된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던 한강남쪽의 부족사회에 북쪽에서 한패의 무리가 들어와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문자를 사용하면서 고도로 발달된 철기를 사용하며 이곳에 정착하면서 하나의 국가를 건설했다고 보겠다. 이상은 한국사와 진단학보에 게재된 위례성과 관계되는 논문 ‘삼한문제 신고(三韓問題 新考)’를 살펴보면서 작은 생각을 밝혔다.
 
여기 참고삼아 위례성에 관심을 가진 동학(同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첫머리를 한자로 적고 한글로 풀어 두겠다.
 
 
백제시조온조왕 기부추모 혹운주몽 자북부여도난 지졸본부여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惑云朱夢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비가 추모 혹은 주몽이라고 한다. 그는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부여왕무자 영유삼여자 현주몽 지비상인 제이녀처지
扶餘王無子 兄有三女子 見朱夢 知非常人 第二女妻之
부영왕은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셋이 있어 근심 중에 주몽을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 둘째 딸로서 그 아내를 삼게 했다.
 
 
미기부여왕훙 주몽사위 생이자 장왈비류 차왈온조
未幾扶餘王薨 朱夢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얼마 아니하여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잇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요 작은 아들은 온조다.
 
 
혹운주몽도졸본 취월군녀 생이자
惑云朱夢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녀를 아내로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설도 있다.
 
 
급주몽재북부여소생자래위태자 비류온조공위태자소불용
及朱夢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로 삼으려하자 비류와 온조는 그들이 태자로 용납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여오간마려등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드디어 오간과 마려 등 십신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니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비류욕거어해빈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그들은 드디어 한산땅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수 있는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해변으로 가서 살고자 하였다.
 
 
십신간왈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기천험지리 난득지세 작도어사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嶽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地勢 作都於斯
십신이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가 띠를 둘렀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있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혔으니 그 천험의 지리를 이루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좋지 않으리까 하였더니
 
 
불역의호 비류불청 분기민 귀미추홀이거지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역시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도하남위례성 이십신보익 국호십제 시전한성제홍가삼년야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신으로 보익을 삼으니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는데때는 전한 성제임금의 홍가3년이다.
 
 
비류이미추토습수 부득안거 귀견위례도읍정정 인민안태
沸流以彌鄒土濕水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으므로 위례성에 돌아보니 도읍이 잘 정해지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으므로
 
 
수참회이사 기신민계귀어위례 후이래시 백성락종 개호백제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 百姓樂從 改號百濟
드디어 부끄러워하며 뉘우치고 죽음으로써 그 시민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기세계여고구려동출부여 고이부여위씨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으므로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
 
 
이상은 온조왕을 시조로 한 백제본기의 서문이며 같은 서문 속에 비류를 시조로 하는 이설이 있는바 이제 그 이설을 원문대로 싣고 그것을 풀이하여 덧붙인다.
 
 
일운시조비류왕 기부우태 북부여왕 해부루서손 모소서노
一云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 解扶婁庶孫 母召西奴
또는 말하기를 시조는 비류왕이고 그 부친은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그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인연타발지녀 시시귀우우태 생자이인 장왈비류차왈온조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是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次曰溫祚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고 그가 처음 우태에게로 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이고 작은 아들은 온조다.
 
 
우태사 과거우졸본 후주몽부용어부여 이전건소이년춘이월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夢不容於扶餘 以前建昭二年春二月
우태가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 졸본에 와서 살았고 뒤에 부여에서 주몽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전한 건소 2년 2월에
 
 
남분지졸본 입도호고구려 취소노위비 기어개기창업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奴爲妃 其於開基創業
남쪽인 졸본지방으로 달아나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어 주몽은 서소노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그 창업의 기반을 열었다.
 
 
파유내조 고주몽총접지특후 대비류등여기자
頗有內助 故朱夢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가세가 기울 정도로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은 그를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도 자기의 아들과 같이 하였다.
 
 
급주몽재부여소생예씨자유유래 입지위태자 이지사위언
及朱夢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드디어는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어시비류위제온조왈 시대왕피부여지난 도귀지차
於是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이때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고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아모씨경가재조성방업 기근로다의 급대왕압세 국가속어유유
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壓世 國家屬於孺留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는데 힘썼는데 대왕이 돌아가자 나라는 유리에게 돌아갔다.
 
 
오등사재차 울울시우췌 불시봉모씨남유복지 별립국도
吾等徙在此 鬱鬱始疣贅 不始奉母氏南遊卜地 別立國都
우리들은 헛되이 여기에 울적하게 근심하며 있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수여제졸당류 도구대이수 지미추홀이거지
遂與弟卒黨類 渡具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드디어 아우 온조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게 되었다.
 
북사급수서개운 동명지후유구태 독어인신 초립국우대방고지
北史及隨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북사나 수서가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 구태가 있었는데 그는 인심이 독실하였다. 그는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고지에 세우니
 
 
한요동태수공손도이여처지 수위동이강국 미지숙시
漢遼東太守公孫度以如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熟是
요동태수 공손도는 그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는데 드디어 동이가 강성하게 되었다. 아직 어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4. (4) 삼국유사

 
속세를 떠난 스님이 사문 밖의 글을 써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우선 궁금한 일이다. 9살에 출가하여 84살까지 72년간을 선사에만 매달린 그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은 30대의 장년시절에 몽고의 병란을 겪으면서 불교서적이 병화에 불타서 없어지는 것을 목격했고 고려인이 주체성을 잃고 몽고풍속에 휩쓸려서 오랑캐 옷 입기를 즐기고 몽고식 머리 깎기를 유행처럼 따라 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으며 민족적 주체의식을 되찾게 하려는 안간힘으로 사문 밖의 글을 썼으리라고 본다.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국가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며 비교적 그 체제와 문장이 정열하여 삼국의 내력을 밝힌 정사(正使)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르다. 일연국존의 사사로운 개인 의사에 의하여 편찬되었고 일사(逸事), 유문(遺文), 전기(傳寄) 등을 설화식으로 나열하였으나 정사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과 빠진 것 또는 고의로 누락시킨 것들을 수록하였으며 우리나라 양대사서(兩大史書) 중의 하나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서이다.
 
저자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백제의 첫 서울 위례성에 대하여 그 사실을 빠짐없이 기재하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編) 백제시조란에
 
 
제일온조왕 동명왕제삼자 이운제이 계묘립 재위사십오 도위례성일운사천금직산 병진이도한산 금광주
第一溫祚王 東明王第三子 一云第二 癸卯立 在位四十五 都慰禮城一云蛇川今稷山 丙辰移都漢山 今廣州
첫 번째의 온조왕은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며 또는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계묘년(BC 18)에 나라를 세우고 45년간을 왕위에 있었으며 도읍은 위례성이다. 또는 사천이라고 하며 오늘날의 직산을 말함이다. 병진년(BC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니 오늘날의 광주이다. 위와 같이 삼국유사에 위례성을 사산으로 못 박고 그것도 부족해서 오늘날의 직산이라고 굳혀 말했다. 앞의 삼국사기에서 부아산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밝힌 바와 같이 용인의 부아산을 삼국사기의 부아악으로 볼 때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직산이 위례성이라면 삼국사기의 미추홀도 인천이 아니라는 논증이 선다. (미추홀에 대하여는 별도로 논술하겠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위례성을 미상지명으로 하였고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는 위례성을 직산이라고 하였다. 비류백제(沸流白濟)와 일본고대국가의 기원에서 저자 김성호(金聖昊)씨는 일연마저 알고 있던 직산위례성이 방대한 사서와 지지(地誌)가 동원되었던 삼국사기에 미상지명(未詳地名)이라 한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추측컨대 직산과 백리도 되지 않는 아산(牙山) 인주(仁州)를 인천(仁川)으로 비정함으로써 직산과 이백리 이상의 거리로 떨어지게 되자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서 거짓 비정의 내막이 폭로될 것을 우려하여 직산위례성을 아예 미상이라고 하여 버린 듯하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보다 합리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직산과 부아악을 종합하여 보면 미추홀의 위치가 아산의 인주이어야 함이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이와 같이 밝힌 내용으로 보아 김성호씨는 ‘부아악’을 용인으로 보았을 때 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이라야 된다는 설이다. 또 삼국유사의 기록내용이 현지전승과 일치됨은 영남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실제로 조사 확인되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문신(文臣)이다. 그는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고려조정의 정권을 좌우하던 권신(權臣)이다. 그가 방대한 서적을 참고로 하였겠으나 실제로 직산위례성을 답사하거나 현지 실측이나 아니면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지도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편찬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주장을 반영하기도 하였고 자기의 의견도 약간은 삽입되었으리라고 본다. 또는 편찬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저자로서의 명의만 올렸을 뿐이고 백제위례성의 기록은 다른 편찬위원의 손에 의하여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고기(古記)의 기록을 비판이나 주관 없이 옮겨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연의 경우는 다르다. 아홉 살에 남해(南海)에서 출가(出家)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을 편력(遍歷)한 승려인지라 직산지방의 왕래도 몇 번이나 하였을 것으로 본다.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天興里)에 천흥사지가 있다. 정확한 사기(寺記)는 없지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흥사 종(鍾)의 표기(表記)에 의하면 고려 목종 5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지금은 소실되어 절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있다. 이 당간지주의 설립자 즉 시주자가 일연스님이라는 말이 오랜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이 비록 전설이기는 하나 일연과 같은 승려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일연은 직산위례성을 실제로 답사하였고 그것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성거읍 천흥리는 옛 직산현의 영지(領地)로 백제 초기에는 위례성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고 또 위례산성 밑에 있는 큰 마을이다. 지금 남아있는 절터나 탑 또는 범종의 제작으로 보아 대단한 거찰(巨刹)이다. 도 만일암(晩日庵) 등 작은 암자를 몇 개씩 거느리며 지금 남아있는 장대석(長大石)이 그 위용을 입증하고 있다. 이토록 훌륭한 사찰을 일연이 다녀가지 않았을 까닭이 있겠는가. 한해 겨울의 안거(安倨)나 한마디의 설법을 하기 위해서라도 왔었음 직하다. 추상적이기는 하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앉아서 눈과 손으로 쓴 글이요 일연은 눈과 발로 쓴 글이라고 볼 때 직산위례성은 일연 쪽의 주장이 타당성 있다고 보면서 아울러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본다.
 
 
 

5. (5)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조 최고의 인문지리서이다. 여기에도 백제의 위례성에 대하여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는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참작하지 않았을 까닭은 없겠지만 위례성에 대하여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직산현의 건치연혁(建治沿革)에
 
 
본위례성 백제온조왕 자졸본부여남분 개국건도우차 후고구려취지위사산현 신라인지 위백성군현 고려초개금명 현종구년속 천안부
本慰禮城 百濟溫祚王 自卒本扶餘南奔 開國建都于此 後高句麗取之爲蛇山縣 新羅因之 爲伯城郡縣 高麗初改今名 顯宗九年屬 天安府
본시 위례성으로 백제의 온조왕이 졸본부여로부터 남쪽으로 옮겨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 땅을 빼앗아 사산현으로 고쳐 부르고 신라 때도 그대로 사산현으로 하고 백성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지금의 이름(직산)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천안부에 소속시켰고...
 
 
이상의 기록 중 첫머리에 나타나는 위례성의 지명은 직산을 가리키는 것이며 위례성이니 사산성이니 하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참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서 위례성, 사산성 등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여지승람이 편찬된 500년쯤 전에는 그와 같은 서적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서적을 참고하였고 한 개 지방의 역사와 유래를 귀 기울이며 엮었으리라고 본다. 또한 여지승람 편찬에 종사한 사람들은 지지학보다는 역사학에 밝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볼 때 만약 이들의 의견이나 논술이 윗글과 같지 않았으면 위례성이니 백제 온조왕이니 하는 따위의 기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이 직산위례성을 잘 몰라서 옛날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면 문장의 끝부분에 삼국사기와 같이 미지숙시(未知熟是)라고 하였을 터인데 그런 구절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또 직산현의 형승(形勝)에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의 지세 해설은 삼국사기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며 당시 직산 고을 어디엔가 온조왕묘(온조왕의 사당)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지금 어딘지 분명치 않다. 백제가 세운 첫 서울인 위례성을 현재의 서울 근교로 또는 경기도의 광주로 비정하고 있음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도 잘못된 비정임을 알 수 있다.
 
또 여지승람의 광주조에 보면
 
 
본백제 남한산성 시조온조왕십삼년 자위례성이도지 근초고왕이십육년 우이도남평양성
本百濟 南漢山城 始祖溫祚王十三年 自慰禮城移都之 近肖古王二十六年 又移都南平壤城
광주(廣州)는 본래 백제의 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
 
 
이상의 기록 중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에 옮겨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옮겨오기 이전의 위례성이라고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분명히 직산지방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내용이 삼국유사에 어긋남이 없도록 배려하면서 편찬하였겠지만 온조왕 14년(BC 5)에 춘정월(春正月)의 천도(遷都)라는 말과 일치한다.
 
다만 여지승람에는 천도의 연대가 13년으로 되었고 삼국사기는 14년으로 되어 1년의 차이는 있으나 출발이 정월이라 하였으니 불과 1~2개월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논문】 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 3. 위례성 지역에 대한 조사
• 4. 문헌에 나타난 위례성
• 5. 유적과 유물로 본 위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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