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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일본 기록 작가, 강제 동원 연구 책 57권 발간
손기정이 방문한 나가사키 시(하) / 서정우(1928~2001)는 경남 의령에서 군함도에 강제로 끌려왔던 강제 노역 피해자로 군함도 최초 증언자이다. 2018년 8월 EBS 다큐프라임 광복절 특집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손기정이 방문한 나가사키 시(하)
 
 
서정우(1928~2001)는 경남 의령에서 군함도에 강제로 끌려왔던 강제 노역 피해자로 군함도 최초 증언자이다. 2018년 8월 EBS 다큐프라임 광복절 특집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군함도 강제 노역 증언자 서정우
 
 
일본의 기록 작가이며 강제 동원 연구자인 故 하야시 에이다이(1933~2017.9.1)는 1970년 회사를 퇴직한 후 일생을 군함도, 사할린, 뉴기니아, 시베리아 등 조선인의 강제 동원의 현장을 50년 동안 방문하고 피해자들의 삶과 가해자의 증언, 시베리아, 사할린 억류자, 조선인 광부, 조선인 자살특공대의 한 많은 삶을 취재 기록하는데 모두 바쳐 책 57권을 발간했다. 그는 한국을 20여 년간 방문하여 강제 연행 당사자들과 가족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하야시 에이다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특별고등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해 사망했다. 하야시 에이다이의 아버지는 신사의 신주로 지쿠호 탄광에서 탈출한 조선 광부 노동자를 보호해 주고 귀국할 수 있도록 남몰래 도와주었다. 이런 모습을 그는 모두 지켜보았다. 2016년 12월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아라가이(저항)-기록자가 하야시 에이다이〉가 상영되었다. 그는 평생을 수집한 일제 강제동원 관련 기록물 6천여 점을 숨을 거두기 14일 전에 한국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였다.
 
 
강제동원연구자 故 하야시 에이다이(1933~2017.9.1)
 
 
나가사키시에 거주하는 기무라 선생은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가사키시를 방문하면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기록과 군함도 등 여러 지역을 안내하며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책에 기록된 당시 상황을 사실대로 알려줬다. 기무라 선생은 “일본에서는 근대사를 국민들에게 가르치지 않아서 과거 식민 통치 역사와 강제 징용과 노역을 전혀 모른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정말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아직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남아있는 아픈 역사를 제대로 청산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반성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군함도 해드랜턴 이재갑 사진 전시회 (장소:서대문형무소역사관, 2019.11)
 
 
사진가 이재갑은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기무라 선생님의 도움으로 오래전부터 군함도(軍艦島), 하시마(端島) 탄광, 미쓰비씨(三菱) 군칸지마를 촬영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전시를 하였다. 2015년에 일본 정부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 제강, 조선, 선탄산업’으로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1945년 2월 11일, 연합국 수뇌부들인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은 크림반도 남단인 러시아 크림공화국 얄타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얄타회담은 기본적으로 전후 유럽의 청사진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이곳에서 소련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군사작전 편의상 ‘38선 분할 점령안’을 전격적으로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1945년 8월 26일 소련군은 평양에 진주하였다. 동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다음 날 서울로 진주했다.
 
 
38도선
 
 
조선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를 끝장내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타국에서 독립을 쟁취하려고 투쟁했던 애국지사가 속속 귀국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코넬대학교에 박사학위를 받은 최덕효 박사는 2020년 2월 학술지 〈일본비평〉에 「배반당한 해방: 미군 점령하 ‘재일조선인 문제’와 냉전, 1945~1948」이란 논문을 기고하며 “1945년 해방은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조선에 대하여 논의한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참전으로 배반당한 해방이 되어버렸다.”라고 말했다.
 
해방이 되어 가장 활발해진 종목이 축구와 마라톤이었다. 손기정도 안암동 자택에 마라톤 선수들을 모아 합숙시키며 마라톤을 지도했다. 보스턴에 사는 미국 존 A 켈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신발을 가져갔던 인연으로 손기정을 보스턴 마라톤에 초청한다. 미군정 시대에 외국에 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선수단은 미군정이 마련해준 군용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갔다.
 
어렵게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 손기정 감독은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한국마라톤의 현실을 호소했다. 1947년 4월 19일 이윤복 선수는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당당하게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은 인천 제물포로 귀국해 경교장에 계시는 김구 선생님을 예방하고 한국마라톤의 부활을 알렸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의 영웅들, 왼쪽부터 함기용(咸基鎔), 송길윤(宋吉允), 최윤칠(崔崙七) 선수
 
 
손기정 감독은 미국 보스턴에서 돌아오자 새로운 구상으로 젊고 패기가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훈련하기 시작한다. 3년인 지나 손기정은 훈련한 선수들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보스턴으로 향한다.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에서 다시 낭보가 울려왔다. 우승자는 놀랍게도 마라톤 풀코스를 네 번밖에 안 뛴 대한민국의 19세 양정고보 3학년 학생 함기용(咸基鎔, 1930~2022)이었다.
 
2등은 송길윤(宋吉允), 3등은 최윤칠(崔崙七) 선수였다. 대한민국 마라톤 선수들은 105리(里), 42.195km를 타조처럼 뛰었다. 이날 마라톤 날씨는 최악이었다. 181명의 선수가 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변덕을 불어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강해 달리는 선수들이 옆으로 자꾸 밀려 나갔다.
 
 
함기용 선수의 달리는 모습
 
 
함기용 선수는 초반에 바람을 안고 뛰어 20km까지는 50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25km 지점에서 함기용 선수는 맨 앞에 있었다. 대한민국 마라톤 선수들은 손기정 감독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지구력을 발휘해 뛰고 또 뛰어 마라톤 대회 사상 처음으로 미국 시상대에 태극기 3개를 하늘 높이 올렸다. 함 선수는 빙판길 악천후에서도 정말 빨랐다. 4km를 남겨 놓고, 다리에 쥐가 나서 달릴 수가 없었다. 당시 취재 기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놀랐다. 기자들은 모두 “피로하면 걷고 걷다가 다시 달리고, 그러다가 또 쉬고 4번이나 걷고도 우승했다고 걷기 챔피언(Walking Champion)이다.”라고 하였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19세)
 
 
함기용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가 춘천호반 마라톤대회로 2023년 4월 23일 20회가 대회가 개최되었다. 손기정 선수는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한평생 육상인으로 살면서 우직하게 마라톤을 지켜냈다. 마라톤 선수들의 가슴에 위대한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손기정은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영웅이다.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베를린의 조선 유학생
• 일본 기록 작가, 강제 동원 연구 책 57권 발간
• 손기정과 보성전문학교
(2023.11.16. 09:00)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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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