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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젖 ◈
◇ 제1막 ◇
카탈로그   목차 (총 : 6권)     처음◀ 1권 다음
1928.9
홍사용
1
흰 젖
 
 
2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3
무거무래역무왕(無去無來亦無往)
4
여시료지삼세사(如是了知三世事)
5
초제방편성십력(超諸方便成十力)
 
 
6
• 인물
7
법흥대왕(法興大王)  신라 23대왕, 원종(原宗), 50여 세.
8
왕비보도부인(王妃保刀夫人)  법흥왕비, 40여 세.
9
성국공주(成國公主)  법흥왕의 계녀(季女),18∼9세.
10
이차돈(異次頓)  내사사인(內史舍人), 한사(韓舍), 26세.
11
철부(哲夫)  위화부령(位和府令), 이찬(伊湌), 50여 세.
12
이사부(異斯夫)  조부령(調俯令), 소판(蘇判), 40여 세.
13
실죽(實竹)  병부령이(兵部令伊), 벌찬(伐湌), 60여 세.
14
공목(工目)  이방부령(理方部令), 급찬(給湌), 40여 세.
15
알공(謁恭)  사정부령(司正府令), 대아찬(大阿湌), 30여 세.
16
노선(老仙)  남무혹운박사(男巫或云博士), 근100세.
17
아도(阿道)  비구(比丘), 70여 세.
18
모례(毛禮)  신사(信士), 30여 세.
19
사시(史詩)  모례매(毛禮妹), 21∼2세.
20
모례모(毛禮母)  60여 세.
21
거칠부(居柒夫)  내사사인, 24∼5세.
22
예작부령(例作府令).
23
집사성조주(執事省祖主).
24
내인(內人)  10여 인.
25
치성(雉省)  6인.
26
상인도전(上引道典)  4인.
27
흑개감(黑鎧監)  4인.
28
시위대감(侍衛大監)  2인.
29
대두(隊頭)  수인(數人).
30
령(領)  수인.
31
옥졸(獄卒)  10여 인.
32
행자(行者)  수인.
33
촌부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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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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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소(處所)
36
신라국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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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38
자금(自今) 1403년 전 신라 제23대왕 법흥대왕 14년으로부터 15년 8월 초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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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희(前戱)
40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
41
미타찬(彌陀讚)
42
본사찬(本師讚)
43
관음찬(觀音讚)
 

 
 

1. 〈제1막〉

 
45
첫여름 이른 아침.
46
영지(靈地) 남산여지암(南山與知巖)
47
오늘쪽은 바위로 된 언덕, 언덕 너머는 일면이 울창한 수림, 언덕 위로 엇비슷이 험준함 암벽이 있고 벽 앞은 넓고 편편한 반석이 깔리었다. 반석대 위에는 사람이 타고 걸터 않을 만한 소암(小巖)이 두어 개 늘어 있다. 왼쪽은 비탈로 되었는데 일대가 모두 성긋한 대수풀, 대숲 너머 저 쪽으로는 신라 서울의 성곽과 시가가 멀찌기 보인다. 더 그 밖으로는 먼 산의 참차(參差)한 연봉, 하원(河原), 기봉(奇峯)을 이룬 백운(白雲)이 감아 아득히 보인다.
48
(반석대 위에 어룡성(御龍城) 치성들, 모두 스무 살 안팎 준수한 미남자, 치성갑은 서서 거닐고 치성을은 다리 뻗고 모로 반쯤 드러눕고 병은 쪼그리고 앉았고 정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49
치성갑   어째 입때들 아니 오시노.
50
치성을   아직도 푸서리길에 이슬이 많은 터이니까.
51
치성병   (하품을 하고 비스듬히 드러누우며) 벌써 우리가 이게 며칠 째야. 짧은 밤에 단잠도 다 ── 못자고 새벽부터…….
52
치성정   기지개를 (켜며) 그럼 우리의 구실이 노상 이렇지 별수있나.
53
치성을   이 사람 내려 앉게. 거기는 이따 상감마마께옵서 앉으실 자리인데.
54
치성정   아따 제길할 자식, 나 상감님 자리에 앉았으나 저 상감님 앞에 드러누웠으나.
 
55
(일동 웃는다.)
 
56
치성갑   옛적부터 거룩하다는 이 여지(與知) 바위도 이제는 영검이 없어졌단 말인가. 무슨 놈의 의논을 벌써 며칠째 해야 밤낮 제턱 날마다 그 시늉이니. (앉으며) 일이 끝장이 나야 한다는 말이지. 이건 생으로 사람을 기름만 내리는 것이지 무어야.
57
치성병   하긴 이번 일이 처치하기가 어렵기는 퍽 어려울게야. 죄없이 사람의 피를 여간 많이 흘렸어야지. 중들도 하늘 밑에 인버러지일 터인데.
58
치성정   (일어나 앉으며) 그러기에 말일세. 중놈이라면 아비 죽인 원수보다도 더한지 눈에 언뜻 띄이기만 하면 이를 갈고 덤비어 미친 개 때려 잡듯 하니.
59
치성을   오늘도 천경림(天鏡林) 근처에서 하나를 붙잡아 불에다 태워 죽인다든가.
60
치성정   (일어나 앉으며) 나도 요전에 귀정문(歸正門) 밖에서 날화장시키는 것을 한번 보았지마는 참 보기에도 너무 몸서리가 나고 지긋지긋하데. 그래도 죽는 사람은 연방 염불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죽을 때까지 눈은 딱 감고 입을 쭝긋쭝긋하며 무엇을 중얼거리는 듯하데 그려, 흥 염불 그 경칠 놈의 염불 좀 고만두고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나 말지.(다시 눕는다.)
61
치성갑   아닐세, 그 사람의 중얼거리더라는 것은 염불이 아니라 반드시 이 나라 사람들을 독하고 모진 소리로 원망하며 푸념을 하던 것이든가 보네.
62
치성병   그러나 그것도 참 이상한 노릇이야. 그렇게 몹시 붙잡는데도 구박을 하고 죽이어 없앴건마는 그래도 연방 어느 틈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꾸역꾸역 쏟아져나와 죽으러만 가니…….
63
치성을   요사이는 성골(聖骨)의 겨레 귀한 집자손들도 많이 그것으로 몰리어 죽나보데.
64
치성갑   아무튼 이제는 하늘이 무심치 않을걸세. 생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서야 큰일이 안나! 이번 길에 모진 죽음을 한 원악한 귀신들이 모두 떼를지어 몰리어 다니며 무서운 소리로 부르짖고 푸른 불길을 내뿜어 이 땅을 맨잿더미가 되도록 태워 집어놓거나 무슨 짓이라도 하던지 하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일세. 어 ─ 허 생각 뒤만 하여도 가슴이 선뜩하고 머리살이 쭈볏거리여서.
65
치성병   하기는 이제 그렇게 극성을 피우며 사람을 못살게 굴던 이들이 꼬리를 샅에 끼고 쥐구멍을 찾을 날도 머지 않을게야. 더구나 요새는 인심도 달리 도는 모양이니까.
66
치성정   우리의 이 구실도 목숨이 아까워서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지만 ……. 아무튼 여러 해 묵은 이 체증을 얼른 쏟아버릴 무슨 용한 약이든지 한때 바삐 있기는 있어야 하겠는데…….
67
치성갑   될 수 있으면 요사스러운 꽃은 꺾어 없애고 거세고 독한 풀은 뿌리께 뽑아버려 어서 길을 떠나야하겠다. 행군취타(行軍吹打)를 해야겠다. (일어나 더벅더벅 두어 걸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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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정   (일어서며) 그래도 될 성 부른 떡잎은 고히 잘 가꾸어 주어야지.
 
69
(고요한 풍류소리와 함께 상인도전(上引道典)의‘쉬 ─’하는 전도(前導) 소리가 들린다. 치성들은 놀래 곤두박질을 해서 몰리어 얕은 자락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상인도전 네 사람이 앞을 서고 법흥대왕, 웅위한 몸에 무사의 복색을 차린 시위대 감이 나란히 2인,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 노선(老仙),철부(哲夫),실죽(實竹),이사부(異斯夫), 공목(工目), 알공(謁恭), 차례로 등장. 흑개감(黑鎧監) 4인은 대왕을 옹위해 서서 걷는다. 그러나 허리를 펴고 걷는 이는 대왕 한 사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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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은 바위에 걸터앉고 시위대감은 왕 뒤에 갈라 서고 노선과 이차돈은 왕 앞에 마주 꿇어앉고 철부, 실죽, 이사부, 공목, 알공은 왕의 앞으로 멀찍이 벌려 앉고 흑개감은 네 모퉁이에 갈라서고 상인 도전은 왕의 앞 멀찍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왕이 앉기를 기다려 치성들은 그 자리에 일어선다. 위의(威儀)는 있어도 모두 숭엄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돈다)
 
71
     (흩날리는 백발을 쓰다듬으며) 덕 없는 이 몸이 겨 속에 깊이 들어 있어 밤이나 낮이나 매양 놓이지 않는 마음은“어찌 하면 이 나라를 거룩하고 가미로웁게 할까. 어찌해야 우리 백성이 평안하고 넉넉할고.”하는 애타는 걱정이 그지 없으매 이리 여러 날을 두고 너희에게 간절히 묻노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나라를 위하여 충성된 뜻과 말을 아까지 말고 숨기지도 말고 모두 나에게 들릴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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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    두 팔로 땅을 (짚고 허리를 굽히었다가 다시 일어나 앉으며) 아뢰옵기 젓사오나 사람의 가장 높은 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께서 계실 줄로 믿사오며 그 덕을 쓰실 이도 임금님 밖에는 아니 계실 줄로 아옵거니와 이 서벌 나라의 기리는 이름을 빛나옵게 드날리시오매 위로는 조상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래로 머리 검은 짐승들을 다사롭게 다스리옵시사. 백성마다에게 두굿기고 그리워하며 찾고 바라는 것을 고루고루 나누어 주옵시려 하옵시니 그 거룩하옵고 크낙하옵신 덕을 어찌 무슨 입으로 적다 이르겠사오릿고.
73
     착한 사나이여, 너의 갸륵한 말은 아름다이 들었노라. 그러나 어찌하여야 내게 그러한 거룩하고 굳세인 힘이 있을고. 그것을 한번 가르쳐보라.
74
실죽    거룩하옵신 상감님께옵서 높은 자리에 계옵시와 넓게 보살피시오며 밝게 다스리시오니 젓사옵건대 작고 무딘 입으로 구태여 무슨 말씀을 사뢰오릿가마는 이 나라가 이룩하오면서부터 남달리 어려운 땅에 있사오매 북으로는 억세인 고구려가 부쩍부쩍 내리 누르고 게엄을 피우며 덤비우니 변방에 수자리 사는 병마가 평안할 날이 없었사오며 서으로 양세인 백제는 날마다 투정과 앙다툼으로 또한 좋은 사이가 아니였사오며 또 동남쪽 살피로 에둘린 바위에는 해적의 등쌀에 성가시러운 걱정이 나날이 차차 늘어만 가올 적에 그 속에 쌓여 부대끼는 설움과 괴로움이 정말 어떠 하였겠사오릿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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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늘이 도우사 폐하께옵서 이 나라에 임하옵시매 너그러우시고 두터우시고 다사로우사 두루두루 미욱한 백성을 사랑하옵시며 영검하옵시고 거룩하오사 널리 이 나라 땅을 빛내고 미쁘게 하옵시니 보배로운 자리에 오르신지 벌써 열이요 또 네 해째이오되 그만히 벌 떼 일어나듯 하던 변방의 도적은 꼬리를 감추어 이제는 군사들이 병장기 쓰기를 잊을 지경이오며 비가 순하고 바람이 고요로오매 사람마다 모두 배를 두드리며 거룩한 태평시절을 거리마다 기려 노래하오니 하늘의 덕이 이미 지극히 높으옵시매 뼈에 사무치는 사망이 위에는 더 바라올 나위도 없을까 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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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로다. 그것은 아니로다. 옛날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할아버지께옵서 일찍이 고구려에 볼모가 되옵시어 가서 계옵실 적에 갖은 설움을 촉촉히 받으시옵는 중에도 날뛰는 가슴을 누르시옵고 무섭게도 아리고 쓰린 고생을 다 ─ 참으시오며 기어이 뒷날 국운을 새롭게 하시사 든든하고 억세인 나라를 이루시려고 여러 번 다스려 벼르옵시고 굳게 맺히옵신 마음은 및고국에도 돌아오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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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오르옵시며부터 이 나라에도 새 빛이 돌고 큰 숨을 쉬게 되었으니 얼마나 갸륵하옵시고 즐거운 일인고, 땅을 널리옵시려 땅비를 이르옵실 새 뚝을 쌓으며 동을 모으게 하옵시고 소수레를 만들어서 백성에게 쓰도록 하시옵시며 가뭄과 장마에는 구호와 진휼(賑恤)을 아끼지 아니하옵시고 늙은이를 먹이시옵고 어린이를 기르시오며 놀고 먹는 이를 모두 부르사 일을 하도록 시키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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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하늘에 닿으신 거룩하고 높으신 덕 그 큰 뜻을 어찌나 해야 이 몸이 조금이나마 잃을 길이 있을고, 못생긴 이 몸이 몸 받은 그 큰 일을 조금이라도 마깝게 하지 못할까 보아 그것을 밤낮 저어하기를 마지 않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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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    이 나라 땅에 부접해 사는 백성은 새로 어느 푸나무나 무슨 짐승들인들 든든하고 우람스럽고 거룩한 덕화(德化)를 입지 않은 게 있사오릿고. 다스리시온 지 셋째 되는 해 봄 정월의 나을신궁(奈乙神宮)에 거동하옵실 적에는 양산(揚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나 춤을 추는 듯 상서를 드리옵고 4년 여름 4월에는 비로소 병부를 두옵시며 7년에는 율법을 지으사 펴셨사오며 또 백관(百官)의 차례와 옷을 마련하시었사오며 어진 신하를 얻으러 하오실제 귀하옵신 몸이 구중에 깊이 들어 계옵셔 대궐 밖 일을 알 길이 없으시매 여러 준걸을 모아 마음대로 놀리고 멋대로 가닥질 하게 하는 곳에서 그들의 행금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어 보옵신 연후에 어진 이를 뽑으시옵고 찾한 이를 들어 쓰고자 하옵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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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귀한 집안 자제들 가운데에 모양과 거동이 엄전하고 바른 이를 가리어 부르기를 풍월주(風月主)라 하옵고 착한 선비와 훌륭한 스승을 구하여 두레를 짜고 패를 지어 효제(孝悌)를 장려하옵시고 충신을 힘쓰도록 하옵시며 또 어여쁜 처자들을 뽑아 가꾸어 원화(原化)를 삼으옵시니 도중(徒衆)이 구름 모이듯 날마다 서로 도의(道義)로써 사괴이고 돕고 사랑하오며 또는 노래와 풍류를 이끌고 산수 좋은 곳마다 즐겁게 돌아다니며 놀아서 먼 데나 가까운 곳에나 어디든지 좋은 땅이면 마음대로 놀고 싶은 데로 발자취가 아니 닿는 데가 없도록 하시어 주셨사오니 그네가 배운 것이 무엇이겠사오릿고, 충신과 열사(烈士)도 그리로 좇아 빼날 것이오며 그네가 뜻한 것이 무엇이겠사오릿고. 양장(良將)과 맹졸(猛卒)도 거기로 말미암아 뛰어 나올 것이 아니오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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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소신의 이 늙고 미욱한 마음이오나 밤과 낮으로 비옵는 것은 다만 뜻하지 않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라도 저절로 거룩한 행실이 나타나며 못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여지이다고 할 뿐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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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죽    그러하올시다 . 철부(哲夫) 이찬(伊湌)의 사뢰옵는 말씀을 듣사오며 끝없는 감격이 가슴에 넘치오며 옛날 황창랑(黃昌郞)의 칼춤처럼 부닺는 마음이 번개치듯 새로금 깨우쳐 느끼어 지노이다. 어허 그런 일을 생각하오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앞을 가리옵고 붉은 피가 용솟음치지 않고서 어찌하오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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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이의 몸으로 백제왕의 억세인 목을 널름 황랑(黃郞)의 의협스러운 춤이나 치술령신사당(鵄述嶺神祠堂) 치술신(鵄述神) 어미의 남편이시던 제상 어른의 굳세인 넋이여. 어허 뜨거웁게 붉은 피와 뼈가 아프게 맺힌 마음은 억새밭 억세인 떨기마다 마디마디 방울방울마다 가시지 않는 피 흔적을 지니고 있지 안사오닛고. 아무리 독한 형벌 무서운 칼날 아래에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알랑거리여 달래임에나 간사스러히 꾀수임에도 빠지지 아니하옵고 기어이 끝끝내 씩씩하고 매운 절개를 발보였사오니 그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이오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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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넋이요 착한 백성 풍월주네들의 기질이다. 아무리 열흘 붉는 꽃이 없이 피었다 곧 지는 꽃송일망정 잇대여 피고 지고 피는 영원무궁한 끈덕진 꽃이 계림(鷄林) 남아(男兒)의 기개며 체면이며 우리의 얼이며 힘이니라.
85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을 일하러 왔으니깐 잠깐 빌어 있는 이 세상을 깨끗하게 살고 영화스럽게만 하면 고만이지. 그 때는 죽더라도 아무 섭섭함도 없을 것이니라. 아니 그 때는 아마 이 땅을 곧 떠나 평안히 쉬일 만한 어머니의 옛나라로 곧 돌아가게 될른지도 몰라. 그 동안의 애를 퍽 많이 썼으니깐 저 한밝산의 굳은 웅자가 우리의 기상이며 정신이요 시바랄의 넓은 회포가 우리의 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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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그러나 슬프도다. 이 나라는 동방의 햇빛을 받는 땅이언마는 이때껏 어둠 속에서 잠꼬대만 하였고 해와 달을 어버이로 모신 우리 백성들 거룩한 검님에 보내신 두굿기는 자손이언마는 어찌다가 무서운 구박에 그대 지울고 주림과 쪼들림에 그토록 파리해졌는고. 어 ─ 허 ─ 이제는 밝은 빛검나라에서도 내어버린 자식으로 돌보지 않으십니까. 기별도 없고 소식도 끊겼으니 찾아가 뵈올 길조차 바이 없구나.
87
그러니 우리는 깨우쳐야 하겠다. 남달이 부지런해야 살 것이로서 배우기에 힘들을 쓰라. 굳세인 뜻과 가미로운 힘을 내이기에 게을리 말라. 서로서로 엉기어 무너지거나 헤어지거나 또 물러서거나 하지 않는 얼과 넋으로 새로이 길하고 이로운 운명의 성문을 흠뻑 두드리어 열어 터 놓잤구나. 우리의 시방 운명은 망하는 것이 아니면 흥하는 것뿐일세. 마음을 어울리고 힘을 묻거든 굳은 데는 꿰뚫고 억센 데는 헤쳐 나아가보라. 나라 지경 밖으로 뛰어 넘어가라. 바다로도 떠나가 보아라. 어 ─ 허 아진(阿珍)깨 앞바다에 어기여차 복 실러가는 배…….
88
실죽    옳도소이다. 백성을 윤택하게 하옵고 국운(國運)을 왕성케 하옵는데는 아무러한 짓이라도 사양치 않겠삽나이다.
89
이차돈   옛적에는 우리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이웃 나라와 겨뤄보려 하오면 지식과 문물이 매양 뒤졌음으로 어찌나 모든 일에마다 이롭지 못하옴을 겪고 느끼였사온지요. 우리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려 하오면 한때라도 바쁜 것이 미욱함을 깨우치는 일밖에 더 없을까 하옵나이다. 남의 나라에서는 옛적부터 벌써 이웃의 모든 나라와 서로 널리 교통해 문물을 바꾸며 복스러운 일을 실어 들이기에 바빴건마는 가여웁게도 우리나라만은 남의 나라 틈에 옴츠러져서 끼어 있어서 조그마한 몸이 부닺기고 지질리기에도 차마 견디기가 어렵사온데 더구나 지식과 문물이 놀라웁고 먼저 깨였다 하옵는 양(梁)나라 같은 나라와 길을 트고 뜻을 서로 통해 보고자 하오나 북으로는 고구려와 서로는 백제가 가로막아 희살을 놓으니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그나마 들어오는 복도 발길로 차버리는 셈으로 이웃 나라에서 부처의 도를 가지고 백성을 일깨워주며 가르쳐 주려고 들어오는 이는 덮어놓고 모두 무찔러 죽이기로만 하오니 무엇으로써 남의 나라 풍정(風情)이나 형편이 어찌된 것이나마를 알아볼 길이 있사오릿고.
90
이사부   어 ─ 허 ─ 이 나라 운수가 장차 어찌나 되올는지. 미욱한 백성 가운데에는 마음과 목숨이 편안치 못한 이가 어찌 없다 이르겠사오릿고, 실없는 일에도 사람의 죽음이 가비얍기가 모닥불 위에 하루살이 목숨. 복을 찾어 푸념하는 이의 입에는 모밀범벅으로 들어처라고 도(道)를 깨달아 깨끗이 깎은 머리에는 대 테를 단단히 매어 놓으니 이럴래서야 시방 어느 곳이 그리 조용하고 편안할 땅이오며 사람 살 고장이라 이르겠사오릿고. 어 ─ 허 ─ 미욱하고 완악한 소견에 배우지 못함이여. 어두운 탓이여.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91
알공    아니올시다 . 이사부 소판(異斯夫蘇判)의 말이 그르도소이다. 이 나라에는 옛날부터 거룩히 밝은 도가 있어 대대로 여러 어지신 임금님께옵서 그것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리었사옵거늘 어찌 이제 대가리 깎고 헌 누더기 입은 중놈의 괴이한 수작을 새로이 옳은 도라고 그릇 참견할 것이오며 또 본디 내게 있는 것을 내어버리고 남의 것만을 받아들이여 좋다 이르겠사오릿고.
92
오히려 소신의 좁은 소견인지오. 아직 것도 마땅치 못하게 여기옵는것은 옛적부터 우리나라 임금님의 높고 거룩하옵신 이름을 마립간(麻立干)으로 일컫삽던 것을 별안간 남의 나라 글로 왕이라 고쳐 쓰옵시며 깨끗하고 좋던 옛옷을 벗기시고 이 몸에 설고 눈에 들지 않는 이 옷을 입히어 주옵시매 도무지 마음에 거북하고 마뜩치 않기 짝이 없사오니 스스로 깊이 딱하고 답답만 할 뿐이로소이다.
93
     너의 말이 너의 뜻 것은 가장 옳은지도 모르리라.
94
그러나 널리 알고 깊이 생각지 못하였음이 매양 큰 달이로고녀. 나의 눈이 남은 보아도 내 몸은 보지 못하매 남의 눈이 아니면 어찌 내 얼굴을 볼 수 있으며. 남의 긴 것을 보지 못하고 어찌 나에게 짧은 것을 가릴 수 있으랴. 나의 뜻도 아직 넓지는 못하나마 될 수만 있으면 조상의 거룩하옵신 뜻과 이 나라의 밝은 도를 온 땅에 끝닿은 데 없이 널리널리 펴보고지고.
95
그러나 보아라 우리 조상의 깊은 뜻을……. 헌 것은 모두 불살라버리고 온갖 것을 새롭게만 하시려고 애쓰시던 것이 아직껏 이 눈에선 ─ 히 밟히지 않느냐. 임금을 이름지어 일컬으심에도 때를 따라 여러 가지로 같지 않게 하셨으니 거서간(居西干)이라 이르옵시기를 한 번이요 차차웅(次次雄)이라 이르옵시기를 한 번이요 니사금(尼師今)이라 이르옵시를 열여섯 번이요 마립간이라 이르옵시기를 네 번이었으매 나도 새로이 이름을 고치어 왕이라 일컬어 부른들 그리 무슨 허물이 있을고. 오히려 나는 더 훌륭한 도와 갸륵한 이름이 어서 이 세상에 또 있기만 기다리기를 마지 않노라.
96
이차돈   시방 이 나라의 운수는 정히 국경을 깨트리고 테 밖으로 더 벌려 나가기만 좋을 뿐이오매 그런 일에 많이 유의하옴이 곧 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한 도리일까 하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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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年前)에도 백제에 흉년이 들어 주림에 우는 백성들이 900여호나 빌어먹어 우리나라 땅 폐하의 어지신 그늘로 돌아왔으며 가야국 왕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오매 비조부이찬(比助夫伊湌)의 누이를 보내시었사옵고 또 백제는 사신을 보내어 화의(和誼)를 청하였사오며 또 저 번에 폐하께옵서 남녘 살피에 거동하시와 너른 땅을 개척하옵실 적에도 가야국왕이 일부러 예로써 달려와 수종을 드렸사오며 이제도 양(梁)나라에서 사신이 이르러 다섯 가지 향과 경상(經像)을 드리였사오니 이만만 하여도 폐하께옵서 거룩하옵신 덕화가 바야흐로 널리 빛나옵심이 아니고 무엇이닛고.
98
그러나 다만 답답하온 것은 양(梁)나라에서 온 사신이 중 원표(元表)라 하옵거늘 이 나라에는 그를 남부끄럽지 않게 변변히 접대할만한 사람도 없사오매 도리어 나의 더럽고 미욱하고 무식함만 드러낼 지경이오니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99
(치성 1인 등장)
 
100
치성    (숨이 차서) 큰 일 났습니다. 사뢰옵기 황송하오나 성국공주께옵서 환후(患候)가 매우 위독하옵십니다. (비죽비죽 울며) 약을 드리어도 효험이 없으시옵고 당굴이 푸리를 하와도 영검이 보이지 않사옵고…….
101
     그것이 어쩐 일인고. (용안(龍顔)에 근심하는 빛이 깊이 어린다)
102
누구든지 그것을 고치어 줄 이가 없겠느냐. (초조하고도 근심 깊은 눈으로 여러 신하를 둘러보며) 여기에 누구든지 용하고 좋은 수를 가르쳐 내일 이가 없어. (모든 신하는 말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왕의 낙망의 빛이 깊어서) 이제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죽게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로군……. 그러나 그대로 죽는 꼴을 어찌 편안히 앉아 보고 있을 수야 있을고.
103
(눈물을 짓는다) 누구든지 없느냐 아무든지 좋다. 그의 목숨을 붙들어 주는이면 아무든지 좋다. 높은 몸이나 낮은 몸이나 사릴 것 없이 내 딸을 데려가도 좋다. 내 딸의 몸뚱이는 목숨을 살리어 준 은인에게로. [小間(소간)] 어째 이리 잠잠만 할꼬. (이차돈을 보고) 보아하니 네가 무슨 실기가 좀 있음직하니 어디 너의 좋은 뜻을 한 번 일러보라. [小間(소간)] 말이 없을고,
104
이차돈   미욱하옵고 나이 어린 소신이 입을 열어 감히 무슨 말씀을 사뢰오릿고.
105
     아니다. 무슨 말이든지 좋으니 어서 일러 보아라.
106
이차돈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폐하께옵서 밝으옵신 덕에 그릇되오심이 없이 더 밝히오시면 젖사옵건대 아무러한 재앙이라고 저절로 사라질 줄로 사뢰옵나이다.
107
     그러면 어찌해아 옳을고.
108
이차돈   상감님께옵서는 거룩하옵시고 높으신 권세와 위덕이 계옵시니 마음에 드옵시는 그래도 바르게 다스리시오면 아무 탈도 없을까 하옵나이다.
109
     그러나 이 몸은 덕이 얕고 눈이 어두워 밝히 볼 길이 없구나. 모든 것이 다 ─ 나의 맛갑지 못한 허물이겠으나 저 공주의 위태로운 병을 어찌해아 빨리 건지어 줄꼬. 약과 만신도 이제는 모두 신기한 보람이 없다는구나.
110
이차돈   소신이 밖에서 듣사오니 지난 해 봄에 일선(一善) 고을 우속(于續) 마을 모례의 집에 한 아도(阿道) 중이 왔삽는데 천지가 진동하옵고 하늘로서 보배로운 꽃이 비내리듯 하였다 하오며 왼손에는 금환석장(金環錫杖)을 집고 오른손에는 옥발응기(玉鉢應器)를 들었으며 몸에는 하납(霞衲)을 입고 입으로는 화전(化詮)을 부르더라 하였삽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중이면 붙잡아 때려 죽임으로 모례가 남에게 들킬가 저어하여 저의 집 울 안에 굴집을 짓고 모셔두었다 하오니 옛날 미추 니사금(未鄒尼叱今)님 적 일을 휘둘쳐 보옵건대 아마 이제도 그러한 이를 또 불러다 물어 보오면 더러 무슨 보람이라도 있을까 하노이다.
111
알공    그 말을 옳지 않소이다. 중을 불러다 푸리를 하면 이 나라의 밝은 도를 깨트려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릿고. 그런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이는 이 마당에서 빨리 물리쳐 뜨거운 불에라도 집어넣어 태워버리고지고. 이 나라의 한 가지 거룩한 내력은 옛날부터 위로는 밝은 하늘을 받드옵시고 아래로 미욱한 인간을 다스리시는 영검스러운 검님께옵서 높은 자리에 계옵시지 않았사오닛고.
112
그 거룩한 검님게옵서는 아무러한 모진 비바람에라도 나아가 다스리심을 게을리 아니하시었사오매 그 은덕을 갚기로써 이 나라 땅과 백성을 지니고 계옵시게 하심이어늘 미욱한 머리 검은 짐승들 사이에는 까닭 없이 빗서고 그릇치는 일이 많사와 뜻하옵건대 그것이 모두 뜬 것이나 허깨비가 아니고 무엇이오릿가. 한때라도 바삐 그러한 부질없고 지저분한 무리는 얼른 물리쳐 버리시옵소서.
113
이차돈   알공대사여 그대의 갸륵히 떠드는 말은 모두 잘 알아들었노라. 그러나 부질없이 지껄이는 소리가 너무나 안타까울손. 한 치 앞도 못 내다 보는 눈 먼 소경이 도리어 흰 것을 검다 이르니 그것이 애달프고야. 시방으로라도 한 발자국 밖이나마 환한 곳을 얼른 좀 보이고 싶고.
114
     너희들은 시방이 그렇게 쓸데없이 말다툼만 할 때가 아니니라. 어떻게 하든지 얼른 내 딸의 병을 고칠 길이나 물어보자.
115
알공    이차돈의 눈에 굿것이 씌였사옵거늘 그것을 먼저 다스리지 않고서 도리어 무슨 영검한 일을 기다리겠사오릿고.
116
     어 ─ 허 듣기 싫다. 이를 어찌할고. (노선(老仙)을 보고) 밝수야. 네나 얼른 무슨 영검한 일을 설설 내리어보라.
117
(치성 1인 달리어 등장)
118
치성    공주께옵서 숨을 모으시옵고 거의 돌아가옵시게 된 줄로 아뢰옵나이다.
119
(일동 모두 놀라고 초조하는 빛이 보인다.)
120
     얼른 들리어다오. 무슨 말이든지 한 마디만 용한 소리를.
121
(노선 일어서서 햇빛을 바라보고 한참이나 무엇을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안색이 차차 창백해지며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어른거리며 침묵. 일동 일어서서 불안에 쌓여 주시. 노선 허리를 굽히고 비슬비슬 걸어 좌편으로 내려가려 한다. 철부 그 옷소매를 잡아 막는다.)
122
철부    여보 거룩하고 영검스러운 밝수님. 어떡하시겠소. 그 무서운 병환에서 공주아가씨를 얼른 건져낼 수가 없을까요. 네 왜 말씀이 없으시오. 그러면 밝수님 당신은 무엇을 그리 슬퍼하십니까. 네 한 마디만이라도 영검스러웁고 좋은 말씀을 들려주옵소서. 상감님께옵서와 궁중의 안팎 이 나라 백성들이 모두 좋아 춤을 추도록.
123
이차돈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노선을 주시하다가 참다 못해) 여보아라. 네가 가기는 어디로 갈꼬. 가는 곳이 어디 메이며 여기가 어떠한 곳이기로 그렇게 버릇없이 걸어나가는고. 너는 대궐 안에 받들어 모신 몸으로 이 나라 땅에서는 가장 이름이 높고 거룩하고 영검스럽다 이르는 밝수로서 그렇게 버릇없는 것을 어전 지척에서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시방은 대궐안에 근심스러운 일이 계옵시어 나라의 위아래 안팎이 모두 애를 졸이며 좋은 기별만 기다리는 이때이거늘 하물며 너는 한 나라의 신직(神職)을 맡은 중대한 몸으로서 요사스러운 눈초리에 눈물을 찔끔찔끔 묻히어 볼수록 사위스러운 짓만 할까 보냐.
124
자 ─ 얼른 일러라. 무슨 말이든지 좋든 그르든 상감님께옵서 간절히 들으시려 하옵시는 이 때이니 속이지 말고 다 ─ 사뢰이고 가고 싶거든 가거라. 만일 그래도 굳이 입을 다물고 끝끝내 버릇없는 짓만 함부로 할 것 같으면(허리에 찬 칼자루를 잡으며) 이 이차돈의 허리에 찬 이 칼이 그리 날래지는 못할망정 너의 가는 모가지를 도리기에 그다지 무디지도 않을 것이다.
125
자 ─ 얼른 내 칼을 받겠느냐 안받겠느냐.
 
126
(이차돈 칼을 빼니 여러 사람들이 붙들어 말린다.)
 
127
     아서라.(철부를 보고) 그 움켜쥔 사매를 놓아보내라.(이차돈을 보고) 너는 무슨 거친 소리를 그리 함부로 하느냐. 여기는 일국의 대사를 의논하는 거룩한 영지(靈地)라. 그런 칼을 함부로 빼는 데가 아니다. 그리고 밝수야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 가거라. 아무 소리도 아니하는 것이 차라리 좋지. 너희 허옇게 세인 그 터럭 속 빛바래인 입술에서 떨려나올 좋지 못한 소리를 나는 듣고도 싶지 않다. 차라리 안 듣는 것이 나을 터이지. 가거라 가. 가고 싶거든 마음대로 얼른 물러가거라. 아무 소리도 듣기 싫어.
128
어 ─ 허 그 흉한 소리를……. 시방쯤은 벌써 내 딸의 목숨을 그만 아마 저먼 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떠났을 것이야. 저 허공 중천에 허위허위 높이 떠가며 시방 우리들의 이 짓을 웃음으로 내려다 볼런지도 몰라.
 
129
(하늘이 흐릿한 듯 돌아가는 떼구름장에서 빗발이 후두둑, 일동 하늘을 우러러 본다.)
 
130
     그렇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이 이것이 우리 아기의 웃으며 흩뿌리는 눈물방울이고녀.(목이 메여 옷소매로 눈물을 짓는다.)
131
(일동 모두 민망함가 초조함과 슬픔에 쌓여 무언(無言))
132
노선    (정신을 차리여 눈물에 섞인 너른너른한 웃음으로) 아니올시다, 상감님.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철부 이찬, 이차돈 한사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내가 너무도 버릇 없었음을 접어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다 ─ 사뢰옵지요. 흰 터럭에 뒤흡쓸리어 먹은 나이 거의 백 살이나 되어 실낱 같은 이 목숨이 무엇이 섭섭하고 알뜰한 것이 있어 숨기고 감출 일이 있사오릿고.
133
     (낙심과 설움의 반동으로) 그래 무슨 말이냐. 내 딸이 죽겠느냐. 그 병을 고칠수가 있느냐 없느냐. 그 탈을 풀어낼 수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이 나라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나 있겠느냐. 그 계집애로 해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무슨 탈이 있느냐. 만일 그렇다 하면 나는 그 자식을 끊어버려도 관계치 않어. 이 나라를 위한 일이면 내 딸을 죽이고 또 목숨까지 바치더래도 아끼울것이 없어. 내 딸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은 다 ─ 내 손아귀 하나에 매었으니깐. 그까짓 것을 없애버리기로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일고. 여러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한낱의 두굿기는 내 자식이지만 선선히 내어버리는 것이 이 서벌(西伐) 나라 밝은 겨레의 거룩한 넋이지. 밝수야. 어디 한 마디만 얼른 일러 보아라.
134
노선    아니올시다. 공주 아가씨계옵서는 곧 회춘(回春)하실 것이 올시다. 아무리 까무러쳐 숨이 떨어지셨삽더래도 곧 다시 깨어나실 것이올시다. 암 근심도 마시옵소서. 고요히 마음 놓고 들으시옵소서. 고이고이 들으시옵소서. (신이 내린 듯 차차 무아경에 들어간다. 푸념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도 가리키며 혼잣소리로.)
135
어허 좋을시고. 온 땅을 밝게 비추이시며 다사로웁게 쪼여주실 검님께옵서 황금덩을 타옵시고 새배 저쪽 본곁에서 거동해나옵신다. (사방을 둘러보며) 깨끗하게 마전해 널은 이른 아침 고요한 휘장 밖으로 뻗어나가려 하는 온갖 새로운 목숨의 힘을 탐탐스러웁게도 손 잡아 이끌어주시는구나. (도성쪽을 내리 굽어 살피며)
136
골골마다 무더기 무더기로 새 것을 이룩하는 거룩한 목숨이 치밀어 오르는 듯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쪼들리고 헤매이던 사람들은 새로이 밝은 빛을 힘입어 새벽 종다리처럼 재바르게 오락가락하누나.
137
(가슴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138
빛이여 빛이여. 어허 밝고 맑은 저 햇빛이여. 거룩하고도 환한 눈의 광채가 이 계림땅 보배로운 흙의 영원하고도 속 깊은 신비를 모두 거두어 우리에게 지녀주시랴 물려주시랴 대대손손이 가슴 속에 가득 쌓아 끼쳐주시랴고 넌지시 눈짓하시고 뒷손질 해주시는 것이었마는 그러나 우리가 미욱하구나. 그 사랑 깊은 뜻을 받기는 새로 그 영검스러운 얼음짱조차 알아들을길이 바이 없구나.(목이 메인다.)
139
(다시 기운을 들여) 우리의 부리가 어떠한 부리신가. 온 누리 모든 것이 모두 다 저 거룩한 동방으로부터 비롯함일세라. 하늘님의 아끼시던 씨앗으로 착한 것이 마음이 되고 흰 빛이 몸이 되어 온 누리를 비추어지라. 온 땅을 걸차고 가미로웁게 하여지라. 온갖 것을 싱싱하고 씩씩하게 하여지라고 이나라에 보내신 거룩하고도 기림 있는 해님의 겨레언마는 흙내를 맡은 뒤부터 영검이 없어지고 미욱한데 무저져서 저절로 이르기를 불쌍한 인간들이로세.
140
모든 것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더럽게 게으름만 피워 닥치는 곳마다 슬픈 소리 고르지 못한 가락만이 들리어 일어나도다. 저마다 떨어져 달아나며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 몹쓸 세상 어허 어찌나 해야 좋을고.
141
손을 비비어 (비는 듯) 어머니 살려주옵소서. 띠알 사나운 마음과 몸의 무서운 아귀다툼을 눌러 주시옵소서. 불같이 괴로운 시새움의 화살을 뽑아주시어 방여의 칼날을 막아주시옵소서. 이제껏 맞는 온갖 궂은 일일랑 거두어 불살러 주시옵고 옹친 것은 풀어주시오며 맺힌 것은 녹이어 주시오며 굳은 것은 느꾸어 주소서. 허룩해진 이 누리를 드잡이해 주시옵소서.
142
(고개를 내저으며) 그러나 그러나 어허 어머니께옵서 손수해 입히신 고운옷을 시막스러운 우리의 심술로 가리가리 쥐어 찢어 넝마 헌누더기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야 그것을 다시 깁고 꼬매어 입히고 거드처 주시기를 바랄 수 있으랴. 어허 이제는 여기저기 소담스럽던 귀불주머니도 손 때에 절어 끊어 떨어졌고 꽃도 놓고 새도 놓은 타리개 버선은 진창만 함부로 밟어 걸레가 되었고 오목조목 잣누비옷도 오줌똥을 못가리어 너절해졌구나. 어머 젖에 함함이 살찐 타락송아지가 이제는 개밥에 도토리처럼 뒤돌리어 눈총만 맞는 불탄 강아지가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료. 이를 어찌하면 좋으료.
143
궂은 비 흩뿌리고 바람은 지동치듯 부는 밤길언마는 허둥지둥 갈팡질팡 헤매니는 걸음을“그리 가면 진굴창이다 저리 가면 낭이니라.”일깨워 근심해 주실 이도 없고녀. 부루통한 젖꼭지는 내가 빨아먹을 것만 여기어 긴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매어달렸더니 어머니께서 일부러 발길로 박차버리었음이 아니라 그것은 눈물에 무져저 누진 꿈자리에서 구성진 잠꼬대만 하였음이었도다.(눈물을 씻으며 느낀다.)
144
어머니께서 피땀을 흘리시어 만드신 손 끝 이 나라를 저희에게 내어주실 제 이르신 말씀 가라사대 “이것을 맡아 지닐 제 내 얼굴을 더럽히지마라” 가라사대 “고이 잘 지내고 어미 품으로 다시 돌아오라” 가라사대 “지내는 동안 어미 얼굴이 그리웁거든 떠날 적의 목메이던 부탁을 휘둘쳐 보아라” 하셨건마는 그러나 이제 보니 저희는 이대로 돌아가 어머니를 바로 쳐다뵈올 낯바닥이 없소이다. 저희가 걸어오던 길섶에 고이 가꾸어 놓으셨던 수줍은 이 몸쓸 심술이 뭉틋고 망거질러 없애였으니까요.
145
옛 꿈터에서 흘러내리는 고요한 물결이 낡은 넋을 아프게 흐느적거리노라. 이것은 이것은 그 어느 거룩한 이의 뉘우쳐라 깨우쳐라 일부러 마음 있어 지워주시는 뼈아픈 눈물이나 아닌지. (목이 메인다.)
146
바람이 분다. 아지랑이도 스러지노라. 끊일락말락 젊은이의 애를 부질없이 시들리던 호들기 소리여. 어허 나의 것은 마디마디 가락가락 느끼어 떤다. 눈물도 하염없어 그칠 줄이 없구나. (눈물을 씻는다.) 애졸이던 마음 날뛰던 가슴을 서로서로 얼싸안고 푸른 밤 동산에 긴 밤을 새우며 안개 서린 잔디밭에 줄달음 주어 뛰아놀던 그리운 벗 정다운 동무는 다 ─ 어디로 헤어져 갔느냐. 해 저문 개펄에서 시름없이 부르던 그윽한 메나리 보드라운 노래 골짜구니가 찌르렁 울리던 우렁찬 소리도 이제는 목이 쉬어 가슴만 앓는 벙어리뿐이로다.
147
(한숨을 쉬고) 뻗쳐 흐르는 영혼의 샘물이 끊이지 않고 새롭게 새롭게 용솟음 치던 샘터는 무엇에 이 눈이 어두워 찾을 바도 없는고. 안개가 잦아진 골에 피어 흐드러진 온갖 꽃송이를 춤추던 손으로 곱게 꺾어 님에게 드릴 꽃다발을 곁던 솜씨로 옛 적에는 많았섰더니라. 호박벌이 멋없이 달아날 적에 말없이 흐리어지던 이슬 머금은눈썹은……. (한숨을 쉰다.)
148
아 ─ 그러나 시방은 이게 어쩜이뇨. 마음과 몸이 너무도 무디고 거칠어진 탓인가. 하나 두어라. 그 적에 실없는 일은 모두 그대로 내던져 두잤구나. 옛무덤을 찾는 에누다리가 슬프기도 하다만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허튼 잔사설이 멋쩍기도 하올세라.(빙긋 웃는다.)
149
거룩하신 검님이 주신 고운 철 그리운 옛날은 궂은 일에 속고 덧없는 마음에 얽매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었지마는 이제라도 우리의 넋과 우리의 피를 들이부어 고운 마디와 훌륭한 가락으로 이 나라를 어울리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며 검님의 뜻일세라. (호령하듯 한다.)
150
어둡던 땅에 먼동을 터주시고 환한 햇볕이 이리 내려 쪼이심은 아직도 두굿기시는 사랑이 남으사 어둠의 홑이불을 걷어치우고 안가슴을 버리어 싸안아 주고자 하심이니 거룩히 흘려주시는 흰 젖을 받아서 겨레의 씨앗이 던저 넌출 뻗는 곳마다 햇빛이 비치는 나라 땅마다 고로고로 축이여 길고 오랠 목숨을 북돋아 기르랴 함일세. 모름지기 여기에서 힘쓰고 부지런 하면 얼마나 거룩하고도 붉은 넋과 깨긋하고도 보얀 피가 깊게 깊게 제기어 디디고 간 곱고 어여뿐 발자욱마다 철철 넘게 고여 있어 어마어마하고도 영검스러운 보람과 자취가 뒷누리까지 길이길이 끼처 남아 있어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푸념을 하고 살그머니 쓰러져서 게거품을 입으로 흘리며 부르르 떨다가 여러 치성(雉省)이 덤비어 주물러준 뒤 한찬만에 정신이 돌아온 듯 일어나 입맛을 다시고 한숨을 쉬며.)
151
폐하께옵서는 아무 근심도 마옵소서. 이번에 공주께옵서 환후가 쾌차하옵실 뿐만이 아니오라 그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거룩한 새빛이 새로이 새로이 들이비쳐올 것이로소이다. 서방(西方)에 금선(金仙)이 계시와 유정 인간(有情人間)을 구제하기 위하옵서 거룩하옵신 일생을 바치시었사오며 다섯 가지 욕심의 펼쳐진 넓은 들판에 부적부적 타들어가는 탐욕의 큰 불길을 대자대비의 떼구름장에서 주루룩 쏟아지는 무상정법(無上正法)의 소낙비로써 앉은 자리에서 꺼 없애시오며 미욱의 뇌옥(牢獄)에 얽매어 있는 중생을 위하사 금강의 지혜로운 칼로써 번뇌의 쇠문을 두드려 부셔주셨사오며 청정 미묘의 바다에 에둘린 해탈정각(解脫正覺)의 꽃동산에서 즐거웁게 살도록하여 주신 이의 거룩하옵신 도가 이 나라에 널리 뒤덮힐 것이로소이다.
152
옛날 미추 니사금님 적에 고구려 사람 아도(阿道)의 어머니 고도녕(苦道寧)이라는 이가 이르기를 지금부터 3천여월 뒤에는 이 나라에 그 도가 퍼질 것이라고 하였다 하옵더니 아마 그 말이 이제 와서 맞는가 보오이다. 어 ─ 허 이 몸은 이 늙은 몸은 불행히 거룩한 도와 인연이 얇음인지 실낱 같은 목숨이 아침 저녁을 재촉해 기다리는 애달픈 몸이오니 얼마나 복이 얇고 덕이 적은 탓이오릿고. 그렇게 거룩하올 세월을 노신(老臣)의 이 눈은 뵈옵지 못하올 것을 생각하오매 메마른 가슴의 낡은 피가 찢어질 듯이 막히어 철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옵고 저절로 버릇없는 짓만 많았사오이다.
153
어 ─ 허 얼마나 섭섭한 일이오릿고. 이다지 애졸이는 슬픔이 또다시 없삽나이다. 상감님 이 늙은이의 철없는 눈물을 두굿겨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노신이 맡아보던 이 밝수의 영검스러운 자리도 있을 까닭이 없을 터이올시다. 그러나 너무 근심하시지는 마시옵소서.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노상한결같이 밝으신 덕으로만 계옵시면 길이길이 큰 복을 누리옵시리다.
154
     (무엇을 깨달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잠깐 잠잠이 무엇을 생각하다가) 따로 푸리할 것은 없을까.
155
노선    아무 것도 없삽나이다. 그저 다만 상감님께옵서 밝으신 뜻대로만 하옵시면 시방 모든 어려운 일은 실꾸리 풀리듯이 저절로 솰솰 풀리오리다 이제는 . 노신의 맡은 일이 다 끝이 났사오니 아 ─ 니 이 나라의 어려운 일은 거진 다 보살폈사오매 고달프고 늙은 몸이라 물러가 편히 쉬올까 하노이다.
156
(노선 정신없이 허둥지둥 걷다가 몇 번이나 엎드러져 넘어지매 치성 두 사람이 부축해 퇴장)
157
     (일어서며) 어찌해야 그렇게 거룩한 일을…… 영검스러운 일을…….
【원문】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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