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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의 광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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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6.2
노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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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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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牛山)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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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신천(信川) 온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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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온천 호텔 2층 베란다에 서서 하염없이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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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잠긴듯이 아물아물 떠오르는 장수산(長壽山)의 연산(連山)! 봉오리가 들어가고 혹은 솟아 올라서 자연의 곡선미를 그리고 있는 경치는 과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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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 숨으려는 석양의 물결이 실줄기 같이 흐늘흐늘. (중략) 그 산봉우리에 타는듯한 자색연기가 뭉게뭉게(중략) 그 산봉우리는 자주빛 포장에 그만 아물아물(중략)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자색 연기는 다시 흩어지고(중략) 에는 단풍잎 같은 조박 구름이 조는듯이 숨겨(중략)의 부는 방향을 따라, 그 구름은 둥실둥실 멀고 먼 남(중략) 아, 형님! 저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하늘을 넘고 땅을(중략) 가려고 하는곳은 어디 일까요? 석양 하늘에 흩어져 가는 구름의 걸음을 심히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저도 저 구름을 따라 산 넘고 물 넘어 바다 건너 하늘끝 저편 그 미지의 나라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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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을 잊어 버리자! 그리고 모든것을 생각하지 말자! 속상하고 귀찮은 세상에 다시 애착을 두지 말자. 구름이 되어 하늘 끝까지 가고 바람이 되어 땅 끝까지 찾아가자. 모든것이 꿈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근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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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베란다 한 모퉁이에서 장수산 저녁 경치를 바라보며, 이러한 생각을 몇 번이나 거듭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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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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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홍색 저녁 노을에 싸인 장수산의 곡선미! 그것을 화가가 보게되면 그의 아름다운 채필(彩筆)을 아끼지 않겠더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이 보게되면 한번 읊기를 슬퍼하지 않겠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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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는 그것을 볼때 진정 울고싶은 생각뿐이었읍니다. 형님도 잘 아시는 바와같이 저도 이전에는 그러한 경색(景色)을 볼때에는 읊고 싶었읍니다. 그리하여 詩[시]니 무엇이니하며 쓰기를 좋아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詩[시]도 멀리 떠나 갔읍니다. 예술이니 무엇이니 하는것도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읍니다. 정말 검고 시커먼, 굽이진 길이 끝없이 눈앞에 둘러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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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라고하면 이전에는 나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의 불을 활활 타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예술이라고하면 나의 가슴위에 서늘한 샘물을 부어 주었지요. 그러나 그 희망의 불은 꺼지고, 그 예술의 샘물은 말랐읍니다. 이제는 정말 나의 가슴에 검푸른 재만 가득할 뿐이니 갈길조차 아득한 나의 앞길에 어찌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지 않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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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항상 울기를 좋아 합니다. 궂은비가 올때에도 울고, 하얀달이 뜰 때에도 울고, 아침 해가 비칠때에도 웁니다. 울음. 눈물! 요즈음 나의 생활은 눈물과 울음으로 뭉친 애달픈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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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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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다지 세상이 쓸쓸 할까요? 그리고 왜 이다지 재미가 없을까요? 어떤 때에는 눈물도 마르고 설움도 떠나고 그저 끝없는 권태만이 온몸에서 풍겨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온몸의 힘줄이 모두 풀어지고 온몸의 피가 모두 마르는듯하여 도무지 한시라도 살고싶지 않을때가 많이 있어요. 그때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우리 어머니는 왜 나를 낳으셨던가? 하고 쓸대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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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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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와같이 쓸쓸하고 재미없는 세상을 그래도 살아 간다는것이 심히 우습읍니다. 그리고 죽는다 산다 하면서도 오히려 죽기를 슬퍼하는것이 심히 가소롭습니다. 죽기도 싫고, 살기도 싫고, 정말 죽음과 삶중에서 어떤것 하나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약동의 길을 찾을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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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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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모두 오해겠지요. 철모르는 어린애 밖에 될것이 없지요. 그러나 이러한 철없는 소리가 모두 진실을 찾아가는 어떤 도정(道程)에 있어서 지껄이는 말이라면 오히려 귀여운 말이 아닐까요? 그리고 방황의 거리에서 울고 슬퍼하는것이 모두 복지를 찾아가는 나그네의 설움이라면 오히려 값있는 설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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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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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는 생각할수록 모든것이 귀하지 않고 허무한것 뿐입니다. 살기가 싫어요. 곧 죽고 싶어요. 그러나 죽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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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것도 없고, 즐거운것도 없고, 반가운것도 없고, 그저 맹물에 모래를 타먹는듯한 심심하고 깔깔한것이 온 몸에 가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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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한동안 사랑에도 심히 열중하였나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도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 한동안 돈에도 심히 분주 하였나이다. 그러나 그 돈에서도 얻은것은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허무. 권태. 실증. 저는 영원한 패배자(敗北者)의 하나가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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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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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면 형님도 저 月[월]씨를 생각하시겠지요! 月[월]씨로 말하면 이미 딴 사람이 꺾어 보지못한 깊은 후원에 피어있는 한 송이 월계였읍니다. 굽슬굽슬한 머리털! 반짝반짝하는 파란눈! 복숭아 꽃이 비치는 두 뺨의 고운빛! 이러한 그의 육체미는 나의 눈을 한없이 끌었으며 비단솜 같은 보드라운 마음! 비들기같이 고결한 인격, 그러한 그의 정신미는 나의 마음을 한없이 취하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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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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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둘도없는 나의 어린 양(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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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릎같이 다정한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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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또다시 어디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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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린 양(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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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향기로운 털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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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혼이 쉴만한 자리를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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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곳에 무지개를 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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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노래에 춤추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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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羊[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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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인 나의 어린羊[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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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같이 감사한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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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둘인들 다시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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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린羊[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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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불붙은 손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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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이 뛸만한 동산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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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곳에 꽃씨를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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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영화에 휩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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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시를 기념겸 써보았읍니다. 이처럼 나는 그이를 사랑하였지요. 그러나 모든것은 허무입디다. 그처럼 사랑하던 그이가 돌연 영원의 길을 떠날줄이야 어찌 알았겠읍니까? 사랑하는 그이가 죽었다 ── 저는 여기서 인생의 허무라는것을 처음으로 배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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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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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저는 인생의 향락(享樂) 이라는것을 다시 꿈꾸고 돈을 모아보기로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돈! 돈! 하고 뛰기를 좋아 했지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나에게는 허락지 않았읍니다. 어떤 사업에 실패를 하고는 다시 돈을 찾을 용기가 없어 졌읍니다. 사랑에, 돈에, 실패당한 저는 다시 이상(理想)이라는 수레를 타고, 어떤 아름다운 세계를 찾아 보려고 하였읍니다. 파리 유학을 꿈꾸고 부드러운 남국의 야자수 그늘을 그리워 하였읍니다. 詩[시]와 그림에 뛰기를 좋아했지요. 그러나 이것도 나에게는 시원한 해결을 주지 않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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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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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도 잘 아시는 바와같이 파리 유학의 꿈을 깨뜨린 저는 뒤통수를 치며 ✕✕일보사에 입사할때에는 적지않은 기대를 가졌읍니다. 2천만 민중의 표현기관! 여론의 정직한 대변자! 이러한 말은 나의 마음을 적지않게 흔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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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민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보자! 나의 이상(理想)을 살찌우고 따라서 민중의 가슴을 살찌워 보자고 적지않게 결심하였읍니다. 그러나 민중의 표현 기관이라는 간판아래 모인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신성한 사람이 아닌것을 깨달았을때 나의 실망이 어떠하였겠읍니까? 그들은 모두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며, 따라서 좋은 간판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모리배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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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년 동안이나 그 속에서 뒤볶이며 세상의 정직한 놈은 하나도 없다고,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금칠한 간판은 모두 손을 벌려 자기 배를 채우려는 도박장이다하고 속 깊이 느끼는 것을 좋아 했읍니다. 그리하여 이 도박장을 떠나야 한다고 얼마나 애를 썼겠읍니까? 그러자 이번 풍파를 기회로하여 수미(首尾) 좋게 ✕✕사를 떠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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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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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돈에, 이상에, 예술에, 모두 실패를 당한 패배아(敗北兒)는 이제 끝없는 공허를 느끼게 되었읍니다. 산이나 찾자. 물이나 찾자. 그리하여 울어나 보자고 생각하던 중에 북행하는 월엽(月葉)양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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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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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온천은 내가 예상하던 바와 매우 상위되는 점이 많습니다. 경치를 보던지, 무엇으로 보던지, 그러 합니다. 내가 예상하기는 모퉁이진 산길이 있고, 굽이진 시냇가가 있으며 따라서 산에는 녹음이 있고 시내에는 모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그와는 달리 하나도 일치되는 점이없이 아주 황무한 벌판에 바람 소리만 지나갈 뿐입니다. 그리고 멀리 남쪽으로 장수산의 연산이 꿈같이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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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한 벌판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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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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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싸움을 하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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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요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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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놀에 붉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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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은 풀의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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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을 껴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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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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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신천온천의 저녁 경치입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백여호 집이있고 온천호텔의 설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온천물은 매우 좋다고 합니다. 더우기 부인병이나 피부병에는 그 효험이 현저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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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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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번 안오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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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에 둘러있는 밀류(배경)는 그 풍경이 매우 단조롭지만, 온천물이 좋고, 황해금강이라고하는 장수산의 원경을 바라보는 것도 적지않은 취미가 있읍니다. 저는 그 장수산의 원경을 바라볼때 根浩[근호]형에게서 들은 칠불암(七佛岩)이니, 20동곡(二十洞曲)이니 하는 신비경을 생각하고 적지않게 가슴을 조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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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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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처럼 꿈같이 홀려있는 장수산의 연봉(連峰)을 바라보며, 나타났다가는 없어지고 쓸어졌다가는 나타나는, 여러가지 환상을 눈앞에 그리며 방황의 거리에서 헤매고 있읍니다. 그때마다 희망의 등대(燈臺)는 수평선 아래 잠기고 시커먼 아니키즘의 그늘이 몽몽(濛濛)히 뭉쳐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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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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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오리까? 죽어야 하겠읍니까? 살어야 하겠읍니까? 어느곳에 삶의 목표를 두고 그것을 아름답게 현실로 만들어야 하겠읍니까? 왜 사는지, 살아서 무엇을 하는지 그 의의 조차도 알지못하는 저는 생에대한 긴장미와 또는 그 힘과 열을 모두 잃어버렸읍니다. 시간은 곱다란 청춘의 자랑을 모두 빼앗아 가지고 영원히 가려는데, 힘없는 다리로써 방황의 거리에 서있는 나의 마음에 고뇌와 번민과 우울이 얼마나 가득차 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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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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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상을 잃은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바이불에 있는 말처럼 적은 문으로 들어가야 겠읍니까? 심륜(沈倫)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 문이 크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 문이 적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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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지 못하겠읍니다. 어떤것이 심륜이요, 어떤것이 생명의 문입니까? 이제 나에게는 이 세가지 길밖에 없는듯 합니다. 하나는 모든것을 부정하고 엄벙덤벙 되어가는 것을 하늘끝까지 땅 끝까지, 표박의 생활을 해보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래도 생에 애착을 두고 허무와 암흑중에서 그 무엇이나 한가지 실현해 보려는 것이요, 마지막 하나는 모든것에 끝을 짓자. 그러면 잘 있을거라고, 저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지요. 이 세가지 밖에 없겠지요. 어찌 나뿐이겠읍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 운명을 가졌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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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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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것은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우수운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한다. 귀하게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떠들기를 좋아 했지요.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잘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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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잘되면 얼마나 잘되고 못되면 얼마나 못되겠읍니까? 잘살고 못산다는 것이 모두 한순간에 나타나는 환상이 아니겠읍니까? 저는 아무리 인생을 긍정하고 거기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여도 정말 이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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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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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형님의 말씀이 힘있게 살아라! 주먹을 쥐고 살아라! 피땀과 눈물을 쌓는 곳에는 반드시 행복과 환희를 가져오는 새로운 열매가 있으리라하고 말씀 하셨지요. 과연 그 말씀이 정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내 앞에 보이는 모든 허무는 그야말로 피와 땀의 노력이 없는 까닭일까요? 백두산의 봉우리를 자세히 보려면 백두산밑을 조금 멀리 떠나서 그 봉우리를 바라 보아야 하는것과 같이 나의 생에대한 정체를 보려면 조금 더 노력과 분투로써 생의 길을 걸어야 하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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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나의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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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디로 가야 겠읍니까? 피곤한 다리를 끌고 조금 더 싸워 볼까요? 그리고 조금 더 신의 노래를 들어 볼까요? 승리는 사라지고 신은 죽었지요? 영원한 공허가 있을 따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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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심심하고 맛없는 사람의 생이여! 언제나 이 근심이 우리 사람에게서 해결되려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부터 영원에 줄기차게 흘러가는 공허의 물결에 사람은 영원히 울어야만 하는가? 사랑도 그렇고, 이상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모두 그런것이다. 그조차 사랑도 맛보지 못하고, 이상도 꿈꾸지 못하게 되기도 전에 시들어 죽는 서러운 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아담이 쫓겨난 에덴은 또다시 우리에게 오지 않으려는가? 아,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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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겠읍니다. 아무리 써도 그 말이 그 말이외다. 끝으로 형님의 건강을 빌 뿐입니다. 그리고 온천호텔 2층에서 싸늘한 자리를 껴안고 있는 아우는 다시금 적막을 느끼며, 사랑을 우습다 하면서 오히려 그 누구의 따스한 가슴이나 있으면하고 넓은 방안에 혼자 있음은 매우 안타까웠읍니다. 내일 저녁에 귀경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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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 2일
84
신천 온천호텔에서
85
춘성 아우 올림
【원문】청춘의 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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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