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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정고 장편(未定稿 長篇)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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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2
나도향
1
미정고 장편(유고)
2
2
 
 
3
창선은 주영을 기숙사까지 내려다 주고 자기 여관으로 향하여 간다. 남대문통을 걸어올 때는 그는 다시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냈다가 꾸깃구깃하여 한 손에 들 적에는 지금까지 잊어버렸던 뒤숭숭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4
그는 조선은행을 지나놓고 전기불 드물고 쓸쓸한 식산은행 앞을 걸어올 때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어색한 감정이 가슴을 눌러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높다란 하늘까지 위에서 자기를 누르는 듯하였다.
 
5
달이 땅에 비쳐서 자기의 시꺼먼 그림자가 뒤를 따라오는 것까지 咀呪(저주)의 亡靈(망령)이 어느 틈에 모르는 사이에 따라오는 것 같았다.
 
6
최후의 선고를 받은 자에게는 희망도 없고 광명도 없고 요행까지도 없는 것 이다.
 
7
자기는 아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는 갈 수가 없다. 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옳은 일이라 하면 가지 않는 것이 창선에게는 진리요 생명이다.
 
8
집에를 가면 사랑하는 주영이도 버리고 자기의 이상하던 모든 것을 헌신짝 같이 버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종이 되어 땅 속의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송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9
그렇지 않고 여기에 있어보자. 세상은 자기에게 보수없는 밥을 줄 리가 없다. 추운 밤에 잘 곳을 줄 리가 없다. 목마를 때 물, 피곤할 때 자리. 이것이 어찌 세상에 흔하고 우스운 것이 아니랴마는 흔하고 우스운, 그러니만치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진리를 주는 것이다.
 
10
먹기는 어떻게 먹으랴 살기는 어떻게 살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잊었던 기억 속에서 무서운 번민거리를 찾아내었다.
 
11
주영의 뱃속에 들어 있는 어린애는 어찌하랴.
 
12
그는 거기와서 앞길이 딱 막혔다. 그는 걸어가던 길을 멈칫하고 섰다가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므로 다시 발길을 내놓았다.
 
13
그는 아무러한 결정과 斷案(단안)을 내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 그는 어두운 굴 속을 더듬어 들어가는 것 같이 한 줄의 광명도 없었다.
 
14
불 같은 정열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한 그만한 비례의 현실적 압박이 있으니 미적지근한 정열을 가진 이들이 당하는 현실적 압박의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을 그는 당하는 것이다. 그의 고통이 그렇게 크니 만큼 아픔이 심하면 심한 만치 안락을 구하는 힘이 굳셀 것이다.
 
15
창선의 번민과 고통은 컸다. 그는 자기의 몸을 사를 듯한 열정을 가진 대신에 현실의 압박과 싸우는 힘은 더 컸다.
 
16
그는 다시 아버지 어머니를 둘러싼 고향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주영이를 생각하고 어린애를 생각하여 보았다.
 
17
그는 그 모든 것을 넣어서 공상을 시작하였을 때 그에게는 행복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공상이라는 자기 희열에서 깨고 차디찬 현실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만 답답함과 갑갑함이 있을 따름이다.
 
18
그는 집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머리가 산란하고 속이 답답하여 종로로 해서 광화문통을 돌아 중학다리를 돌기로 하였다.
 
19
발에 익은 길이라 어느 틈에 온지 모르게 광화문까지 오다가 그는 갑자기 무엇에 도취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라왔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부쳐 준 돈을 생각하였다.
 
20
그는 돈이 귀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 돈이 자기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결정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또는 아버지의 주신 것은 주신 것이지마는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것인 것을 생각할 때에 그는 분한 생각까지 났다.
 
21
『이까짓 돈은 있거나 없거나 산다.』
 
22
그는 주먹을 쥐고 결심한 듯이 공중을 항하여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까 세검정에서 얼마간 쓰고 남은 돈을 만져보았다. 그는 다시 그 돈을 찢어 버리고 싶기까지 하였다.
 
23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휘적휘적 사직골 맞은 골목을 돌아서려 할 때 그의 앞을 딱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24
『어디 갔다 오나?』
 
25
창선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자기 앞에는 申泰浩(신태호)가 서 있었다. 그는 가느스름한 눈에 상냥한 웃음을 상글상글 나타내면서,
 
26
『오래간만일세그려』
 
27
하고 창선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는다.
 
28
창선은 신태호를 만나면 언제든지 다정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끌려 버리므로 그도 따라서 태호의 손을 잡았다.
 
29
『이거 얼마만인가. 왜 그렇게 한 번도 놀러오지를 않아.』
 
30
『나 역시 공연히 바쁘니까 그렇지. 회사인지 빌어먹을 데 다니느라고 눈코뜰 새가 있어야지. 월급 몇 푼이 사람 죽이네.』
 
31
이 사람은 학교 재학 당시에는 자기 년급중에 어학의 재조와 작문을 제일 잘하므로 장래의 문학자나 문사가 된다고 대 기염을 토하며 학교에서 학생끼리 만드는 잡지도 자기가 편집을 맡아하고 연설 같은 것을 할 때에도 옛날 옛적의 문호 이름이나 그들의 警句(경구)를 섞어가며 그럴듯하게 늘어 놓아 일반 학생들과 선생들이 장래를 촉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도 그 방면으로 나아가기를 맹세까지 하여온 청년이다.
 
32
꽃밭에 놀던 나비들이 첫서리를 맞고서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밑에서 서로 만난 듯이 옛일을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하니 몇 달 되지 않은 사이지마는 세상의 변천과 또는 자기네 내면생활의 변화는 말할 수 없는 감회를 일으킬 뿐이다.
 
33
창선은 그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면서,
 
34
『대관절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35
하니까 그는,
 
36
『별로 정한 곳이 어디 있나? 심심하니까 저녁 먹고 나선 셈이지』
 
37
하고 땅을 내려다 보았다.
 
38
『그럼 마침 잘 되었네. 오래간만이니 나하고 산보나 좀 해보지 않으려나?』
 
39
『그러세그려. 나 역시 혼자 다니기는 너무 심심한데.』
 
40
두사람은 중학다리를 건너서 안동으로 나섰다.
 
41
창선은 안동 네거리에서 방향을 정하려는 듯이 머뭇머뭇하더니,
 
42
『우리 어디 가서 저녁 한 그릇 먹어보세』
 
43
하며 태호의 의견을 묻는다.
 
44
『저녁? 저녁은 시방 곧 먹고 나오는 길인데. 자네는 여태까지 안 먹었나?』
 
45
『먹기는 먹었으나 좀 일찍 먹었기 때문에 시장하여졌어. 어떻든 가보세그려.』
 
46
창선은 전동 큰길로 내려오다가 어떤 청요릿집을 향하여 들어간다. 태호도 따라 들어갔다.
 
47
창선은 자리를 정한 후에,
 
48
『여보게, 자네 술 한 잔 먹지 않으려나?』
 
49
하고 태호를 보았다. 태호는 먼저 웃기만 하다가,
 
50
『술? 어디 술 먹을 줄 아나?』
 
51
하는 것이 먹고 싶은 모양이다. 창선은 다시 물어보지도 않고 술을 청하였다.
 
52
술이 들어와 놓이고 안주가 들어와 놓이었다. 많이 먹어보지 못한 청국술 독한 냄새가 일종의 상긋한 알콜 향기를 내면서 독한 냄새로 코를 찌른다.
 
53
창선은 술을 태호에게 한 잔 따른 뒤에 자기의 잔에 부었다.
 
54
마치 먹어도 해롭지 않은 약을 마시는 듯이 창선은 먼저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뒤에 태호에게 잔을 전하였다. 이것은 어린애들이 소꿉장난을 할 때 빨간 벽돌을 물에 타서 소주라고 하고서 콧잔등에 붓고서 에헴 하고 수염 쓰다듬는 시늉을 하는 데서 조금 진보된 놀음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다.
 
55
『들게』
 
56
창선은 태호를 보며 권하였다.
 
57
『자네는 소문 들으니까 大酒豪(대주호)가 되었다네그려.』
 
58
창선은 다시 한번 태호를 보았다.
 
59
『무얼 어디 몇 잔 하나. 더구나 이런 술은 독해서…』
 
60
『독하긴 무에 독해. 이런 길로 다섯은 할 걸?』
 
61
하고 창선이 옆에 있는 술병을 가리키니까 태호는 고개를 내흔들며,
 
62
『여보게 큰일날 소리 말게. 이것 둘은 먹으라면 먹지. 그러나 그 이튿날은 죽어나는 거…』
 
63
『대관절 자네는 술을 어디서 그렇게 배웠나?』
 
64
『술 배운 것 말인가?』
 
65
『그래』
 
66
창선은 태호의 말을 받고 또 잔을 들며 눈짓과 손짓으로 술들기를 청하였다. 두사람은 일시에 한 잔씩을 들었다. 술은 혓바닥에 닿지 않고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치 쓰디쓴 약을 마시는 것 같았다. 맛도 보지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고 그대로 잔을 놓으면서,
 
67
『커어』
 
68
하여 입맛들을 다셨다. 그들은 술맛을 몰랐다. 어른들이 하니까 나도 해본다는 소꿉질 하는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 두 번 해보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69
『술 배운 거야 별다를 것 있나?』
 
70
태호는 조금 호기있는 어조로 말을 하였다.
 
71
『회사에를 다니니까 자연히 먹게 되데그려. 우리 회사의 사원이 육칠십 명 되는데 그 중에서 술먹는 사람이 얼만고 하면 아니 술먹는 사람을 고르는 것 보다도 술 안먹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도리어 속하겠네. 네 사람인가 다섯사람 빼놓고는 거의 다 먹으니까. 혹시 어디 연회가 있어 가거나 그렇지 않고 친구들과 섞이어 가서 아니 먹으면 병신 구실을 하네그려. 그리고 또 이것들이 짖궂게 먹으니까 한두 잔 받아먹는 것이 자연 버릇이 되어 먹게 된 것이란 말야』
 
72
『그러면 술에 무슨 맛이 있던가?』
 
73
태호는 한참이나 주저주저 하다가 맛이 있다 하자니 어떤 맛인지 모르는 것을 거짓말 하기도 무엇하고 또 모른다고 하는 것은 주객의 위신에 관계가 되는 것 같아서,
 
74
『맛이야 물론 있지. 그러나 우리 따위 술로야 어디 깊은 맛을 아나. 남이 먹으니까 먹는 것이지』
 
75
하고 슬그머니 딴 말을 하여 버리려고 할 때 옆의 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구두소리, 교의 치우는 소리가 마치 마굿간에 말굽소리 나듯이 야단이다.
 
76
그들은 어디서들 술들이 취하여 다시 이 집에 와서 이차회나 삼차회를 하려는 것인 듯하였다. 목따는 소리같이 낄낄하는 소리로 중국인들을 부리기도 하고 손뼉을 두들기도 하고 도는 재떨이를 집어서 상 위에다가 탁 내어 던지기도 하는지 시끄럽고 부산하다.
 
77
그들은 창선이가 있는 방을 지나서 들어가지 않고 창선이가 있는 방 뒤 난간을 돌아서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문을 향하여 앉은 창선에게 얼른 눈에 뜨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78
『내가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학교 졸업한 후부터 즉시 아버지하고 싸운 뒤 부터야. 남들이 화날 적에 한두 잔씩 먹으면 모두 잊어버린다고 그러데 그려. 그래서 먹어 보니까 한때 흥분은 되지마는 어디 모든 것이 잊어버려지던가. 공연히 마음만 점점 거칠어지데. 그렇지만 한 번 입에 대기를 시작한 후로 그것을 영영 떼어 버리기는 어려워. 언제든지 친구를 만나 서로 술잔을 들면 맛도 모르는 술 가운데 또한 알 수 없는 맛이 있네그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젊은사람으로 술 아니먹는 사람이 별로이 없는 모양인데, 내가 아는 친구 중에도 아마 구십 퍼센트는 술먹는 사람인 모양이야!』
 
79
창선은 쉴새없이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시면서 말을 하였다. 태호는 거기에 동감이라는 듯이 손으로 상 바닥을 치더니,
 
80
『그러이, 그래. 나 역시 그러이. 지금 청년뿐만 아니라 나이깨나 먹은 이로부터 늙은이까지라도 사람치고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별로이 없는 모양이야!』
 
81
하고 한심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82
술잔들을 다시 들었다. 입에 열이 올라오면 구미를 잃어버려 맛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선과 태호는 어느덧 몸에 술기운이 돌아서 눈과 입에 그것이 나타나기를 시작하여 입에 닿은 술이 아까는 쓴 가운데에도 이상한 맛을 알 수 있더니 지금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83
지금은 술을 입술에 대고 입맛을 다시어 가면서 마실지라도 아무러한 맛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술술 마실 수가 있었다.
 
84
그들은 두 눈꺼풀 위에 천근만한 무엇을 올려 놓은 듯하여 눈을 크게 떠 제대로 그 눈썹을 퍼려 하였으나 그것은 허사였다. 눈은 점점 게슴츠레 하여지더니 상체와 두 손이 조금씩 조금씩 흔들거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오뚜기를 슬그머니 건드린것 같았다.
 
85
창선은 눈 위에다가 세상 근심을 올려 놓은 것 같았다. 술이 마음을 돌아나가면 나갈수록 그의 마음은 울고 싶다 할지 무엇을 한 번 깨뜨려 부수고 그대로 거꾸러 지고 싶다 할지 어떻든 가슴속에 울적하게 쌓여 있는 무엇을 한 번에 시원하게 풀어볼 수 있다 하면 다시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86
그는 정종을 청하였다. 옆의 방에서도 이 방 흉내를 내어,
 
87
『우리도 정종 가져와!』
 
88
하고 저희들끼리 웃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평탄하고 순조로 나오지 않고 구부러지고 흔들거리며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웃고 싶어 웃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웃으니까 따라서 웃어 보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생시에 하던 이야기를 입으로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89
창선은 뚝뚝하게 그 말을 들었다. 그는 자기 흉내를 내는 그들이 무례한 생각이 나기는 났으나 그대로 웃으며 참았다. 갑자기 태호는 목을 누루면서,
 
90
『목이 몹시 마르이』
 
91
하며 상을 찌푸렸다. 창선은 선뜻 보이를 부르더니,
 
92
『맥주 한 병 들여와』
 
93
하였다. 옆의 방에서도 또,
 
94
『호갸 우리도 맥주 한 병 일이 있어』
 
95
하고 저희들끼리 허리를 구부려가며 웃는 모양인데 그 중에는 담벼락이 아니라 병풍 하나 격한 사이로 창선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96
『저 자식들 먹는 대로 우리도 따라서 먹어 볼까?』
 
97
이 소리는 창선의 귀에다가 싸움을 하여 보자고 조전하는 화살을 먼저 던지는 것 같았다. 창선은 속으로 따라서,
 
98
『어디 해보자. 너희가 지나 내가 지나 죽을 때까지 해보자』
 
99
하고 술이 들어간 김이라 헛기운이 올라서 결심을 하였다.
 
100
창선은 태호를 권할 겨를도 없이 자기 혼자 마시었다. 창선의 눈에는 모든 것이 藝術寫眞(에술사진)에 안개 경치를 박아 놓은 듯이 흐릿한 가운데 싸여서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를 시작하였다. 어떤 때는 푸른 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별 틈으로 주루룩 흐르는 운성 같은 것도 보였다가 어떤 때는 오색이 찬란한 무지개가 바람개비 모양으로 뺑뺑뺑 돌다가 딱 끊기고 연화불 같이 탁 터져 쫙 퍼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101
열이 온몸에 퍼지었다가 그것이 골고루 돌지 않고 이리저리 한꺼번에 몰릴 때에는 창선의 몸과 정신이 공중에 높이 솟았다가 다시 깊은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였다.
 
102
둔화된 신경은 작은 것을 생각지 못하며 작은 것을 감촉하지 못한다. 술취한 사람이 수를 세지 못하며 바늘을 집을 수 없는 것은 그 까닭일 것이다.
 
103
창선은 일어섰다. 그는 춤이 추고 싶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춤 그의 노래라는 것은 넘치는 유열을 그의 표정과 근육과 손짓이나 발짓으로 나타내어 흐르는 듯한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감정을 어떠한 동작이나 형태로서 바깥으로 내쫓아 보고 싶은 침통한 충동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노래도 불러 보았다. 춤도 추어 보았다. 그러나 다만 자기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요 피곤할 뿐이었다.
 
104
그는 다시 앉았다. 불빛이 아까보다 조금 어두워 보였다. 그것은 자기 눈에 혈액이 많이 도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앞에 놓인 접시나 교의나 또는 花甁(화병)까지 그 위치가 바꾸어진 것 같았다.
 
105
창선은 다시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술잔은 탁각탁각 하더니 오똑 섰다.
 
106
옆에 있는 음식접시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같이 그 가장자리에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듯 하였다. 그는 그것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마치 요술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 것 같이 오똑 아까같이 보였다.
 
107
『아- 취한다! 아아 좋다.』
 
108
창선은 입김을 내쉬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슴속에 심장이 뛰는 것과 혈관 속에 피가 울리는 것과 또는 울적한 마음이 더욱 누르는 듯한 것 밖에는 정말 좋은 것이 없었다.
 
109
『먹자!』
 
110
창선은 잔을 들었다.
 
111
『그리고 잊어버리자.』
 
112
태호도 잔 들은 손이 떨리었다. 그는 작은 눈이 실 같이 그의 눈이 그속에서 반짝거릴 뿐이다.
 
113
그때 옆의 방에서도 잔들을 들며 그 중에 목소리 강강하고 또렷또렷은 하나 조금 떠듬떠듬 혀 꼬부라진 소리로,
 
114
『자 들어라!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자. 그렇게 비관할 것은 없다.』
 
115
하는 소리는 분명히 이쪽을 조롱하는 소리다.
 
116
창선의 눈은 깊은 산중의 이리의 눈 같이 번득거리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술잔을 들며 말을 하였다.
 
117
『자아 들어라, 모두 마시자!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마시자. 친구와 같이 술을 마시고 술과 같이 취하고 춤추고 노래하자! 아침 햇빛이 동편에서 솟을때에는 다시 우리의 행복이 올 것이다. 너희들은 양껏 먹어라. 그리고 그 이튿날의 행복을 위하여 춤추어라! 노래하여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거칠것이 없다.』
 
118
그는 말소리에 억양을 맞추었다. 그리고 기운이 가득하였다. 여러 사람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119
『흥 어리석은 놈들아』
 
120
창선은 누구를 대항하려는 듯이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또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엄연히 서서 그쪽에서 말소리가 끝나자 곧 부르짖었다. 그는 입 가장 자리에 조소가 나타났었다.
 
121
『너희가 내일의 행복을 말하지마는 어느 하느님이 너희들에게 내일의 행복을 주마고 맹세하였드냐? 말할 놈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122
하고 술을 마실 때 태호는,
 
123
『이거 왜 이러나. 공연히 건드렸다가 싸움이나…』
 
124
하고 눈짓을 한다. 그러나 그도 속으로 통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25
『자 대답을 하여라! 폼페이의 영화도 하루저녁의 재로 변한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
 
126
창선은 태호의 눈짓을 본체만체 하였다. 그는 가슴의 울적한 비분을 한 번 풀어볼 상대자가 생긴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최후의 결전을 하는 용사와 같이 적수가 자기보다 세력이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았다. 남을 때려눕히는데 승리의 통쾌함이 있기도 하지마는 싸우다 거꾸러지는데 명예에 싸인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담벼락을 대강이로 받아서 뚫어 버리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마는 거기에 대강이가 터져보는 데에도 말할 수 없는 유쾌가 있다. 즉 맞아보지 못한 자가 남을 때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싸움은 그 싸우는 용감심에 승부가 있는 것이요 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127
옆방은 대포 소리를 불시에 들은 군중 처럼 갑작스럽게 고요하여졌다. 그러더니 먼저 말을 하던 청년이 소리를 꽥지르며 병풍을 뚫고 나올듯이,
 
128
『어떤 놈이냐? 건방진 소리를 하는 놈이!』
 
129
하고 이 방으로 뛰어오려는 것을 동무들이 잡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그 중에 성미가 조금 느긋한 듯한 사람이 질그릇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130
『허허, 재미있는 친구로군! 술 한잔 가히 먹을 만한데』
 
131
하고 까짜 비스름하게 혼자말을 한다.
 
132
어느 틈인지 창선이 있는 방 방장을 바람같이 열어젖뜨리고 들어오는 청년이 있었다.
 
133
그의 눈에는 독살스러운 빛이 마치 총을 맞고 덤비는 맹수와 같이 번득거리었다.
 
134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는 듯이 두리번두리번하였다.
 
135
『어떤 놈이냐? 지금 말을 한 놈이』
 
136
하고 두 팔을 그 청년은 걷었다. 그 청년의 얼굴에는 술기운이 올라온 데다가 열이 올라서 붉다 못해 푸르르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라든지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는 얼핏 옛날의 그리스 사람을 연상하게 하였다.
 
137
창선은 전등불 같이 활활 붙는 듯한 두눈으로 그 청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멈칫 뒤로 물러서며 비웃는 듯이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138
그 그리스 타입 청년의 뒤로는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따라나와 창선의 방문을 막아섰다. 그들은 마치 김장 때 배추 흥정하는 틈에 선 배추장수들 모양으로 떠들었다.
 
139
『저놈이다!』
 
140
『이놈 아직 맛을 모르는 놈이로군!』
 
141
『잡어내라 잡어내』
 
142
이렇게 떠드는 것을 창선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스 타입의 청년도 창선을 뚫어지게 보았다. 얼마 동안은 조용하였었다. 그리스 타입의 청년은 어디서 창선을 본 것 같이 의아해 하는 것이 그의 눈을 보아서 알 수가 있었다.
 
143
태호는 그리스 타입의 청년 앞으로 갔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144
『여 여보』
 
145
그는 자기 마음이 다정한 것만 생각하고 그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정을 다하여 간청하였다.
 
146
『피차 술먹다가 그런 것을 무엇을 그러시우, 그만둡시다.』
 
147
『무얼 그만두어. 우리는 여태까지 그런 일을 해보지를 못하였어.』
 
148
하고 주먹으로 태호의 복장을 들여미니까 이 나약한 샌님은 공중제비를 하여 한구석에 가 틀어박히며
 
149
『에쿠』
 
150
하는 듯이 흘겨보았다.
 
151
그리스는 창선을 발길로 지르고 손톱으로 쏘집었다. 그리고 발버둥질을 치며 매달렸다. 창선은 다시 그리스의 멱살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는 깰깰 하면서 말을 못하였다. 창선은 그리스를 그대로 번쩍 들어다가 그들의 동무들이 서 있는 데다가 내던졌다. 그리스는 펄썩 주저 앉았다.
 
152
그러자 그 중에 나이 지긋하고 粘液質(점액질)로 생긴 청년 하나가 다시 덤비려는 그리스를 밀치고 한 손가락 사이에 다 타가는 담배를 든 채 웃통 벗은채 제 딴은 자세를 단정하게 가지고 창선에게로 가까이 오나 그의 다리는 술이 돌아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렸다.
 
153
『여보쇼. 초면에 말씀하기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154
하는 소리는 아까 그 질그릇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 까짜를 올리던 사람이다.
 
155
『네, 말씀하쇼』
 
156
하고 그대로 꼼짝없이 섰었다.
 
157
『피차 술이 취해서 이리 된 일이니까 누가 잘잘못이 있겠소. 그럴 거 없이 피차 잘 지내도록 합시다. 자 그럴 것 없이 서로 화해하쇼』
 
158
하고 창선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창선은 시원한 울적함을 풀지 못한 것이 아까왔든지 그래도 버티고 서서 붙잡는 손을 뿌리쳤다.
 
159
『그럼 우리도 잘못했단 말이요? 시비는 시비대로 따져놓아야 할 것이 아뇨? 무엇으로든지 해보고 싶거든 해보자고 합시다』
 
160
하고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서 있는 그리스를 눈이 뚫어지게 보더니 다시한번 자기 주먹을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그리스에게 가까이 가서 주먹을 코 밑에다 들이대며,
 
161
『한번이면 죽어』
 
162
하고 얼러대었다. 그리스는 본시 감정질이 되어서 일시 퍼뜩하는 마음에 정신없이 덤비었다가 한 번 맛을 보고나서 기운이 준 데다가 술이 모두 깨어서 다시 덤빌 생각도 감히 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앙센 마음은 남아서 창선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163
『어디 때려보아라. 때려봐!』
 
164
하고 있을 뿐이었다.
 
165
『글세 여보』
 
166
그 뚱뚱한 친구는 다시 창선의 등을 어루만지었다.
 
167
『그만둡시다. 노형이나 내가 유쾌하게 술 먹는 것이 본의가 아니요. 자, 그러지 말고 우리 방으로 갑시다』
 
168
하고 다시 한구석에서 분해서 새근거리고 있는 태호를 보며,
 
169
『자 가십시다. 일이 모두 미안하게만 되었읍니다.』
 
170
창선은 그래도 버티고 서서,
 
171
『아뇨, 노형네 방에 갈 것은 없읍니다.』
 
172
하기는 하였지마는 어떻든 저쪽 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덤비는 것이니까 마음이 저으기 풀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173
『글세 그러실 것은 없지 않소. 일인즉 우리 편에서 술들이 더 취하여 먼저 잘못은 하였읍니다.』
 
174
어루만지는 수작인지 또는 정직하게 사죄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어떻든지 창선은 그제야 만족하여졌다.
 
175
『쩍.』
 
176
입맛을 한 번 다신 창선은 얼굴빛이 점잖아지면서
 
177
『피차 잘잘못이 있겠소. 젊은 혈기에 그리 되기도 예사요 술깬 뒤에라도 한 번 만나 웃으면 그만인 걸. 자, 다 잊어버립시다 』
 
178
하고 창선은 그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단히 악수를 하였다. 태호는 한 번 나가자빠진 것이 속으로는 분하나 말도 못하고 되어가는 꼴만 보다가 일이 평화로이 해결되는 것을 보고서 속으로 다행해서,
 
179
『고맙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 무엇이 이로울 것이 있단 말이요』
 
180
하고 저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굉장한 일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다가 기대하던 굉장한 일은 없이 결과가 싱거웁게 되므로 그대로 하나씩 둘씩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리스는 여전히 이를 악물고 버티고만 섰다.
 
181
점액질의 청년은 그리스를 보고,
 
182
『자아, 우리 방으로 가세. 가서 우리 다시 화해나 하고 재미있게 술이나 한잔 먹어보세』
 
183
하고 그리스를 밀쳤다. 그리스의 성미가 한 번 얽힌 마음의 매듭은 다시 풀줄을 모르는 줄 앎으로 그 청년은 창선과 화해를 당장 시키지 않는 것이다.
 
184
창선과 태호는 그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안은 마치 강화조약을 하는 듯이 한쪽에 살기가 있어 보인다 하면 또 한편에는 웃음이 있어 보여 그 살기와 웃음이 서로 융화가 되려는 첫걸음에 있는 듯하였다.
 
185
여러 사람은 서로서로 얼굴들만 쳐다보았다. 창선은 전승국의 대표자라 하면 태호는 수종원 격으로 나란히 앉아서 위엄있게 앞만 보고 있었다.
 
186
그리스 타입은 저쪽 상 귀퉁이에 서서 원수를 잡지 못한 고양이처럼 살기있는 눈으로 창선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조금도 창선에게서 떼지를 않았다. 마치 눈독을 들이는 것 같았다. 틈만 있으면 그에게로 덤벼들 것 같았다.
 
187
여러 사람들은 마치 제 정신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아까도 창선을 한꺼번에 죽일 듯 덤벼들던 자들이 지금은 또다시 창선을 앞에 놓고 웃음을 띠어 친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창선이 갑자기 정다워 그리한 것도 아니요 또는 가까이 할 필요가 생겨서 그리한 것도 아니라, 약한 자가 언제든지 갖는 경우라는 마음이 창선을 두려워하게 하였으며 그 두려운 마음은 다시 창선에게 웃음을 보내어 환심을 사두려는 비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188
첫째 그들은 그리스에게 우정을 지킬 필요가 없었고 또는 어디까지든지 이해관계가 크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189
점액질의 청년은 술을 부어 창선을 권하며 여러 사람과 같이 마시었다.
 
190
이렇게 여러번 먹는 동안에 그리스 혼자만 술을 먹지 않았었다.
 
191
방안은 얼마 동안 엄숙한 연회처럼 조용하더니 그 중에 얼굴 까맣고 눈이 자그마한 젊은이가 담배를 끄더니 침을 옆에다가 퇘퇘 배앝고 말을 꺼냈다.
 
192
『참 이렇게 한자리에 있었어도 인사를 못하였읍니다그려』
 
193
하고 옆에 앉은 태호에게 인사를 청하였다. 태호와 그 사람은 인사를 하더니 여러 사람과 죽 둘러가며 인사를 하였다.
 
194
그리고는 옆의 청년들과 술잔을 돌리며 흥치있고 정답게 이야기 시작이 되었다. 창선도 일어섰다. 그는 자기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195
그리스는 갑자기 한 발자국 앞으로 거꾸러질듯이 나서더니 다시 뒤로 물러서며 여태까지 몰랐던 죄인을 자기 동료 중에서 찾아낸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196
『당신이 이창선이요?』
 
197
하고 창선을 멍하니 보고 섰었다. 여러 사람은 일시에 그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198
『그렇소. 왜 그러쇼?』
 
199
하는 창선을 보았다. 그들의 고개짓은 군대에서 조련할 때와 같이 동시에 움직이고 동시에 그쳤다.
 
200
그리스의 지금까지 독살스럽던 얼굴에는 일종의 승리의 웃음이 나타났다.
 
201
그 웃음에는 조소하는 빛도 섞이어 있었다.
 
202
『흥! 내 어쩐지 아까부터 당신을 본 것 같습디다!』
 
203
하고 비로서 천천히 축배를 올리듯이 자기 혼자 잔을 들어 마시었다. 술잔을 입에서 떼고 입맛을 한 번 다실 때는 경멸함과 조소함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가득하였다.
 
204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리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205
그리스는 거퍼 술잔을 들더니 창선을 보며,
 
206
『그러면 노형이 유주영이라는 여자를 알겠구려』
 
207
하고는 뒷짐을 지었다. 창선은 그리스의 입에서 주영의 말이 나오는 것이 기적인 동시에 또는 명예롭지 못한 수치를 느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208
『응?』
 
209
소리만 지르고 말이 없다가,
 
210
『그것은 노형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211
하고 그리스를 훑어보았다. 그리스는 조소하는 눈으로 창선을 보더니,
 
212
『왜 나는 좀 그것을 모르라는 법 어디 있읍디까?』
 
213
하며 술잔을 입에 댄 채 웃었다.
 
214
『흥, 노형은 주영이라는 여자를 노형밖에는 더 모르는 줄 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형보다 나으면 나을른지 알 수가 없어도 못하지 않게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또 있단 말이요.』
 
215
창선은 이 말을 듣고 가슴속에 무슨 豫感(예감)을 주는 것 같은 찔림이 있었다.
 
216
『아니 나는 노형이 무슨 의미로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소.』
 
217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느냐고요? 네. 만일 그 의미를 나에게 물어보신다하면은요.』
 
218
그는 술취한 사람이 누구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오지 않는 침을 아무데나 퇘퇘 배앝으며,
 
219
『나는 당신에게 忠告(충고), 아니 충고라 하면 좀 아니꼽게 아실런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 깨우쳐드릴 것이 있다는 말씀이죠.』
 
220
『네. 너무 고마운 말씀이요. 얼마든지 고맙게 듣지요.』
 
221
여러 사람 중에는 혹은 술잔을 든 채 혹은 테이블에 고개를 대고 잠이 든 채, 음식을 젓가락에 든 채 두 사람의 설왕설래를 듣고 있다.
 
222
그리스는 입맛을 다셔 침을 한 번 삼킨 후,
 
223
『노형이 들으면 혹시 노할른지도 알 수 없으나 노형이 아무리 똑똑하고 젠체 하더래도 말이요.』
 
224
채 말을 마치기 전에 목소리는 갑자기 밀어 올라오는 흥분으로 말미암아 떨리며 강철을 튀기는 듯이 쟁쟁 하는 소리가 섞이었다.
 
225
『결국 당신은 부끄러움 모르는 어리배기 바보 못난이란 말이요. 하하. 퍽 듣기 싫으시겠소. 그러나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언제든지 둘인 것과 같이 사실은 언제든지 거짓말이 못 되는 것이지요.』
 
226
창선은 주먹에 피가 올라왔으나 그대로 참고서,
 
227
『그러면 세상 일이 하나도 이유없이 되는 것이 없으니까 그 이유를 말씀하셔야 할 것이 아닐까요. 더구나 노형의 인격을 두고 맹세하고 당신 말에는 거짓말이 없을 것을 나는 믿으려 합니다.』
 
228
여러 사람의 눈들만 반짝반짝한다.
 
229
『노형은 지금 노형이 주영 씨란 여자의 사랑을 완전히 차지한 듯이 만족히 여기실 터이지요?』
 
230
주영 씨란 씨자가 어째 어색하기도 하고 또는 존경하는 듯한 의미로 여러 사람의 귀에 들렸다.
 
231
『나는 노형 말의 요령을 찾아낼 수가 없소. 당신이 새삼스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도무지 없는 것이 아니오. 남의 개인관계에 대하여 더구나 중상적 말을…』
 
232
『아니 아니 남의 말을 듣고서 말씀을 하시오. 말이란 두서가 있으니까 말이오. 노형이 만족하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일이 도리어 노형의 낙망과 불명예를 만든다 하면 어떻게 할 터냐 그런 말이요.』
 
233
『말씀하시요.』
 
234
『어떻게든 말이오. 다른 말은 다 그만둡시다. 당신은 아직까지도 당신의 分數(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란 말이오.』
 
235
그리스는 담배를 붙이고 성냥갑을 든 채,
 
236
『노형의 주제에 사랑을 한다는 것이 본래부터 건방진 수작이란 말이요』
 
237
하고 성냥개비를 창선에게 내던지자 그것은 창선이가 마시다 둔 잔 속으로 들어갔다. 그 魔(마)와 같은 기운이 숨어 있는 액체 속에 기운 죽은 백양목의 한 조각이 잠가질 때 그 백양목은 무엇에 뒤틀리는 듯이 가라앉았다.
 
238
그리스는 그만만 하면 창선에게 부부히 아까의 보복을 하였으리라고 만족한 웃음과 함께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아 공중으로 후- 하고 내뿜었다. 창선은 그리스의 말 뜻을 알았다. 그는 정녕 자기를 모욕하였다. 그의 전신의 피는 철위에 부은 기름과 같이 끓기를 시작하였다. 두 눈에서는 장마비 쏟아지자 번쩍번쩍하는 번개불같이 불이 솟았다. 팔과 다리와 오금의 근육은 뜨거운 피가 전속력으로 돌아가는 대로 부들부들 떨리었다. 그의 가슴속은 기관차의 실린더 모양으로 맹렬한 기운으로 벌럭거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온몸의 조직과 기관은 다만 싸움을 위하여 돌진하려고 준비가 다 되었을 뿐이었었다.
 
239
그러나 그는 『아직 참아라』 하였다.
 
240
그는 자기의 모든 감정을 한 번 더 눌렀다. 누루면 그 반동세력은 더 큰 것이다.
 
241
『나는 노형 같은 반벙어리와 말하는 것이 대단히 명예롭지 못할 것 같소.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마는 나는 반벙어리에게 나의 명예에 대한 말을 들었으니 다시 한번 물어보겠소. 당신은 언제든지 결과와 지엽의 말만 하였지 근본과 또는 원인은 말하지 않았단 말이오. 당신 입이 있는 것 같이 나도 입이 있으니까 나를 모욕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분명하고 여러 사람이 다 알아듣도록.』
 
242
창선은 말을 하고 주먹을 테이블에 놓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고개를 대고 잠을 자던 사람이 빨간 눈을 번쩍 들었다.
 
243
그리스는 주제넘다는 듯이 창선을 노려보았다. 그만하면 알아채고 국으로 있으라는 말이다. 도리어 무엇이라 하면 제 밑 들어 남 보인다는 듯이,
 
244
『모욕? 나는 노형 같은 이를 모욕하고 싶어할 사람이 아니오. 내가 당신을 모욕한다 하면 그야말로 내가 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니까. 더 다시 무슨 말을 날더러 하여 달라 하면 당신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245
『말씀을 하시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더라도 순직하고 힘있고 열있는 사람이 되고 싶소. 자 무슨 말이든 하여 보시오. 자 자』
 
246
창선은 교의를 비켜 놓고 점점 그리스 옆으로 가며 주먹을 내흔들면서 재촉을 하였다.
 
247
때는 이미 익으려는 것 같았다. 창선의 주먹은 그리스의 입에서 말이 나오든지 아니 나오든지 그의 몸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스는 이왕 말을 꺼내었다가 흐리멍텅하게 하여 버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거니와 또는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비밀을 탄로시켜 버리는 것도 유쾌한 일 같았다.
 
248
창선의 주먹이 거의 그리스의 턱밑에 닿았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난 激情(격정)으로 그리스는,
 
249
『네가 백정의 아들이 아니냔 말이다. 너는 백정의 아들인 까닭으로 연애하는 것이 주제넘다는 말이다. 백정의 아들이 연애가 다 무엇이냐? 그뿐 아니라 훌륭하게 남에게 애인을 빼앗기고도 그것을 모르고 속 못 차리는 너를 볼 때 불쌍하단 말이야. 하하하하』
 
250
하는 소리를 지르고 혼자 웃을 때 창선의 주먹은 그의 멱줄띠기를 쳤다. 창선의 피의 힘, 살의 힘 또는 뼈의 힘, 나중에는 그의 영의 초자연적 힘, 자기의 대대로 내려오는 쌓이고 쌓인 원한의 힘이 뭉치고 뭉친 대장간의 메판에 떨어지는 메보다도 더 단단한 주먹은 한 번에 그리스를 넘어뜨렸다.
 
251
『이 자식, 내가 백정의 자식인 까닭에 너에게 무슨 해를 끼치더냐? 우리 아버지나 우리 할아버지는 정직하게 솔직하게 유순하게 짐승의 가죽을 벗기어 자기의 생활을 하여 왔다. 그러나 너의 애비와 할아비의 한 일은 무엇이냐. 갖은 허위와 포악과 박탈과 은둔과 기만과 나중에는 자기까지 속인 것 밖에 무엇을 하여 왔느냐? 우리 조상이 너의 조상들에게 학대와 멸시와 박탈을 당하고 목숨을 잃은 일은 있다 하더라도 너의 조상들은 아마 쌀 한 알갱이 피천 한 푼을 준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조상은 피눈물을 참아가면서 여태까지 왔다. 때를 기다렸다. 입을 찾고 눈을 찾고 귀를 찾고 자기의 다리 팔의 힘을 찾을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네가 지금 무엇으로써 나를 백정의 자식이라고 모욕하려느냐? 그 조건을 말하여라. 너희는 결국 인습의 노예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252
여러 사람은 일어섰다. 다시 잠이 들었던 젊은 사람 하나는 꿈 속에서 놀란 듯이 일어나던 맡에 사면을 휘휘 둘러보며 어리둥절한다.
 
253
다른 사람들은 공연히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며 등골에 소름이 쭉쭉 끼친다.
 
254
그 중에 한 청년은 마치 닭싸움 하는 것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유쾌한 성벽으로써 보고 있었다. 그는 싸움이 더욱 더욱 잔인한 지경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속으로는 손뼉까지 치고 싶었다.
 
255
점액질은 말을 다시 하지 않을 사람같이 입을 다물고 있더니 창선의 팔을 잡아다녔다.
 
256
『여보시우. 그만두시우. 술취한 사람을 그러면 무엇을 하시우. 그만두시우. 그만두어요.』
 
257
말리기는 말리지마는 그의 마음속에도 옛날의 유대 백성들의 마음속에『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하는 거만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에게 대하여 일종의 자긍을 갖는 동시에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죄악의 굴혈로 들어가도 그때의 유대사람의 머릿속에는「택함을 입은 백성」이란 관념은 살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점액질의 청년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남았었으랴? 隱遁(은둔)과 姑息(고식)과 편협과 시기와 질투 증오 또는 여대 망상으로 가득 찼던 그들 부모의 관념을 그들의 부모에게서 피를 받아 나올 적부터 역시 얼마간 받아가지고 내려왔었다.
 
258
그들은 무슨 조건과 이유가 없이 창선을 멸시하였다. 그들에게 만일 무슨 까닭에 너희 맘 속으로 창선을 멸시하느냐 하면 그들은 아마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259
세례 요한이 옛날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적에『너희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자랑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 돌로써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느니라』한말과 같이 진리는 조선 사람 양반 특수계급, 이 모든 것을 변하여 땅에 구르는 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단단히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은둔과 주저 가운데서 뜨물 먹는 듯한 생활을 하여가는 무리들이었다.
 
260
창선은 붙잡는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아니하였다.
 
261
『너는 나를 모욕하는 것보다도 나의 애인을 모욕하였다. 너는 음해와 중상으로써 남의 신성한 애정을 저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262
그리스는 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힘 약한 것을 보인 수치스런 마음과 자기가 그만큼 멸시하는 창선의 그야말로 치명상(致命傷)에 가까운 철권을 받고 나니 그에게 남은 것은 약한 자의 맨 나중 무기인 악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263
그는 어느 결엔지 상 위에 있는 넓단 화접을 집었다. 그것은 창선의 이마를 번개같이 때리고 세 조각이 갈라지며 상 위에 걸렸다가 다시 재주를 넘고 마룻장 위에 떨어져 산산히 부서졌다.
 
264
창선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하여졌다. 그가 아마에 손을 대었다가 떼일 때 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솟았다.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265
『피』
 
266
소리를 지르고 창선을 보았다. 옆에서 창선을 만류하던 태호는 수건을 꺼내어 창선을 씻어 주려고 이마를 짚으려 하며,
 
267
『피가 나네. 피. 어서 씻어』
 
268
하고 창선을 권하니까 창선은 그대로 태호를 뿌리쳤다.
 
269
그리스는 피가 몰린 눈으로 창선을 보며,
 
270
『무엇이냐, 되지 않는 녀석 백정놈이』
 
271
하고 욕설을 퍼붓고 섰는데 옆의 청년은 그의 두 팔을 단단히들 붙잡았다.
 
272
창선은 웃었다. 그는 그 웃음 속에서 최후의 승리가 있는 것을 믿었다. 그는 다만 태연히 흘러내려오는 피를 씻으려고도 하지 않고 껄껄 소리쳐 웃었다.
 
273
『나는 너 같은 비겁한 자와 다시 싸우려고는 하지 않을 터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너에게 손대인 것을 부끄러워한다. 나의 대적이 되지 못하는 자와 싸우려 한 것이 나에게 불명예이니까! 자아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미안한 일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떠나가는 것이 피차에 좋은 것 같습니다. 자아 그러면 이후에 다른 기회에 만나 뵐 때가 있을 터이지요.』
 
274
창선은 문으로 나오며 그리스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는 모자를 집어쓰며 그리스를 항하여,
 
275
『내가 약해서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네가 싸울 사람이 아닌 것을 안 까닭이다. 나의 대적은 네가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까닭이다.』
 
276
창선은 그 집에서 나가다가 사무실에서 셈을 하여 줄 때 비로소 이마가 아픈 것을 깨달았다.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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