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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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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3. 탁본
4. 칼바위를 찾다
about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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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3.12.26. 19:35) 
◈ 4. 칼바위를 찾다
숲이 짙어가는 여름이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무렵 상이 암 주지 스님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한참 울린 후 통화가 되었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스님, 내일 바위 암각서 보러 가려고 하는데 암자에 계십니까?”
4. 칼바위를 찾다
 
 
숲이 짙어가는 여름이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무렵 상이 암 주지 스님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한참 울린 후 통화가 되었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스님, 내일 바위 암각서 보러 가려고 하는데 암자에 계십니까?”
 
“아! 예,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스님은 선뜻 대답을 했다. 주지스님과 통화가 되었다고 바위를 보러 가자고 도반에게 연락을 했다. 도반은 바쁜 일과가 있지만 급한 일은 아니라며 미루고 같이 동행 하겠다고 답을 주었다. 약속날짜를 정해서 만났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탁본할 계획으로 도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도반과 약속장소에서 만나 성수산으로 접어들었다. 초봄에 왔을 때에는 도로가 얼어 있어서 주차장에서부터 걸었는데 지금은 신록이 우거진 계절이라 절 아래 급경사인 가파른 언덕까지 자동차를 운전하고 올라왔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천년세월 부처의 가피를 뿜어내는 암자가 바위에 걸려있었다. 절 앞에 당도하자 풍경소리가 골짜기를 쓸어내렸다. 암자에는 천왕문이 없었다. 당연히 사천왕도 있을 리도 없다. 암자 공사를 하면서 자재를 실어 와야 하기 때문에 임으로 바위를 잘라내어 입구에 길을 만들었다. 바위는 마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좌·청룡 우·백호 형상이 되었다. 돌문은 불이문 不二門이었다. 둘이 아닌 그 무엇의 본체는 본디 하나라는 진리의 문이다. 절 입구 석벽은 내가 받아들이는 생각에 따라 불이문도 되고 사천왕도 되는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화백나무는 무량수전 법당을 지키는 사천왕이었다. 불이문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다. 불이문은 세속의 번뇌를 털어버리고 법문 안으로 들어와 속죄를 받는 곳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오래된 나무가 우주 삼라만상의 일체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성수산 아홉 골짜기에 살고 있는 구룡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모여드는 터를 알려주듯 아홉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쓸고 간 허공에 산새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삼복염천이라 산도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법당 추녀 끝에서 쇠 붕어가 절그렁 거렸다. 중생의 속마음을 쓸어주는 소리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쇠 붕어 한 개는 미동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종 안으로 벌들이 무리지어 드나들었다. 쇠 붕어는 벌들이 밀랍을 발라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쇠 붕어 속에 집을 지었을까. 바람이 때려도 속울음을 참으며 쇠 붕어는 벌들에게 제 자리를 내어 주고 묵언수행 중이었다. 수도승이 따로 없었다.
 
법당 뒤로 언저리에 용틀임하는 아름드리 청실배나무가 겹겹으로 구름머리를 이루고 있었다. 마른나무 껍질을 뚫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우람하고 응용한 체구에 더없이 화려하고 찬란하여 저토록 숨 막히게 휘황한 것인가, 극락이 저러하랴 어느 만한 세상이면 먹피를 토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랴. 늙은 청실배나무가 숨죽여 토해낸 절규였다. 오백년이 넘은 청실배나무는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내려 수 백 년 동안 상이암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청실 배는 사찰이나 서원에서 향사를 올릴 때 쓰는 과일이며 서원이나 사찰을 창건할 때 식재하여 과실이 익으면 불전이나 영전에 바치는 제물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이화가 만발하여 중생들에게 광명 등처럼 환하게 밝혀 주고 있다.
 
도반은 불자였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도반을 따라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적요 속에 오직 부처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 범접할 수 없었다. 아직도 내 맘속에 꿈틀대는 집착의 끈을 명월흉금으로 가슴을 열어 부처님께 토해내고 싶었다. 녹음으로 틀어놓은 염불소리가 법당을 빠져나와 적요한 골짜기를 채우고 있었다. 절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깊은 절에서는 스님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웅전의 문도 활짝 열려있고 열린 대웅전의 황금부처의 미소도 활짝 열려있어 누구든 들어와서 향을 피워 사르건 기도를 하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그런 넉넉함이 산속의 절에서는 느껴지는 법이다. 아미타불 부처는 무명의 암흑 속에 홀연히 빛나는 한 점 등불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독경소리를 들으며 잠시 풀어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지스님과 차를 나눴던 승당 앞은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막으려는 듯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발이 울타리처럼 둘러 있었다. 승방 앞 댓돌에 털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털신은 모두 들어갈 때 자세 벗은 자세 그대로 놓여있지 않고 언제라도 신으면 그대로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바깥쪽으로 향해 놓여있었다. 털신 한 켤레가 집착으로 무장된 마음을 해제시켜 한결 편안 했다.
 
“스님 계십니까.”······
 
진즉 밖의 인기척을 알고 있었다는 듯 주지스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 오세요.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셨습니까.”
 
“산속이라 이곳은 삼복염천에도 조석으로 춥습니다. 나는 추워서 겨울옷을 입었습니다. 허 허 허······ 저녁에 한 번씩 장작불을 지피면 하루 종일 따뜻하지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이 타오를 때면 가슴 저 밑바닥부터 훈훈한 느낌이 올라와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야 할 만큼 서늘하다고 겨울옷을 입고 있는 이유를 대신 변명했다. 승방은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타면서 풍기는 연기 냄새가 배여 있었다. 나는 막 언덕배기를 올라와 마당에서 한참 더위를 식혔다.
 
스님이 차를 달였다. 정성이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찻물을 끓이고 차를 넣고 끓는 물로 찻잔을 덥히고 다시 한 번 마른수건으로 닦고 덥히고 난 후 찻물을 사발에 부어 조금 식힌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무슨 의식을 치르듯 그 모습이 경건했다.
 
“차 한 잔 하시지요. 산중이라서 차 밖에 드릴게 없습니다.”
 
스님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오르면서 찻물에 숲이 배여 있었다. 스님이 잔에 차를 따르려고 하자 나는 겸손하게 얼른 찻잔을 들었다.
 
“ 긍께, 말하자면 임금이 따라줘도 찻잔은 놓고 받고 술잔은 들고 받는 것이지요.”
 
스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살피며 따라 주었다.
 
“차를 마실 때에는 오로지 차에만 집중해야 차 맛을 제대로 느낍니다. 절간에서는 차를 마실 때 묵언수행처럼 조용히 차만 마십니다.”
 
주지스님은 이곳에서 삼십년 가깝게 오래 살았어도 본래 속가가 나주사람으로 남도사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잔의 찻물이 목구멍으로 타고 흘러들면서 온 몸에 스며들었다. 찻물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 하나가 목을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묵언수행처럼 말에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을 줄였다. 차를 몇 잔 받아 마시고 나서 그만 마시겠다는 표시로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스님은 우리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찻물 따르기를 멈추었다.
 
“하실 말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도반이 전문가 입장이라 먼저 말을 하도록 여유를 주었다.
 
“스님, 이른 봄에 연락도 없이 저희가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셨어요, 아무 연락이 없어서......”
 
“그때 젊은 스님이 알려 준대로 산에 올라 갔지만 초행이라 바위를 찾을 수가 없어서 중간쯤에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안내 없이는 절대 불가한 곳이던데요.”
 
“오늘은 스님 안내를 받고 확인하려고 이렇게 일찍 서둘러 왔습니다.”
 
“ 제가 그때 먼 곳 미얀마에 불교 성지순례를 다녀오느라 절간을 비웠습니다.”
 
“그러셨군요.”
 
도반은 말을 이었다.
 
“그때 객승이라는 스님 한 분만 계셨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산에서 내려와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아서 그냥 하산을 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마시던 차를 마지막으로 넘기면서 한참 뜸을 들였다.
 
“글쎄요.”......
 
그리고 더 이상 객승에 대한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그때 그 객승이 알려준 대로 바위를 찾아 올라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산 중간쯤에서 계곡이 나눠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한 길을 선택하여 올라갔는데 또 다른 계곡이 나타나면서 눈을 가렸습니다. 나무가 해를 가려 어둡고 추워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하산을 했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스님의 안내를 받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도력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군요. 그럼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저도 채비를 하고 나오겠습니다. 숲이 우거져서 걷기가 불편할 겁니다.”
 
스님은 승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찻잔을 씻어 가지런히 선반에 올려놓았다. 뜨거운 차를 마셔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승방 밖으로 나오니 산이 뿜어주는 공기가 시원했다. 향로봉 바위틈에 있는 노송은 겉치레 없이 건조하고 단조로운 스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평소에 걸치던 승복을 벗고 간단한 등산 차림으로 나왔다.
 
“가십시다.”
 
먼저 앞장을 서며 길을 열었다. 높은 것 같으면서도 낮은 것 같고 낮은 것 같으면서도 높은 상이암이다. 산새도 석간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걸 보니 더위가 산중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길이 험해서 옷이 얇으면 가시에 걸려 찢겨집니다. 다치기도 하지요. 그래서 부득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봄에는 잡목과 잡초 이파리가 없어 그나마 괜찮지만 여름 숲은 초목들은 사람에게 달려들어 할퀴지요. 넝쿨들이 날마다 한질은 크는 것 같습니다.”
 
벼랑위에 늦게 핀 진달래가 참으로 귀티가 났다. 칙칙한 바위와 조화를 이뤄 철쭉귀부인은 더욱 더 곱게 보였다.
 
“스님, 어쩌면 저렇게 곱디고운 빛깔을 지녔을까요. 죄 없는 빛깔입니다.”
 
“여기는 추워서 꽃이 늦게 핍니다. 대처에 꽃이 지고나면 피지요. 그래서 꽃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강 선생은 이미 보살입니다. 허허허......”
 
“보살이 이렇게 쉽게 되나요?”
 
스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뒤를 따랐다. 나뭇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산신각 뒤로 부도 세 기가 모셔져 있었다. 혜월당, 두곡당 고승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부도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고 부도 한 기는 이름 없었다.
 
“스님, 부도 중에 한 기는 명함이 없어요?”
 
스님은 무명의 부도에 대한 기록도 없어 잘 모르지만 아는 대로 설명하겠다고 했다.
 
부도는 고승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다. 혜월당, 두곡당은 당호 명문이 선명하게 나타나 누구였는지 찾을 수가 있었다. 음각 되어 있는 탑신은 조선중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해월당 부도는 항아리 모양을 한 탑신과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는데 종 모양으로 그 중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다. 두곡당 부도는 팔각의 받침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얹은 구조로 탑신에는 위아래에 넝쿨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무명의 부도는 상륜부와 노반, 보주까지 완형으로 남아 있다. 상단에 거북이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아마도 큰 스님이었기에 법당 아래에 사리탑이 묻힌 것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아니면 수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절간이 재화로 소실되어 묻히면서 법당 위치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면서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부도에는 주로 기단부 중대석에 동물조각이 있는데, 이처럼 상륜부에 있는 예는 드물다. 이 부도의 탑신에는 아무런 명문이 없어 부도의 주인공은 알 수 없었다. 법당을 중수하던 중 중장비로 땅바닥을 파내다가 발견되었다. 아직도 누구의 사리탑인지 밝혀지지 않아 이름도 성도 없지만 부도 자체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인부들을 시켜 지금 이 자리에 옮겨 놓았다. 스님들은 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얼마나 많은 응어리를 삭이며 수행을 했을까. 이곳에 모셔진 고승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성도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중생의 허물을 벗고 화석이 되어 버렸다.
 
부도는 원래 부두浮頭·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를 번역한 것이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예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묘탑, 즉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지만 연대가 그때까지 올라가는 묘탑은 문헌상으로도 볼 수 없다. 844년에 조성된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이 가장 오래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부도의 건립은 법제문도들이 선사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스승이 입적한 뒤 온 정성을 다하여 세우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이 들어온 이후 부도의 건립이 크게 유행하였다. 구산선문에서는 각기 사자상승師資相承함으로써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으며 각 선문에는 그 법문의 개산조와 개산인의 순서로 뚜렷하게 하종파의 계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각 선문의 제자들은 각기 소속 종파가 확정되면서 그들의 조사祖師를 숭앙하여 평시에 그가 설법한 내용이나 교훈 등을 어록으로 남기고 입적 뒤에 선사를 추앙하기 위하여 후세에 길이 보존될 조형적인 장골처藏骨處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부도라고 볼 수 있다.
 
부도의 기점을 이루고 있는 전흥법사염거화상탑은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상대석·중대석·하대석 등의 기단부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이는 탑신굄대·탑신부·옥개석·상륜부까지 모두 팔각으로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인 평면이 팔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부도를 팔각원당형이라 하며 이후 신라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국보 제59호)과 같이 평면이 사각으로 변하여 일반 석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범종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석종형부도가 나타나 팔각원당형과 함께 발전되었다.
 
부도에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탑비塔碑가 따로 세워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문화상 등을 알 수 있다.
 
낯선 경계자를 주시하며 어미는 새끼를 새끼는 어미를 확인하며 소각장으로 모여 들었다. 쓰레기를 소각하고 나면 그 재에 염분기가 있어 먹으려고 자주 출몰 한다고 했다. 새까만 털에서 무지개 빛깔이 어른거렸다. 두 쪽으로 갈라진 발굽사이가 깊었고 빛을 퉁겨내는 까만 눈동자는 광물질이었다.
 
주지스님은 짐승들을 보면 항상 축원의 기도를 한다고 한다.
 
“이 세상에 다시 오게 되면 사람으로 오거라, 그 대신 염불소리 많이 듣고 해탈하기 바란다.”
 
고 했다. 나는 얼른 그 말을 받아서 질문을 했다.
 
“스님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불성이 있지요. 다만 우리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지 불성이 있습니다.”
 
그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렇게 살아서 왔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오. 평소 자주 내려오기 때문에 가끔 소금을 한바가지 퍼다 염소들이 오는 곳에 놓아줍니다. 저 중생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면 마음이 짠합니다. 누가 챙겨주는 먹이도 없지요, 천적들을 피해 살아야지요, 짠하지요. 그런 속에서도 저렇게 건강하게 커서 저런 광채의 빛깔이 나는 겁니다.”
 
각질이 단단한 나무 수피 속에 이렇게도 많은 이파리들이 숨어있었던가, 연초록 이파리에 달랑거리던 햇살이 눈으로 파고들었다. 이파리들이 꽉 차 있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했다. 산죽 밭을 헤치며 길을 만들며 들어갔다. 산죽 뿌리가 온 산을 점령하여 움켜쥐고 있었다. 간간이 산죽 부딪치는 소리가 골짜기의 정적을 깨웠다. 벼랑 끝에 발을 묶듯 몇 구비 골짜기는 가부좌 틀고 앉아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나무들은 서로를 비켜 가지를 뻗어 얽히지 않았다. 숲에서는 모두 경내가 되고 경전이었다. 경계가 없는 숲에서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도 부처가 아니겠는가. 이들이 모두 숲에 살고 있는 한 숲 전체가 경전이었다. 아홉 개 산 문 용 구렁에서 조화를 부릴 때마다 산안개가 일어나고 비가 내렸다. 중중첩첩 산봉우리가 겹쳐있고 그 옛날 수행자들이 오르내리던 옛길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열반에 들어간 수행자처럼 느껴졌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온 바람이 앞서고 산중턱엔 구름이 빈 마음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놀란 산 나부 떼들이 가루를 흩뿌리며 줄도망을 쳤다. 소로 길에서 웃자란 풀들이 발목을 휘감았다. 이른 봄에 왔을 때는 마른칡덩굴이 널 부러져 있었는데 줄기에 이파리가 자라 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산길에는 오르거나 내려가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산은 높지 않으나 산을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파르고 거칠었다. 가파른 산길은 촘촘한 돌무더기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잘 깎아 만든 가지런한 돌계단이 아니라 산에서 마구잡이로 구르다 멈춘 잡석들이 길이 되었다. 걷는데 불편하지만 생긴 그대로 운치가 있었다. 한참 쉬었다 갈 수 있는 층계참도 없이 바윗덩이들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걸어온 길 위에 헝클어진 마음을 나도 모르게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 달라붙은 오만과 집착이 천천히 떨어져 나간 것처럼 후련했다. 오랫동안 목을 조여 오던 인연 줄 하나를 벗어내고 있는 것일까. 햇살이 강할수록 숲의 향기는 강열했다.
 
나는 돌계단을 오를수록 힘이 들었다. 스님은 숨소리 한 번 변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같은 호흡과 같은 어조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님, 아직 정정하십니다.”
 
“ 긍게 어찌 힘들지 않겄소, 그냥 호흡 맞춰 가는 게지요. 저도 좀 힘이 듭니다. 힘드시면 잠시 쉬어 갑시다.”
 
스님은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서서 호흡을 조절했다.
 
“산은 한곳도 빈틈이 없지요. 이것이 자연의 오묘한 솜씨가 아닌가요. 나는 산을 볼 때마다 우리불자들이 산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잎을 만들고 가을이면 버릴 줄 알고 겨울이면 깊은 묵언수행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니까요. 이게 불법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불법공부가 따로 없습니다. 자연에서 배우는것이지요. 먼저 열반에 들어가신 큰 스님들도 어느 날 문득 깨우침을 자연에서 얻은 것이지요.”
 
범부중생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만만한 높이의 산정이 이토록 고되고 힘들까 싶게도 길은 계속 가파르게 산정을 향해 굽어져 있었다. 그 누가 이 험한 계곡을 타고 올라와 금석문을 새겼단 말인가. 몸에서 소금 알갱이가 떨어졌다.
 
짧은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면 산이 먼저 물 냄새를 풍겼다. 여름엔 숲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산안개를 만들고 비를 만들었다. 아침에 일기예보에서 폭염주의보를 내렸다. 잎 하나 까딱 않는 삼십육도 날씨 속에 숲길을 걷는 일은 고행이었다. 비릿한 산 이끼 냄새가 일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성수산 용 구렁에서 또 조화를 부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산안개가 겹겹으로 선궁을 둘렀다. 절벽 반쯤은 용궁에 이른 것처럼 산안개가 둘러있었다.
 
하늘을 가린 잡목 그늘은 음침하고도 축축했다. 길잡이로 앞서가던 스님은 걸음이 느려지면서 서서히 뒤로 쳐졌다. 칠십 초반으로 평생 채식만 하면서 살았는데 겉모습은 건장하지만 기운이 점차 소진하고 있었다. 삭정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서로 힘들어 걸음이 느려졌다. 스님과 보폭을 맞추면서 달팽이 걸음으로 조절을 했다. 푸른 잎이 온통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조각보처럼 자잘하게 나눠져 있었다. 숲이 만들어낸 푸른 조각보였다. 이른 봄에 왔을 때에는 잎을 버린 빈산이어서 지금보다는 수월했었다. 산길은 험하고 간혹 산짐승이 다니는 길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골짜기가 자주 두 갈래 세 갈래로 자주 나눠져서 안내자가 없으면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데 이른 봄에 초행길을 겁도 없이 올라왔던 것이었다. 다래덩굴은 돌무더기 속에서도 성장이 왕성했다. 바위와 나무를 옭죄어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다래덩굴이 마치 산짐승을 잡으려고 걸어 둔 올무 같았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감기고 만다. 꿈틀거리며 나무꼭대기까지 감고 올라간 다래덩굴은 이무기처럼 몸통이 굵어 어떤 것이라도 금방 잡아먹을 듯 위세가 당당했다. 산속에서 물길은 보이지 않지만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팔부능선쯤에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나가자 듬성듬성 돌을 괴어 만든 길이 보였다. 사람이 살면서 쌓은 돌계단이었다. 이 돌계단은 어느 누가 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누군가 이 토굴에 기거하면서 쌓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보았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산죽 밭을 지나자 토굴이 보였다. 마치 긴 터널을 뚫고 나와 환한 광명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확 뚫렸다. 토굴 주변에 오동나무 화 궁 몇 채가 솟아 있었다.
 
토굴까지 올라오는 동안 산을 휘어 감고 있던 산안개가 걷혔다.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하게 더웠다. 햇볕이 반짝 비추었다. 봉분처럼 생긴 작은 토굴 위로 그 자리만큼만 햇빛이 들어와 있었다. 이 한줌의 햇빛이 토굴 주변에 광명 등처럼 비추고 있었다. 토굴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무너질 것처럼 한쪽으로 기
 
울어져 있었다. 숨어 있던 산짐승이 튀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토굴에서 바라본 전경은 앞에 가려진 것 없이 확 트여서 조망이 좋았다. 토굴 옆에 두리 뭉실한 큰 바위 아래에서 샘물이 솟고 있었다. 구부 능선에서 물이 거꾸로 솟아오른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 옹달샘물이 계곡을 타고 내려가 절간 식수가 되고 흘러서 저수지에 모였다가 인근 지역 들판을 적시고 섬진강으로 유입되어 남해바다로 합수가 되는 섬진강 지류이다. 산정에서 솟은 물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산보다 물이 높다는 학설도 있었다.
 
스님은 서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명진서해라 맑은 날이면 먼 서해바다까지 보인다고 했다. 잡념을 잊고 무념 무상 속으로 들어가면 서해바다 파도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고 했다.
 
나는 또 중생의 자발심이 일어 물었다.
 
“스님, 그 파도 소리를 끌어들일 경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까?”
 
스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 긍게 명진 서해 하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지금 내 안에 들어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짧은 생각에 부끄러웠다.
 
햇빛을 보지 못한 벽면에 냉기가 고여 있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토굴은 거미줄이 옥죄고 있었다. 거미들의 집합체였다. 토굴은 흙담집으로 도를 닦는다는 범부들이 혼자 독 불 공 하는데 방해받을 요인은 없어보였다. 오래된 함석지붕은 녹이 슬어 여러 곳에 구멍이 나 있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습기로 썩어 내리고 있었다. 단칸방 문고리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안은 들여다 볼 수 없었다. 흙벽은 무너지고 있고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였다. 이곳이 아무도 모르는 이성계의 은밀한 기도처가 아니었던가.
 
토굴 옆으로 날카로운 바위가 있었다. 마치 칼을 꽂아 놓은 것처럼 바위는 직각 이었다. 바위 위치가 벼랑 끝에 있어서 살펴보는데도 난감했다. 스님이 글씨로 보았던 곳은 집터 옆에 있어서 자세히 살펴 볼 수가 있었다. 힘들게 올라온 목적은 암각 서였기 때문에 돋보기렌즈와 현미경을 통해 글자를 찾으려고 온 신경을 모아 살펴보았다. 풍마우세로 바위 조각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 자국이 마치 글자를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새긴 것처럼 비슷했지만 글씨는 아니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암각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승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얻은 게 없으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덕분에 칼바위를 얻었잖습니까. 이 귀중한 이야기가 있는 토굴과 칼바위만 해도 충분합니다.”
 
도반은 바위나 어떤 조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그 대상에 귀한 대접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애매하게 이름도 없던 바위 형상이 칼을 세워 놓은 형상이라서 칼바위라고 셋이 즉석에서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 칼바위의 위상이 올라간 것 같았다. 스님은 날씨가 좋을 때는 이곳에서 서해까지 볼 수 있는 곳으로 확 트인 조망권이 최고의 자리이며 무염 지라고 다시 한 번 강조를 했다. 나는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누구라도 이곳에서 오면 한 번쯤 충분히 야망을 꿈꿀 수 있는 자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계는 도선암을 찾아 백일기도를 작심하고 왔지만 암자의 목탁소리도 번거롭고 갈증이 나서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 토굴에 홀로 묻혀서 삼업을 씻고 정진을 한 것이었다. 토굴 양 옆으로 큰 바위가 좌청룡, 우백호로 자리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백호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호가 웅비하려는 자세였다. 호랑이가 물을 먹고 있는 입 모양 밑에서 물이 솟았다. 시작은 아주 작지만 이 물줄기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여 서해로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 지류 원천이었다.
 
이상한 것은 칼바위 형상이었다. 마치 칼을 뽑아 그 어떤 것을 치고 칼끝을 땅에 꽂아 세운 것처럼 생겼다. 바위가 날카로운 칼처럼 직각이었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범상치 않은 장수가 깊은 뜻이 있어 이곳에 들어와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축을 뒤흔드는 하늘의 괘 괴 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를 피할 수 없었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불기둥이 장수에게 달려들었다. 장수는 순간 칼을 들어 불기둥을 내리쳤는데 산이 갈라지는 괴성이 나면서 온 몸에 불기둥 전류가 흘러들어 감지되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하늘도 멀쩡하고 산도 멀쩡했다. 장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위가 반으로 갈라져 한쪽만 남아있었다. 벼락 맞아 두 동강으로 갈라진 바위 하나는 이곳에 있고 한쪽은 아래로 굴러와 절 입구에서 멈췄다는 전설이 있다. 장수는 언제든지 분신 같은 무기를 곁에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그 장수는 젊은 시절 이성계가 아닌가. 불기둥을 단숨에 내리 긋는데 저 불기둥 씨알들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번뇌를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은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세상에 모두가 다 부처요, 보살 아닌 것이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화 되어 수 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토굴 뒤로 병풍바위가 직각으로 펼쳐져 있다. 독불공을 하면서 삼업을 씻어내는데 흉악한 것들을 막아주는 방패막이를 했던 병풍바위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 나라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악하고 또 신돈의 난으로 위험한 시기였다. 신돈의 난을 피해 잠시 무학대사의 인도로 성수산에 들어와 천지신명에게 백일치성을 드린 곳이라는 전설 같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칼바위와 백호바위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에 칼바위 전설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토굴을 지어 기도처를 만들었고 그 칼바위가 마치 이성계의 혼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생각에 갇혀있는 자들은 지금도 혼자서 찾아와 독 불 공을 하는 곳이었다. 완강한 침묵으로 손댈 수 없는 냉담함으로 숲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스님은 평정을 되찾은 뒤 성수산은 십만 평이고 그 중 암자에 딸린 임야는 3만평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절터는 신라 때 고승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는 내용이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사적기를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옛날에는 이 산이 생암산이고 암자는 생암이었는데요. 아세요? 생암은 생불인 관음보살이 두 왕조에게 현신하여 생암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는데요. 그리고 생불이 현신한 산이라서 생암산이라고 하던데요. 혹 제 표현이 틀린 건가요?”
 
나는 예전에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스님은 의외인 듯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
 
“마을 어른들이 얘기해서 알았습니다.”
 
스님은 그에 대해 설명을 했다.
 
“저도 상이암 사적 기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수천리 마을 보살들이 말을 해서 알았지요.”
 
왕건이 도선에 의해 천지신명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드려 고려 제1대 왕이 되었고 고려 말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나 젊은 시절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면서 성수만세 소리를 세 번 들었고 기도처에서 독불공을 하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불기둥이 달려 들어 가지고 있던 칼을 들어 내리쳤는데 바위를 갈라놓았다는 설화는 훗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설화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이 자리에 절이 있었다는 것인데 옛 절은 알 수 없는 과거에 묻혀 전설로 남아있고 그 후 상이암 자리에 몇 차례의 중창을 거쳐 암자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성계가 기도 중에 하늘에서 울리는 성수만세 소리를 세 번 듣고 새겼다는 삼청동 글씨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삼청동글씨는 이성계 글씨로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토굴에서 본 성수산 지형은 아홉 산문이 열려있는 용 구렁이었다. 산 구름이 운해를 이뤄 그 속에서 마치 용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형국이었다. 토굴 뒤로 활짝 펼쳐진 병풍바위는 절벽 낭떠러지에 깎아 세운 것처럼 산정에 솟아있어 절경이었다. 그 암벽아래에 토굴이 있고 석간수가 샘솟고 있었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이성계가 시절이 평안했더라면 마애불 한 분쯤 각을 하여 모실만한 장소인데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다. 이곳은 여덟 명의 왕이 나온다는 한반도 제일의 팔공산 생 왕 처인 곳이다. 속세의 번뇌 망상을 모두 잘라내고 천년을 돌아가는 길 끝에 또 하나의 천년의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용 구렁에서 또 조화를 부리고 있었다. 바위 곁에서 소낙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여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용 구렁에서 조화를 부린다며 구룡이 기운이 넘쳐서 그런 거라고 스님은 도인처럼 말을 했다. 시원한 빗줄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산안개가 되었다. 산안개로 산속 풍경의 선을 지우고 있었다. 중중첩첩 둘러친 깊은 골을 가르고 산바람이 불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오로지 먹고 마시고 쏟아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수박씨처럼 박혀있는 벌레들의 은신처는 벽계구곡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산멀미가 났다. 바위마다 나무마다 담쟁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담쟁이는 뿌리가 손톱만큼만 남아도 다시 자란다. 어디든 붙어서 잘 자라는 그 생명력은 가히 엽기적이다. 흡착할 수만 있다면 아무 곳이나 붙어 자란다. 강인하고 집요하다. 가을에는 주황색으로 물이 든다. 꽃은 황색이라 눈에 잘 띄지 않다. 열매는 푸른빛을 띠는 검은색으로 새들의 양식이 된다. 청라는 담쟁이 이름이다. 담쟁이는 지금(地錦)이라고도? 한다. 땅을 덮는 비단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에 보면 담쟁이를 소인배에 빗댄 상소가 나온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신은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빼어나기가 송백과 같고 깨끗하기가 빙옥과 같은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빌붙기를 등나무나 담쟁이같이 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입니다.”
 
 
칼바위 주변으로 안쪽의 능선과 산협을 살폈다. 바위는 산 쪽의 물줄기와 닿아있는 것도 같았지만 유역이 분명치 않아서 오래된 자연 지층인지 아니면 지난 산사태 때 허물어진 자리인지 식별 할 수가 없었다. 산의 맨 살 갱이 흙이 드러나 있고 바위는 제 몸에 난 흠집에 푸른 이끼를 덮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도는 세상을 다 산 사람의 뒷모습처럼 느껴졌다. 칡덩굴을 따라 나서는데 새벽 공기 같은 알싸한 칡꽃에 꿀 냄새가 묻어 있었다. 해묵은 나무에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며 천공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스님에게 농담을 건넸다.
 
“스님, 스님이 목탁 두드리는 일과 딱따구리가 고목나무를 파는 이치는 같지 않을까요.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 심취하여 열반에 오르려는 모습이 닮았다고 봅니다.”
 
산에서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면 딱따구리가 고목나무를 쪼아대며 내는 소리와 스님의 목탁소리는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었다.
 
“허허허...... 강선생,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두들기고 파고드는 것이 어찌 의미가 다르겠습니까? 보살들이 절에 백날 다니면 뭐합니까. 법당문턱이 너스래미 일도록 드나들면 뭐합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불상에 절만 하면 된다는 기복신앙으로 다니는데요. ......
 
나는 그 말을 해 놓고 미안 했다.
 
침침한 날씨에도 산세가 이처럼 뚜렷하여 마음속의 조화가 그지없이 넓음을 알았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벙어리 양과 같은 사문 일에 대하여 해답할 능력이 없는 아양승과 죽과 밥만 축내는 죽반승들은 많은 돌을 쌓아놓고 불자들을 종횡으로 휘두른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은 다 버려라’ 부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석가는 아난에게 죽림 촌에서 마지막 설법을 통해 자등명, 법등명이라고 했다. 수행자의 길은 외롭고 고통의 길이니 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법의 등불을 밝혀가라고 했다. 수행자는 무양의 길로 가는 깨달음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상이암은 무량수불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당이다.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 무량수불이므로 무량수전이라고 부른다.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 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함께 한국의 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으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에 있다고 보며 보통 무량수전의 전각은 문 방향을 남향으로 놓되 아미타불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게 놓는다. 이렇게 하여 참배자는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된다. 상이 암도 아미타불이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 건축물로 추측되는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대웅전 다음으로 많으며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봉안된다. 후불탱화로는 극락정토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극락회상도를 주로 봉안하며 그밖에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묘사한 극락구품탱화나 아미타탱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극락정토왕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대웅전과 견줄 만큼 꾸몄다. 불단은 꽃무늬와 비천으로 장식하고, 주불 위에는 닫집인 천개를 만들고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이나 극락조 등을 조각해 장식하기도 한다. 상이 암은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재화로 모두 소실되어 문화재가 남아있지 않았다.
【소설】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 3. 탁본
• 4. 칼바위를 찾다
• 5. 궁예와 왕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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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