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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젖 ◈
◇ 제2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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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9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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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 젖
2
〈제2막〉
 
 
 

1. 1장

 
4
왕궁 경내의 비원(祕園) 일구(一區). 정면과 우편은 몇 나무 수양(垂楊)이 성긋한 속으로 은은히 들여다 보이는 이끼 서린 궁장(宮墻) 우편 담 끝에는 본궁으로 통하는 일각대문. 담 넘어 저쪽에는 그리 멀지 않게 전각(殿閣)의 용마루와 추녀가 드러나 보인다. 중앙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석가산, 홍예(虹霓)를 틀은 조그마한 석교. 못에서 좌측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언덕 위에는 두어 나무 무궁화가 방긋이 웃고 섰는데 그 중에 한 나무 쓰러질 듯 노고(老苦)한 등걸이 반나마 허리가 구부러져서 못 속의 저 그림자를 고요히 들여다보는 듯. 좌편 가으로 다가서 무궁화나무 그늘에는 조그마한 정자 한 채. 길은 언덕 너머에서부터 정자를 앞으로 끼고 돌아 석교를 건너 연류두전일(蓮流頭前日) 저녁나절.
5
(알공(謁恭) 정자에 홀로 앉아 무슨 생각에 잠기었는 듯 일어나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로 두어 걸음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금 우뚝 서서 무엇에 주리인 듯 무엇을 찾는 듯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가 실망에 넘치는 듯한 한 숨을 한 번 깊이 쉬이고 다시 정자에 힘없이 주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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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 언덕 너머 길로 공주가 아기 內人[내인] 하나를 데리고 등장.
7
알공은 허둥지둥 정자 옆 무궁화 그늘에 몸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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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소박한 편복(便服)에 간단하고도 고품(高品)한 분장, 한 속에는 태극선 한 손에는 무궁화 한 가지를 넌지시 꺾어들고 고요한 발자욱을 게을리 옮기어 놓는다.)
 
 
9
공주    (꽃을 코에 대어 향내를 맡으며) 내가 앓아 누웠던 그 동안에 이 꽃이 이렇게 활짝 어여쁘게도 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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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그러믄요 아기씨께옵서는 , 편치 않아 계옵신데 그 꽃만 홀로 먼저 그렇게 피었었으니 그 동안에 보아 주실 임자를 그리워하는 시름은 얼마나 많이 멋없고 실없는 동풍을 탓하고 원망하였겠습니까. (소리를 내어 웃는다.)
11
공주    (소리없이 방긋 웃고서) 아이 가엾어라. 철 적은 봄꽃에게 내가 너무도 많이 못할 짓을 하였군. 그러나 어찌하노. 뜻밖에 저절로 지어진 그 허물을……. 이 꽃잎이 이렇게 애처로웁게도 으스러졌으니 아마나 어느 적에 데퉁 적은 소박니 발이 아프게 후려때리고 가버린 까닭이나 아닌가. 시름 속에 어여삐 핀 꽃이 눈물 속에 넌짓 웃다가 소낙비에 그만 으스러져 죽는다. 아으 가엾이도…….
12
내인    아기씨, 그래도 봄바람이 건듯 불 제 향내 맡은 범나비는 지는 꽃이 섧든 말든 제 멋만 좋아라고 너울너울 춤을 추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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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흥 그까짓 미친 나비의 짓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니.
 
14
(알공 고개를 갸웃이 내밀고 숨어서서 보며 빙긋빙긋 웃다가 공주의 말에 놀라운 듯 얼른 고개를 끌어들이고 서서 낙심천만인 듯 고개를 한 번 젓고 기인 한숨을 땅이꺼질 듯 쉰다.)
 
15
내인    아기씨 저런 나비 말이지요. (조약돌 하나를 알공의 숨어 있는 무궁화나무 그늘을 향해 던지고 웃는다.)
 
16
(알공 몸을 사리며 돌을 피하는 듯)
 
17
공주    얘 이 동산은 너무도 고요하구나. (버들숲에서 새로이 우는 매미 소리를 듣고서) 저 매미는 무엇이 그리 맵기로 매암매암하고 늘어진 가락을 꺾어 우노.
18
내인    내일이면 벌써 유월 유두니 서늘한 가을도 이제 얼마 아니 남았으니까요.
19
공주    유두날 밖에서들은 즐겁게 놀이를 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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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그러믄요. 백성들이 성 밖 동으로 흐르는 물가에 모여서 머리도 감고 놀음 놀이를 차리어 즐겁게들 노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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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밖에서는 그렇게 늘성거리건마는 여기는 이렇게 쓸쓸만 하구나.(석교(石橋)에 올라서서 못을 들여다보며) 물도 맑기도 해라.
22
내인    장마가 지나갔으니까요.
23
공주    (무궁화 한 송이를 입으로 담싹 물어 따서 물에 떨어뜨리며) 참 가엾은 일도……. 꽃을 먹이로 알고 쫓아오는 물고기여! (물을 이윽히 들여다 보다가) 이 동산지기의 심청도 너무나 밉살머리스러울손. 왜 다만 한 마리의 물고기를 이 작은 못에다 저리 외짝으로 가두어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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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그런 게 아니랍니다 . 전에는 금잉어 두 마리가 짝을 지어 굼실굼실 잘도 놀던 것을 그만 한 마리는 아기씨께옵서 편치 안 옵실 적에 잡아서 쓰셨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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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아으 애처로웁게도 나에게 어째 그것을 잡아 먹이었을까. (눈물을 지우는 듯) 더구나 어디에 물고기가 없어서 하필 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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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그래도 밝수의 말이 아기씨 병환에는 그것을 잡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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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아이 얄궂어라. 늙은 밝수의 능청 맞은 수작……. 가엾이도 내가 그것을 먹고서 병이나았다니! 저렇게 어여쁜 것을 어찌 차마 잡아 먹어……. (물을 들여다보며) 이 모진 목숨은 네 짝을 잡아먹고 살았다는구나. 너는 저렇게 쓸쓸스러웁게 내던져두고. 아마 나를 원수로 여겨보겠지.(쓸쓸한 웃음을 웃으며 내인을 보고) 그것이야 아무 마음도 없어서 그런가 꼬리를 치며 굼실굼실 조아리고 혼자 잘도 노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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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한참이나 열적어 섰다가 비로소 때를 얻었다는 듯이) 그래도 아기씨께옵서 병환이 나으셨으니까 고만이지요.
29
공주    (슬슬 걸어가며) 무얼 그것을 먹어서 나았을라고. 이차돈 한사의 은덕으로 아도(阿道) 중의 법력으로 내가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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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    참 그 거룩한 아도 중이 이제는 이 서울 안 천경림에다 집을 올리고 있게 되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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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내인 일각문으로 퇴장, 알공 살며시 일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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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공    (일각문을 바라고 두어 걸음 걷다가 서서) 어허 이 나라에서는 가장 높고 귀하옵신 몸이여, 상감마마께옵서는 아드님이 없으시니 대왕 폐하의 거룩한 용상도 저 아기씨 차지. (낙심하는 듯이) 아 ─ 그러나 임자가 있구나. 원수의 이차돈이가…….
 
 
 

2.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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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달없는 밤 초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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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례(毛禮)의 집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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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술 볼빛에서 어머니는 삼을 메고, 사시(史侍)는 삼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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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벗어라 벗어라 네가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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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벗지 아니하면 내가 벗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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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라 속아라 네가 속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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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속지 아니하면 내가 속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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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 삼이 왜 이렇게 얼크러졌을까 이것 좀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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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다, 어쩌면 그렇게 얼크러졌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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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이러다가는 이 번 팔월 한가위에 우리가 아마 회소(會蘇)가락을 부르게 되나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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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다. 이렇게 애써서 하는 길삼을 남한테 뒤떨어지지는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러나 여섯 주비에 길쌈 잘 하는 솜씨가 퍽 많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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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엉크러진 삼을 들고) 어머나, 이것 좀 보아. 참 얄궂어라. 어쩌면 이리도 몹시 얼크러졌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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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를 낄낄 차며) 어쩌면 그렇게……. 하긴 그게 삼이 얼킨 것이 아니라 아마 네 마음이 무엇에 무척 얼크러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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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부끄러워 웃는 듯) 어머니도 그런 말씀은…… 내가 무엇에 그리 마음이 어지러워졌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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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얼 요사이 밤마다 네 잠꼬대하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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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이렇게 커다란 것이 어린애처럼 무슨 잠꼬대를 다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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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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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아이 얄궂어라.(웃음을 멈추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 하기는 요새 내 몸이 퍽 이상해지기는 했어. 밤마다 까닭없이 무엇이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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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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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글쎄……. 무엇인지 썩 잘 아는 듯도 하면서 또 무슨 일인지도 몰라요. 그래 그럴 적마다 꼭 이차돈 한사님의 얼굴만 뵙고 싶어서 못견디겠어……. 어머니 그러다가도 어쩌다 한 번 만나 뵈면 아무 할 말도 없고 또 이야기도 싱겁고 쑥스러워서 괜히 쓸데없는 소리만 몇 마디 지껄일 뿐이라오. 참 엄전하고도 참한 도령님. 그런 이가 이 세상에 둘이나 다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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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나도 벌써부터 짐작했어. 그래 어떻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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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어떻긴 무에 어때. 접때 아도 스님 모시러 오셔서 뵈온 뒤로부터 저절로 마음이…….(부끄러운 듯 자지러지게 아양을 떨며) 아이고 어머니 나는 무어라 말할 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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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네가 그이에게 반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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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반하기야 무얼. 그러나 아마 무엇이 어떠하기에 저절로 끌리고 그리운 생각이 나지요. 어머니 나는 그 뒤에 그이의 얼굴을 두 번밖에 못보았다오.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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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망칙스러워라, 계집애가 철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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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러나 나는 그이를 볼 적마다 수줍고 부끄러워 못 견디겠어……. 그이는 참 훌륭한 사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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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하면 무얼 해. 그러한 이가 너 같은 것이야 이제 다시 한 번 눈꽁댕이로나 더 거들떠 볼 줄 아니. 또 사나이 속을 누가 아니. 더구나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데.
61
사시    그까짓 속은……. 그까짓 것이야 아나 모르나.(한숨을 쉬며) 내가 다만 궁금한 것은 그이도 나를 그리워하시는지 나는 그런 말을 그이에게 물어볼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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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수줍은 색시가 괜히 외기러기 짝사장으로 헛물만 켜는 셈이면 어떻게 하니. 더구나 저렇게 나이 찬 계집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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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러면 어머니는 왜 접때 그이가 왔을 적에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버려두었었오. 나는 가슴이 이렇게 답답해 죽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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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귀중하신 손님이 이런 집엘 다 찾아오셨으니깐 좋은 낯으로 그저 잘 대접해서 보내자는 것이니까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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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래도 어머니는 그이가 세 번째 말을 타고 우리 집 울 뒤로 돌아 내리었을 적에 내가 울구멍으로 내다보아도 어머니는 빙긋 웃고 아무 말씀도 날더런 안 하시고서 무얼 그래. 그 때 어머니는 아주 눈웃음을 치며 그이를 맞아들이지 안으셨오. 그 때에 그이가 나를 보고 넌짓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이실 때에 어머니의 마음도 과히 그리 싫지는 안으셨겠지요. 그렇게 귀중하기만 하신 몸과 또 이 딸년의 일을 생각하여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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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면쩍은 듯이) 망할 것. 이제 별소리를 다해 지껄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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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래 그 때 그이가 사흘을 우리집에서 묵고 계셨지요. 그이의 돌아가시던 발길이 더디 더디 머뭇거림은 모두 나 때문인 줄 알 제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고 기꺼우시었겠오. 그이의 타신 흰 말이먼 산모롱이로 돌아가는 것을 나는 싸리문간에서 시름없이 쳐다볼 때에 어머니는 무엇이라 나를 달래주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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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은 그 때 내 생각은 네가 오늘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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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렇지만 뒤울 안 굴집 앞에서 그의와 나만이 서로 쳐다보고 있을 때에 거만한 걸음으로 우리를 놀래어 주신 이가 누구요. 나는 분명히 부엌 모퉁이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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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그렇게 약고 똑똑하던 네가 금방 그렇게 마음이 쏠릴 줄은 몰랐구나 .(한숨을 쉬며) 모든 것은 도무지 내가 잘 보살피지 않은 허물이 크겠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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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힘없이) 허물이야 무슨 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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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가 만일에 그이가 훌쩍 너를 떼처버리고 돌보지 않는다거나 데려가지 않는다면 어찌나 되겠니. 그것이 걱정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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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참 얄궂어라. 그이가 나를 왜 돌보아 주어야만 될까요. 왜 데려가야만 될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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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그에게 바친 몸이고 그는 너를 맡은 사람이니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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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런 짓을 왜 누가 했던가요. 그런 일은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바치고 맡은 일은 없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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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한때의 무슨 눈보임 사랑 뿐이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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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그것부터 모르지요. 글쎄 그이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누가 그걸 아느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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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너는 철없는 계집애다. 만일 그런 일을 네 오라비가 알아만 보아라. 어떠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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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왜 내가 그이를 그리워하는 걸 시새워 할 일이 있을까. 아니지요. 오빠도 이 말만을 들으면 퍽 좋아하겠지요. 더구나 그 거룩한 한사님을 깨끗한 풍월님을 누가 구태여 헐고 미워할 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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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 그이를 보면 아무라도 탐탐히 하지 않고야 어떻게 하겠니. 누구에게든지 두굿김을 받는 엄전하고 씩씩한 풍채이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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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놀라는 웃음으로) 저것 보아 어머니도 그에게 무척 반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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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집애도 내가 그이에게 반해 무엇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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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왜 무엇 할라고만 꼭 반하오. 아무튼 거룩한 우리 도령님이야. 그리고 어머니 내사(內舍) 한사(韓舍)까지 지내신 귀중하신 성골의 겨레로써 더럽다하지 않고 이런 집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그렇게 상감님의 가까운 일가이시언마는 조금치나 교만한 빛도 보이지 않으시고 그냥 이런 사람처럼 아무 흉허물 없이 그대로 놀으시겠지. 그리고 우리 집안일도 퍽 두굿기어 걱정해 주시나 봅디다. 예전에 삼 년 굴산 두산성을 쌓을적에 우리 아버지가 많으신 공로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퍽 많이 갸륵하다고 칭찬해 주십디다. 아무튼 그이는 퍽 좋은 어른이야. 아주 정든 동무같애. 점잖고 엄전하면서도 상가롭고 탐탐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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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는 요사이쯤은 그이가 오심즉도 하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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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어머니는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싸리문 밖에 나가 먼 산을 바라보는 걸 눈여겨 보셨오. 울 밖에서 개소리만 컹컹 나고 신발 소리만 잣짓해도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울렁거리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어떻든 나라에 일이 있어 아도 스님을 모시러 오는 길이 아니면 오실 수 없는 줄도 번연히 알면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또 꿈속에도 날구장천 이때나 오실까 저때나 오실까 애졸여 기다린다오. 나도 만일 사나이로 태어났더면 그 어른의 타신 말구증이라도 되어 말고뻐나 잡고 온 서울로 대궐 안으로 어디든지 그 어른 가시는 데까지 따라나 다녔으면 좋겠어. 만일 전장 같은 데라도 나아가서 그이의 몸 대신으로 내가 칼을 맞아 죽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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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원체 그런 말괄량이 계집애니깐 변덕 도섭이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차며) 미처 날뛰는구나 하면 또 금방 무슨 시름에 겨워서 눈갈이 퉁퉁 붓는 짓을 하고 아무튼 이제는 좀 색시꼴이 박이도록 안존해 버릇을 좀 해보아라.
 
87
사시    내가 왜 도섭스럽고 변덕스러워 졌을까요. 이 가슴에 아무것도 솟쳐 느껴지는 것만 없으면 이년도 저절로 얌전하고 안존해진답니다. 어젯밤에도 까닭없이 밤새도록 울었지.(부끄러운 듯 방긋 웃으며) 선머슴꾼들의 메나리 가락이 슬퍼서…⋯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상감님과 이차돈 한사님의 훌륭하고 좋은 이인줄 아니봅디다. 나는 실없는 노래가락에도 이차돈하고 기리는 높은 마디를 여러 번 들었어. “이차돈 이차돈”부르기 좋은 이름! 그밖에는 나는 또 무슨 소린지 아무것도 모르지.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나는 귀가 어두워서 도무지 몰라요. 아으 만일 이 좁은 가슴이 그렇게 울렁거리지만 않을 것 같으면 마음대로 한 번 그이의 이름을 소리쳐 실컷 불러나볼테야.
88
     망할 계집애. 툭하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저께도 아도 스님 앞에서 이차돈 한사님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니 그게 온 무슨 꼴이란 말이냐.
89
사시    무얼 그 때 이차돈 한사님이 오셔서 아도 스님을 모셔다 공주 아기씨의 병환을 고쳐드린 까닭에 상감님께서 주신 많은 보물을 스님께 받아다 우리에게 무슨 주셨으니깐 그렇지. 이 좋은 귀걸이도…⋯. 이것도 얼마나 좋은 보물이요. 이 넓은 서울서도 나밖에는 가진 이가 없을 터인데…⋯.
90
     대궐 안에도 없어. 아무튼 너는 아직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다.
91
사시    그래 스님 앞에서도 그 생각이 별안간 나서 이차돈 한사 도령님 하고 부른 것이지 무어요.
92
     오냐, 그래 잘했다.
 
93
(모는 앉아 졸고 사시는 콧노래를 부르며 쓸쓸하고 외롭게 엉킨 삼을 풀어 잇고 있다.)
 
 
 

3. 3장

 
95
천경림(天鏡林).
96
우편으로 아도화상의 주처(住處)인 초암(草庵)이 노삼창울(老杉蒼鬱)한 심림(深林)이 그윽한 속에 있다. 그리 높지 않은 토계(土階)에 형극(荊棘)과 잡초가 어웅하게 엉키었다. 거암과 괴석이 산재, 좌편에는 덤부사리를 껴 희미한 산경(山徑)이 통한다. 멀리 보이는 듯 연봉(蓮峯)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97
(초암(草庵)에는 아도와 모례와 행자 몇 사람이 앉아 있다.)
 
98
모례    인연이라는 것은 참말로 이상한 것입니다.
99
아도    그렇지. 지난 봄에 나의 지나는 발길이 너희 집에 머물러 하룻밤 드세인 신세를 짓지 않았던들 오늘날 이렇게 한솥에 밥을 같이 먹으며 지내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다.
100
모례    그만 해도 지난 봄일이 벌써 옛날 일같이 생각할수록 아득한 그림자만 어렴풋이 느끼여질 뿐이올시다. 저의 집이 있던 일선(一善)골 우속(于續)마을은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가는 큰 길 나들이가 되어서 나라에서 지킴을 굳게 하시고 곳곳마다 산성을 쌓아 가만히 들어오는 도적을 막으실 세, 부처님의 도를 이 나라에서는 엄금하는 법이 되어서 스님께서 그 때 저의 집에 오시기 바로 그 전에도 고구려 중 정방(正方)이란 지경(地境)을 넘어 서자마자 붙들리어 죽고 또 고대 멸구자(滅垢疵)라는 이가 들어왔다가 산채로 불에 태워버린 그러한 참혹하고도 무시무시한 때에 마침 스님께서 찾아들어오셔서…⋯ 그 때는 어찌도 겁만 나던지요. 더구나 스님께서는 몹시 파리하셨고…⋯. 그렇더니만 오늘은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한 땅을 얻어 있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생각하면 부처님의 도으심이 아니고 무엇이오릿가.
101
아도    그야 내가 들어와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이때껏 부처님의 큰 뜻을 보암직하게 널리 펴지도 못하였으니 그것이 매우 부끄럽기 그지없으며 답답한 일이로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에 깊은 인연이 있는 몸인 줄로 스스로 믿나니 내가 있을 때 마침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원표화상(元表和尙)이 오지 않았던들 어쩔 뻔하였으며 또 공주께옵서 병환이 계시다 곧 나으심도 진실로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옵신 덕이시며 이 나라의 큰복이었도다. 이제부터는 차차 더 좋은 인연도 많이 있겠지.
102
모례    거기에도 또 나이는 아직 젊으시나마 이차돈 한사님이 아니시면 누가있어 상감님의 거룩하신 뜻을 잘 받자와 이만한 일이나마 이룩할 수 있겠습니까.
103
아도    참 이차돈 한사님이 아까 오셨나 보더니 어디로 가셨느냐.
104
모례    아마 저 ─ 숲 속에서 풍월님네들을 만나서 놀고 계신가 봅니다.
105
아도    그러신가. 아무튼 이 나라에 부처님 도를 거룩하게 이룰 이는 그 어른 한 분뿐야.
106
모례    그렇지 않아도 아까의 말씀이 머리를 깎고 방포(方袍)를 입고 싶으시다고 그러시던데요.
107
아도    (한참을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저절로 그러한 때가 돌아올른지도 몰라.
 
108
(이차돈 등장)
 
109
아도    어디를 가셨다 오시오.
110
이차돈   저기서 젊은이들과 놀았습니다. 풍월줄 젊은이를 만나보면은 그 굳세인 뜻과 씩씩한 거동이 저절로 마음에 가득 차 가슴이 든든해져요.
111
아도    그렇습니까. 나는 예전부터 아무러한 것을 보아도 모두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던데…⋯.
112
이차돈   하기는 더러 그런 적도 있겠지요. 우리같이 아직 나이 젊은 몸으로도 답답한 일에 나 닥칠 때나 어려운 일을 다스릴 때에는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복받칠 때도 있으니까요.
113
아도    그렇지…⋯. 더구나 당신같이 그만 시절에는 든든한 일도 많고 쓸쓸한 일도 적지 않은 것이니까. (먼 산을 한참이나 건너다 보다가) 그런데 저쪽 산기슭에 부옇고 붉으스레한 아지랑이가 낀 듯한 저것은 무엇인고. 내 눈에는 무엇인지 그리 똑똑히 보이지도 않는데.
114
이차돈   그것이 아마 신나무인가 봅니다. 서리에 물들으신 나무요.
115
아도    응 신나무. 벌써 가을도 퍽 깊은 게로군. [小間(소간)] 하늘과 땅에 깊이 들은 가을빛을 우리처럼 구슬퍼 할 이도 아마 없을 것이야. 한사님 당신도 이런 것을 더러 느끼시는지.
116
이차돈   글쎄요 . 사나이는 본디부터, 가을을 쓸쓸히 본다 하니까.
117
아도    신나무의 붉은 빛도 이제 잠깐이겠지. [小間(소간)] 나는 그 동안 퍽 많이 여러해 해마다 봄꽃이 피었다 지며 가을 신나무가 붉었다 떨어지는 것을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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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스님께서 이러한 산으로 도를 닦으러 다니신지는 몇 해나 되었습니까.
119
아도    글쎄요…⋯.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뜨면서) 아마 퍽 오랜 예전부터이겠지요.
120
이차돈   그럼 젊으셔서부터 이러한 쓸쓸한 살림살이를…⋯ [小間(소간)] 그 동안에는 어느 산에 오래 많이 계셨습니까.
121
아도    그것도 이제는 다 ─ 이루 헤아릴 수도 없지요. 고구려 백제 또 이런 서울로 떠돌아다니기를 대중 없이 하였으니까 또 개골산(皆骨山)이나 삼일포(三日浦) 같은 데로 휘돌아다니며 날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퍽 오랜 시절을 보내었으니까.
122
이차돈   그러면 스님께서 처음에는 무슨 느낌이 계셔서 이렇게 불법(佛法)을 닦는 중이 되셨습니까.
123
아도    그것을 저도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세상 살림살이의 어리석은 꿈자리가 아마 나에게도 퍽 시달림을 주었던 것이지요. 시방은 오히려 아주 그 사막스럽던 꿈자리와 어깨겯기 동무가 되어서 날마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 셈이지 무척 익어져서…⋯. 예전에는 피가 쭐쭐 흐르는 듯한 현실에만 다 닥쳐 부닺기며 쪼들려지냈는데.
124
이차돈   우리가 그리 많지 못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더러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좀더 자세히 들리어 주실 수 없습니까.
125
아도    (침묵해 앉았다가) 아니 그 옛날 일을 시방 다시 휘둘쳐 끄집어 내어 말하기도 너무 계면쩍구려.
126
이차돈   그렇지만 저는 그 말씀을 좀 자세히 듣고만 싶은데요.
127
아도    (이차돈의 얼굴을 잠깐 넌지시 건너다 보다가) 왜 그 지겨운 꿈자리가 또 당신에게로…⋯. (잠깐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힘없이 내저으면서) 아니지요. 그것을 시방 당신에게 들리어 드리는 것은 당신의 몸으로 보아서도 매우 좋지 않으니까. 실없고 변변치 못한 나의 지나간 이야기는 그대로 듣지 말고 무덤 속 깊이 파묻어 내버려두지요. 다만 살려고만 바득바득 애를 쓰던 무겁에 쌓인 세상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그저 쓸쓸한 반생을 부처님께 바치고 지낼 뿐이지요.
128
이차돈   스님 저도 일생을 부처님께 바쳐 버린 생각이 있는대요. 오늘이라도 머리를 깎고…⋯.
129
아도    (무엇을 생각하다가 가여운 듯이) 아니요. 아니요. 당신의 몸은 그렇게 가볍게 쉽사리 바쳐버릴 몸이 아니요. 이제 더 거룩한 일에 거룩하게 바칠 때가 있을 터이니까. 그 때는 이 몸도 아 ─ 니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이 길이길이 당신의 공덕을 기리며 거룩한 스님으로 섬기여 모실 것이요.
130
이차돈   이 더럽고 미욱한 인간에게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131
아도    아니 그것을 시방 말할 수는 없소. 다만 그것은 부처님이 점지하시고 하늘이 맡기여 주시는 일이니까.
132
이차돈   그것이 참 말씀이십니까.
133
아도    아무렴, 참말이고 말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지는 말읍시다.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다른 번뇌가 생길른지도 모르니까. (방긋 웃으며) 이제 이 세상 다른 지나가는 이야기나 해보지요. 그래 요사이는.
134
이차돈   별로 재미스러운 일도 못 보았습니다. 그저 철을 따라 바뀌는 마음과 새로운 느낌이…⋯.
135
아도    그렇지요. 더구나 당신의 저만 시절에는…⋯. 나도 스물 남짓해서 좋은 산수로 휘돌아 다닐 적에…⋯ (한숨을 쉰다) 그 때는 시방처럼 풍월님네들도 없었지만 깊은 산에는 도 닦는 선인이 많이 있었더니다. 시방도 아무튼 그때의 일이 잊히지 않고 이따금 휘돌쳐 느끼어져요. 펄펄 뛰는 젊음이의 몸으로 들뜬 마음 부닺기는 가슴 즐거운 일도 많았고 애졸이는 일도 많았으니깐 고요한 숲 속에서 밤을 새워 몸별을 쳐다보며 먼 장래를 꿈꾸어 볼 일도 있었었오. 티끌 밖 구름 속에 죽지 않는 약을 찾아 헤매였음은 무릇 몇차례였던가. 높은 산마루에 올라서서 눈 아래의 온 땅을 내리굽어 깔보기도 하였어요. 괴로움 많은 이 누리를 어찌하면 건져 볼까 근심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였오.
136
이차돈   그러지만 스님께서도 젊어서는 우리와 같이 밝수의 도를 닦으셨습니까.
137
아도    그런 일도 있었지요. 젊었을 적에는 부질없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박이다 박이다 못하여 그 답답한 넋을 혼자 거두어 뭉치며 이 가슴 속에 깊이 파묻어 버리었소. 식은 피가 빛 없이 흐르는 무덤을 삼아서…⋯.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세상을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을 듯하여 나는 그 땅에서 그 곳에서 외롭게 지내는 법을 찾아내인 셈이요. 쓸쓸함을 얻은 셈이요. 나 혼자만 느끼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으니깐…⋯. 인생의 그리운 것과 쓸쓸하다는 것을 한 데 묶어서 지니고 있기에 혼자 몹시 괴로웠던 것이지요.
138
이차돈   스님 나도 요사이에 가끔 가슴에 사무쳐 뻗치는 무엇을 느끼는데 그것이 아마나 스님께서 겪으셨다는 그 쓸쓸할 것이 아닐런지요. 어떤 때는 무엇이 씌운 듯 무엇에 붙들린 듯 얼이 빠져 우두머니 앉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두 볼을 적시기도 합니다.
139
아도    그렇기도 할 터이지요. 더구나 당신은 피가 많고 느낌이 빠르실 터 이니깐.
140
이차돈   그러나 젊음이로서는 너무 그러는 것이 사위스러운 일이 아니오릿가.
141
아도    무얼요. 이 세상은 근본이 쓸쓸한 것이니깐. 쓸쓸한 땅에 쓸쓸함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의 그 시름은 때를 따라서 더러 나올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의 그 시름은 때를 따라서 더러 나올 수 있는 시름이니까 그리 슬퍼할 것도 없지마는 나처럼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고쳐볼 수 없는 이 시름은 사람의 하는 수없는 운명으로서 가지고 온 시름이니까 당신도 일생이라는 것을 다 겪어본 뒤가 아니면 아마 그것을 모를 것이야. 무덤으로 가는 길섶에서 죽음과 삶의 지름길을 못찾아 헤매이며 그러한 시름을 겪어 보지 않으면…⋯.
142
이차돈   스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그것을 겪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143
아도    그것은 나도 아직 모르지요. 그러나 곧 알 수도 있어…⋯. 이 나라 지경을 들어오면서부터도 죽음의 고개를 네다섯 번이나 넘어 왔고 또 본디 죽음이라는 그것을 짊어지고 여기를 들어왔으니깐. 시방도 아마 내가 저승길의 어느 한 구비를 넘어가는 것이나 아닌지도 모르지요.
144
이차돈   만일 죽음이 닥쳐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45
아도    죽음은 죽음 그대로 깨달어버리는 일이 옳은 일이죠. 죽음이 반드시 한번은 꼭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깐…⋯. 다만 그 자리에서도 괴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또 허덕거리거나 겁할 것도 없이 한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거기에서 남을 원망하거나 또 자기의 몸을 속이지도 말고 크고도 거룩한 소원대로 충실히 붙좇아 가기만 하면 아무러한 허물도 없을 것이요. 그것이 아마 부처님께옵서 가르치시옵신 큰 뜻도 되오리다.
146
이차돈   스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오나 무엇인지 뜨거웁게 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힘을 느끼겠습니다.
147
아도    네 ─ 당신의 마음에는 한 줄기에 굵고도 엉기인 핏줄이 있소이다. 나는 벌써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어요. 아무쪼록 그것을 헐지 말며 잘 ─ 간직해두시오. 그리고 운명이라는 큰 길을 곧게 가도록 힘을 쓰시요. 사람의 지혜란 곧 운명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깐…⋯.
148
이차돈   이르신 말씀은 가슴 속에 깊이 삭여 두어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149
(저녁 쇠북이 운다)
150
(사시 향연(香烟)을 들고 천천히 등장 정례(頂禮))
 
151
설옹금교동불개 계림춘색미전회(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152
가령청제다재사 선착모랑택리매(可怜靑帝多才思 先着毛郞宅裡梅)
【원문】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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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