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은 밤 지는 달이, 춘천 삼학산(三鶴山) 그림자를 끌어다가 남내면(南內面) 솔개 동내〔松峴〕 강동지(姜同知) 집 건넌방 서창에 들었더라.
2
창호지 한 겹만 가린 홑창 밑에서 긴 베개 한 머리 베고 넓은 요 한편에 혼자 누워 있는 부인은, 나이 이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돋아 오는 반달같이 탐스럽더라. 그 부인이 베개 한 머리가 비어서 적적한 마음이 있는 중에, 뱃속에서 팔딱팔딱 노는 것은 내월만 되면 아들이나 딸이나 낳을 터이라고 혼자 마음에 위로가 된다. 서창에 비치는 달빛으로 벗을 삼고, 뱃속에서 꼼지락거리고 노는 아이로 낙을 삼아 누웠으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잠 못 들어 애를 쓰다가 삼학산 그림자가 창을 점점 가리면서 방 안이 우중충하여지는데, 부인도 생각을 잊으며 잠이 들었더라.
3
잠든 동안에 게으른 놈은 눈도 몇 번 못 끔적거릴 터이나, 부인의 꿈은 빨랫줄같이 길게 꾸었더라.
4
꿈을 꾸다가 가위를 눌렸던지 소리를 버럭 질러서 그 집 안방에서 잠자던 동지의 내외가 깜짝 놀라 깨었는데, 강동지의 마누라가 웃통 벗고 넓은 속곳 바람으로 한걸음에 뛰어왔다.
5
"이애 길순아,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이애 길순아, 길순아."
6
길순이를 두세 번 부르다가 길순이가 대답이 없으니, 다시 안방으로 향하고 강동지를 부른다.
7
"여보 영감, 이리 좀 건너오시오. 길순의 방에서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웬일이오."
8
벌거벗고 자던 강동지가, 바지만 꿰고 뛰어나와 건넌방 문을 흔든다.
10
길순이를 부르느라고 온 집안이 법석을 하는데, 그 방 속에 있는 길순이가 잠이 깨었으나 숨소리도 없이 누웠다가 마지못하여 대답하는 모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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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는 그 대단한 길순이가 무슨 염려가 되어 저렇게 애를 쓰시오. 길순이는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고 들어가서 주무시오."
12
하더니 다시는 아무 소리 없는데, 길순이 가슴은 녹는 듯하여 베개에 드러누웠고, 강동지 내외는 죄나 지은 듯이 헛웃음을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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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잠이나 잘 자거라. 무슨 소리가 들리기로 염려가 되어서 그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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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강동지 마누라는 웃통을 벗은 채로 방 한가운데 앉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빠진 사람같이 우두커니 앉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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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달 그림자가 지구를 안고 깊이 들어간 후이라 강동지 집 안방이 굴 속같이 어두웠는데, 강동지는 그렇게 어두운 방에서 담뱃대를 찾으려고 방 안을 더듬더듬 더듬다가 담뱃대는 안 잡히고 마누라의 몸뚱이에 손이 닿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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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가 계집을 만지듯이 마누라의 머리에서부터 더듬어 내려오더니, 중늙은이도 젊은 마음이 났던지 담뱃대는 안 찾고 마누라를 드러누이려 하니, 마누라가 팔을 뿌리치며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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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좀 가만히 있소. 남은 경황이 없는데 왜 이리하오."
19
"여보, 자식에게 저 몹쓸 노릇을 하고 걱정이 안 된단 말이오? 나는 우리 길순이 생각을 하면 뼈가 녹는 듯하오. 자식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인데, 금옥같이 길렀다가 지금 와서 저러한 신세가 되니, 그것이 뉘 탓이오? 초록은 제 빛이 좋다고, 사위를 보거든 같은 상사람끼리 혼인하는 것이 좋지, 양반 사위 좋다고 할 빌어먹을 년이 있나.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가난한 집 지차자식(之次子息)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부모도 없고 사람만 착실한 애를 골라서 데릴사위를 삼아서, 평생을 데리고 있으려 하였더니, 그 소원이 쓸데없고, 사위 없는 딸 하나만 데리고 있게 되었소. 여보 영감, 양반 사위를 보려고, 남을 입도 못 벌리게 하고 풍을 칠 때에는 그 혼인만 하면 하늘에서 은이나 금이나 쏟아지는 것 같고 길순이는 신선이나 되는 듯하더니, 사위 덕을 얼마나 보았소?"
20
"말 좀 나직나직 하게. 길순이 들으리. 덕은 작게 본 줄로 아나? 김승지 영감이 춘천 군수로 있을 때에, 최덜퍽에게 빚 받은 것은 생억지의 돈을 받았지, 어데 그러한 것이 당연히 받을 것인가? 그나 그뿐인가. 청질은 작게 하여 먹었나."
21
"에그 끔찍하여라. 큰 수 났군. 그러나 그 수 나서 생긴 돈은 다 어데 두었소?"
22
"아따 이런 답답한 말도 있나? 빚 갚은 것은 무엇이며, 그 동안 먹고 쓴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백척간두에 꼭 죽을 지경에, 김승지 영감이 춘천 군수로 내려와서 우리 길순이를 첩으로 달라 하니 참 용꿈 꾸었지. 내가 전에는 풍언 하나만 보아도 설설 기었더니, 춘천 군수 사위 본 후에는 내가 읍내를 들어가면, 동지님 동지님 하고 어데를 가든지 육회 접시 술잔이 떠날 때가 없었네. 그 영감이 비서승(秘書丞)으로 갈려 들어가지 말고 춘천 군수로 몇 해만 더 있었더면, 우리가 수 날 뻔하였네. 여편네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 안에서 방정을 떨고 있으니 될 것도 아니 되어. 잠자코 가만히만 있게, 그 양반 덕에 우리가 또 수 날 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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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에 마누라가 골이 잔뜩 났더라.
24
무식한 상사람은 내외 다툼이 나면 맹세지거리 욕지거리가 아니면 말을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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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빌어먹을 소리 좀 마오. 집안이 잘될 것을 여편네가 방정을 떨어서 안 되었소그려. 내일부터 내가 벙어리 되면 하늘에서 멍석 같은 복이 내려와서 강동지의 머리에서부터 내려 덮어씌울 터이지. 어디 좀 두고 보아야. 양반 사위 보고, 그 덕에 청질이나 해먹고, 읍내 가면 육회 접시 술잔 얻어 먹었다고, 그까짓 것을 덕본 줄 알고, 길순에게는 저러한 적악한 줄은 모르니 참 답답한 일이오. 길순이는 정절 부인이 되려나 왜 다른 데로 시집을 안 가고, 김춘천인지 김승지인지, 그 망할 놈만 바라고 있어. 김승지 김승지, 김승지가 다 무엇이오. 그런 짐승 같은 놈이 어데 있단 말이오. 저의 마누라가 무서워서, 첩을 데려가지 못하고, 저렇게 둔단 말이오? 아내가 그렇게 겁이 날 것 같으면, 당초에 첩을 얻지 말 일이지, 얻어 놓고 남에게 저런 못 할 노릇을 해. 그 망할 놈 편지나 말면 좋으련만 편지는 왜 하는지. 내일은 길순이더러 다른 서방을 얻으라고 일러서, 만일 안 듣거든 쳐죽여야. 호강하려고 남의 첩 되었다가, 어떠한 빌어먹을 년이 고생하고 근심하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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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에 강동지는 골이 나서, 제 계집을 박살이라도 하고 싶으나 꿀꺽꿀꺽 참고 잠자코 있는 것은, 계집을 아껴서 참는 것이 아니요, 돈을 아껴서 참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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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무슨 돈인가. 강동지의 마음에는 길순이를 돈덩어리로 보고 있는 터이라. 그 돈덩어리를 덧냈다가 중병이 나면 탈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느 틈에 담뱃대를 찾아서 담배를 붙였던지, 방바닥에서 담뱃불만 반짝반짝한다. 단풍머리 찬바람에 이슬이 어려 서리 되는 새벽 기운이라, 열이 잔뜩 났던 마누라가 몸이 써느렇게 식었는데 옷을 찾아 입느라고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윗목에 가서 혼자 옹그리고 등걸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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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마누라, 마누라, 감기 들려고 웃목에서 등걸잠을 자나?"
29
마누라는 숨소리도 없이 쥐죽은 듯이 누웠는데, 강동지는 그 마누라의 잠 아니 든 줄을 알면서 모르는 체하고 혼자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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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이란 것은, 하릴없는 것이야. 그런 방정이 있나. 김승지 영감이 날더러 길순이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기별까지 하였는데, 집안에서 그런 말을 하면, 그날 그시로 아니 떠난다고 방정들을 떨 듯하여서 내가 잠자코 있었지. 내가 영웅이지, 조 방정에 그 소리를 듣고 한시를 참아. 웃목에서 등걸잠을 자다가 감기나 들어서 뒈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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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담뱃대를 탁탁 떨고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가니, 마누라는 점점 추운 생각이 나서 이불 속에로 들어가고 싶으나 강동지가 부를 때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 제풀에 들어가기도 열적은 일이라 다시 부르기를 기다려도 부르지는 않고, 제풀에 골이 나서 새로이 일어나더니 혼자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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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수 같은 밤은 왜 밝지 아니하누. 내가 감기나 들어서 거꾸러지기만 기다리는 그까짓 영감을 바라고 살 빌어먹을 년이 있나. 날이 밝거든 내 속으로 낳은 길순이까지 쳐죽여 버리고, 내가 영감 앞에서 간수나 마시고 눈깔을 뒤어쓰고 죽는 것을 뵈일 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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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말거나 누가 죽으랬나. 공연히 제풀에 방정을 떨어. 죽거든 혼자나 죽지. 애꿎은 길순이는 왜 쳐죽인다 하는지, 김승지가 날마다 기대리고 있는 길순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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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싱거운 싸움 하는 소리가 단칸 마루 건넌방에 혼자 누운 길순의 귀에는 낱낱이 유심히 들린다. 강동지의 엉터리도 없는 거짓말에 길순이 귀에는 낱낱이 참말로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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