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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聖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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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4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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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聖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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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거울같이 괴이하고 야릇한 것은 없다. 태고적에 거울이라는 것이 아직 없고 고요한 저녁 강물 위에 자기의 그림자를 비치워 볼 수밖에 없었을 때에는 사람은 자기의 꼴과 원숭이의 꼴조차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가령 사람 사이의 애정이라는 것도 어수룩하고 순박하였을 것이다. 거울이 생긴 때부터 사람은 원숭이와의 구별을 알았고 제 얼굴의 맵시와 흠을 보았고 부끄럼과 사랑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적어도 사랑의 감정이 복잡하게 분화되고 연애라는 것이 있게 된 것은 거울이 생긴 후부터라고 보배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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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인가 동물원에 갔을 때 핸드백의 거울로 우리 안의 원숭이를 희롱해 본 적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제 꼴을 보고 짐승은 놀라고 흥분해서 한바탕 날뛰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고 소리를 치고 독살을 피우며 우리 밖 사람에게로 달려드는 시늉을 하였다. 확실히 제 꼴과 사람의 모양과의 차이를 처음으로 발견한 때에 느낀 놀랍고 부끄럽고 괴이한 감정에서 온 것이라고 보배는 판단하였다. 같은 감정을 사람도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을 때에 느꼈을 것이며 참으로 번민과 사랑과 모든 정서는 거기서 생기는 자기의 얼굴의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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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의식 없이 감정의 발로는 없으며 하루의 모든 생각과 생활은 참으로 얼굴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보배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일어날 때 잠잘 때 이외에 가게에 있을 때에도 틈틈이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고 지금 와서는 그것이 생활의 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거울을 볼 때에 그 속에 자기의 얼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어느 다른 사람의 얼굴을 아울러 생각하였다. 두 얼굴을 비기는 곳에서 만족도 느끼고 불안도 왔다. 가령 요사이는 거울을 대할 때에 으레히 민자의 얼굴이 의식의 전부를 차지하였다. 흡사히 시몬느 시몽 같은 둥글고 납작스름한 민자의 애숭이 얼굴을 생각하면서 그와는 반대되는 기름하고 엽렵한 자기의 얼굴이 대조적으로 솟아올라 그와의 사이에 가벼운 질투와 안타까운 초조와 신선한 야욕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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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가 언니 언니 하면서 겉발림이 아니라 진정으로 언니 대접을 하는 것을 보배 역시 기뻐하고 충심으로 맞아들이면서도 마음 한편 구석에 이런 대립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을 그 자신 괴이히 여기기는 하였다. 이 대립의 감정은 물론 준보를 얼싸고 오는 것이었다. 가게의 위층은 바요, 아래층은 끽차부로 보배는 바에 매였고 민자는 끽차부의 시중을 혼자 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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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보는 바에 보다도 끽차부에 오는 때가 많았다. 신문사의 일이란 그렇게 한가한 것인지 거의 번기는 날이 없으며 오후만 되면 어느결엔지 아래층 소파에 와 앉아서 로버트 테일러 비슷한 기름한 얼굴을 청승맞게 괴이고 어느 때까지든지 머물러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있을 때면 친구의 탓으로나 밀 수 있지만 혼자 때에도 여전히 지리하게 눌러앉아 마치 애매한 시간과 씨름이라도 하자는 격이었다. 그렇게 천치같이 우두커니 앉았을 때의 의식의 대상이 민자임을 보배는 물론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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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보배가 늘 하는 버릇으로 신통한 손님도 없고 한 틈을 타서 아랫층으로 살며시 내려가 보았을 때 그곳에도 손님 없는 휑덩그레한 한편 구석에 준보와 민자가 따로 앉아 속살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들어맞는 예감에 보배는 산뜻한 칼 맛을 느꼈으나 한편 섬찟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천연스럽게 내려가서 한자리에 다정스럽게 휩쓸리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에 솟아오른느 피심지를 억잡을 수는 없었다. 민자와의 사이에 담을 의식하게 되고 준보에게 불현듯이 욕심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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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끼었으므로 말미암아 잠깐 어색해지기는 하였으나 자리의 공기는 즉시 풀려서 세 사람은 단란한 회화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만큼 준보와 보배의 사이도 서름서름한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보배는 전에도 준보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불시에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야욕을 느끼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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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하게 차만 마시러 오지 말고 더러는 위층에 술도 마시러 오라는 것이 그 자리의 한마디 야유이기는 하였으나 의외의 자리에서 의외의 실토를 하게 된 것을 보배는 즉시 마음속에 반성하게 되었고 그런 반성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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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보와 민자는 어울리고 알맞는 한 쌍이다. 될 대로 맡겨 두고 천연스런 태도로 왜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는 보배의 마음은 반은 벌써 악마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셋 가운데에서 하나는 언제든지 악마의 역할을 하는 수 밖에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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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이란 짜장 괴이한 물건이다. 그것은 때때로 어처구니없는 신비로운 장난을 즐겨하는 것 같으다. 몸에 소름이 돋치지 않고는 보배는 다음 기억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잡지사 축들과 늦도록 진탕으로 놀다가 다들 보낸 후 보배가 거나한 김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아래층 끽차부로 비틀비틀 내려갔을 때였다. 몇 사람의 손님이 이 자리 저 자리에 흩어져 앉았고 카운터 근처 구석에는 준보가 늘 오는 그 모양 그대로 눅진히 붙어서 옆에 앉은 민자와 말을 건네고 있었다. 휘적휘적 걸어가서 준보의 옆에 섰을 때에 보배는 문득 놀라 한참 동안이나 맞은편을 노리고 섰었다. 창졸간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아하면서 장승 같이 넋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준보 곁에 난데없는 여자가 한 사람 나타나 이쪽을 호되게 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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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보배의 일신을 다구지게 쏘아붙였다. 눈이 매섭고 상이 길어 흡사 안보오락 비슷한 인상을 주는 그 여인을 보배는 확실히 전에 그 어디서 보았던 듯도 하고 혹은 초면인 듯도 한 기괴한 착각에 현혹한 느낌을 마지못하고 서 있는 동안에 돌연히 또 이상한 발견을 하게 된 것은 준보와 여자와 민자의 세 사람을 우연히도 한자리에 모으게 한 그 기괴한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어울리는 짝은 준보와 민자가 아니라 준보와 그 낯모르는 여자였던 것이다. 용모와 자세와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 우연히도 빈틈없는 일치의 인상을 주었다. 이상한 발견에 놀라는 한편 보배도 그 짧은 순간 속에서도 돌연히 준보에게 모든 열정을 다 기울이고 있는 민자의 비극적 역할을 생각하고 그에게 대한 한 줄기의 가엾은 생각이 유연히 솟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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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민자! 날도적 같은 그 여인! 눈을 홉뜨며 주먹을 쥐려니 맞은편의 그 여인도 보배와 똑같은 시늉을 한다. 어이가 없어 몸 자세를 늦추고 시선을 옮길 때 여인은 다시 그것을 흉내내었다. 보배는 번배같이 정신이 깨었다. 망칙한 요술이었음을 깨닫고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맞은편 벽에 걸린 커다란 체경의 요술이었던 것이었다. 여인은 물론 보배 자신이었다.취흥으로 거나한 바람에 거울의 요술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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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그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비밀을 두 사람에게 속뽑히었을까 두려워하며 겸연한 마음으로 준보 옆에 털썩 주저앉기는 하였으나 그 후 까지도 이 괴이한 경험은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사람이 아무리 취하였기로 거울에 비친 제 얼굴도 못 알아보는 법 있나 하고 한결 같이 의심이 솟는 지경이었다. 몸에 소름을 돋치지 않고는 이 기억을 되풀이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이 경험은 보배에게는 한 큰 암시요 유혹이었다. 이 암시로 말미암아 그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적확히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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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보배에게는 민자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불현듯이 솟기 시작하였다. 합숙소에서는 쓰는 방이 다르므로 가까운 처지라고는 하여도 아무래도 사이가 떴다. 그럴수록 더한층 민자의 가지가지의 거동에 보배의 눈이 날카롭게 갔다. 합숙소에는 목욕장의 설비가 없으므로 거의 이틀도리로 거리의 목욕간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배는 그때마다 민자와의 동행의 기회를 엿보았다. 목욕실에서만은 사람은 피차에 감출 것이 없다. 사람 없는 조용한 아침 목욕물 속에 잠기면서 보배는 민첩한 눈으로 민자의 육체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젖꼭지가 살구꽃 봉오리같이 봉긋은 하나 아직도 젖가슴이 전체로 얄팍한 애잔한 애숭이의 육체이기는 하나 그러나 사람의 육체같이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은 없다. 보배는 천연스런 웃음결을 이용하여 은근한 속에서 민자의 속을 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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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의 맛이란 첫 송이만큼 자별스러운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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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삼아 물방울을 퉁기면서 목욕통 전에 나가 그의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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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 어데 손가락 좀 곱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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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다정스럽게 끌어다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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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두 번?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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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그의 손가락을 곱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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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안 멍하니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하는 대로 손가락을 맡기고 있던 민자는 겨우 그 뜻을 깨닫고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을 화끈 붉히면서 달팽이같이 손을 움츠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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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칙해라 언니두, 망평 좀 작작 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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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울 것두 많다. 여자끼리 무슨 허물이야. 내 곱아 볼까. 자 한 번 두 번……(하하하하) 내게는 다섯 손가락쯤으로 당초에 부족한걸. ……별 사내가 다 있었지. 그러나 옛날에 배운 영어의 단자와 같이 신기하게도 모조리 잊어버려지고 마음속에 남은 것은 그래도 첫 사내야. 첫 사내와의 사이라는 것은 대개 어처구니없고 흐지부지하고—여자의 평생의 길은 거기서 작정되는 것인가 봐. 나도 첫 사내만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밟아온 길과 처신머리가 좀더 달랐을는지도 모르나—허나 나는 결코 밟아 온 반생의 길을 불측하게도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도 여기지는 않어. 그런 것도 한 가지 살아가는 형식이거니만 생각되거든. 괴벽스럽고 어지러운 생각인지도 모르나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내를 대할 때에 마치 한 상 한 상의 잔칫상을 대하는 것같이 준비된 성스러운 식탁을 대하는 것같이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어. 식탁 위의 것이 아무리 귀한 진미였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맛의 기억이란 사라져 버리는 것. 그렇게 제 앞으로 차례진 식탁을 대할 때에 마음껏 제 차지를 즐기는 것이 떳떳한 수지. 는실녀라고 웃든지 말든지 내 생각과 태도는 이래. 자, 민자. 내 앞에서 숨길 것이 무엇이고 부끄러울 것이 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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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게 내섬기며 보배는 민자를 어지러운 연기 속에 후려 쌌다. 그러나 민자는 그 속에서 허비적거리는 법없이 침착하게 자기의 태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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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생각은 잘 알았어두 저를 더 족치지는 마세요. —한 번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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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그의 표정에서 거짓말을 찾을 수는 없었다. 팔다리가 아직도 가늘고 허리목이 아직도 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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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준보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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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네. 괴덕두 작작 부려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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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판에 민자는 대야에 남은 물을 보배의 옆구리에 확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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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깨끗하다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는 자랑두 아무것두 아니거든. 알맞은 때를 약빠르게 붙들어야지 고때를 놓치면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굳다고 하더라도 병이 생기기 쉬운 법야. 기회라는 것은 늘 그 제일 알맞은 순간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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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우리를 얕잡아보시는 셈이죠. 이래 뵈어두 결혼할 때까지는 아무런 일이 있어두 순결을 지켜볼 작정이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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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흥 결혼—나두 한때는 그런 꿈두 꾸어 본 적 있었다나. 그러나 결국 다 공상이고 꿈이었어. 결혼—용감하고 원대한 포부야. 대담한 이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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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안으로 신문사가 확장되면 지위도 높아질 터. 수입도 늘 터. 그때면 결혼해 가지고 조그만 집 한 채 장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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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계획이군. 어떻든 준보도 순진한 청년, 민자도 순진한 소녀. —어지간히 순진들은 해. 결혼의 축하로 문총이나 한 방 맞아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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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는 껄껄 웃으며 대야의 물을 민자의 등줄기에 괴덕스럽게 쳐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물소같이 네 활개를 죽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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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하고 애잔한 민자의 자태가 눈에 아프다. 둥근 턱과 짧은 코와 짧은 윗입술이 새삼스럽게 가엾게—측은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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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는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을 때면 별안간 울고 싶어지는 적이 있다.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같이 세상이 아름답고 환상이 샘같이 솟아서 살아 있는 것이 고맙고 즐겁게 여겨지는 때는 없다. 이 생명의 감격이 눈물을 솟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옆에 있는 것이 그 누구이든지 간에 그것이 사람인 이상 보배는 그에게 인간적 동감을 느끼게 되고 부드러운 마음을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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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는 준보와 그의 친구와 보배의 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오후의 바는 고요하고 황혼의 빛이 홀 안을 그윽하게 물들이고 있다. 보배는 교향악의 레코드를 뒤집어 걸고 친구가 잠깐 자리를 물러간 틈을 타서 준보에게로 가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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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와 결혼하신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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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한 질문에도 준보는 놀라는 법없이 시선을 얕게 드리운 채로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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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라고 비웃고 싶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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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기는 왜요. 너무도 용감해서 하는 말이죠. 한 사람과 결혼해서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용감한 생각이 아니고 무어예요. 한동안의 독신주의 사상은 헌신짝같이 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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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차피 한 가지의 구속은 받어야 하는 것이니 차라리 결혼해서 안타까운 구속 속에 살아 보는 것도 한 가지의 흥미일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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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아침에 변했다 저녁에 고쳤다 하는 이치는 다 그만두고—더 놀라운 것은 결혼할 때까지 진미로 민자를 아직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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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걱정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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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보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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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어떻게 다 발려냈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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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와 저는 한 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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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행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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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말고요. 민자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도 내 시험 해 볼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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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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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청맞은 성인군자.”
 
54
보배는 별안간 달려들어 괴덕스럽게 준보의 귓불을 끄들며 그의 이마에 입을 갖다 대려다가 마침 나갔던 친구가 들어오는 바람에 천연스럽게 그 자리를 떠나 의자 있는 편으로 물러갔다. 레코드의 교향악도 마침 끊어지고 보배는 음악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말끔한 자기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55
무릇 사내라는 것을 보배는 말하자면 얼음장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 처음에는 가장 굳고 찬 듯이 보이나 징긋이 쥐고 녹이는 동안에 나중에는 형적조차 없이 손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의 반생의 경험 안에서 사내의 마음이 이 법칙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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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엄숙하게 가지고 시선을 곧게 지니는 것은 일종의 자세요, 한 번 속마음을 뒤집어 본다면 음지에 돋아난 버섯같이 새빨갛게 찬란하게 독기를 피우고 있는 것이 사내의 정인 것이다. 준보의 경우 또한 보배에게는 벌써 수술대에 오른 개구리인 셈이었다. 자동차 속에서 민자와 보배 사이에 든 준보의 꼴은 사실 개구리의 그것같이 모든 감정을 마취당한 허수아비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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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의 공휴일임을 이용하여 준보는 민자와 보배들과 함께 하루의 행락을 같이한 후에 저녁 강변으로 자동차놀이를 떠났다던 것이 고요한 강물을 바라보며 곧은 길을 줄기차게 내닫는 드라이브의 맛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꼭 끼어 앉은 세 사람의 체온에서 오는 따뜻한 맛이 유난히도 몸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58
민자와 보배의 사이에 끼인 준보의 꼴은 너볏이 다리를 뻗은 개구리의 모양이라고도 할까. 보배는 은근히 준보의 체온을 가늠보았다. 이렇게 빈틈없이 꼭 끼어 앉았을 때에도 민자와 자기에게 보내는 준보의 체온에 두텁고 엷은 차별이 있을까. 민자에게만 후하고 자기에게는 박할 수 있을까. 체온은 곧 애정이다. 준보의 애정이 그 밀접한 접촉에 있어서 역시 차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애정은 접촉의 거리에 비례하는 것이요. 그 접촉되는 대상의 육체는 민자의 그것이라도 좋으며 보배의 그것이라도 좋고 그 외 그 누구의 것이라도 좋을 것이다.
 
59
보배는 준보와 맞닿은 그의 한편 어깨에 은근히 힘을 주고 준보의 속을 뽑아 보려 하였다. 반응은 밀려오는 파도같이 더디기는 하였으나 적확한 것이었다. 이윽고 몸이 출렁하며 그 반동으로 준보의 어깨가 힘차게 자기의 어깨 위로 육박해온 것을 보배는 반드시 자동차의 바운드의 탓으로만 돌릴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차의 탄력을 이용한 준보의 의지를 그 등뒤에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의지는 보배가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거듭하였을 때에 참으로 사람의 표정과 같이도 속임 없이 확적히 드러남을 그는 보았다.
 
60
남에게 들킬 바 없는 저 혼자의 스핑크스의 웃음을 띠이면서 그 행동을 거듭하는 동안에 보배에게는 문득 한 가지의 걱정이 일어났다. 자기와 같은 동작을 건너편 민자 역시 하고 있지 않을까. 거기에 대하여 준보 또한 같은 반응의 표시를 보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 걱정은 보배를 돌연히 전에 없는 초조 속으로 끌어넣었다. 초초는 즉시 용감한 결심으로 변하였다. 주저하고 유여할 것 없이 한시라도 속히 다가온 기회를 민첩하게 잡자는 것이었다. 고요한 강변을 닫는 고요한 표정 속에 싸여서 속심 없는 개구리를 목표에 두고 앙칼진 결심히 한결같이 솟아올랐다.
 
61
그러나 기회는 도리어 너무도 일찍이 온 감이 있었다. 민자의 돌연한 신병으로 말미암아서였다. 목욕 후의 부주의로 가벼운 감기가 온 것을 무릅쓰고 가게에 출입하는 동안에 병운 활짝 덧쳐서 마침내 눕게까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준보들의 신문사의 조그만 회합이 있었다. 이차 회를 바에서 하고 난 후 헤어들 지는 때 준보는 거나한 김에 드디어 보배의 차 속에 앉게 되었다. 물론 보배 단독의 뜻만이 아니요 합의의 결과였으나 두 사람은 밤거리를 한바탕 돈 후 다시 술을 구하여 으슥한 요정 이층으로 올라갔다.
 
62
잔을 거듭하는 동안에 두 사람은 곤드레만드레 취하였다. 취중에는 행동이 까딱하면 돌발적이 되고 기괴하게 흐르기 쉬운 것이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그런 기괴한 행동의 속심에는 언제든지 계획한 뜻이 준비되어 있음이다. 너무도 모든 것이 수월하게 뜻대로 되어감이 보배에게는 도리어 싱거웠으나 사내의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벗겨 본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기쁨과 모험의 흥분이 그의 열정을 한층 북돋았다.
 
63
간단하였다. 거기에 이르는 준비의 과정이 장황함에 비겨서 결과는 어처구니없이 간단하였다. 말이 없었으며 그 필요가 없었다. 말이란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고 구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말은 오히려 결과 후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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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맞은 성인군자.”
 
65
보배는 이제는 마음이 한층 더 허랑하여져서 말에도 꺼릴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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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이 탄로났지. 이러구두 민자와 결혼하나.”
 
67
“왜 못해.”
 
68
준보는 뒤슬뒤슬 웃으며—두 사람의 태도는 그것이 있기 전과 똑같이 뻔질뻔질하고 천연스러운 것이었다. 시렁 위의 과일 한 개를 늠실 집어먹은 아이의 천연스런 태도였다.
 
69
“낯가죽도 두껍긴 해. —하긴 그것이 세상의 사내지만.”
 
70
“내게 덕을 가리켜 주고 그것을 됩데 허물 잡자는 말인가.”
 
71
“허물은 왜. 마음이 이렇게도 대견한데.”
 
72
사실 보배는 잔치를 먹은 후의 만족과 흥분을 겪은 후의 안정을 느꼈다. 화학실에서 뜻대로의 실험을 마친 후의 화학자의 평화로운 만족이었다.
 
73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새것’이라는 생각을 잊는다. 제일 아름답고 제일 빛나고 훌륭한 것은 ‘새것’이며 다른 많은 이유를 버리고라도 ‘새것’은 ‘새것인 까닭에 빛난다는 것을’ 잊는 수가 많다. 새 옷, 새신,새집, 새 세상—이 평범한 진리를 그것이 너무도 평범한 까닭에 혹은 ‘새것’의 자극이 너무도 큰 까닭에 감히 엄두를 못 냄인지도 모른다. 낡은수록 좋은 것에 단 한 가지 포도주가 있음을 보배는 듣기는 하였으나 지하실에서 몇 세기를 묵었다는 포도주를 마셔 본 적이 없는 까닭에 그는 포도주 또한 새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새것, 새 진미, 새 마음! 보배가 준보를 시험하였고 준보가 보배를 거쳐 다시 민자를 구함도 또한 이 ‘새것’의 진리에서 나왔음에 지나지 않는다. ‘새것’을 구함이 악덕이라면 묵은 것을 구함이 미덕인가 하고 보배는 반감적으로 느껴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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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이 가져오는 감격과 흥분에는 물론 위험스럽고 두려운 것이 있기는 하다. 겉으로는 평화를 꾸미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역시 일종의 안타깝고 두려운 것을 한결같이 느끼게 되는 이 밤의 경험이 보배에게 그것을 말하였다.
 
75
요정을 나와 자동차로 준보를 보내고 혼자 합숙으로 돌아왔을 때 그 감정은 한결 크게 마음을 둘러쌌다. 만족의 감정은 그 뒤에 숨어 버렸다. 민자의 방 앞을 지날 때에 그는 모르는 결에 주춤하였다. 어차피 민자에게는 진실을 말하여야 할 것이나 진실을 말함은 별을 따기보다도 어려운 노릇이요 그렇다고 숨긴다는 것은 또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또렷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재주라는 것이 있으니 결국 재주로— ‘기교로’—속히 시간을 주름잡을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도 생각하며— 한때의 선수도 이 밤만은 우울한 번민자로 변할 수밖에는 없었다. 결국 아직도 나의 주의가 철저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반성하며 불을 끄고 늦은 잠자리에 누웠으나 가달가달의 뒤숭숭한 괴롬이 한결같이 솟을 뿐이었다.
【원문】성찬(聖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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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聖餐)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