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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연(饗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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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14
채만식
1
饗 宴[향연]
 
 
2
신천총 영감은 오늘도 어저께처럼 그리고 그저께처럼 그그저께처럼, 또 그리고 달포 전부터 시작하여 그새 매일 일과삼아 해오던 대로 오늘도 천천히 걸어서 문안으로 들어왔다.
 
3
별로 급하게 온 바도 아니지만 후유후유 황토마루 네거리에 당도하니 등에 처근히 땀이 젖는다. 삼개(䵇浦)서 쫀쫀한 십리길, 젊은 사람들과 달라 파근히 지친 품이 길바닥에라도 그대로 드러누웠으면 편안할 것같이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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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가 단오(端午)니 가령 모시것이야 생심도 못하리라 하겠지만 적이나 하면 인조라도 항라 두루마기 하나쯤 입었어야 할 것을 이 특특한 당목 두루마기가 철도 아니려니와 제일에 무겁고 더워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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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 배고 땅이 옹색한데다 차가마와 사람의 왕래로 바쁜 거리에서라 조금씩 길 한귀퉁이로 귀물답게 위해논 잔디하며 게(體操)나 하듯이 흩지게 나란히를 하고 섰는 나무(街路樹)하며가 풀이 숲이 흔해서 보아도 못 보고 사는 문밖보다 새삼스럽게 눈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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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는 먼지를 썼어도 푸르고 나뭇잎은 알아보게 넓어 길바닥으로 제법 소담스런 그늘을 아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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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실히 풀잎과 나뭇잎에서 여름 소식을 알겠다. 여름인가 하면 겨울같이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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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여름이 오거나 봄이 가거나 뉘우칠 게 없는 다 늙은 세월이지만 옷은 무거운데 날로 더위가 더하니 그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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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은 삼복중이라고 해도 곧이가 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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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모르고 하면서 신천총 영감은 고단한 몸을, 그래도 인제는 오기는 다 왔느니라 마음 놓이는 마음에 잠깐 그늘 밑으로 들어서서 쉬기보다 어서 바삐 그리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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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의 큰 시계는 조그마서 노안(老眼)에 보이지 않고 순포막 앞을 지나다가 들여다보니 꼭 두점이다. 때는 마침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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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이라 ××일보사의 뒷문께를 여살펴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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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뒷문 옆에는 먹자죽이 흥건하게
 
14
○○○군
15
  결혼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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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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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쓴‘광고’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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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네 섞어 사람이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신천총 영감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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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복장(禮服)을 한 젊은이가 허리를 굽히면서 어서 오십시오 공손히 인사를 한다. 또 한 사람은 노랑꽃을 가슴에 달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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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는 아직 아니왔소”
 
21
“네에, 아직…… 아마 오라잖어서 오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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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서 참 다행이군!”
 
23
“네에 날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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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답을 지날말삼아 인사삼아 하고 나서 신천총 영감은 삼층의 식장으로 올라간다. 벌써 안팎 손님이 빡빡하게 모였다. 예식 시작을 기다리기도 지리했거니와 예식도 퍽 지리했다. 신부의 걸음은 어찌 그리 늘어지며 주례의 이야기는 어찌 그리 길며 축사는 어찌 그리 여럿이 자꾸자꾸 하며 축전축문은 어찌 그리 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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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예식이 끝나고 다른 손님들과 신천총 영감도 문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배가 허리에 착 붙고 허기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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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올려다보니 아마 석점반이 지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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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연락부절로 오고 가고 한다. 젊은이 하나가 노인 어서 타시라면서 허리를 굽혀 모신다. 시장한데 ×××관이라는 요리집까지 걸어갈 일이 꿈만하더니 십상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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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 때보다 더 마음 지리하게 기다려서야 겨우 식당으로 옮아앉았다. 그러나 잔치에서는 음식을 먹으면서 축사를 해서 해롭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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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총 영감은 위선 앞에 놓인 접시에다가 이것저것 음식을 걷는다. 전유어, 편육, 생전복, 적, 민어회, 닭조림, 제육조림, 생선찜, 떡 그밖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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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편이 있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없다. 음식을 걷어다 놓고는 비로소 먹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걷어온 놈이 아니고 원접시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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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게 먹는다. 맛있는 음식인데 시장했겠다, 한데 노인이니 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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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어는 연해서 좋고 제육조림은 진건해서 좋고 닭조림은 뼈는 성가시어도 훗입맛이 감칠맛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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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가 산뜻한데 멀어서 고개를 늘리고 끼웃거리니까 그 앞의 젊은이가 얼핏 접시째 집어주면서, 노인 이것 좀 잡수십시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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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지 다 주느냐고 사양하면서 받으니까, 좋습니다고 초고추장까지 집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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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원접시의 음식이 엔간히 동난 뒤에야 신천총 영감은 비로소 국수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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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다음에는 꿀을 찍어서 떡, 떡 다음에는 과실인데 사과를 한 알 집어다가 먹진 않고 앞에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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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니 접시들이 거진 깨끗이 비었다. 손님도 하나둘 물러나가서 자리도 이빨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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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총 영감은 적당한 시기로 생각하고 손수건─이라기보다 보자기뻘 되는 헝겊─을 펴놓고서 맨처음에 걷어 모아논 음식을 싼다. 사과도 잊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시장한 끝에 배불리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하다. 그래도 인제는 그만하고 일어서야지 갈 길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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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려고 하다가 보니 옆에서 젊은 친구 하나가 권연을 피워 물고 푹 내뿜는데 어떻게도 향긋한지 앉은 자리가 떨어지질 않는다. 그게 아니라도 아까부터 속이 싱거언 입안이 텁텁해서 한 대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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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성냥 있거던 좀 빌리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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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총 영감은 조끼 호주머니에서 마코곽을 꺼내 들고 젊은 친구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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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기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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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성냥곽을 선뜻 꺼내 준다. 신천총 영감은 담배곽을 만지고 들여다보고 하다가 허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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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없군! 원 담배두 없으면서 성냥을 빌렸담? 허허허…… 옜소 이 성냥 도루 너시요. 원 그런 줄 알었으면 사가지구 왔지! 내남없이 나이 늙으면 이래 못쓰는 법이야!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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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친구는 싱그레 웃고 있다가 제 담뱃곽─피종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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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피우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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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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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십시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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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원…… 그럼 어디 한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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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피우세요. 노인께 젊은 놈이 피우던 곽을 디려서 되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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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천만엣! 안헐 겸사를 다 허우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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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권연까지 피워 물고 자리를 물러와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여럿이 늘어서서 배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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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발써 가십니까? …… 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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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내 좀 가볼 디가 있어서……거 날이 좋아서 더 경사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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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날이 참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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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럼 먼점 가우.”
 
57
“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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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총 영감은 시커멓게 늘어논 구두들 틈에 섞인 낡은 고무신을 찾아 신고 문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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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만족이다. 손에 꾸려 든 음식도, 딸이 부탁하던 족편이 없어서 섭섭했지만 그 대신 생전복은 있으니 괜찮다.
 
60
십리길을 도로 허덕허덕 걸어나갈일이 따분했으나 그 역시 시방은 배가 든든해서 아까 들어올 때보다는 한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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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앞을 다 나와서 돌려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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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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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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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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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광고’가 서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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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총 영감은 ○○○ 군이 누구며 ○○○ 양이 누군지는 모르겠어도 아마 돈냥이나 있나 보다고, 그러길래 혼인잔치도 그만큼이나 잘 차렸지야고 생각하면서 트림을 걸게 끄르륵, 천천히 걸어간다.
【원문】향연(饗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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