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성궁은 안평대군(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의 옛집으로 장안성 서쪽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지라, 산천이 수려하여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 하며, 사직이 그 남에 있고 경복궁이 그 동에 있었다. 인왕산의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서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고, 비록 험준하지는 아니하나 올라가 내려다보면 아니 뵈는 곳이 없는지라, 사면으로 통한 길과 저자거리며, 천문만 호가 밀밀층층하여 바둑판과 같고, 하늘의 별과 같아서 역력히 헤아릴 수 없고 , 번화 장려함이 이루 형용치 못할 것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여 구름 사이에 은영(隱映)하고 상서(祥瑞)의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침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니 짐짓 이른바 별유천지(別有天地) 승지(勝地)였다.
3
때의 주도(酒徒)들은 몸소 가아(歌兒)와 적동(笛童)을 동반하고 가서 놀았으며, 소인(騷人:풍류를 즐기어 노래하고 읊는 사람)과 묵객(墨客)은 삼춘 화류시와 구추단풍절에 그 위를 올라 음풍영월하며 경치를 완상하느라 돌아가기를 잊으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경치의 좋음은 무릉 도원에 지남이 있더라.
4
이때, 남문 밖 옥녀봉 아래에 한 선비가 살고 있었으니, 청파사인 유영이라. 그는 연기 이십 여에 풍채가 준아하고 학문이 유여 하되, 가세가 빈곤하여 의식을 이을 길이 없는지라, 울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 곳의 경개가 좋음을 익히 들었으며 한번 구경코자 하되,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빛이 매몰하여 남의 웃음을 받는지라 머뭇거리다가 가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5
만력(萬曆) 신축(辛丑) 춘삼월 기망(보름)에 탁주 한 병을 샀으나 동복도 없고 또한 친근한 벗도 없는지라, 몸소 술병을 차고 홀로 궁문으로 들어가 보니, 구경 온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손가락질하면서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생은 하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다가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높은데 올라서 사방을 보니, 새로 임진왜란을 갓 겪은 후라, 장안의 궁궐과 성안의 화려했던 집들은 탕연(蕩然)하였다. 부서진 담도 깨어진 기와도, 묻혀진 우물도, 흙덩어리가 된 섬돌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풀과 나무만이 우거져 있었으며, 오직 동문 두어 칸막이 우뚝 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6
유생은 천석(泉石)이 있는 그윽하고도 깊숙한 서원으로 들어가니, 온갖 풀이 우거져서 그림자가 밝은 못에 떨어져 있었고, 땅 위에 가득히 떨어져 있는 꽃잎은 사람의 발길이 이르지 아니하며 미풍이 일 적마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11
문득 차고 있던 술병을 풀어서 다 마시고는 취하여 바윗가에 돌을 베개삼아 누웠더니, 잠시 후 술이 깨어 얼굴을 들어 살펴보니 유객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동산에는 달이 떠 있었고, 연기는 버들가지를 포근히 감쌌으며, 바람은 꽃잎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때 한 가닥 부드러운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서 찾아가 보았다. 한 소년이 절세(絶世) 미인(美人)과 마주 앉아 있다가 유영이 옴을 보고 흔연히 일어나서 맞이하니, 유영은 그 소년을 보고 묻기를,
12
"수재(秀才)는 어떠한 사람이기로 , 낮을 택하지 않고 밤을 택해서 놀고 있느뇨?"
14
"옛 사람이 말한 경개약구(傾蓋若舊)란 말은 바야흐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지요."
15
세 사람은 솔밭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매, 미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부르니, 차환(시종 드는 계집 아이) 두 명이 숲 속에서 나왔다. 미인은 그 아이를 보고 말하기를,
16
"오늘 저녁 우연히 고인(故人)을 만났고, 또한 기약하지 않았던 반가운 손님을 만났으니, 오늘밤은 쓸쓸히 헛되이 넘길 수 없구나. 그러니 네가 가서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아울러 붓과 벼루도 가지고 오너라."
17
두 차환은 명령을 받고 갔다가 잠시 후 돌아 왔으니 빠르기가 나는 새 오락가락 하는 것과 같더라. 유리로 만든 술병과 술잔, 그리고 자하주(신선이 마시는 자줏빛의 술)와 진기한 안주 등은 모두 인세(人世)의 것은 아니더라.
18
세 사람은 석 잔씩 마시고 나서, 미인이 새로운 노래를 부러 술을 권하니, 그 가사는 이러하니라.
25
노래를 마치고 나선 한숨을 '후유' 쉬면서 느껴 우니, 구슬 같은 눈물이 얼굴을 덮으니,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 절을 하고 묻기를,
26
"내 비록 양가의 집에 태어난 몸은 아니오나, 일찍부터 문묵(文墨)에 종사하여 조금 문필(文筆)의 공을 알고 있거니와, 이제 그 가사를 들으니, 격조가 맑고 뛰어나시나, 시상이 슬프니 매우 괴이하구려. 오늘밤은 마침 월색이 낮과 같고 청풍이 솔솔 불어오니 이 좋은 밤을 즐길 만 하거늘, 서로 마주 대하여 슬피 울음은 어인 일이오. 술잔을 더함에 따라 정의가 깊어졌어도 성명을 서로 알지 못하고, 회포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소.'
27
하고 유영은 먼저 자기의 성명을 말하고 강요하더라. 이에 소년은 대답하기를,
28
"성명을 말하지 아니함은 어떠한 뜻이 있어서 그러하온데, 당신이 구태여 알고자 할진대 가르쳐 드리는 것은 어려우리까마는, 그러나 말을 하자면 장황합니다."
29
하며 수심 띄운 얼굴을 하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30
"나의 성은 김이라 하오며, 나이 십세에 시문(詩文)을 잘하여 학당(學堂)에서 유명하였고, 나이 십사세에 진사 제이과에 오르니,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김진사로서 부릅디다. 제가 나 어린 호혈한 기상으로 마음이 호탕함을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또한 여인으로 하여 부모의 유체를 받들고서 마침내 불효의 자식이 되고 말았으니 천지간 한 죄인의 이름을 억지로 알아서 무엇하리까?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이오, 저 두 여인의 이름은 하나는 녹주요, 하나는 송옥이라 하는데, 다 옛날 안평대군의 궁인이었습니다."
31
"말을 하였다가 다하지 아니하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안평대군의 성시(盛時)의 일이며 진사가 상심하는 까닭을 자상히 들을 수 있겠소?"
33
"성상(星霜)이 여러 번 바뀌고 일월이 오래 되었으니, 그때의 일을 그대는 능히 기억하고 있소?"
34
"신중에 쌓여 있는 원한을 어느 날인들 잊으리까? 제가 이야기해 볼 것이오니. 낭군님이 옆에 있다가 빠지는 것이 있거든 덧붙여 주옵소서."
36
세종대왕의 왕자 팔 대군 중에서 셋째 왕자인 안평 대군이 가장 영특하였지요. 그래서 상이 매우 사랑하시고 무수한 전민과 재화를 상사하시니, 여러 대군 주에서 가장 나았사옵더니, 나이 십삼 세에 사궁에 나와서 거처하시니 수성궁이라 하였습니다.
37
유업(儒業)으로써 자임(自任)하고, 밤에는 독서하고 낮에는 시도 읊으시고 또는 글씨를 쓰면서 일각이라도 허송치 아니하시니, 때의 문인재사들이 다 그 문(門)에 모여서 그 장단을 비교하고, 혹 새벽닭이 울어도 그치지 않고 담론(談論)을 하였지마는, 대군은 더욱 필법(筆法)에 장(長)하여 일국에 이름이 났지요. 문종대왕이 아직 세자(世子)로 계실 적에 매양 집현전 여러 학사와 같이 안평대군의 필법을 논평하시기를,
38
"우리 아우가 만일 중국에 났더라면 비록 왕희지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찌 조맹부에 뒤지리오."
40
하루는 대군이 저희들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41
"천하의 모든 재사(才士)는 반드시 안정한 곳에 나아가서 갈고 닦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법이니라. 도성(都城) 문밖은 산판이 고요하고, 인가에서 좀 떨어졌을 것이니 거기에서 업을 닦으면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42
하시고는 곧 그 위에다 정사(精舍) 여남은 간을 짓고, 당명을 비해당(匪懈堂)이라 하였으며, 또한 그 옆에다 단을 구축하고 맹시단이라 하였으니, 다 명(名)을 돌아다보고 의(義)를 생각한 뜻이었지요. 때의 문장(文章)과 거필(巨筆)들이 단상에 다 모이니, 문장에는 성삼문이 으뜸이었고, 필법에는 최흥효가 으뜸이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다 대군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였사옵지요.
43
하루는 대군이 취함을 타서 궁녀 보고 말씀하시기를,
44
"하늘이 재주를 내리심에 있어서, 남자에게는 풍부하게 하고 여자에게는 재주를 내리심에 있어서 적게 하였으랴. 지금 세상에 문장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능히 다 상대할 수 없고, 아직 특출한 사람이 없으니. 너희들도 또한 힘써서 공부하여라."
45
하시고는 대군께서는 궁녀 중에서 나이가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열 명을 골라서 <소학>, <언해><중용>, <대학>, <맹자>, <시경>, <통감>, <송서> 등을 차례로 가르쳐 5년 이내에 모두 대성하였지요. 열 명의 이름 금련, 은섬, 자란, 보련, 운영이니, 운영은 바로 저였어요.
47
"시녀로서 한 번이라도 궁문을 나가는 일이 있으면 그 죄는 죽음을 당할 것이며, 또 외인이 궁녀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 죄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50
하루는 밤에 자란이 지성으로 저에게 묻기를,
51
"여자로 태어나서 시집가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애인이 누군지 는 알지 못하나, 너의 안색이 날로 수척해 가므로 안타까이 여겨 내 지성으로 묻나니, 조금도 숨기지 말고 이야기하라."
53
"궁인이 하도 많아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말을 못하겠거니와 네가 지극한 우정으로 묻는데 어찌 숨길 수 있겠니?"
55
지난 가을 국화꽃이 피기 시작하고 단풍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대군이 칠언사운 10수를 쓰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동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56
"나이 어린 선비가 김진사라 자칭하면서 대군을 뵈옵겠다 하옵니다."
59
하시고는 맞아들이게 한즉, 베옷을 입고 가죽띠를 맨 선비로서 얼굴과 거동은 신선 세계의 사람과 같더구나. 진사님이 절을 하고 하는 말이,
60
"외람 되어 많은 사랑을 입고 존명을 욕되게 하고 이제야 인사를 올리게 되오니 황송하기 말할 수 없사옵니다."
62
진사님이 처음 들어올 때에 이미 우리와 상면을 하였으나, 대군은 진사님의 나이가 어리고 착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피하도록 하지도 아니 하였었지. 대군이 진사님 보고 말씀하시기를,
63
"가을 경치가 매우 좋으니 원컨대 시 한 수를 지어 이 집으로 하여금 광채가 나도록 하여 주오."
64
하시니, 진사가 자리를 피하고 사양하며 말하길,
65
"헛된 이름이 사실을 어둡게 하고 말았나이다. 시의 격률도 모르는 소자가 어찌 감히 알겠나이까?"
66
이때 대군은 금련으로 노래하게 하시고, 부용으로 거문고를 타게 하시고, 보련으로 단소를 불게 하시고, 나로써 벼루를 받들게 하시니, 그때 내 나이는 십칠 세였단다. 낭군은 한 번 보매 정신이 어지러워지고 가슴이 울렁거렸으며, 진사님도 또한 나를 돌아보면서 웃음을 머금고 자주 눈여겨보더라.
67
진사님이 붓을 잡고 오언사운 한 수를 지으니 그 시는 이러하였지.
71
서리가 무거우니 국화는 금빛으로 드리우네.
77
"진실로 천하의 기재로다.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78
하시었고, 시녀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79
"이는 반드시 신선이 학을 타고 진세에 오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81
나는 이로부터 누워도 능히 자지를 못하고, 밥맛은 떨어지고 마음이 괴로워서 허리띠를 푸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는데, 너는 느끼지 못하더라.
83
"그래 내 잊었었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정신의 맑아짐이 마치 술깬 것과 같구나."
85
그 후로 대군은 자주 진사님과 접촉하였으나, 저희들은 서로 보지 못하게 한 까닭으로 매양 문틈으로 엿보다가 하루는 설도전에다 오언사운 한 수를 썼습니다.
94
시와 금전 한 쌍을 겹겹이 봉해 가지고 진사님에게 부치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어요.
95
얼마 후 진사님이 오셨는데, 얼굴은 파리해져서 더욱이 옛날의 기상은 아니었어요.
96
제가 벽을 헐어 구멍을 뚫고 봉서를 던졌더니, 진사님이 주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펴 보고는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며 차마 손에서 놓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97
한 무녀가 대군이 궁에 드나들면서 사랑과 신용을 얻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진사님이 그 집을 찾아가 보니 나이가 삼십도 못되는 얼굴이 아주 예쁜 여자로서 일찍 과부가 되고는 음녀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진사님을 보고는 기뻐하였지요. 무녀는 진사님을 붙들어 놓고 정으로써 돋우고 밤을 새우면서 같이 자리라 마음먹고는, 다음날 목욕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꾸밈을 하고 꽃같은 담요와 옥같은 자리를 깔아놓고 계집종으로 하여금 망을 보게 하였답니다. 김진사가 와서 이 광경을 보고 이상히 여기니, 무녀가,
98
"오늘 저녁은 어떤 저녁이기에 이와 같이 훌륭한 분을 뵈옵게 되었을까."
99
하였으나, 김진사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대답도 않고 있으니, 무녀가 또 말하길,
100
"과부의 집에 젊은이가 왜 왕래를 꺼리지 않고 자기의 번민을 말하지 않는지요?"
101
"점이 신통할 것 같으면 어찌 내가 찾아오는 뜻을 알지 못하오?"
102
이에 무녀는 즉시 영전에 나아가 신에게 절하고 방울을 흔들고 몸을 떨며,
103
"당신은 정말로 가련합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삼 년이 못 가서 황천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104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맺힌 한을 백약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 만일 당신이 다행히 편지를 전하게 될 것 같으면 죽어도 영광이겠습니다."
105
"비천한 무녀로서 부르시지 않으면 감히 들어가질 못합니다. 그러하오나 진사님을 위하여 한번 가보겠습니다."
106
무녀가 편지를 갖고 궁에 들어와 가만히 전해 주더이다. 제가 방으로 들어와서 뜯어보니,
107
'한 번 눈으로 인연을 맺은 후부터 마음은 들떠 있고 넋이 나가 능히 마음을 진정치 못하고 매양 성 그쪽을 향하여 몇 번이나 애를 태웠지요. 이전에 벽 사이로 전해 주신 편지로 해서 잊을 수 없는 옥음을 황경히 받아들고 펴기를 다하지 못하여 가슴이 메이고 읽기를 반도 못하여 눈물이 떨어져 글자를 적시기에 능히 다 보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 하오리까. 이러한 후부터 누워도 자지를 못하고 음식은 목을 내려가지 않고 병은 골수에 사무쳐 온갖 약이 효험이 없으니 저승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직 소원은 조용히 죽음을 따를 뿐이오니,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신께서 도와 주셔 혹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이 원한을 풀게 하여 주신다면 마땅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서라도 천지신명의 영전에 제를 올리겠습니다.
108
다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예를 갖추지 못하고 삼가 붓을 놓나이다.'
109
라 하였고, 사연 끝에 칠언사운 한 수가 적혀 있었으니, 이러했지요.
113
어린 제비는 흙을 물고 제 집을 찾아가네.
114
누워도 못 이룰 꿈이오. 하늘엔 기러기도 없구나.
117
제가 보기를 다함에 기운이 막혀서 입으로는 능히 말할 수 없었고,
118
눈물이 다하자 피가 눈물을 이었습니다.
120
"너희들 열 명이 한방에 같이 있으니 업을 전념할 수 없다."
121
하시고 다섯 명을 나누어 서궁에 가서 있게 하니, 저는 자란, 은섬, 옥녀, 비취와 같이 즉일로 옮겨갔습니다. 옥녀가 말하길,
122
"그윽한 꽃, 흐르는 물, 꽃다운 수풀이 산가나 야장과 같으니, 참으로 훌륭한 독서당이라 말할 수 있구나."
124
"산 사람도 아니고 중도 아니면서 이 깊은 궁에 갇히었으니, 정말로 이른바 장신궁이다."
125
하였더니, 좌중 궁인들이 자탄하고 울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126
그 후로 저는 편지를 써서 뜻을 이루고자 했으며, 진사님도 지성으로 무녀를 찾아 간절히 부탁을 하였으나 그녀는 오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아마 진사의 뜻이 자기한테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기도 합니다.
127
그럭저럭 두어 달이 지나고 계절은 다시 가을로 접어들어 바람이 불고 국화는 황금빛을 토하고 벌레는 소리를 가다듬고 흰 달은 빛을 밝혔습니다. 이때에 시내에서 빨래함은 좋은 때라. 여러 궁녀와 같이 날짜와 빨래할 장소를 결정하려 했으나 의논이 맞지 아니하였지요. 남궁 사람들은,
128
"맑은 물과 흰 돌은 탕춘대 밑보다 나은 데가 없단다."
130
"소격서동의 물과 돌은 바깥에서 더 내려가지 아니하니 왜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데를 구하는가."
131
하였으니, 남궁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고서 승낙하지 않으므로 결정을 짓지 못하고 그 날 밤에는 그만두고 말았지요. 그 뒤 진사님을 그리워하는 저의 병이 위중해짐에 남궁·서궁의 궁녀들이 모여 의논 끝에 소격서동으로 정하기로 하였지요. 중당에 모였는데, 소옥이 말했습니다.
132
"하늘은 명랑하고 물이 맑으니 정히 빨래할 때를 당하였구나. 오늘 소격서동에다 휘장을 치는 것이 좋겠지?"
133
이에 여러 사람은 다 반대가 없었습니다. 저는 서궁으로 돌아가서 흰 나섬에다 가슴속에 가득 찬 슬픔과 원한을 써서 품에 넣고 자란과 같이 오겠다."
135
"오늘 찾아온 것은 김진사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은 것뿐이니, 기별해줄 것 같으면 몸이 다하도록 은혜를 갚겠어요."
136
무당이 그 말대로 사람을 보냈더니 진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둘이 서로 만나니 할 말도 못하고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지요. 제가 편지를 주면서 말했어요.
137
"저녁에 꼭 돌아올 것이니 낭군님은 여기에서 기다려 주옵소서."
138
하고는 바로 말을 타고 갔습니다. 진사님에게 전한 편지의 그 사연은 이러하였습니다.
139
'일전 무산 산녀가 전해 준 편지에는 낭랑한 옥음이 종이에 가득하였습니다. 정중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어보니 슬프고도 기뻐서 마음을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고 바로 답서를 보내고자 하였사오나 이미 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또한 비밀이 샐까 두려워서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날아가고자 하오나, 날개가 없으니 애가 끊어지고 넋이 사라져 다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죽기 전에 이 편지를 통하여 평생의 한을 다 말씀드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낭군께서는 저를 새겨 두옵소서. 저의 고향은 남쪽이옵니다.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시기를 여러 자녀 가운데에서도 편벽 되게 사랑하시어, 나가 놀아도 저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셨습니다. 부모님은 삼강오륜의 행길을 가르치시고 또한 칠언당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이 열세 살 때 대군의 부르심을 받은 까닭으로 부모님을 이별하고 형제를 멀리하여 궁중에 들어오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빨래하러 가는 행차에는 양금의 시녀들이 다 모였던 까닭으로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사옵니다. 눈물은 먹물로 변하고 넋은 비단 실에 맺혔사오니 바라고 원하옵건대 낭군님께서는 한번 보아주옵소서.'
140
이러한 글은 가을을 맞이하여 상심하는 글이고, 그 시는 상사의 시였습니다.
141
제가 말을 타고 무당의 집에 돌아와 본즉 진사님은 종일 느껴 울어 넋을 잃고, 실성하여 제가 온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왼손에 차고 있던 운남의 옥색 금환을 풀어서 진사님의 품속에 넣어 주고 말하였습니다.
142
"낭군께서는 저를 보고 박정하다 아니 하시고 천금같은 귀한 몸을 굽혀 더러운 집에 와서 기다리시니,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또한 목석이 아니오니 감히 죽음으로써 허락하리이다. 제가 만약 식언한다면 여기에 금환이 있사옵니다."
143
하고, 갈 길이 총총하므로 일어나 작별을 고하니, 흐르는 눈물이 비와 같았습니다. 제가 진사님의 귀에다 대고,
144
"제가 서궁에 있으니 낭군께서 밤을 타 서쪽 담을 넘어 들어오시면 삼생에 있어서 미진한 인연을 거의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145
말을 마치고는 옷을 떨치고 나와서 먼저 궁문을 들어오니, 여덟 사람도 뒤따라 들어오더이다. 얼마 후 제가 자란 보고,
146
"오늘 저녁에는 나와 진사님과 금석의 약속이 있으니, 오늘 오지 않을 것 같으면 내일에는 반드시 담을 넘어 오리라. 오면 어떻게 대접할까?"
148
진사님이 담을 본즉 높고 험준하여 넘지 못하고 돌아와서 근심하고 있는데, 특이라 하는 어린 종이 있어 이를 알고는 진사님을 위해 사다리를 만드니, 매우 가볍고 능히 거두었다 폈다 하기에 아주 편리하였습니다. 그 날 밤 궁으로 가려고 할 때 특이 품안으로부터 털옷과 가죽 버선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149
"이것이 있으면 넘어가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입니다."
150
진사님이 입으니 빛이 낮과 같았습니다. 진사님은 그 계교를 써서 담을 넘어 숲속에 엎드리니 달빛은 낮과 같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사람이 안에서 나와 웃으면서,
152
진사님이 나아가 절을 하니, 자란이 말하였습니다.
153
"진사님이 오심을 고대하기를 대한에 비를 바라듯 하였는데, 이제야 뵈옵게 되어 저희들이 살아났사오니 진사님은 의심하지 마옵소서."
154
하고는 바로 이끌고 들어가기에, 진사님이 층계를 거쳐 들어오실 제 저는 사창을 열어놓고 짐승 모양의 금화로에다 향을 사르고, 유리 같은 서안에다 <태평광기> 한 권을 펴들고 있다가, 진사님이 옴을 보고 일어나 맞이하고 절을 하니 진사님도 답례를 하더이다.
155
자란으로 하여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자하주를 따라 권하니, 석 잔을 마시고 진사님은 좀 취한 듯이 말하였습니다.
157
자란이 마침 그 뜻을 알고는 휘장을 드리우고 문을 닫고 나가더이다. 제가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나아가니 그 즐거움은 가히 알 것입니다. 밤은 이미 새벽이 되고 뭇닭은 날 새기를 재촉하기에 진사님은 바로 일어나 돌아가셨습니다.
158
이러한 후로부터는 어두울 때에 들어와서 새벽에 돌아가시니 그렇게 하지 않는 저녁이 없었지요. 사랑은 깊어가고 정은 두터워져 스스로 그치기를 알지 못하였어요. 이 때문에 궁중 안 눈 위에는 문득 발자취가 나게 되었습니다. 궁인들은 다 그 출입을 알고 위험하다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159
하루는 진사님이 좋은 일의 끝이 화기가 될까 두려워 근심하고 있는데 특이 들어와 물었습니다.
160
"저의 공이 매우 컸는데 상을 논하지 않으시니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진사님의 얼굴빛을 보니 근심이 있는 것 같사와 알지 못하거니와 무슨 까닭이옵니까?"
161
"보지 못한즉 병이 마음과 골수에 있고, 본즉 헤아릴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어찌 근심하지 않겠느냐?"
162
"그러면 어찌하여 남 몰래 업고 도망가지 않으십니까?"
163
진사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날 밤 특의 계교를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164
"특이 노비지만 지모가 많아 이 계교로써 가르치니 그 계교가 어떠하오?"
166
"저의 부모님과 대군이 주신 의복과 보화가 많은데, 이 물건들을 버리고 갈 수 없사오니 어찌하면 좋으리이까. 말 열 필이 있다 하여도 다 운반할 수 없습니다."
167
진사님이 돌아가서 특에게 말하니, 특은 기뻐하면서,
168
"무엇이 어려움이 있사옵니까? 저의 벗 중에 역사 20여 명이 있사온데, 이 무리로 하여금 운반케 하면 태산도 또한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169
밤마다 수습하여 이레만에 바깥으로 운반하기를 마치고 난 특이 말했습니다.
170
"이와 같은 보화는 본댁에 쌓아두면 상전께서 의심할 것이오니 산중에다 구덩이를 파고서 깊이 묻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71
그런데 특의 뜻은 이 보화를 얻은 후에 저와 진사님을 산골로 끌고 들어가서 진사님을 죽이고는 저와 재보를 자기가 차지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진사님은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172
하루는 진사님이 대군의 궁에 갔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173
"도망해야 하겠소. 내가 지은 죄로 해서 군이 의심을 품고 있으니 오늘밤에 도망가야 하겠소. 오늘밤에 도망가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소."
174
"지난 밤 꿈에 한 사람을 보았는데 얼굴이 흉악하고 모돈단우라 칭하면서 말하기를 '이미 약속한 바 있어 장성 밑에 오래도록 기다렸노라' 하기에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났거니와, 몽조가 상서롭지 아니하니 낭군님도 생각하여 보옵소서."
175
"꿈은 허망하다고 하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소."
176
"그 장성이라고 말한 것은 궁장이며, 그 모돈이라고 말한 것은 특이니, 낭군님은 그 노복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신지요?"
177
"그놈은 본래 미련하고 음흉하지만 전일 나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어찌 나중에 악한 일을 하겠소?"
178
"낭군님의 말씀을 어찌 감히 거역하오리이까마는 자란이와 나의 정이 형제와 같으니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179
하고는 곧 자란을 불러 진사님의 계교로써 말하였더니, 자란이 크게 놀라며 꾸짖어 말하더이다.
180
"서로 즐거워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스스로 화근을 빨리 오게 하느냐? 한두 달 동안 서로 사귐이 또한 족하거늘 담을 넘어 도망하는 것을 어찌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있으리오? 천지는 한 그물속 같으니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도망간들 어디를 가리오? 혹 잡힐 것 같으면 그 화는 어찌 너의 몸만으로 그치겠느냐. 몽조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는 것은 그만 두고라도 만약 길하다고 하면 네가 기쁘게 가겠느냐. 마음을 굽히고 뜻을 누르고서 정절을 지켜 평안이 있으면 천이를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의 얼굴이 좀 쇠하면 대군의 사랑도 풀어질 것이니 사세를 보아 병이라 하여 누워 있으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실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낭군과 같이 손을 잡고 가서 백년해로(百年偕老) 함이 가장 큰 계교이니 이런 것을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는가. 이제 그와 같은 계교를 당하여 네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감히 하늘을 속일 수야 있겠느냐?"
181
이에 진사님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는 한탄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나갔습니다.
182
하루는 대군이 서궁 수헌에 와서 철쭉꽃이 만발하였음을 보시고 시녀에게 명하여 오언절구를 지어 올리게 하고는 대군이 칭찬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183
"너희들의 글이 날로 발전하므로 내 매우 가상히 여기거니와 다만 운영의 시에는 뚜렷이 사람을 생각하는 뜻이 있구나. 네가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 김진사의 상량문에도 의심할 만한 대목이 있었는데, 너는 김진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184
이에 저는 즉시 뜰에 내려 머리를 땅에 대고 울면서 고했어요.
185
"대군께 한 번 의심을 보이고는 바로 곧 스스로 죽고자 했으나 나이가 아직 이십 미만이고, 또 부모님을 보지 않고 죽으면 구천지하에 죽어서도 유감이 있는 까닭으로 살기를 도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가 또한 이제 의심을 나타냈사오니 한 번 죽기를 어찌 애석히 여기리까."
186
하고는 바로 비단 수건으로 스스로 난간에다 목을 매었더니, 대군이 비록 크게 노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정말로 죽이고 싶지 않은 고로, 자란으로 하여금 구하여 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진사가 그날 밤 들어오셨으나, 저는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자란으로 하여금 맞이해 들여 술 석 잔을 권하고는 봉서를 주면서 제가 말했지요.
187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니, 삼생의 인연과 백년의 가약이 오늘 밤으로 다한 것 같습니다. 혹 천연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마땅히 구천지하(九天地下)에서 서로 찾게 되겠지요."
188
진사는 편지를 받고 우두커니 서서 맥맥히 마주 보다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갔습니다. 자란은 처량하여 차마 볼 수 없어 몸을 숨기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 있었습니다. 진사가 집에 돌아와 봉서를 뜯어보니,
189
'박명한 운영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사뢰하옵니다. 제가 비박한 자질로서 불행하게도 낭군님께옵서 유념하여 주시어 서로 생각하기를 몇 날이며, 서로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하다가 다행히 하룻밤의 즐거움을 나누었을 뿐, 바다같이 크고 넓은 정은 다하지 못하였나이다. 인간사 좋은 일에는 조물주의 시기함이 많사와, 궁인이 알고 대군이 의심하시어 조석으로 화가 다가왔으매, 낭군께서는 작별한 후로 저를 가슴에 품어 두시고 상심치 마시옵소서. 힘써 공부하시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후세에 이름을 날리시어 부모님을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의복과 보화는 모두 팔아서 부처님께 바치시어 여러 가지로 기도하시고 정성을 다하여 소원을 내어 삼생의 미진한 연분을 후세에 다시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190
진사는 다 보지를 못하고 기절하여 땅에 넘어지니 집사람들이 뛰어나와 구하시니 다시 깨어났습니다.
191
"궁인이 무슨 말로 대답을 하였기에 이렇게 죽으려 하시나이까?"
192
하고 물으니 진사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한 가지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193
"재보는 네가 잘 지키고 있느냐? 내 창차 다 팔아서 부천님께 숙약을 실천하리라."
195
'궁녀가 나오지 않으니 그 재보는 하늘과 나의 것이겠지.'
196
하며 벽을 향하여 남몰래 웃었으나, 사람들은 까닭을 알 수 없었지요.
197
하루는 특이 스스로 옷을 찢고 코를 쳐서 피가 흐르게 하여 온몸을 더럽히고 머리를 흐트리고 맨발로 뜰에 엎드려 울면서 말했어요.
198
"제가 강적의 습격을 받았나이다. 외로운 한 몸이 산중을 지키다가 수많은 도적들이 습격하여 오므로 목숨을 걸고 도망쳐 왔나이다. 만일 그 보화가 아니더면 제게 어찌 이와 같은 위험이 있으리이까?"
199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므로 진사님은 따뜻한 말로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200
얼마 후 진사님은 특의 소행을 알고 노복 십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불의에 그 집을 수색하여 보니 다만 금팔찌 한 쌍과 운남 보경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201
이 말이 전파되어 궁인이 대군께 고하니, 대군이 대노하여 남궁인으로 하여금 서궁을 찾아보게 한즉 저의 의복과 보화가 전부 없어졌으므로, 대군이 서궁 궁녀 다섯 사람을 뜰에 불러놓고, 형장을 엄하게 차려놓고 영을 내리기를,
202
"이 다섯 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을 징계하라!"
204
"장수를 헤아리지 말고 죽을 때까지 치렷다!"
206
"바라건대 한 번 말이나 하고 죽겠나이다."
207
하고 은섬이 초사를 올리니, 대군이 보기를 마치고 나시더니 또 한 번 초사를 다시 펴고 보시는데, 노여움이 좀 풀리는 것 같으므로 소옥이 엎드려 울면서 아뢰었습니다.
208
"전날 빨래하러 갈 때에 성안으로 가지 말자고 한 것은 저의 의견이었으나, 자란이 밤에 남궁으로 와서 매우 간절히 청하기에 제가 그 뜻을 안타까이 여겨 군의를 물리치고 따랐사옵니다. 운영의 훼절은 그 죄가 저의 몸에 있사옵고 운영에게 있지 아니하오니 저의 몸으로써 운영의 목숨을 이어 주옵소서."
209
이에 대군의 노여움이 좀 풀어져서 저를 별당에다 가두고 다른 궁녀들은 다 돌려보냈는데, 그 날 밤 저는 비단 수건으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210
진사는 붓을 잡아 기록하고 운영은 옛일을 당겨서 이야기하는데 매우 자상하였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다가, 운영이 진사보고 말하였다.
211
"이로부터 다음 이야기는 낭군님께서 하옵소서."
212
이에 진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213
운영이 자결한 후 모든 궁인들이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부모가 돌아간 것과 같이 했습니다. 저는 공불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구천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자 그 금팔찌와 보경을 다 팔아 사십 석을 사서 청녕사로 보내어 재를 올리고자 하나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특을 불러 전일의 죄를 사하고,
214
"내 운영을 위해 초례를 베풀고 불공을 드려 발원을 빌고자 하니 네가 가지 않겠느냐?"
215
특이 즉시 절로 가서 삼 일을 궁둥이를 두드리면서 누워 놀다가, 지나가는 마을 여인을 강제로 끌고 들어와 승당에서 수십 일을 지내고도 재를 올리지 않으므로 중들이 분히 여겨 재를 올리라고 하매, 특이 마지 못하여,
216
"진사는 오늘 빨리 죽고 운영은 다시 살아나 특의 짝이 되게 하여 주소서."
217
이와 같이 삼 일을 밤낮으로 발원하는 말이 오직 이것뿐이었답니다. 그리고 나서 특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218
"운영 아씨는 반드시 살 길을 얻을 것입니다. 재를 올리던 그날 밤 저의 꿈에 나타나서 정성껏 발원해 주니 감사한 마음 이루 다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하고 울었으며, 중들의 꿈도 또한 같았다고 합니다."
220
저는 독서하고자 청녕사에 며칠 묵는 동안 중들로부터 특이 한 일을 자세히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목욕 재계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향불을 사르면서 합장하고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칠 일만에 특이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221
이러한 후로부터 저는 세상 일에 뜻이 없어 새 옷을 갈아입고 고요한 곳에 누워 나흘을 먹지 않고 한 번 깊이 탄식하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222
쓰기를 마치자 붓을 던지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슬피 울면서 능히 스스로 그칠 줄을 몰랐다. 유영은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김진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말하기를,
223
"우리 두 사람은 다같이 원한을 품고 죽었기로 염라대왕이 죄없음을 가련히 여기시어 다시 인간에 태어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하의 즐거움이 인간보다 못하지 않는데 하물며 천상의 즐거움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로써 인간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오늘 저녁에 슬퍼한 것은 대군이 한번 돌아가시자 고궁에 주인 없고 까마귀와 새들이 슬피 울고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않으므로 그리 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다 새로 병화를 겪은 후로 아름답고 빛나던 집이 재가 되고 섬돌, 담이 모두 무너지고 오직 섬돌 위에 피어 있는 꽃만이 향기 만발하고, 뜰에는 풀만이 깔리어 그 빛을 자랑할 뿐이니, 그 찬란하던 옛날의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인간사 변화가 이와 같이 같거늘 다시 옛일을 생각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224
"그러면 그대들은 천상의 사람입니까?"
225
"우리 두 사람은 본래 천상 선인으로서 오래도록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었더니, 하루는 제가 반도를 따가지고 운영과 같이 먹다가 발각되고, 전세에 적하되어 인간의 괴로움을 골고루 겪다가, 이제 옥황상제께서 전의 허물을 용서하사 삼청궁으로 올라가서 다시 옥황상제의 향안 앞에서 상제를 모시게 하였삽기로, 돌아가는 이때를 타서 바람의 수레를 타고 다시 진세의 옛날 놀던 곳을 찾아와 보았을 뿐입니다."
226
하며 김진사가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운영의 손을 잡고 또 말했다.
227
"바다가 마르고 돌이 불에 타 버린들 우리들의 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오늘 저녁에 존군과 서로 만나 이렇듯 따뜻한 정을 나누었으니 속세의 인연이 없으면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존군께서는 이 원고를 거두어 가지시고 돌아가 뭇사람의 입에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자 않도록 영원히 전해 주시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229
그리고는 김생은 취하여 운영의 몸에 기대어 시 한 수를 읊었다.
235
봄빛은 예와 같건만 주인은 간 곳 없구나.
237
아직 푸른 이슬은 우의를 적시지 않았네.
244
천 년 만 년 우리 사랑 꿈마다 찾아오네.
245
오늘 저녁 예 와 놀며 옛 자취 찾아보니,
246
막을 수 없는 슬픈 눈물은 수건을 적시네
247
이때 유영도 취하여 잠깐 누워 있다가 산새 소리에 깨어났다. 구름과 연기는 땅에 가득하고 새벽빛은 창망한데, 사방을 살펴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생이 기록한 책자만이 있었다. 유영은 쓸쓸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신책(神冊)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248
장속에 감추어 두고 때때로 내어 보고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침식(寢食)을 전폐했다. 후에 명산을 두고 두루 찾아다니더니,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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