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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은 필생의 역저인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좌절된 것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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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民族)의 성쇠는 매양 그 사상(思想)의 추향 여하에 달린 것이며, 사상 추향의 혹좌혹우(或左或右)는 매양 모종 사건의 영향을 입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宗敎)나 학술(學術)이나 정치(政治)나 풍속(風俗)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어찌하여 효(孝)하며 어찌하여 충(忠)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공자(孔子)를 높이며 어찌하여 이담을 배척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팔괘(八卦)를 낳는다 하는가. 어찌하여 신수(身修) 연후에 가제(家齊)요, 가제 연후에 국치(國治)인가. 어찌하여 비록 두통이 날지라도 관망(冠網)을 끄르지 않으며 티눈이 있을지라도 버선을 신는 것이 예(禮)이었던가. 선성(先聖)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선대의 일이면 그대로 행하여 일세를 몰아 잔약·쇠퇴·부자유의 길로 들어감이 무엇에 원인함인가. 왕건(王建)의 창업인가,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인가, 임진(壬辰)의 왜란(倭亂)인가, 병자(丙子)의 호란(胡亂)인가, 사색(四色)의 당파인가, 반상(班常)의 계급인가, 문귀무천(文貴武賤)의 폐인가, 정주학설(程朱學說)의 유독(遺毒)인가. 무슨 사건이 전술한 종교·학술·정치·풍속 각 방면에 노예성을 산출하였는가. 나는 일언으로 회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仁宗) 13년(1135) 서경전역(西京轉役)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서경전역의 양편 병력이 각 수만에 불과하며 전역의 수미(首尾)가 양개년에 불만하였지만, 그 전역의 결과가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침은, 서경전역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渤海) 멸망의 전역보다도, 서경전역 이후 고려 대 몽고의 60년 전역보다도, 몇갑절이나 돌과(突過)하였으니, 대개 고려 지(至) 이조 1천년간에 서경전역에 지날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2)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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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전역 발생의 원인과 동기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 전역으로 하여 생긴 영향을 논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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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전역(西京戰役)의 원인을 말하려면 당시 낭(郎)·유(儒)·불(佛) 삼가의 정치(鼎峙)한 대세부터 논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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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郎)’은 곧 신라의 화랑(花郞)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皀衣)를 입어 ‘조의선인(皀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 화랑을 국선(國仙)·선랑(仙郞)·풍류도(風流徒)·풍월도(風月徒) 등으로도 칭하였다. 『삼국사기』는 그 저자 김부식이 화랑을 구시배척(仇視排斥)하는 유교도 중에도 가장 협애엄혹(狹隘嚴酷)한 인물이므로, 본국 전래의 『선사(仙史)』『화랑기(花郞記)』 같은 것은 모두 말살하고 다만 외국에까지 전파된 화랑의 1, 2 사실과 『화랑세기(花郞世紀)』의 1, 2구 곧 당인(唐人)이 지은 『신라국기(新羅國記)』『대중유사(大中遺事)』 등에 쓰인 화랑에 관한 문구를 초록하여, 그 원류(源流)를 혼란하며 연대를 전도하고, 허다한 화랑의 미사(美事)를 매몰하였으니, 이 얼마나 가석한 일인가, 이에 관한 곡절은 타일에 전서(傳書)로 상론하려 하니 여기에는 약하거니와, 화랑은 곧 신라 이래 국풍파(國風派)의 중진이 되어 사회사상계의 일위를 점령하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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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儒)’는 공자(孔子)를 존봉하는 자니, 지난날에 사가들이 매양 존화주의에 취(醉)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위조하여 가며 태고부터 유교적 교의(敎義)가 조선에 횡피(橫被)한 줄로 말하였으나, ‘비치’나 ‘불구레’로 왕을 부르며 ‘말치’나 ‘쇠뿔한’으로 관(官)을 이름하던 시대에는, 공자·맹자의 이름을 들은 이도 전국에 기인(幾人)이 못 되었을 것이다. 대개 유교는 삼국 중·말엽부터 그 경전(經傳)이 얼마큼 수입되어, 예(禮)를 강하며 춘추(春秋)를 읽는 이가 있어 뿌리를 박아, 고려 광종(光宗) 이후에 점차 성하여 사회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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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佛)’은 인도로부터 중국을 지나 조선에 수입된 석가(釋迦)의 교니, 삼국 말엽부터 성행하여 조정이나 민간에서 일체로 숭봉하고, 불교(佛敎)가 비록 세사에 관계 없는 출세적(出世的) 종교이나 그 교도가 문득 정치상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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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신라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만세의 책(策)을 정할 때, 각교의 경알(傾軋)을 염려하여 유·불 양교는 평등으로 대우하며, 화랑(花郞)은 삼교 교지(敎旨)를 포함한 자라 하여 각교의 상에 위(位)케 하며, 각 교도의 호상 출입을 허하였다. 그래서 신라사를 보면 전밀(轉密 : 金歆運傳[김흠운전]에 보임 ― 原註[원주])은 불교의 승(僧)으로 화랑 문노(文勞)의 제자가 되고, 안상(安詳:〔安常〕: 『三國遺事[삼국유사]』 栢栗寺[백률사]에 보임 ― 原註[원주])은 화랑인 영랑(永郞)의 고제(高弟)로 승통(僧統)의 국사(國師)가 되고, 최치원(崔致遠)은 유·불 양교에 출입하는 동시에 또한 화랑도(花郞道)의 대요를 섭렵함이 있었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매양 시세를 따라 변천하고 사람의 기망(期望)대로 되지 아니하는데야 어찌하랴. 진흥대왕의 각교 조화책도 불과 수백년에 무효에 돌아가고 고려 인종13년(1135)에 서경전역(西京戰役)이 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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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왕건(王建)이 불교로 국교(國敎)를 삼고 유교와 화랑도 또한 참용(參用)하더니, 그 후사(後嗣)에 이르러는 왕왕 중화를 존모하여, 광종(光宗)은 중국 남방인 쌍기(雙冀)를 써서 과거(科擧)를 설치하고 더욱 유학(儒學)을 장려할새, 만일 유교의 경전(經傳)을 통하는 중국인이 이르면, 대관을 시키며 후록(厚祿)을 주며 또 신하의 미려한 제택(第宅)을 빼앗아 준일까지 자주 있었고,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는 최승로(崔承老) 등 유자(儒者)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아, 낭교도(郎敎徒)나 불교도(佛敎徒)는 모두 압박하여 오직 유교뿐을 존상(尊尙)하기에 이르렀다. 불교는 원래 출세(出世)의 교일뿐더러 어느 국토에 수입되든지 매양 그 나라 풍속·습관과 타협하기를 잘하고 타교를 심히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그 의관·에악·윤리·명분 등으로 그 교의 중심을 삼아 전도(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의 동화를 요구하며 타교를 배척함이 비상히 격렬하므로, 이때의 유교 장려는 낭파(郎派)와 불파(佛派)를 불평히 여길 뿐 아니라 곧 전국 인민의 불락(不樂)하는 바이었었다. 이런 관계는 대개 공자 『춘추(春秋)』의 ‘필즉필삭즉삭(筆則筆 削則削)’ 주의를 존봉하는 사가(史家)들의 삭제를 당하여 상세한 전말은 기술할 수 없으나 불명 불비한 사책(史册) 속에 끼친 1, 2 사실을 미루어 그 전체를 대략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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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와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의거하매, 성종 12년(993)에 거란대장 소손녕(蕭遜寧)이 입구(入寇)하여, 북계(北界)를 공격하며 또 격문을 보내어 80만병이 장차 계속하여 이르리라 통갈(恫喝)하니, 거조(擧朝)가 황겁하여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割讓)하여 걸화(乞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그때 홀로 서희(徐熙)·이지백(李知白) 양인이 있어 그 비계(非計)임을 박론(駁論)하여, 이지백은 주(奏)하기를 “선왕의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 회(會)를 회복하고 타방의 이법(異法)을 배척하여, 국가 태평의 기(基)를 보(保)하며 신명(神明)에 고한 연후에, 싸우다가 불승(不勝)하면 화함이 늦지 않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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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지백이 성종의 중화 문물만 낙모(樂慕)하여 국민 감정에 어긋남을 기(譏)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지백이 가리킨 ‘선왕(先王)’은 고려의 선대요 ‘선랑회(仙郞會)’는 화랑회니, 태조 이래로 대개 신라의 화랑회를 중흥하여 연등·팔관 등회와 병행하다가 성종이 유교를 독신(篤信)하고 화풍(華風)을 숭상하여 낭(郎)·불(佛) 양가의 회를 혁파하였던 것이 명백하다. 이제 외국의 입구(入寇)를 당하여, 같이 숭중(崇重)의 예대(禮待)를 받언 유교의 제신들이 외구(外寇)를 물리칠 계책은 추호만치도 안출치 못하고 도리어 할지매국(割地賣國)의 거(擧)로 국왕을 권하는 고로, 이지백의 차주(此奏)는, 제일로 유신(儒臣)의 유약(儒弱)을 열매(熱罵)코, 제이로 낭·불양가를 위하여 원(寃)을 명(鳴)하고, 제삼으로 국풍파(國風派)를 대표하여 중화 숭배자를 질타함이니, 여기에서 낭·불 양가의 국풍파들이 유교도에 대한 불평의 온양(醞釀)이 이구(已久)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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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로부터 조신(朝臣)의 정론자(廷論者)가 드디어 양파로 나뉘었으니, 낭가(郎家)는 매양 국체상에는 독립·자주·칭제·건원(建元)을 주장하며, 정책상에는 흥병북벌(興兵北伐)하여 압록 이북의 구강(舊疆)을 회복함으 역창(力唱)하고, 유가는 반드시 존화주의의 견지에서 국체는 중화의 속국 됨을 주장하고, 따라서 그 정책은 비사후폐(卑辭厚幣)로 대국을 섬겨 평화로 일국을 보(保)함을 역창하여, 피차 반대의 지위에 서서 항쟁하였었다. 예를 들면 현종(顯宗) 말년에, 발해(渤海)의 중흥을 보조하여 거란(契丹[글란])을 쳐서 구강(舊疆)을 회복하자는 곽원(郭元)이 있는 반면에, 본토를 근수(謹守)하여 생민을 보하자는 최사위(崔士威) 등이 있으며, 덕종(德宗) 초년에, 압강교의 훼철(毁撤)과 구류된 아방 사신의 회환을 거란에게 요구하다가 불청하거든 절교하자는 왕가도(王可道) 등이 있는 반면에, 외교를 근신(謹愼)히 하여 병화가 없도록 하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있으며, 기타 여조 역대 외교에 매양 자존의 경론(硬論)을 발한 자는 거의 낭파나 혹 간접으로 낭파의 사상을 받은 자요, 비사(卑辭)와 후폐(厚幣)의 사대론을 집(執)한자는 대개 유교도들이었고, 불교는 자체의 성질상 정치 문제에 관하여 낭가와 같이 격렬히 계통적 주장을 가지지는 아니하였으나, 대개는 낭가와 접근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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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八關會)를, 『삼국사기』에는 불씨(佛氏)의 법회(法會)라 하고,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한시(漢時)의 대포(大酺)와 같은 가례(嘉禮)의 경회(慶會)라고 하고, 근자 이능화(李能和)의 저한 『불교통사(佛敎通史)』에는 『고려사』 태조 천수(天授) 원년(918)에 “設八關會…… 其四仙樂部[기사선악부]”와 태조 유훈(遺訓)에 “八關[팔관] 所以事天[소이사천] 及山川龍神[급산천용신]”과 의종(毅宗) 22년(1168)에 “自今[자금] 八關會[팔관회] 豫擇兩班家產饒足者[예택양반가산요족자] 定爲仙家[정위선가]” 등의 말을 인용하여, 팔관회를 사선(事仙)의 회로 불사(佛事)를 겸섭(兼攝)한 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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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선(四仙)’은 『삼국유사』에 의거하면 화랑의 사성(四聖)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의 존칭이요, ‘선가(仙家)’는 그 상하문을 참조하여 또한 화랑을 가리킨 자인데, 대개 낭(郎)·불(佛) 양가의 관계가 접근한 이래로 낭가의 소도대회(蘇塗大會)에 불가(佛家)의 팔관계(八關戒)를 쓴 것이니, 팔관을 대포(大酺)의 유라 함도 망단이거니와 팔관의 선가(仙家)를 지나 선교(仙敎)의 선(仙)으로 인정함도 대오(大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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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중엽에는 화랑이 그 사상으로만 사회에 전할 뿐 아니라 실재 그 회가 존속하여 왔으므로, 화랑을 반대하는 유가에서도 그 명칭과 의식을 많이 도취(盜取)하였으니, 그 1, 2의 예를 들면 최공도(崔公徒)·노공도(盧公徒) 등은 화랑의 원랑도(原郞徒)·영랑도(永郞徒) 등을 모방한 것이며, 학교(學校)의 청금록(靑衿錄)은 화랑의 풍류 황권(風流黃券)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사가(史家)의 삭제를 당하여 화랑의 사적이 망매(茫昧)하니 어찌 차탄할 바가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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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일대에 화랑의 사상을 실행하려던 군신 양인이 있으니, 예종(睿宗)과 윤관(尹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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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본기(睿宗本紀)에 의거하면 그 11년(1116) 4월에 “四仙之跡[사선지적] 所宜加榮[소의가영]…… 國仙之事[국선지사] 比來仕路多門[비래사로다문]…… 宜令大官子孫[의령대관자손] 行之[행지]”의 조(詔)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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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이 만일 화랑의 중흥에 동경하는 인군(人君)일진댄, 어떤 까닭으로 그 즉위한 지 10여년 만에야 비로소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 4성의 유적을 가영(加榮)하고 국선(國仙)의 사로(仕路)를 열었을까. 본조(本調)는 서경 신궐(新闕)에서 내린 것인데, 서경 신궐 창작한 사실이 예종본기에는 불견하였으나, 오연총전(吳延寵傳)에 의거하면 예종이 참(讖)에 의하여 서경 신궐을 세우므로 연총(延寵)이 간하나 불청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곧 여진 정벌 이전의 일이니, 그런즉 서경 신궐의 창작은 여진 정벌 이전의 일인 동시에 화랑 중흥책과 밀절(密切)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또한 여진 정벌과 관련된 것이니, 당시 사책(史册)에 반드시 상세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나, 후래 김부식파 사가가 서경 신궐의 창작이 묘청 천도계획의 선구이므로 이를 삭제하는 동시에, 그의 구시(仇視)하는 화랑에 관한 기록도 물론 존류(存留)치 아니하였을 것이다. 11년 조칙(詔勅)의 국선 운운은, 저들의 화랑 전고(典故)의 무식한 사가들이 국선(國仙)이 곧 화랑(花郞)임을 알지 못하고 무의중에 삭제치 아니함이니, 이는 마치 『여지승랑(輿地勝覽)』에 ‘선(仙)’을 도교(道敎)의 ‘선’으로 오인하여 다수한 화랑의 유적(遊跡)을 존류함과 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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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예종은 화랑사상을 가진 인군으로 여진 정벌도 이 사상을 실행함인 것은 명백하며, 윤관은 신라 화랑 김유신(金庾信)을 숭배하여 위국기도(爲國祈禱)의 충성과 6월빙하(六月氷河)의 열신(熱信)을 가진 인물로, 예종과 동의하여 여진을 정벌하여 북변을 개척하고 9성(九城)을 건설하였다. 9성은 『고려사』에 의거하면, 구사(舊史)에는 영(英)·웅(雄)·복(福)·길(吉)·함(咸)·의(宜) 6주(州)와 공험(公嶮)·통태(通泰)·평융(平戎) 3진(鎭)이라다가, 철환(撤還)할 때의 의주(宜州)와 공험(公嶮)·평융(平戎) 2진이 없고 숭녕(崇寧)·진화(眞化)·의화(宜化) 3진이 돌현(突現)함이 가의(可疑)며, 또 의주성(宜州城)은 정주(定州 : 지금 定平[정평] ― 原註[원주]) 이남에 있은즉 여진을 격축하기 이전에도 쌓은 자라 하여 9성의 수목(數目)을 의심하였으며, 함주(咸州)는 지금 함흥(咸興)이요 영주(英州)·웅주(雄州)는 길주(吉州)에 합병한 자요 복주(福州)는 지금 단천(端川)이요, 의주(宜州)는 지금 덕원(德源)이라 하고, 공험진·통태진·평융진 등의 지계를 명기치 못하여, 9성 거리의 원근을 모호히 하여, 지금껏 사가의 쟁송하는 바가 되었으나, 이 따위 구구한 문제는 아직 차치(且置)하고 9성의 건설과 철환한 사실의 전말이나 약론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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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眞)은, 삼한시대의 예맥(濊貊)이요 삼국시대의 말갈(靺鞨)이니, 고구려가 망하매 발해(渤海)에 속하고, 발해가 망하매 고려에 속하였으나, 또 일변으로는 거란(契丹)을 섬기는 고로, 『문헌통고』에 “女眞[여진] 臣事契亂[신사계란] 奴事高麗[노사고려]”라 하고, 예종 4년(1109) 여진 사자의 말에도 “女眞[여진] 以大邦[이대방](高麗[고려] ― 原註[원주]) 爲父母之邦[위부모지방] 朝貢不絶[조공부절]”이라 함이다. 예종의 부 숙종(肅宗)이 여진의 점점 강대함을 꺼려 이를 정복하려 하였으나, 다만 헌종(獻宗)의 유당(遺黨)이 내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흥병(興兵)을 주저하였다가, 및 그 죽을 때에 여진 정복할 밀지(密旨)를 예종과 윤관에게 내리었었다. 예종과 윤관이 대병 17만으로 여진을 정벌하여, 누천여급을 참하고 불과 수삭의 내에 9성의 땅을 얻었다. 고려 지리지에 두만강 외 7백리 선춘령(先春嶺) 하에 : 至此爲[지차위] 高麗之境[고려지경]“ 7자를 새긴 윤관의 비가 있다 하니, 윤관의 개척이 이조 김종서(金宗瑞)보다 원과(遠過)함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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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성공(成功)은 낭도(郎徒)의 흔약(欣躍)하는 바이나 유도(儒徒)의 불락(不樂)하는 바이다. 출병의 처음에도 벌써 유신(儒臣) 김연(金緣) 등이 상소하여 출병을 반대하더니, 및 9성을 성치한 뒤에 여진이 그 실지(失地)를 회복코자 번갈아 침입하니, 아군이 비록 연승하나 수년 동안에 인부의 징발과 재물의 손해가 적지 아니한 것은 면치 못할 일이라, 유도들이 더욱 이를 기회삼아 공박하니, 예종이 마침내 초지(初志)를 견수하지 못하고 9성을 철(撤)하여 여진에게 환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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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에 살피면, 이때 여진군의 참모장 된 자는 금 태조(金太祖)다. 거란은 점점 쇠약하고 여진이 발흥하는 때니, 만일 예종이 초지를 견수하여 일시의 곤란을 잊고 윤관을 전임(傳任)하였더라면, 고려의 국세가 흥익(興益)하여 후세에 외국의 피정복자 될 치욕을 면할 뿐 아니라, 곧 거란을 대신하여 일어난 자가 금(金)이 아니요 고려일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여진은 9성 반환의 은(恩)을 감(感)하여, 자금(自今)으로 세세 자손이 세공(世貢)을 수(修)하고 와력(瓦礫)으로라도 고려 경상(境上)에 던지지 아니하겠다고 맹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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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 여진이 강대하여 대금국(大金國)이 되매, 비록 고려에 바치던 조공은 폐하였으나, 금 일대에 한번도 고려를 침입한 일이 없엇으니, 이는 윤관 일전의 공이다. 윤관의 때에 사필을 잡은 자가 윤관을 구시(仇視)하던 김부식의 도당이었으니, 윤관의 전공을 그대로 적지 아니하였으리라. 이것도 독사자(讀史者)의 알아둘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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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과 같이 윤관(尹瓘)이 비록 금 태조(金太祖)를 전승하였으나, 고려의 유신들이 이를 반대하여 더 진취함을 막을 뿐 아니라 기득한 9성까지 환귀하더니, 금 태조가 이에 고려와 청화(請和)하고 서북에 전력(專力)하여, 제위(帝位)에 즉위한 지 10년 안에 거란을 멸하고, 만주로부터 중화의 양자강 이북을 병탄하여 대금제국(大金帝國)을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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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의 원처 사람은 졸지에 흥하거나 망하거나 이를 심상히 볼 뿐이지만, 자가 행랑(行廊)의 하인배가 돌연히 천상인이 된다 하면, 이를 볼 때 신경의 앙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는 거의 보통의 인정이다. 수천년래 중화대륙을 차지하는 자가 악마 같은 진시황이거나, 비적괴수(匪賊魁首)의 한고조(漢高祖)이거나, 야만종족의 거란 태조이거나, 모두 그다지 조선인의 두뇌를 자극할 것이 없었으나, 오직 금 태조가 중국 황제 됨에 이르러는 거의 예시(睨視)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금 태조가 원래 고려에 조공하던 여진종으로, 더구나 윤관에게 패하여 9성 등 천여리 땅을 빼앗기던 만추(蠻酋)로서, 일조에 중국 황제가 되어 작일의 정복자인 고려 군신을 도리어 압박하기에 이르니, 고려의 군신이 어찌 분개치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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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이 9성의 철환을 후회하는 동시에, 국선(國仙)의 중흥을 장려하며, 서경(西京)의 이도를 계획하며, 또 성종 이래의 비사후폐적(卑辭厚幣的) 외교 정책을 고치고, 왕왕 금 태조에게 보내는 국서 중에 “여국(汝國)의 원(源)이 오토(吾土)에서 발하였으니 여(汝)는 원래 오국의 속국”이니 하는 문구로, 금국 군신의 노를 촉하여 하마하마 국교상 대결렬이 발생케 된 때가 허다하였건마는, 금 태조는 전일의 맹약에 구속되어 거연히 고려를 침범치 않고, 예종은 9성의 역(役)에 제신의 반대를 (懲)하여 경홀히 금과 대항치 못하므로, 피차 평화를 유지함이러니, 및 예종이 승하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매,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와 기타 무장과 시인배(詩人輩)가 분기하여 칭제코 북벌키를 강경히 주장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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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의 영수는 첫째는 윤언이(尹彥頤)니, 윤언이는 곧 윤관의 아들로 유일한 낭가의 계통이다. 본론의 영수됨이 필연코 당연한 일이나, 윤언이가 칭제북벌론을 주장할 때의 상소와 건의는 『고려사』 본전(本傳)에 모두 삭제를 당하고 오직 서경전역 후 자명소(自明疏)만 게재되어, 후인으로 하여금 윤언이가 칭제북벌론자의 일인임만 알고 그 상세는 알지 못하니 어찌 가석치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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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묘청(妙淸)이니, 묘청은 서경 승도(僧徒)로, 도참(圖讖)의 설을 부회(傅會)하여 서경에 천도하고 제호(帝號)와 연호(年號)를 칭한 후, 북으로 금을 정벌하자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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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정지상(鄭知常)이니, 정지상은 7세에 “何人把新筆[하인파신필] 乙字寫江波[을자사강파]”의 「강부(江鳧)」 시를 읊던 신동으로 당시에 천명(擅名)하던 시인이요, 근세 임백호(林白湖)와 같이 강토의 확대를 몽상하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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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인이 칭제북벌(稱帝北伐)에 대한 의견은 동일하나, 다만 묘청과 정지상은 서경천도까지를 주장하였고, 윤언이는 거기 부동의하던 바이다. 묘청전에는 묘청·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3인이 다 서경인이므로 서경인 김안(金安) 등이 존봉하여 ‘서경삼성(西京三聖)’이라 칭하였다 하나,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라 따로 일파를 칠 것이 없어 이를 거론치 아니한다.
37
『고려사』에 묘청을 요적(妖賊)이라 하였다. 이는 묘청이 음양가(陰陽家)의 풍수설(風水說)로 평양 천도를 창(唱)함에 인함이라 한다.
38
대개 신라 말엽부터 평양 임원역(林原驛)은 대화(大華)의 세라, 여기에 천도하면 26국이 내조(來朝)하리라는 비결(秘訣)이 유행하였었다. 아마 고구려가 망하고 평양 구도가 황폐하매, 신라의 비열한 외교를 분히 아는 불평가들이 이 일단의 비결을 조작하여, 거연히 세간의 일종 미신이 되었던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822)의 김헌창(金憲昌)과 17년의 김범문(金梵文)이 모두 평양 건도에 탁(託)하여 반병(叛兵)을 일으켰으며, 그 뒤 궁예(弓裔)도 이상의 신도(新都)는 평양이었으며, 고려 태조도 그 ‘훈요(訓要)’에 평양은 지덕(地德)의 근본이라 하여 후왕의 사중순주(四仲巡駐)를 권하였으며, 혜종(惠宗)은 아주 평양에 굉대한 궁궐을 짓고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며, 예종도 전술한 바와 같이 평양에 신궐을 창작하였다. 이같이 평양 건도가 역대 왕조의 기도하던 바이나, 기실은 평양에 천도하면 북구(北寇)에 밀이(密邇)하니, 만일 적기(敵騎)가 압록강을 건너는 때에는 도성이 먼저 병화의 요충(要衝)이 되므로, 중앙의 근본이 동요하여 한번의 소좌(少挫)만 잊어도 전국이 진경(震驚)할 것이다.
39
평양은 실로 당시 도성 될 지점에 만만 불의(不宜)하거든, 칭제북벌론자(稱帝北伐論者)가 매양 평양 천도를 전제로 함은 비상한 실책이니, 유언이가 전자를 주장코 후자에 부동의함은 과연 탁견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나 비결과 풍수설로 평양 천도를 주함은 묘청으로써 비롯함이 아니니, 이로써 묘청을 요적(妖賊)이라 함은 너무 억울한 판결이다. 묘청이,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능히 지휘한다 이르며, 대동강저에 유병(油餠)을 빠뜨리고 신룡(神龍)의 토연(吐涎)이라 하여 백관의 표하(表賀)를 청함이, 어찌 요적의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일은 고려 이전 상유(常有)한 일이니, 고대에 종교상·정치상 인물들이 매양 망연한 천신을 의탁하여 군중을 농락하던 것이라, 이것으로 묘청을 죄함도 또한 공언(公言)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묘청을 광망(狂妄)타 하였는가.
40
예종본기나 묘청전으로 보면, 다시 칭제북벌론에 경향(傾向)한 자가 거의 전국인의 반이 지나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도 10의 9분은 묘청을 믿었다. 비록 김부식·문공유(文公裕) 등 기개인의 반대자가 외구(外寇)의 형세를 성히 포장하며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보루(堡壘)를 고수하려 하나, 이를 공파함이 그다지 어려운 일 아니거늘, 이제 이같이 성숙한 시기(時機)를 선용치 못하고 문득 김부식의 일소(一疏)로 인종이 천도의 계를 정지함을 노하여, 서경에서 병을 일으키고 ‘천견충의군(천견충의군)’이라 자칭하며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 인종에게 상경 신궐로 이어하여 그 국호, 그 연호를 받기를 구하니, 그 시대 인신의 예로 그 얼마나 발호(跋扈)한 행동인가. 이같이 발호한 행동을 취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내부가 공고하고 실력이 웅후(雄厚)한 뒤에 발표할 것이 아닌가. 묘청의 거병한 밀모(密謀)에 윤언이와 정지상이 공참치 못하였을뿐더러, 묘청의 심복 제자인 백수한(白壽翰)까지도 송도에 있어 진행의 내막을 막연히 알지 못하고, 그 공모자가 불과 서경에 우류(偶留)하던 병부상서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뿐이요, 돌연히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이중(李仲)을 집수(執囚)하고 그 병을 탈취하여 거사하였으니, 인종이 비록 유약하나 어찌 대위국 황제의 허명(虛名)을 탐하여 발호한 인신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즐기어 이어하였을 것인가. 윤언이가 비록 묘청의 칭제북벌론에는 동일하던 일인이나, 어찌 이같이 광망(狂妄)한 거동에야 일치할 수 있을 것인가. 윤언이의 일파는 고사하고 묘청의 친당인 문공인(文公仁) 등도 거병의 보가 처음 송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거의 이 일의 절무(絶無)를 믿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이 차차 적확하여 오매, 칭제북벌론자는 모두 와해되고 반대자 등이 작약(雀躍)하여 김부식이 원수로 묘청 토벌의 길에 오르며, 정지상·백수한 등은 출병 전에 김부식에게 피살되며, 윤언이는 묘청과 같은 칭제북벌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막하가 되어 묘청 토벌자의 일인이 되게 되었다.
41
정지상은 시재(詩才)가 고금에 절륜(絶倫)하여 문예가의 숭배를 받다가 김부식에게 죽었으므로 후래의 시인들이 불평히 여기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유행한다. 그 한둘을 들겠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琳宮擊磬罷[이미궁격경파]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양구를 달라다가 지상이 허치 아니하므로 살해하였다고도 하며, 혹은 정지상의 “그대가 술 있거든 부디 나를 부르소서.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또한 청하오리. 그래서 우리의 백년 세월을 술과 꽃 사이에서” 이 시조(時調) 1수를 지었더니, 김부식이 보고 이놈이 시조도 나보다 잘한다 하여 살해하였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문예의 시기(猜忌)도 한 원인이 될지 모르나 대체는 김부식은 사대주의의 괴(魁)요 정지상은 북벌파(北伐派)의 건장(健壯)이니, 만일 정지상을 살리어 그 작품의 유행을 허한다면 혹 그 주의가 부활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김부식으로서 정지상을 살해한 최대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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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13년(1135) 정월에 묘청이 서경에서 거병하매, 인종이 김부식으로 토역원수(討逆元帥)를 배(拜)하고 김정순(金正純)·尹彥頤[윤언이] 등이 부(副)가 되어 중군(中軍)을 이끌고, 김부의(金富儀)·김단(金旦) 등은 좌우 양군을 거느리어 왕정(往征)할새, 불과 수십일에 조광(趙匡)이 묘청을 참하여 걸항(乞降)하거늘, 광(匡)의 사자 윤첨(尹瞻)을 하옥하니, 광이 다시 항수(抗守)하여 그 익년 12월에야 비로소 성을 함락하고 조광을 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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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김부식이 행군하는 중로에 보사역(寶山驛)에 이르러 군사회의를 열고 공격 완급의 가부를 제장에게 물었다. 윤언이 등 제장은 모두 급공(急攻)을 주장하나, 김부식은 묘청의 흉모(凶謀)를 회포(懷抱)함이 5, 6년인즉 그 수비가 완고(完固)하니 기개일간에 공발(攻拔)할 바 아니라 하여 완공(緩攻)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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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묘청은 실상 음모를 쌓아온 것이 아니요, 다만 그 광망한 생각에, 서경을 의거하고 거병하여 인종의 천도를 촉구하면 김부식 등 사대주의파는 자연 경산(驚散)하고 인종은 하릴없이 내림(來臨)하리라 한 것이 의외에 토벌군이 이르매 그 도당의 묘청에 대한 신망이 돌락(突落)하여 드디어 묘청을 참하여 걸항함이니, 이는 사실이 명증하는 바이다. 조광 등이 묘청을 참한 뒤에 조정의 사의(赦意) 없음을 보고 이에 창졸히 반하여 거전(據戰)하였으니, 김부식이 만일 윤언이를 신용하였으면 시일간에 토평(討平)하였을 것이거늘, 부식이 종시 언이를 시의(猜疑)하여 완공(緩攻)의 계를 쓰다가 말내(末乃)에 양년에 걸치도록 승산이 없어, 안으로 인종의 의구(疑懼)가 적지 않고 밖으로 금국 내침(金國來侵)의 염려가 급하매, 언이의 말을 들어 공인(工人) 조언(趙彥)이 만든 석포(石砲)로 성문을 부수고 화구(火毬) 던지어 함성(陷城)의 공을 아뢰었으니, 『고려사』의 묘청·윤언이·김부식 3전(三傳)을 상찰하면, 본 전역의 성공은 모두 윤언이의 계책에서 나옴이요 김부식은 촌공(寸功)이 없음이 명백하다. 윤언이가 묘청과 동일한 칭제북벌론자로서 이제 도리어 묘청 토벌에 진력하니, 주의를 저버림이 아닌가. 그러나 이는 묘청의 허물이요, 윤언이의 책임이 아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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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행동이 광망하여 그 동당 정지상 등을 속이어 사지에 빠지게 하고, 기타 모든 동주의자를 진퇴양난의 지경에 서게 하여 칭제북벌의 명사까지도 세인의 기휘(忌諱)하는 바가 되게 하였으니, 윤언이가 비록 천재인들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개선 후에 김부식이 윤언이를 정지상의 친우라 하여 구살(構殺)코자 하여, 전공의 상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6개년 원적(遠謫)에 처하였다가 간신히 생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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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언이의 자명표(自明表)에 “在壬子年西幸時[재임자년서행시] 上請立元稱號[상청입원칭호]…… 嫛是立元之稱[예시입원지칭] 本乎尊主之誠[본호존주지성] 在我本朝[재아본조] 有太祖[유태조]·光宗之故事[광종지고사] 稽諸往牒[계제왕첩] 雖新羅[수신라]·渤海以得爲[발해이득위]”라 하여, 입원(立元 : 年號[연호] ― 原註[원주]) 일사만 변명하고 칭호(稱號 : 帝號[제호] ―原註[원주])의 일건은 묵과하였으니, 칭제북벌의 논자로 사대주의의 조정에$서 구활(苟活)하려 하니, 그 신세의 거북함과 언론의 부자유함을 상견(想見)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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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언이전(尹彥頤傳)에 의거하면, 윤언이가 만년에 불법을 혹호(酷好)하여 승 관승(貫乘)과 공문우(空門友)가 되어, 관승이 일찍 일포단(一蒲團)을 제작하여 언이와 누구든지 양인 중 선사자(先死者)가 포단을 쓰기로 상약하였더니, 일일은 언이가 관승을 찾고 돌아오매 관승이 포단을 보내었거늘, 언이가 웃으며 “사(師)가 약(約)을 부(負)치 아니한다” 말하고 일서를 벽에 써 가로되 “春復秋兮[춘복추혜] 花開葉落[화개엽락] 東復西兮[동복서혜] 善養眞君[선양진군] 今日途中[금일도중] 反觀此身[반관차신] 長空萬里[장공만리] 一片閑雲[일편한운]”이라 하고 포단에 앉아서 영면하였다. 그 벽에 쓴 글이 표면으로는 일개의 불게(佛偈)와 같으나, 기실은 주의상 실패한 분노가 언외에 넘친다. ‘一不而殺六通[일불이살육통]’은 천하의 지통(至痛)한 일이다.
49
묘청이 비록 그 행동이 광망하였으나, 그 주의상 불후(不朽)의 가치는 김부식 유에 비할 자가 아니거늘, 전사에 폄사(貶辭)만 있고 살린 말은 전무하니, 이는 공론이 아니다.
51
묘청이 패망하여 서경 전역이 결말되매, 김부식이 드디어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賛化同德功臣) 휘호(徽號)에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성서사 겸이예부사(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中 判尚書事 兼吏禮部事)의 영직(榮職)에 또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의 문임(文任)을 맡아, 고려 당시의 국사(國史)를 감수하는 동시에 나(羅)·여(麗)·제(濟)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52
선유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考據)할 사료(史料)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대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史料)를 분멸(焚滅)한 것이다.
53
부식의 때에 단군(壇君)의 『신지(神誌)』나 부여(扶餘)의 금간옥첩(金簡玉牒)이나 고구려의 『유기(留記)』나 『신집(新集)』이나 백제의 『서기(書記)』나 거칠부(居柒夫)의 『신라사(新羅史)』 같은 것이 남아 있었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삼국사기』인용서목으로 보면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고려고기(高麗:〔高句麗〕古記)』『신라고사(新羅古事)』『선사(仙史)』『화랑세기(花郞世紀)』 등은 다 부식의 급견(及見)한 것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여 신라와 발해가 병치한 지 불과 2백년 만에 고려 왕씨조가 되었은즉, 여·제·나·발의 고비(古碑) 유문과 민간 전설이 많이 유전(遺傳)되었을 것인즉, 이것도 모두 채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뿐 아니라, 김부식 이후 5, 5백년 만에 외국인의 손으로 저작한 『성경지(盛京志)』『직례통지(直隷通志)』 등서에도 고구려 대 수(隋)·당(唐 ) 전쟁의 고적인 고려성·고려영·개소둔(蓋蘇屯)·당태종함마처(唐太宗陷馬處)·황량대(謊糧臺 ) 등이 다수히 기재되었은즉, 부식의 당시에는 사료될 만한 고적이 더욱 풍부하였을 것이니, 부식의 요(遼)·송(宋)에 왕래할 때에 마음대로 수습할 수 있을 것이며, 부식 이후 수백년 곧 고려 말엽에 저작한 『삼국유사』 에는 이두문의 시가를 다수 게재하였고 이조 초엽에 편찬한 『고려사』에는 고려의 「내원성(來遠城)」과 백제의 「무등산(無等山)」(兩種[양종]도 다 吏讀文[이두문]의 詩歌[시가] ― 原註[원주])을 그 의의를 해독한 증거가 있은즉, 부식의 때에는 이보다 풍부한 삼국의 국시(國詩)인 이두문의 시가를 망라할 수 있을 것이건만, 이는 다 부식의 구수시(仇讎視)하는 바요 채록코자 하는 사료가 아니다. 어떤 까닭이냐 하면, 부식의 이상적 조선사는 ① 조선의 강토를 바싹 죽이어, 대동강 혹 한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② 조선의 제도·문물·풍속·습관 등을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교육이나 받고, ③ 그런 뒤에, 정치란 것은 오직 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비열한 외교의 사령(辭令)이나 감인(堪任 )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 함이다. 그러나 부식 이전의 조선사는 거의 부식의 이상과 배치되어, 강토는 요하를 건너 동몽고까지 연접한 때가 있으며, 사회는 낭가(郎家)의 종교적 무사풍을 받아 공·맹의 유훈(遺訓)과 다른 방면이 많으며, 정치계에는 왕왕 광개토왕(廣開土王)·동성대왕(東城大王)·진흥대왕(眞興大王)·사법명(沙法名 )·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같이 외국과 도전하는 인물이 간출(間出)하여, 부식의 두통거리가 한둘뿐만이 아니러니, 이제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서경전역의 승리한 뒤를 기회삼아 그 사대주의를 근거하여 『삼국사기』를 지을새, 그 주의에 합하는 사료는 부연 찬탄 혹 개작하며, 불합하는 사료는 논폄도개(論貶塗改) 혹 산제(刪除)하였다.
54
나의 말을 불신하거든 『삼국사기』를 보라. 부여와 발해를 발거(拔去)할 뿐 아니라, 백제의 위례(慰禮)는 직산(稷山)이라 하고, 고구려의 주군을 태반이나 한강 이남에 옮기고, 신라의 평양주(平壤州)를 삭제하여 북방 강토를 외국에 할양함에 그 이상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조선의 고유한 사상으로 발전한 화랑(花郞)의 성인(聖人)인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은 성명도 기재하지 않고, 당조 유학생으로 거의 당에 동화한 최치원 등을 숭배하며, 당과 혈전한 부여복신(夫餘福信)은 열전(列傳)에 올리지 않고 투항한 흑치상지(黑齒常之)를 특재(特載)함이, 그 이상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기타 이 같은 종류가 허다하여 매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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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자가의 이상과 배치되는 시대의 역사에서 자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수습하려 한즉, 그 사료도 간핍(艱乏)하려니와 또 부득이 공구씨(孔丘氏)의 필삭주의(筆削主義)를 써, 그 사실을 가감 혹 개작할밖에 없을 것 이다. 그중 가장 산삭(刪削)을 당한 자는 유교도의 사대주의의 정반대되는 독립사상을 가진 낭가(郎家)의 역사인 것이다. 희라. 이적(李勣)과 소정방(蘇定方)이 여(麗)·제(濟)의 문헌을 소탕하였다 하지만, 그 사학계의 겁운(劫運)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전역의 결과에 미치랴.
56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증오하였을진대, 어떤 까닭으로 『삼국사기』 중에 그 사실(史實)을 전삭(前朔)치 아니하였는가. 부식은 대개 중국사를 존중히 여기는 자라, 화랑의 사실이 당인(唐人)의 『신라국기(新羅國記)』 『대중유사(大中遺事)』 등서에 기재된 고로 부식이 부득이 몇줄의 낭가의 전고(典故)를 적어 줌이다. 낭가에서 여교사(女敎師)를 원화(源花)라 하고 남교사(男敎師)를 화랑(花郞)이라 한 것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원화와 화랑의 구별을 혼동하였으며,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사다함(斯多含)이 진흥왕 26년(565)에 화랑이 되었거늘, 본기(本紀)에 진흥왕 27년에 원화·화랑이 비롯하였다 하여 그 연대를 착오하였으며, 화랑은 고구려 조의선인(皀衣仙人)을 모방한 것이거늘, 그 내력을 말살하였으니 가석한 일이 아닌가.
57
내가 일찍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읽어본즉 그 목록에 ‘선랑(仙郞)’이 있거늘, 매우 반갑게 그 편을 피람(披覽)하니 전부가 1자도 없이 결항(缺頁)이 되고 말았다. 중화인의 삼국과 발해에 관한 기사로 『동번지(東藩志)』『발해국지(渤海國志)』 등이 허다하였지만 1권도 전한 것이 없고, 그 전하여 온 서적에도 우리의 요구하는 바 조선의 자랑할 만한 사실로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빠진 기사는 매양 결항되어, 『남제서』에 적힌 동성대왕과 사법명의 전사(戰史)가 2항이 결하고 『고려도경』에 선랑 전고의 수항이 결하였다. 이 어찌 후에 고의로 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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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기(古記)인 『선사』와 『화랑세기』 등은 모두 멸종되고 오직 『삼국사기』란 일서가 세간에 전하였으니, 이는 저들 제사(諸史)의 가치가 모두 『삼국사기』보다 열(劣)한 명증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본서의 우열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개 이하 수종 사건에서 원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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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경전역의 뒤에 다시 제이의 남경전역(南京轉役)이 나지 못하여, 윤언이·정지상 등 일류의 인물은 주사(誅死)가 아니면 찬축(竄逐)을 당하여 다시 그 주의로 사회에 제공치 못하게 되매, 낭(郎)·불(佛) 제가의 저사(著史)는 다시 독자의 요구가 못될뿐더러, 또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에 일체의 사료(곧 前述[전술]한 古記[고기] 등 ― 原註[원주])를 궁중에 비장하여 타인의 열람할 길을 끊어, 자기의 박학자인 명예를 보전하는 동시에 국풍파(國風派)의 사상 전파를 금지하는 방법을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사기』가 홀로 당시 사회의 유일한 유행의 역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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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사기』가 유행된 이후에 고려의 국세가 더욱 쇠약에 향하여, 불과 백여년 만에 몽고가 발흥하여 그 세력이 구·아 양대륙에 횡절(橫絶)하여 중화를 병합하매, 고려가 오직 비사후폐(卑辭厚幣)로 그 국호를 유지하게 되다가 마침내 저의 압박이 정치 이외 각 방면에 미쳐, ‘황도(皇都)’‘황궁(皇宮)’등의 명사를 폐하게 되며, 심지어 팔관회(八關會)에 쓰는 악부시가(樂府詩歌)까지 가져다가 ‘천자(天子)’‘일인(一人)’ 등의 구어를 고치게 하고, 왕건 태조 이래의 실록(實錄)을 가져다가 허다한 찬삭(竄削)을 행하니, 이에 오직 『삼국사기』 같은 사책에 의거하여 우리가 자고로 사대의 성의가 있다는 자랑을 하게 된 때, 궁중 비장(宮中秘藏)의 고사(古史)가 더욱 심장(深藏)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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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몽고의 세력이 병축(屛逐)되매 고려조의 운명도 또한 고종(告終)하였다. 이씨조가 창업하매 비록 내정과 외굘르 다 자주하여 타방의 철주(掣肘)를 받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그 창업의 시인(始因)이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으로 되므로, 『삼국사기』 이외의 역사를 세상에 공포할 의기가 없어, 송도의 비장이 다시 한양의 비장이 될 뿐이었었다. 정도전(鄭道傳)이 『고려사』를 편찬할새, 『삼국사기』의 서법을 봉승(奉承)하여 몽고제조(蒙古帝朝)에서 미쳐 다 찬개(竄改)치 못한 나머지까지 찬개하더니, 그 뒤에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을 명하여, 태조 이래 실록 가운데 ‘조(詔)’‘짐(朕)’ 등자 곧 정도전의 ‘교(敎)’‘여(予)’ 등자로 고친 것을 다시 원문대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가 거의 정도전의 찬개한 원본이었으니, 하물며 몽고제조의 찬삭을 당한 자야 어찌 회복하였으랴. 그런즉 고려의 사료도 사료 될 만한 사료는 삼국의 사료와 같이 모두 비장 속에 갇히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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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서는 본조사를 자유로 저작치 못하는 악습이 있었거니와, 우리 조선에는 전술과 같이 전대사까지도 관사나 준관사(準官史) 이외에는 마음대로 보거나 쓰거나 하지 못하는 괴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이 일찍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서 비밀히 가장하였다가, 우연히 친우의 휴거(携去)한 바가 되어 대화(大禍)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상고 이래 역대의 비장(秘藏)이 수백년래 경복궁(景福宮) 중에 숨어, 내외하는 처녀적 서적이 되었다가 임진란의 병화에 장(葬)하고 말았을 것이니, 삼국의 사료 될 재료가 모두 멸종되고 오직 『삼국사기』만 전하여 온 것이 상술한 수종 원인에 불출(不出)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그러면 『삼국유사』는 어찌 유전(流傳)하였는가. 이는 다만 불교의 원류를 서술하고, 정치에는 혹 어급(語及)하였어도 대체가 『삼국사기』를 의방(依倣)할 뿐이요 사대주의의 의견과 충돌된 고싱 없는 까닭이다.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는 김부식 『삼국사기』 이전의 저술인데, 『이상국집(李相國集)』 가운데 「동명왕편(東明王篇)」 주에 인용한 자로 보면 그 사료 될 가치가 『삼국유사』보다 배승(倍勝)할 것이나, 이것도 마침내 멸종됨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취지가 같지 아니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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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는 정도전이 찬하다가 역주(逆誅)하고, 김종서가 이어서 완성하였으나 그도 또한 정변에 죽으므로 세조가 드디어 정인지의 찬이라 이름하여 행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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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서술한 바를 다시 간략히 총괄하여 말하면,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郎家)의 독립사상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더니, 돌연히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광망하여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낭가의 윤언이 등은 겨우 유가의 압박하에서 그 잔명을 구보(苟保)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는 창업이 곧 이 주의로 성취되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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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불교를 믿으면 의양(依樣)의 방할(棒喝)을 전수(傳授)하는 태고(太古)나 보우(普愚)가 날지언정 평지에서 돌기하는 원효(元曉)가 날 수 없으며, 유교를 좇는다 하면 정주(程朱)의 규구(規矩)를 각준(恪遵)하는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이 될지언정 문로(門路)를 자립하는 정죽도(鄭竹島)는 존립할 곳이 없으며, 비록 세종의 정음(正音)이 제조된 뒤일지라도 원랑도(原郞徒)의 송가(頌歌)가 나지 않고 당인(唐人)의 월로(月露)를 음(吟)하는 한시가(漢詩家)가 충척(充斥)하며, 비록 갑오·을미의 시기(時機)를 제우(際遇)할지라도 진흥대왕(眞興大王) 같은 경세가가 일지 않고 외세를 따라 전이(轉移)하는 사회 될 뿐이니, 아아, 서경전역(西京轉役)의 지은 원인을 어찌 중대하다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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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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