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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젖 ◈
◇ 제4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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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9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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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 젖
2
〈제4막〉
 
 
 

1. 1장

 
4
초추(初秋) 어느 날.
5
이차돈의 거처.
6
정면에서 좌편까지는 사랑 대청(舍廊大廳) 누(樓)마루. 뒤에는 동산, 우편은 화단, 화단을 꿰뚫어 통로.
7
(누마루 위에는 이차돈과 거칠부가 앉았다.)
 
 
8
이차돈   중전마마께옵서 하치 않은 이 몸을 그처럼 하념(下念)하옵신다 하니 도리어 황송하옵기 그지없네. 그러나 이 몸은 불행히 그렇게 편안한 자리에서 복스러웁고 즐거운 살림살이를 하고 있지는 못할 것일세. 나는 시방 위태스러운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길일세. 자칫하면 떨어져 주는 외나무다리를 일부러 건너고 있어……. 다리 건너 저쪽에는 불쌍한 동무들이 부르짖고 있으니까 나는 내 힘과 희망과 용맹이 닿는 데까지는 부지런히 또 바삐 그 다리를 건너가야만 되겠지.
9
거칠부   그렇지만 나라 일을 자네 혼자만은 못할 것이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야 할 것인데 보아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은 자네에게 그리 붙쫓지 않는 것 같고 더구나 상감마마께옵서는 천성이 인약(仁弱)하셔서 과단(果斷)하지 못하시고 주저하시는 일이 하도 많은데 자네 혼자 그렇게 날뛰기만 하면 무얼 하나.
10
이차돈   그럼 이 나라의 어려운 일을 맡은 이 몸으로써 이 몸이 나아가 일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나.
11
거칠부   아닐세. 시방이 어떠한 때인가. 더구나 자네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자네의 일이면 모두 쫓아다니며 희살을 놓으려 드는 이가 있지 아니한가. 그럼 또 자네는 자네의 손으로 무덤구덩이를 파고 있는 짓만 하니……. 그래서 중전마마께옵서도 그것을 염려하심이 아닌가. 자네의 몸을 위하여 또 당신 따님의 장래를 위하여…….
12
이차돈   그러나 우리의 목숨을 결단코 우리의 것만이 아니니까. 수많은 여러사람을 위하여서는 이 몸을 버리는 것이라도 좋지. 제가 스스로 깨달아 아는 길은 서슴지 않고 더벅더벅 걸어나아갈 것이 아닌가.
13
거칠부   하지만 사람으로서 번연히 죽는 곳인 줄도 알면서 잠깐만 피하면 살 수 있는 것을 일부러 그곳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간다 하면 그것을 그리 현명하고 용감스러운 짓이라고 이를 수도 없겠지.
14
이차돈   그야 그것을 누가 현명한 짓이라고야 이르겠나마는 나는 나의 눈 앞에 오도가도 못하는 낭떠러지를 보고 있네. 그리고 그 낭떠러지 밑에서는 수많은 생령(生靈)이 손을 들어 부르짖으며 내가 얼른 내려가서 붙들어 올리기만 기다리고……. 더구나 상감마마의 망극하옵신 성은이 무거웁게 뒷덜미를 내려누름에 이겠나.
15
거칠부   자네는 그렇게 성은을 일컬어 말씀하지마는 나는 첫째로 황송한 말씀이지마는 상감마마께옵서 요사이 처분하시는 일이 모두 무슨 뜻으로 어찌하심인지 의심하기를 마지 않네.
16
이차돈   천만에……. 우리의 입으로 그러한 소리를 어찌 함부로 하겠나. 자네나 내나 다 ─ 같이 신자(臣子)의 몸으로 더구나 우리 임금님께옵서…….
17
거칠부   그야 아무 나라 임금이라도 언짢은 짓을 일부러 하려 들지는 아니 하겠지. 그러나 임금님으로서 착한 신하들을 애써 어려운 곳에만 몰아넣어 둔다면.
18
이차돈   나는 용기만 있으면 죽을 땅이라도 가기를 그리 사양치 않겠네.
19
거칠부   자네는 내가 하는 말에 골이 났나.
20
이차돈   골 나고 말고도 없네. 나는 나의 일을 나의 뜻대로만 행할 뿐이니까.
21
거칠부   내 마음 같아서는 제발 이번 일은 자네의 뜻대로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아무튼 모든 일을 돌보아서도 자네의 몸을 고이 갖도록 하게. (일어서며) 그러면 나는 이대로 들어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중전마마께 여쭙겠네. 아마 매우 자네의 일을 근심하시며 기다리실 터이니까……. 따로이 여쭐 말씀은 없나.
22
이차돈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아무 말씀도 없네. 다만 이 이차돈이는 상감마마의 거룩하옵신 분부를 받자와 여러 사람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을 결단하였다고 그 한 말씀만 잘 여쭈어주게.
23
거칠부   (이차돈의 손을 힘있게 잡으며) 그래 자네는 나의 충고(忠告)를 아니 중전마마의 간절하옵신 분부를 참으로 들어줄 수 없나.
24
이차돈   이 사람 자네는 왜 이리 눈물은?
25
거칠부   (목이 메어서) 내가 친구로서 자네에게 이 안타까운 충고도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나 아닐까 하는…….
26
이차돈   (일부러 웃으며) 온 별 일도 다 ─.
27
거칠부   자네 요사이 알공의 마음이 어쩐 줄을 아나?
28
거칠부   그따위 일은 일부러 알고 싶지도 아니하이.
29
거칠부   아무튼 이따 저녁에라도 또 만나세.
 
30
(거칠부 퇴장)
 
31
이차돈   (홀로 우두커니 섰다가) 이상한 일이다. 그의 말이 야릇하게도 마디마다…… 나의 가슴을 찌르르 하게 찌르는 듯하구나. (오뇌가 심한 듯) 이래야 좋을까 저래야 좋을까. 한 사람에게 붙들리어 있는 호화스러운 죄수가 될까 여러 사람을 건네어주는 구찬한 뱃사공이 될까.(동안을 떼어 고개를 힘없이 내저으며) 아니 그럴 수가 있나. 그러한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어찌하여서 나는 내 뜻대로 행하기를 그리 주저하게 되나. 내 마음 속에 거짓이 있었던가. 내가 똑똑히 보았던 그 진리가 봄아지랑이처럼 헛되어 어리인 다만 한 마당의 옅은 꿈자리뿐이었던가 . 아니다. 그러할 리도 없다. 나는 분명히 한 훌륭한 영체(靈體)를 붙잡아 보았다. 그러면 이따금 마음의 성 안으로 번개가 치튀어 나닿는 그 황금빛의 번쩍거리는 꼭두각시는 어쩐 일인고, 삶이냐 죽음이냐. 어허 자비하옵신 검의 힘이여. 이 어려운 길을 가리여 주옵소서. 나의 갈 만한 길을 터놓아 주옵소서.(잠깐 무슨 생각에 고개를 숙이었다가 다시 들며) 그게 다 ─ 무엇이냐. 그따위 것으로 나를 놀리어. 흥 내가 그렇게 못난 천치인가.(주먹을 힘있게 쥐며) 그냥 하여버리자. 그따위 것은 내가 돌아볼 겨를도 없어. (무슨 공포에 쌓이는 듯)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 나라 따위 독한 안개를 뿜어놓으려고……(잠깐 동안을 띄어 목메인 어조로)아니다. 그것은 몹쓸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고 어찌하랴.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상감마마께옵서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옵셨고 또 나도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인 그밖에 다른 말이 왜 있으랴.(결심한 듯이)하자. 그대로 하자. 중전마마의 아끼어 주시는 마음보다도 상감마마의 일부러 떼치시려는 그 깊고도 거룩한 뜻을 받들어 드리자.(뒷짐을 지고 몇 걸음 왔다갔다 한다.)
 
 
 

2. 2장

 
33
팔월 초하룻날 저녁 때.
34
관아(官衙), 사정부령(司正府令)의 처소.
35
전면이 대청(大廳), 대청 앞은 뜰, 뜰 아래 좌우편은 행랑이 있을 듯, 숙엄한 관가(官家).
36
(청 위에는 위화부령(位和府令) 철부(哲夫)와 사정부령(司正府令) 알공(謁恭)이 마주 않았다. 뜰에는 부리(府吏) 몇 사람이 시립(侍立). 뜰 아래 ○○○ 마당에는 부리(府吏) 한두 사람이 바쁘게 왔다갔다 한다. 무슨 큰 일이 있은 듯.)
 
 
37
철부    자네의 벼슬이 이제 사정부령으로 올랐으니 위가 높을수록 몸과 마음을 조심하여 상감마마의 거룩하옵신 은덕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일세.
38
알공    (근심에 쌓인 얼굴로) 벼슬이 높아 기쁜 것보다도 이 몸이 법을 맡은 관원이 되오매 어지러웁고 처리하기 어려운 이 나라 모든 일을 생각하오면 조바심하듯 하는 마음이 가라앉을 겨를이 없소이다. 이 내 마음을 가다듬어 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사오매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은 모두 사철 그 시늉이 싫음이 올 뿐더러 더구나 외국에서 들어오는 중놈들은 날마다 버릇없는 짓만 점점 늘어서 이 나라의 거룩한 신단을 무너버리랴 도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꼬드기어 그것을 속이고 놀아나게 합니다. 그려. 멋도 모르는 백성들은 공연히 미친 듯이 손에 손목을 서로 이끌고 떼로 몰리어 다니면서 서낭당을 부시고 검줄을 끊어버리고 짐때를 쓰러뜨리고 거룩한 성단에는 똥오줌을 함부로 깔기려 들거늘 도리어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맞아 들이려고만 합니다그려. 어허 이 몸은 그것을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쳐져서. (일부러 몸서리를 친다)
39
철부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자꾸 불법을 순을 치고 망기질러 없애라고만드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불법은 거룩하고 또 새로운 도라고 이르니 한때 바삐 반가이 맞아들이여 절도 지어주고 백성들 마음대로 믿음을 터놓아 주면은 백성들은 울근불근 원망하여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요 도리어 든든한 마음에 온건만 해질 것이 아닌가. 질래 그렇게 자네의 심술과 고집 그대로만 하다가는 백성을 들레이고 나라를 어지러히 하는 것뿐일 것일세.
40
알공    그렇지마는 사도(邪道)에 빠져서 미쳐 날뛰는 이 나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두들켜 누르지 않고 어찌 하오릿가.
41
철부    그러나 태평한 성대를 이루려하다가 도리이 인심을 소동시키며 이 나라땅 방방곡곡 어디든지 이르는 곳마다 불법이 있는 곳이면 함부로 병화를 번뜩이며 병장기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려 드는가. 시방 벌써 이나라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감마마께옵서나 대궐 안팎까지도 모두 그리로 마음이 돌아 쏠리옵신 모양이던데 쓸데없이 자네만 그리 완악히 고집만 세우다가는 그것이 무엇이 될꼬.
42
(하늘을 우러러) 어 ─ 거룩한 검님이여. 철없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주옵소서. 저희끼리 서로 뻗서고 시새우고 옥갈리는 이보다 차라리 밝게 나라를 다스리는 명관이 되도록 해주옵소서.
43
알공    (철부를 붙들어 만류하며) 너무 이렇게 저만을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사람이올시다.
44
철부    (울듯이 목이 메어서) 내가 자네를 일부러 무어 헐어 말하랴는 것은 아닐세.
45
알공    그야 저도 이찬 어른의 갸륵하신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올시다. 당신의 나라에 충의로운 정성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성과 마음을 가진 현명한 사나이도 시방 이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제일 좋은 방침을 모두 부서뜨리려고 만드니까……. 그것을 칭찬해주는 이가 있을는지도 모르지요마는 이 몸으로서는 단속을 해주지 않으면 못살겠으니까요. 요사이도 이차돈 한사의 조심없는 일을 보면 너무도 섭섭만 해보입디다. 일상과 같이 어제도 대궐 안에서 함께 나올 적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보고 염불을 하며 날뛰겠지요. 그 광경을 보는 나는 기가 막히다 못해 눈물이 다 쏟아졌어요. 그래 한사를 보면서 그대가 공주의 병환에 중을 불러 들인 까닭으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으니까 그이의 대답 좀 보셔요. 아주 귀치 않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듯이 눈살을 찌프리며 이제는 저 백성들은 아무쪼록 부처님의 거룩한 법으로 인도를 해야 되리라고 한 마디 퉁명스럽게 해버리겠지요.
46
철부    (손으로 무릎을 치며) 옳 ─ 아 참. 그러려니 옳은 말이야. 그것이 정말 착하고 슬기있는 이의 솔직한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정말로 그것이 좋은 말이지. 나라의 태평을 도모하고 백성의 넋을 건져주기에 힘을 쓰지는 않고 다만 물욕과 권세에만 눈이 어두워서 저의 사복만 채우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배짱에서야 그렇게 훌륭한 말이 한 마디나 나올 리가 있겠나.(알공의 참괴고민(慚愧苦憫)하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시방이 나라의 묵은 도인들 잃은 밝수들은 더운 옷에 배불리 먹고 호강만 하기에 얼이 빠져 무슨 그리 백성을 근심하는 정성이 조금인들 있겠나. 다만 부른 배때기에 기름만 써서 유들스럽기만 하지. 그래도 시방 이 나라를 건져내랴 애를 쓰고 다니는 이들은 딴 나라에서 새로이 들어온 중들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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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공    그러면 이찬 어른께서도 중놈들을 두둔하십니다그려.
48
철부    아니지. 그런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을 말할 뿐일세.
49
알공    이찬 어른께서마저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이 몸은 시방으로라도 쓰지 못하는 법관의 직분을 내어버리는 수밖에 없지요. 더구나 이차돈 같은 이는 가까운 성골로 또 장래에는 공주 아가씨의 남편이 되실 이요 국민의 신망이 시방 한창 그 일신(一身)에만 들이 쪼아 누구나 다 ─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 모양이니까…….
50
철부    (엄연한 어조로) 눈으로 보아서 시방 조정에서 있는 신하들 중에 그처럼 충성되고 의기 있는 사나이는 그 한 사람밖에 없을 줄로 아네.
51
알공    그야 상감마마께옵서 아끼며 사랑하옵시는 근관(近官)으로 대궐 안의 은총을 저 몸에만 받아 휘감고 있으니까 무엇으로 보든지 그러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그 대신 자기 몸에는 아무러한 소독도 없는 것만을 일부러 자꾸 하니 그것이 큰 탈이 아닙니까.
52
철부    그것이 그의 칭찬할 만한 충의로운 기질이란 말이지 무엇인가.
53
알공    무어 그렇기만 하면 오히려 좋게요. 시방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도 이롭지 못하고 자기에게도 또한 이롭지 못한 짓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또 우리에게 이롭고 실(實)다운 큰 일에도 모두 기롱지거리 웃음소리로 만들어버리니 우리는 그렇게 실없는 이하고는 한 자리에 앉았기도 싫으니까.
54
철부    나 보기에는 그의 하는 모든 일이 다 ─ 자기의 참 마음으로 말하는 것같던데.
55
알공    옳지요. 그 참 마음이라고 떠드는 그것이 곧 녹두밭에 정업이처럼 사람의 눈에는 잘 띄일 만한 훌륭한 깃발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남의 눈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그러나 그의 태도는 너무나 사람들을 모두 깔보는 것같지 않습니까. 시방 우리도 정다웁게 지내는 듯하기는 하지마는 그것이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이 조정에서 잡아내리어 내쫓으려고 드는 음흉한 수단이나 아닐른지 누가 압니까.
56
철부    하느님 맙소사. 여보게 그런 몹쓸 소리는 아 ─ 예 입에도 올리지도 말게. 어허 그 사람에게 어찌 그런 말이 될 뻔이나 한 소리인가. 도리어 자네의 그 모질은 소리야말로 정말 자네에게도 또 그 사람에게도 조금도 이롭지 못할 것일세.
57
알공    그러나 이 몸이 일부러 그를 모함하거나 방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얼마 아니 있어서 곧 하는 수 없이 그러한 몹쓸 일이 생길 줄로 믿으니까요. 이 몸은 그가 어떠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감님의 근시(近侍)하는 신하이니까 요사이도 무슨 일을 또 꼬두기어 여쭈어 무슨 짓을 끄집어 일으킬른지 누가 압니까.
58
여보시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요사이로 중놈들이 버쩍 기세를 부리는 것도 모두 그의 허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접때 아도 중을 불러들이어 공주의 병을 고친 까닭이 아니오니까. 이 몸이 까닭없이 남의 일을 헐어 말하려는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아무튼지 제가 지나 내가 지나 저도 가다가 가다가 막마침으로 어느 막다른 곳에서 내 손에 경을 좀 쳐볼 때도 있을 터이지요.
59
철부    벌떡 일어서며 (손을 내젓고) 어허 무서운 소리. 어허 독한 내를 품기는 무서운 소리. 그러한 소리를 나는 더 듣지 않겠네. (허둥지둥 퇴장)
 
60
(부리(府吏) 1인 급한 걸음으로 등장)
 
61
알공    잘 조사해보았느냐.
62
부리    (굽실하며) 네 ─ 자세자세 염탕하였사옵니다. 오늘부터 천경림에다 큰 절을 이룩하옵시는데 동독(董督)은 이차돈 한사께옵서 하옵시며 상감마마께옵서 시키시와 나라의 천량을 대어 짓는다 하옵더이다.
63
알공    (한참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럼 너는 시방으로 곧 이방부령(理方府令)을 잠깐 여쭈어 오너라. 조용히 의논할 말이 있으니…….
64
부리    (굽실하며) 이방부의 공목급찬(工目級湌) 말씀입니까.
65
알공    그래.
66
부리    (머리를 긁적이며) 이방부 거기는 어찌도 무섭사온지요. 문간에 걸어 놓은 싯뻘건 오랏줄만 보아도…….
67
알공    어 ─ 고약한지고 무슨 주둥이를 그리 놀리고 섰노.
 
68
(부리 비실비실 퇴장)
 
69
알공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암만 해도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일어서며) 그렇다. 이제는 없애버릴 수가 있는 때가 돌아왔다. 상감마마께서는 그 천성이 이번에도 또 모든 일을 이차돈에게만 미루어 버리실 터이니까…… 어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늘이 시키시는 일이로군. (매우 유쾌한 듯이 한 번 소리쳐 웃는다.)
 
 
 

3. 3장

 
71
대전(大殿)
72
전면이 장엄 광대한 전각(殿閣).
73
(정면 중앙 용상에는 법흥대왕이 앉았고 문무백관이 위의 있게 왕을 시위해 있다)
 
 
74
알공    폐하께옵서는 도무지 모르옵시는 일이오면 이차돈 호올로 어명을 거짓꾸미어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짓을 함부로 저질로 놓았사오니 저를 어찌하면 좋사오릿고.
75
예작부령  근자에는 풍년도 그리 들지 못하였사오매 하늘만 쳐다보옵고 살던 백성들이 모두 유리걸식할 지경이오며 더구나 이웃나라 군사가 지경 안을 침범해 노략질하오매 군사들이 병장기 쓰기에도 쉬일 겨를이 없사옵거늘 무슨 일로 애매하고 파리한 백성들을 부리어 쓸데없는 절집을 일부러 수고로이 짓게사오릿고.
76
조부령   국고에는 천량이 떨어져 다 ─ 하였사오니 무엇으로 절을 짓겠사오릿고.
77
공목    이차돈은 회군능상(悔君凌上)하옵고 어명을 위조한 대역죄인이오니 시방으로 곧 금부(金府)에 내려 죄대로 다스리겠나이다.
78
     (번뇌에 쌓여 침묵)
79
알공    만일 이차돈의 죄를 밝혀 다스리지 못하오면 소신이 먼저 법관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죄로 목을 버혀 바치겠나이다.
80
공목    황송하오나 이차돈에게는 폐하의 은총이 너무도 크셨사와 이러한 변고가 일어난가 하옵나이다.
81
     (침통한 어조로) 이번 일은 모두 나의 허물이다.
82
알공    그러하오면 이차돈에게라도 다 있는 것이지.
83
     그만한 허물은 아무에게라도 다 있는 것이지.
84
알공    아니로소이다. 이 나라의 밝은 도를 무너뜨리려 드옵고 또한 어명을 거짓 꾸미어 도량방자한 짓을 함부로 한 그 대역범죄가 어찌 아무에게나 다 ─ 있는 것이라 이르겠사오릿고, 만일에 소신의 사뢰온 말씀이 망년된 게 있사오면 시방으로라도 이 혀를 빼어버리는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85
     (고민만 할 뿐 침묵)
86
공목    그러하오면 저 알공을 망녕된 말을 한 죄로 곧 다스리오릿가.
87
     (천천한 어조로) 아니다. 알공은 저 맡은 직분에 충실한 사람인 줄로 내가안다.
88
공목    그러하오면 이차돈의 죄는 곧 다스리어도 좋겠사오릿가.
89
알공    그거야 으례히…….
90
     안 된다. 이차돈에게도 죄를 줄 수는 없다.
 
91
(중신은 어이가 없는 듯 어안이 벙벙해 왕의 얼굴만 쳐다본다. 왕은 몹시 고민. 갑사(甲士)의 복장을 한 이방부리 4인은 이차돈을 죄인으로 오라를 지어 가지고 등장. 왕과 이차돈 무언히 눈물 어리인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로 한참이나 건너다 보다가 서로 묵연히 고개를 숙인다. 서로 몹시 고민에 쌓인 듯. 이방부리 이차돈을 뜰 아래에 꿇리어 놓는다.)
 
92
알공    너는 폐하의 은총을 가장 두터웁게 입은 근신(近臣)의 몸으로 무엇이 부족하여 감히 어명까지 위조하는 대역의 죄를 범하였는가.
93
이차돈   (놀라운 듯 고개를 들어 대왕의 얼굴을 한 번 이윽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힘없이 숙인다)
94
공목    너는 죽을 죄를 지은 줄 아느냐.
95
알공    어째 말이 없는고. 들으니 천경림에다 큰 절을 이룩한다고 하더니 그동안에 벌써 성불(成佛)을 하였느냐.
96
이방부리들  (거친 목소리로) 빨리 아뢰어라.
97
알공    너무도 어마어마하게 크낙한 죄를 지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느냐.
98
이차돈   (무거웁고 천천한 어조로) 너희들이 그 따위 소리를 하려고 일부러 나를 여기에까지 잡어들이어 이렇게 지겨웁고도 황송한 꼴을 상감마마 앞에 보려 드리려 하느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
99
알공    그밖에 다른 말은 또 없느냐.
100
이차돈   없다. 이것도 상감마마께옵서 시키옵시는 일이라 하면 내 직분은 그것을 다 ─ 받들어 행할 뿐이니 이제는 내 발 앞에 죽음만 있어 기다릴 뿐이다.
101
공목    (이방부리를 보고) 그러면 곧 금부로 내려가두라.
102
(이방부리 이차돈을 이끌고 천천히 걷는다. 대왕은 몹시 고민, 전각(殿閣) 내외가 모두 침울한 빛.)
【원문】제4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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