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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정고 장편(未定稿 長篇)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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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2
나도향
1
미정고 장편(유고)
2
3
 
 
3
창선은 집을 항하여 간다. 부악산을 스쳐 내려오는 찬 바람이 아직 술기운이 다 깨지 못한 훗훗한 뺨을 식히면서 지나갈 적마다 일종의 비분이 그의 뜨거웁게 타오르는 감정을 식히는 듯하였다.
 
4
그 감정은 아직까지는 잘 조화가 되지 못하고 잘 整齊(정제)가 되지 못한 것 같이 창선의 가슴을 거북하게 흔들어 놓는 듯하였다.
 
5
거칠은 감정을 가진 자는 자기의 감정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은 누르려 하면 누를수록 자기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할는지 조바심이 나서 괴로웠다. 그 감정 그 울분은 창선의 가슴속에서 훌륭히 세련을 당하여 조화를 얻고 정제가 되어 조리있고 규칙있고 열이 있고 힘이 있게 자기의 억울을 풀 때가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지마는 아직 때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第六感(제육감)으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그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움으로 찼었던 것이다.
 
6
『아아 세상이 나를 무슨 까닭으로 천대하고 모욕하느냐? 모욕하고 천대하는 조건을 나에게 보여라. 만일 내가 백정의 아들이라는 단순한 조건으로 너희들이 모욕하고 천대한다 하면 너희들은 무엇이냐. 너희들은 무슨 큰 소리를 할 입이 있느냐? 사람이 사람의 아들인 까닭에 죄인이라는 어리석은 말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7
그는 불 같이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며 세상을 깨뜨려 부수어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모조리 때려 부수고 싶었다. 지금은 어떠한 사람과 싸울 때도 아니요 어떠한 나라와 싸울 때도 아니요 어떠한 민족과 싸울 때도 아니라 온 세상으로 더불어 싸울 때인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오히려 부자의 정리의 미적지근한 정이 남아 있다. 지금은 아버지와 싸우기는 너무 적다. 그리스와도 싸우기에는 너무 비겁함이 있다. 더 큰 것이 세상보다도 더 큰 무엇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것과 싸우다가 힘이 자라지 못하면 그대로 자기가 쓰러질 때까지 싸울 뿐이다.
 
8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났다. 그것은 결코 비겁한 자의 나약한 눈물도 아니요 의지 박약한 자의 절망의 눈물도 아니라 두 발을 잡힌 굳세인 용사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비분한 눈물이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은 주먹을 적시었다.
 
9
아무것도 없고 다만 한둘레 밝은 달이 먼 데 산 윤곽만 희미하게 비추이는 안동 네 거리 고요한 길 위로 무거운 구두발을 내어놓는 창선의 가슴은 납덩어리를 끓여붓는 것 같이 뜨거웁고 또 무거웠던 것이다.
 
10
그는 고요한 달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달려 있는 달까지 원망스러웠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가는 달은 언제든지 높은 중천에 둥두렷이 달려 있어 이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 정하고 깨끗한 것은 말이 없고 웃음이 없고 울음이 없어도 사람에게 무슨 암시를 주는 듯하다.
 
11
기우두룸하게 올라오던 달은 또 기우두룸하게 서쪽으로 기울어간다.
 
12
멀리서 주정꾼이 별궁 담을 끼고 반 넘어를 부르고 올라가는 소리가 창선을 다시 정열과 비분과 울적한 심사에서 차디찬 세상으로 불러내었다.
 
13
그는 달을 보니 세검정 생각이 나고 세검정 생각이 나니 주영이가 생각나고 주영이 생각이 나니 아까 그 그리스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아니라 그리스가 생각되니 주영이가 생각되고 주영이 생각이 나니 세검정이 보이고 세검정이 보이니 달이 한 번 쳐다보였다.
 
14
창선은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15
『정신나간 녀석! 누구를 중상하려고. 놈의 가는 뼈가 굵기도 전에 그따위 버릇부터 배웠나.』
 
16
창선은 생각하였다. 저녁과 새벽으로 맨 먼저 났다가 맨 나중 사라지는 장경성(長庚星)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것이 한강물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잠기는 일은 있을는지 몰라도 주영의 사랑이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17
낙동강 금모래 위에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운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을 지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
그는 오늘 세검정에서 주영이와 약속한 일을 생각하고 지금껏 지내오던 것을 생각하고 또 처음 만나던 때를 생각하고 지나간 사랑의 역사의 갈피와 구석을 모조리 돌아보고 주영의 마음을 생각하고 제 마음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생각하여 보아도 주영과 자기의 사랑은 참이요 진실이었다.
 
19
그러나 사람이 자긱가 모르는 곳에 자기의 이해와 관련되는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을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의 절대의 이해 다시 말하면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주영의 사랑과 관련되는 일이 한 번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그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이 든든할 리는 없었다. 만지면 커지는 것이 부스럼이면 생각할수록 커지는 것은 의심이다.
 
20
창선은 불 안땐 아궁이에 연기가 나랴?는 말이 생각나며 조그마한 근거라도 없는 곳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리가 없었고 그리스가 주영의 이름을 자기에게 말하는 것이며 또는 그것을 말미암아 자기를 모욕한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의심을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21
『의심하지 마라. 그것이 죄악이다. 더구나 애인을 의심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어찌 작은 죄악이랴?』
 
22
의심의 싹이 그의 가슴 복판에서 뾰로통하게 솟아오르려 할 때 그는 그것을 누르려고 혼자 이런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23
그러나 그것을 누루기는 어려웠다. 싹은 점점 자라나는 것 같았다. 그는 공중에다가 손을 내저어가면서 모든 것을 씻어 버리려 애썼다. 그는 지금 바야흐로 지으려는 죄악과 싸우려는 것처럼 여러번 주먹을 쥐고 꾸짖고 달래고 또는 결심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난행(難行)을 하는것 같았다.
 
24
그러나 창선은 하나님이 아니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이상이라 하면 그 이상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있고 싸움이 있고 희생이 있으므로 사람의 사람다운 점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창선도 주영과 자기 사이의 사랑을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싸우고 또는 자기희생까지 하려는 데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5
그는 의심을 누르고 자기의 감정을 눌러서 될 수 있는 데까지 자기를 냉정하게 보려 하였다. 냉정한 가운데 아무것도 가리운 것이 없이 우뚝 서있는 자기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26
그는 어느덧 자기 여관 가까이 왔다. 화동서 재동으로 넘어가려면 한 반쯤 넘어가 바른손 쪽으로 뚝 떨어진 곳에 수통이 박히고 그 수통박이 앞집에 대머리 반찬가게가 있으니 그것은 그 주인의 머리가 훌렁 벗겨진 까닭이다.
 
27
그 대머리 반찬가게 옆집이 바로 창선이가 유하는 여관이다.
 
28
창선은 담뱃대를 물고 소설책을 든 대머리 반찬가게 주인을 보았다.
 
29
지금까지 속이 조이고 거북하던 것이 안경을 콧잔등이에다가 걸어놓고 침을 지르르 흘리고 앉아서 소설에 정신을 잃고 앉아 있는 대머리를 보고 얼마간 마음이 늘어지며 유한하여지는 듯하였다.
 
30
대머리 반찬가게 주인은 안경 너머로 창선을 보더니 다시 안경을 쳐들고 뚫어지게 보며 자기 이마를 만져볼 듯이 손을 이마 앞 공중까지 들었다가 다시 담뱃대를 들고 멀거니 창선을 보았다.
 
31
창선은 즉각적으로 여태까지 인사는 서로 하지 않았어도 서로 안면은 익숙한 터에 창선의 이마가 터진 것을 보고 말을 할듯말듯 하다가 계면쩍어 그만 두는 것을 알았다.
 
32
창선은 문을 열기 전에 생각나는 것은 여관집 주인 노파와 그 딸이다. 그 노파라든지 그 딸이 자기를 아주 착실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아는데 술먹고 이런 꼴을 당하였다 하면 오죽 욕을 할까. 욕은 하든지 말든지 밥값을 한 달치나 안 준 데다가 집에서 돈 온 것을 아는데 모두 술 먹는데 써버리고 이마가 터져 들어왔다 하면 신용까지 잃어버려 밥도 못먹고 내쫓길 터이니 딱한 일이지.
 
33
창선은 공연히 죄지은 사람 같았다. 그는 문앞에 다다라 서서 손을 입에 대고 허 입김을 불어서 술내가 나는지 안 나는지 시험하여 보았다. 그러나 자기 코와 입과 피 속에 배인 술김이 자기 코에 맡아지지는 않았다. 그는 혼자 안심을 하면서도 그래도 주저하는 생각이 나며 문을 열려는 손은 열적은 맛이 있고 어떤 때는 열려 있고 어떤 때는 닫혀 있는 문이 혹시 닫혀 있으면 어찌 하나 하는 생각까지 났다. 만일 열려 있으면 그대로 열고 들어가 시치미를 떼고 들어가 자버리면 그만이지마는 그렇지 않고 문이 닫혀 있어 노파나 딸이 나와 문을 열다가 술취한 눈치를 채이면 어떻게 하랴 하는 생각이 나서 대담하게 문을 밀지 못하였다.
 
34
그러나 문을 아니 열 수는 없었다.
 
35
문은 빗장이 걸려 있었다. 창선은 무의식적으로 둘러서서 말이 없었다.
 
36
누구든지 불러야 할 일이다. 노파가 나오든지 그 딸이 나오든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나올 것이다. 노파가 나와? 그것은 얼마간 다행한 일이지마는 그딸이 나와? 그러면 창선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37
창선은 그 검은 눈. 붉은 뺨, 흐르는 듯한 허리, 모과(木瓜)빛 같은 종아리, 石膏(석고)같은 모가지를 연삭하고 조금이라도 자기의 추태나 허물을 그 스물 두 살 된 머리 쪽진 여자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운 것이 어찌 부끄러운지 그것을 집어 말하려면 더욱 몽롱한 감각만 남을 뿐이요 물김을 붙잡는 것과 향기를 맛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뿐이었다.
 
38
더구나 서늘한 눈동자에서 번쩍번쩍하는 눈 광채가 창선을 볼 적마다 웃을 때 창선은 그 웃음에서 무슨 뜻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무슨 뜻」으로 남아 있을 뿐이요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39
그는 마치 제비뽑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문을 열려 하였다.
 
40
두번째 대답이 있었다.
 
41
『나가우』
 
42
마치 기침 소리에 싸여 나오는 목소리가 안방 속에서 그윽히 들린다. 그것은 노파의 대답이다.
 
43
방문 소리가 났다. 신짝 끄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정녕코 딸의 발자취였다.
 
44
창선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가까이 문으로 들어섰다가 그래도 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 조금 나섰다. 문이 열렸다.
 
45
『인제 오세요. 나는 벌써 들어와 주무시는 줄 알고 문을 닫아 걸었죠.』
 
46
조용한 밤 가운데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사내마음은 이상한 물결이 치는 것이다. 마치 잔잔한 물결 위에 진주 한 알을 떨어뜨린 듯이 창선의 가슴 복판은 따뜻한 피가 용철같이 풀리었다가 다시 감기었다가 하는 것 같았다.
 
47
창선은 말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48
『녜, 녜』
 
49
입 속으로만 중얼거리었다. 그 여자는 창선의 눈을 보고 전신의 행동을 보더니 다시 희미한 안방 창 한겹을 지내 나오는 불빛에 이마의 상처를 보았다.
 
50
『에그 저게 웬일에요』
 
51
하며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설 때는 창선의 가슴도 공연히 설렁하였다.
 
52
『네? 무엇이요?』
 
53
『이마의 피가 묻었어요.』
 
54
창선은 새삼스러웁게 손으로 이마를 만지고 다시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55
창선은 우물쭈물하면서,
 
56
『여태까지 피가 흐르네』
 
57
하고 수건을 꺼냈다. 그 수건은 마치 단풍을 움켜쥐인 것 같이 붉고 누르렀다.
 
58
『그게 웬일에요? 어쩌면 피가 저렇게 흐르는 것도 모르시고』
 
59
하며 창선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설 때 자기의 코에 떫은 침감냄새 같은 술 내가 코에 끼쳤다. 그 여자는 그렇지 않을 곳에서 그런 것을 본 것 같이 다만 입만 다물고 말이 없이 창선을 물그러미 보았다.
 
60
창선은 자기를 보는 그 여자의 눈이 자기를 책망하는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며 자기 방으로 향하여 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장자리에다가 납가루를 번질번질 칠해 놓은 것 같은 때묻은 이불 요가 깔리어 있는 방은 몹시 으스스 하였다.
 
61
그 여자는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무슨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어머니를 불렀다.
 
62
『어머니!』
 
63
어머니는 이 세상과 꿈 세상의 몽롱한 경계선을 배회하는지 딸의 대답은 들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64
『어머니 이것 좀 봐요.』
 
65
어머니의 몸을 흔드는 바람에 노파는 아까운 꿈나라에서 깨는 듯이 눈을 채 뜨지도 못하며,
 
66
『왜 그러니? 문 걸었니?』
 
67
할 뿐이다.
 
68
『건넌방 손님이 이마가 터지고 술이 취해 들어왔어요. 이마가 퍽 많이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69
『무어? 이마가 터져?』
 
70
전기불 켜지듯 노파의 눈은 둥그래졌다.
 
71
『어쩌다가 그랬어.』
 
72
『내가 아우.』
 
73
『넘어진 게지』
 
74
『그렇지도 않은 게야. 술이 퍽 취했어요.』
 
75
『술이라니 어디 그이가 술먹을 줄 아니? 먹어도 한두 잔 남몰래 먹는데』
 
76
노파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77
『어디 가만 있거라 그게 무슨 소리냐』
 
78
하고 담뱃대를 들고 건넌방으로 건너오면서,
 
79
『주무시우? 대관절 어디를 상했단 말이오?』
 
80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창선은 기껏 피해 들어와서 이불을 쓰고 드러누었는데 자던 노파가 일부러 일어나서 들어오는 것은 고맙기는 하나 귀찮은 일이었다.
 
81
『아녜요. 별로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82
하고 창선은 고개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며 두 눈만 내어 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83
노파는 짐짓 다가앉으며,
 
84
『어디 좀 봅시다』
 
85
하고 창선의 손을 들더니 쭈글쭈글한 상을 더욱 찡그리면서,
 
86
『어그 이게 웬일요. 어디 가 넘어졌소? 대단히 다쳤구려. 약을 하든지 밀태승(密陀僧)을 바르든지 해야지 그대로 두었다가 덧나거나 하면 어찌한단 말이요. 대관절 바람이 들어가면 어떻게 하오?』
 
87
하더니 안방을 향하여,
 
88
『얘, 그 의걸이 장 안에 햇솜 보무라지 좀 가지고 건너오너라』
 
89
하며 그 딸을 부른다. 창선은 제발 좀 남의 염려 그만하고 그대로 건너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거기다가 딸까지 불러다가 이 꼴을 보이려고 하니 속으로 민망하고 초조하다.
 
90
『괜찮아요. 가만 두면 저절로 말라 붙을 걸요. 그만두세요』
 
91
하고 만류하나 들을 리가 없었다.
 
92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는구려. 덧나면 큰일나지. 험이 되면 어떻게 하우』
 
93
할 즈음 안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94
창선은 그 여자가 자기 꼴을 보지 못하게 전기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95
그러나 문을 열고 딸은 들어왔다. 손에는 햇솜뭉치를 들었다. 창선은 마치 사막에 고개만 파묻은 타조 모양으로 혼자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96
노파는 혼자,
 
97
『글쎄 어디서 이랬소. 넘어졌단 말요? 누구에게 맞았단 말요? 큰일날 뻔 했어. 불행 중 다행이지.』
 
98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창선의 이마 터진 데다가 솜을 대고 꼭꼭 누른다. 그 딸은 팔짱을 끼고 때묻은 버선을 호목까지 질러 신은 채 물그러미 서서 창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99
노파는 솜을 다 대고 나더니 누워 있는 창선을 내려다 보면서 아까 상 찌푸리던 얼굴을 어느덧 기롱하는 사람이 갖는 시부렁대는 빛으로 변하고서,
 
100
『글쎄 웬일이요. 말을 좀 하시우. 어찌 된 일이요?』
 
101
하고 담뱃대에다가 불을 붙여 문다. 본시 젊었을 때부터 절조가 없는 무정조한 거치러운 생활을 하여온 늙은 은근자의 피 속에는 후천적으로 음란한 피가 흘러서 그것이 천성이 되다시피 한 데다가 다시 그의 성격은 변태적으로 가꾸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한 개의 병적 성격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나이 젋은이를 보면 반드시 음란한 실없는 소리와 성적 유희(性的遊戱)를 연상케 하는 기롱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벌써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나 아직까지도 아침이면 분세수를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남자를 보면 히스테릭한 부끄러움을 지어 동화(童話)에 많이 나오는 요술하는 노파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그 간드러지게 웃는 웃음이며 옆의 사람들을 호려들일듯이 톡 치는 손짓에는 무서운 요괴(妖怪)함이 흐르는 것 같다.
 
102
그가 혹시 나들이를 갈 때에 화장을 하고 몸맵시를 차리는 것은 마치 고목가지에 꽃을 붙혀 놓은 것이나 해골에 분칠을 하여 놓은 것 같아서 그야말로 대낮의 요귀 같았다.
 
103
그는 자기의 지나간 청춘을 반성해 보고 판단할 지능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지나온 생활이 마땅히 자기가 하여와야 할 팔자였으며 그 이외에 더 넓고 고상한 생활이 더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더 알려고 하지도 못하였다. 설령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보다 더 범위가 넓고 고상한 생활이 이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로서는 더 나갈 수가 없고 더 고상해 질 수가 없었다. 그는 철저한 숙명(宿命)에 자기 몸을 얽어놓고 자기의 생활, 다시 말하면 자기의 팔자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놓을 수도 없는 것이요, 한 발자국 더 돌려놓을 수도 없던 것이다.
 
104
자기의 외면생활은 즉 자기의 내면생활이요 아무러한 생의 고민, 생에 대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105
그는 그러나 늙었다. 어느덧 뜨거웁던 피는 식기를 시작하고 검던 머리는 희기를 시작하였다. 쇠잔하여가는 육체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에 너무 힘이 없었다.
 
106
그는 탄식은 하였을망정 결코 비관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똑같이 당하는 것임을 알 때 그는 든든한 생각이 났다.
 
107
그러나 그는 다른 어떠한 같은 종류의 여자들이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질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늙은이가 갖는 젊은이에게 대한 질투, 즉 자기는 벌써 영영 쇠잔하여진 것을 깨닫고 자기 이외의 사람이 싱싱한 힘을 가진 것을 볼 때 일어나는 암상스런 질투를 이 사람좋은 노파는 많이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108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기의 못하는 것, 자기가 향락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하고 남이 향락할 수 있는 것을 볼 때 일어나는 반동 감정을 결코 악의로써 남에게 풀려 하지 아니하고 호의로써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젊은 여자나 젊은 남자를 볼때 변태적으로 일어나는 성적감각(性的感覺)을 자기에게서는 만족을 찾기 어려운 것을 알고 쓰린 斷念(단념)과 함께 그것을 제삼자인 다른 사람에게 돌려보내어 그 만족해 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써 자기의 위안을 삼기 시작하였다.
 
109
거기에는 심술궂은 고집과 완고한 강제가 있었다. 즉 자기가 어떤 여성과 어떤 남자에게 만족함을 주어 그것을 즐기고 거기서 위안을 얻으려는 무서운 욕망은 자기의 직접 충동으로 일어나는 만족을 채우려는 것 이상의 완고함과 심술스러운 것이 있었던 것이다.
 
110
『아마 어떤 계집 때문에 누구하고 싸운 게지. 그러니까 얼른 말을 못하고 주춤주춤하지.』
 
111
창선은 그 소리를 들으니까 울컹하고 속에서 더러웁고 창피한 마음이 일어났다.
 
112
「나를 그런 비열한 녀석으로 아느냐」하는 생각이 나며 더한층 분한 생각이 나며 그 말을 듣는 자기보다도 그 말을 하는 그 노파의 마음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고개를 노파에게서 돌이켰다.
 
113
『흥 내가 그렇게도 비열해 보이시우? 계집 까닭에 싸울 나는 아니랍니다.』
 
114
창선은 시떱지 않은 듯이 코대답을 하였다.
 
115
『에그 큰소리 마시우. 젊은 양반의 혈기를 누가 믿을 수 있읍니까? 비열할 것도 무엇 있소. 젊어서 그러기도 예사일이지. 젊어서 안 그러면 언제 그러게.』
 
116
담배통에 재를 엄지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며 노파는 창선을 어린애라는 듯이 스스로 내려다본다. 그 딸은 다만 흥미 있는 농담을 듣는다는 듯이 생그레 웃으면서 어느 틈에 앉았는지 옹구리고 앉아 있다.
 
117
『그러나 저러나 전에 없던 일이 웬일이요? 술을 저렇게 자셨으니 인제는 점점 못되어 가는구려.』
 
118
사내가 술 먹는 것이 흉될 일이 아닐뿐더러 한두 잔 먹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졸장부로 아는 그는 어느 때 싫다는 것을 억지로 권하기까지 하고 혹시 자기가 울적할 때면 호협스러웁게 주안을 차리고 일부러 같이 먹기를 청하는 그는 말거리를 만들려고 이런 소리도 해보는 것이다.
 
119
창선은 자리 속에 눕기는 하였으나 아까 가슴에서 날뛰던 감정이 다시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바람에 노파의 말이 귀찮기만 한 데다가 딸까지 앞에 앉혀 놓고 객적은 농담을 하는 것이 싫었으나 억지로 마지못해 말대답을 하여 준다.
 
120
『왜 내가 전에는 술을 못 먹었답디까? 주인 마나님이 보시지를 못했지요.』
 
121
『에그 저런, 사내가 술 한두 잔 먹은 것을 가지고…』
 
122
망을 채 끊기도 전에 그 딸이 가로나서며,
 
123
『오늘같이 자신 날은 생전 처음이야』
 
124
하며 또 그 시원한 눈은 웃었다. 드러누운 창선의 가슴 위로 그 서늘한 수정알 같은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 같았다.
 
125
『아마 잡숫지 못하는 약주를 좀 과히 잡수신 것을 어떤 나쁜 녀석들이 손을 댄 게지요.』
 
126
딸은 눈앞에 창선의 맞은 꼴이 선하게 보이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앉아서 말을 하였다.
 
127
창선은 딸의 말을 들으매 속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서,
 
128
『설마 얻어맞고 다닐까요? 사내 자식이 변변치 못하게』
 
129
하고 딸을 흘겨 보았으나 그 흘기는 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130
『그럼 왜 말을 아니하세요.』
 
131
『말씀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지요.』
 
132
『저것 좀 봐? 부끄러운 일이니까 말을 못하지 왜 못한담.』
 
133
노파는 깔깔대며 담뱃대를 떨다가 담배 연기가 코로 들어가며 기침을 시작하였다. 입 속에 모인 가래를 배앝더니 그대로 기침이 복바쳐 올라와서 딸을 항하여,
 
134
『나는 건너가겠다. 천천히 이야기나 더 하고 건너오려무나. 물이나 새로 떠다놓고…』
 
135
하고 노파는 건너갔다.
 
136
그 딸은 어머니를 따라 건너가기는 싫고 또 그렇다고 젊은 사내방에 앉아 있기도 계면쩍은 듯이 고개만 숙이었다가 다시 창선을 보았다 하였다.
 
137
방안은 두 사람이 번갈아 쉬는 숨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 듯이 고요하다. 창선은 눈을 감고 있고 그 딸은 성냥갑만 만지작거리며 있었다.
 
138
너무 조용한 것이 두 사람을 근지럽게 하는 것 같아서 딸은 창선의 머리맡에 있는 담배갑을 보더니,
 
139
『담배 하나 피워 드려요?』
 
140
하고 창선의 주의를 끌려 하였다.
 
141
창선은,
 
142
『글쎄요. 하나 피워 주신다 하면 먹지요.』
 
143
하고 고개를 돌렸다.
 
144
딸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성냥을 그어대어 한모금 흠뻑 빤 후 후- 하고 내불면서 창선을 주었다. 창선은 담배를 받아 물고 한 손을 이불 밖에 내놓았다.
 
145
『담배 태우시죠.』
 
146
창선은 딸에게도 담배를 권하였다.
 
147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상하셨어요? 말씀을 좀 하세요』
 
148
딸은 나에게야 말못할 것이 무엇 있느냐는 듯이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149
창선은 기가 막힌 듯이 힝 웃으면서,
 
150
『꼭 아셔야 하겠어요?』
 
151
하고 딸을 쳐다보았다.
 
152
『꼭 알아야 할 것까지는 없지마는 한 집안에 있으면서 궁금한 일이 아녜요. 그렇게 안 알려 주실 것은 또 무엇예요.』
 
153
『안 알려 드리는 것도 아니고 못 알려 드릴 것도 없지마는 말을 하면 분하고 속이 상해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으니까 그렇지요.』
 
154
『무엇이 그렇게 분하고 속이 상하세요? 어디 이야기 좀 하여 보세요. 저에게 이야기 하시는 것은 아무 일 없으실 것이니까요.』
 
155
창선은 그래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웬일인지 그 다정스럽게 묻는 여자 앞에서 자기가 애인이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156
더구나 자기의 신분을 말하기도 거북하였다.
 
157
『차차 말을 하면 아시지요. 오늘은 그런 말을 나에게 물어 주지 마세요.』
 
158
『저는 웬일인지 이마가 상하진 데는 무슨 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알고 싶어요. 그와 같은 일이 예가 다른 술먹은 사람의 일이라 하면 저도 그리 이상하지도 않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지마는 그리 하시지 않으실 어른이 그런 일을 하셨으니까 그 가운데는 필연코 무슨 큰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159
『무슨 큰 이유라뇨?』
 
160
『그것은 저도 잘 모르지요.』
 
161
딸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웃음을 지을 때 그의 두 뺨에는 옴푹옴푹 우물이 지었다.
 
162
『술먹고 머리 터지는 데도 무슨 예사 사람…』
 
 
163
(1매 결)
 
 
164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알려 드릴 날이 있을 터이지요.』
 
165
창선은 다시 말을 이었다.
 
166
『언제요?』
 
167
『언제든지요. 내가 무슨 사정으로 댁에서 떠나가는 일이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아실 날이 있지요.』
 
168
『어느 천 년에요.』
 
169
『그렇게도 알고 싶으세요?』
 
170
『그럼요. 손님 일이면 무엇이든지 알고싶어.』
 
 
171
[이하 결]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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