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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除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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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2
홍사용
1
제석(除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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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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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金正秀)  순후고풍(淳厚古風), 60여 세.
4
인식 ( 仁植)  정수의 아들, 침착 성실, 27~8세.
5
이씨 ( 李氏)  정수의 며느리, 28~9세.
6
가애 ( 可愛)  정수의 손녀, 7~8세.
7
최태영 (崔台永)  정수의 집주인, 40여 세.
8
여인 ( 女人)  바느질 맡긴 집의 행랑어멈, 30여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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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10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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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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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오후 6시경으로부터 동 12시까지 그 동안에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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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場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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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깨끗하지 못한 조선 실내. 정면은 밖으로 통하는 미닫이, 좌편은 아랫목, 우편은 장지, 장지 밖은 윗방이다. 방 안에는 종이로 바른 헌 농짝, 헌 반 짓 그릇, 쪽 떨어진 화로, 아무튼 모두 변변치 못한 세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직 자리 잡히지 못해 보이는 살림살이다. 창 밖에서는 바람이 몹시 분다. 아랫목에는 할아버지와 가애가 앉았고 윗목에서는 이씨가 바느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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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무슨 답답하고 슬픈 정조에 쌓였다가 새로금 화재를 돌리려는 듯) 날도 퍽은 쌀쌀해. 떡국 추윌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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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어리광으로) 할아버지 나 돈 한 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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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인두로 화로의 불을 돋우며) 그래도 그러거든, 금세 밥 잔뜩 먹 고무 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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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잠깐 몸부림을 하며) 싫 ― 여, 나 돈 한 푼만 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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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참 망해 못보겠네. 전에는 그러지 않더니 할아버님이 오시니까 버르장머리가 점점……. (눈을 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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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귀여운 듯이 가애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따 가만 두어. 그럼 어린것이 그렇지. 이 할아비나 있으니까……. (주머니 끈을 끌으며) 가 마 ― ㄴ 있자. 내 주머니에도 더러 귀 떨어진 동전이 한 닢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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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엉덩방아를 찧으며) 옳지. 수수돈. 난 쌀돈은 싫여. 커다란 수 수 돈이 나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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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정수를 힐끗 보며) 그만 두시지 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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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눈으로 가애를 보며) 망할 거, 그예 할아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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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무얼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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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아이 좋아. 나는 수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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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귀여운 듯 가애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허허 고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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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웃으며) 걔는 은전이나 백동(白銅) 돈을 싫고 일 전짜리 동전만 그렇게 커다라서 좋은 건 줄 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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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그럼 수수돈이 안 좋구. (돈을 가지고 손잡신을 하며) 이런 빨 ― 간 수수돈 큰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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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암 그렇지. 아무 거라도 크면은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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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를 보며) 그러나 무어 그것이 욕심이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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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를 보며) 그럼 그것으로 너 무엇을 살래. 왜떡을 살까 팔뚝팔뚝 뛰어넘는 오뚝이를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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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나 눈깔사탕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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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아따 사탕도 좋지. 그럼 시방 사 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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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응 할아버지 나 업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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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정수는 모르게 얼른 입을 악 물었다가) 아이 어린 애 염치도. 금세 할 아버님께 돈까지 줍시사 해갔고 또 무어 업고 가자고. 이제 응석이 아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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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아따 아무려나 그것도 괜찮어. (가애를 업고 일어나려 하다가) 그러나 바깥이 너무 추워서 아가가 감기 안 들까.
37
가애    괜찮어.
38
정수    아따 그럼 아무러나 그렇게 하지. (일어서며) 그런데 얘 애비는 어째 입때 안들어오누.
39
이씨    오늘이 그믐이고 또 무엇을 좀 얻어야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늦는게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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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저녁도 안 먹고 배는 고픈데 어디로 떨고 다니노. 무엇을 얻다니, 돈? 아따 장천 그 놈의 돈! 그럼 네 애비가 이걸 보면 또 사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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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 들어오기 전에 얼른 다녀오지. 그러나 가게가 그리 멀지나 않는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하다가) 옳지. 그 휘양을 좀 쓰고 가야지 머리가 시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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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어린 애도 그 ― 예 할아버님께……. (웃는 얼굴로 일어선다)
 
43
(정수, 가애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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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앉으며 손끝을 모아 입에다 대고) 호 ―. 손끝이 시리구나. 아주 이제 어둡네. 바느질 한 가지로 오늘 해도 그만 지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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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을 그어 석유등잔에 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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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심지가 나쁜가. 석유가 다 ― 달었나. 어째 그리 침침해. (심지를 돋우고 다시 바느질을 하며) 어째 이때껏 안 찾으러 오나. 그렇게 급하다고 재촉을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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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서  아씨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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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누구요. (미닫이를 열고) 응 참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시방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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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다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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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네 시방 막 ―. (시치미를 뜨며) 그렇지 않아도 "찾으로 올 때가 됐는데 어째 아니 오나."하고 시방 막 ― 혼잣말을 하던 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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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때고 인두판을 찾으며) 추운데 잠깐 들어와요. 이제 인두 질만 치면 고만이니 그 동안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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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방으로 들어오며) 저녁을 벌써 다 ― 해 잡수셨어요? (앉으며 방바닥을 짚어 보고) 방도 퍽 써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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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단촐한 식구에 옹솟골에만 불을 조금씩 지피니까……. (인두를 화로 전에 '툭’ 부딪혀 떨어 입으로 '훅’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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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이 씨의 인두질 치는 걸 들여다 보며) 아이 바느질도 퍽은 얌전하셔라. 어쩌면 깃달이도 이렇게 예뻐요. (웃는 듯) 우리 아씨가 이번 옷을 입으시면 퍽 좋아하시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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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무얼 급하게 하느라고……. 또 손끝이 곱아서. (손끝을 얼른 입에다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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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그래도 원체 솜씨가 퍽 얌전하시니까……. 우리 아씨 옷 성미가 매우 까다로우시지만 아마 이번 옷은 꼭 맘에 드실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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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렇게 옷을 취택해 입는 이에게 만일 이 옷이 성미에 맞지 않으면어 떡 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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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무얼요. 이만하면 상관 없어요. 하기는 요새의 옷번새는 날마다 달라진다니까……. 무슨 붕어밸도 요새는 좁아지고 저고리 길이도 짧게 입는데 ―. 그 기생들 입은 옷모양을 좀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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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기생? 나같이 이런 구석에만 꾸어박혀 사는 신세가 그런 기생을 어떻게 보았겠소. 그런데 참 당신 아씨라는 그이는 무엇 하는 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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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보아하니 아마 그도 전에는 기생이었나봐요. 시방은 그저 남의 소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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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소실? 그럼 아마 퍽 호강으론 지낼껄. 이런 바느질도 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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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흥 호강이요? 그렇지. 호강은 호강이지. (한손을 들어 제 가슴을 얼른 가리키며) 이런 년들처럼 옷 밥 걱정도 그리 안 하고……. 남편 되는 나리만 한 번 와 주무시고 가면 아주 담박 심평이 피어 야단 이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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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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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글쎄 말씀을 좀 들어보셔요. 접때 처음 그 집 행랑에 들었을 적에는 어찌도 모든 것이 변만스럽고 우습던지요……. 엊저녁에도 쥔 나리가 주무시고 간 덕분에 나도 세찬이라고 광목 열 자 고무신 한 컬레가 생겼답니다. 그래 아씨가 흥만 풀리면 좋은 수가 가끔 많지요. 이런 드난 꾼에게도…….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나리가 체꿀 작은 첩한테 가 주무시리라나. 그래 시방쯤은 아씨가 한창 통통쯩이 나 야단 이지요. 참 우스워 죽겠어. 그래 잘 먹고 잘 입고 호강은 하는 대신 장 ― 그 짓으로 세월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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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아이 참 변스러워라.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잘 살고 고만이지. 그 밖 또 무슨 걱정이야. 이렇게 바느질 품팔이를 해가며 먹고 사는 팔자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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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왜요. 더러 군색한 때는 있겠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지어 입고 먹고살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상팔자지요. 그렇게 잡스런 생각만하고 있을 까닭도 없고……. 더구나 바느질 솜씨도 저렇게 얌전하시겠다 아씨 같은 이야 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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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까짓 것 바느질도 남의 옷만 밤낮 지어주는데 암만 잘한들 무 얼하오. 내 발등 가릴 것이 있어야지. 오늘이 섣달 그믐, 내일이 명일이라도 빨래 하나 못해 입고 솥에도 그리 변변히 끓일 것도 없으니……. 또 별안간 이사는 갓 해놓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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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방을 휘 둘러보며) 윗방도 한 간인가요. 참 저 위의 그 전 사시던 댁 보다는 방이 두 간이나 되고 넓어서 퍽 좋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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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방만 넓으면 무얼 하오. 그나마 저 윗간 냉돌 찬 곳이 내 차지라오.
70
여인    참 아까 아기 업고 나가시던 영감님은 누구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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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우리 시아버님이시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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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시골 계시다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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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예 ― 시골 일가집에 계시다 오셨어요. 전에는 우리 집도 남부럽지 않게 꽤 괜찮이 살던 집안이더니 그만 작은 시동생이 난봉을 피워서 왜채(倭債)에 다 ― 털어바치고 벌써 3년째나 아 ― 니 이 설만 쇠면 4년째나 되지요. 온 집안이 모두 거산(擧産)을 해 이 지경이 되어서 이렇게 성명도 없이 세방구석으로만 굴러다닌다오. 그래 시 아버님께서는 시골 일가집에 가 아이들 글 가르쳐 주시고 계시다가 그저께 바로 이 집으로 이사오던 날 우리 바깥 양반이 맏 아드님이니까 그래도 맏아드님을 찾아서 명일이라고 쇠려 오신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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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바깥 양반께서는 무슨 생화를 하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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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집안이 별안간 그렇게 되니까 별로 신통한 생화도 없지요. 그저 세상 모르고 고이 길러 글공부나 하던 책상물림이니 어디 별안간 만만한 생화 ― ㄴ들 어디 얻어 만나기가 그리 쉬웁소. 그래 하는 수없이 날마다 하루하루 그 날 그 날 벌어서 먹고 살지요. 어떤 때는 그나마 벌이도 없어서 버는 날은 먹고 못버는 날은 굶고……. 굶는 것도 원체 많이 굶으니까 이제는 아주 시들하다 못해 진저리가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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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아이 딱해라. 더구나 어린 아기하고……. 그래도 바깥 양반이 학교 공 불 하셨으면 월급이라도 좀 타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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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흥, 학교도 일본까지 다 ― 갔다 왔기는 왔지만 그것도 내 것이 있을 제 말이지. 시방은 아마 그리 월급짜리도 만만치 못한가 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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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 ― 끔 돈 많이 줄테니 오라고 하는 데도 더러 있기는 있나 봅 디다 마는 아마 그런데는 또 뜻이 아닌 게야. 그러기에 그런 때마다 "내가 아무리 죽게 되였기로"하며 연방 눈살을 찌프리고 어떤 때는 시골 같은 곳으로 몸을 피해 가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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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참 사내 맘들은 이상도 해. 왜들 그런지……. 집에 아범도 가끔 그런답니다. 그냥 모꾼 서는 거나 막벌이 보담은 굴 뚫는 데 남포 질꾼이 돈을 퍽 많이 몇 갑절씩 번대요. 그런데 그런 것은 해보래도 일부러 아니 합니다그려. 그것은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가는 일이 라나. 천한 목숨이 죽기는 그리 원통한지……. 온 남도 죽을 일 이면 일부터 시킬라고요. 죽긴 왜 죽어. 괜 ― 히들 하기 싫으니까 그런 핑계지……. 그래 그럴 제마다 이 어멈은 아범하고 노상 싸움이랍니다. 이 댁 바깥 양반께도 아마 그런 남포질판에서 오시란 게로군요 무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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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글쎄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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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멀리서) 아가, 손이 시리냐. 그럼 얼른 들어가 엄마더라 호 ― 해달 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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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아이 참 가야지. 너무 오래 있어서 또 통통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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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무얼, 얼마 있었다고 고 동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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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가애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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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엄마, 난 솜사탕 사 먹었어. (팔을 벌리며) 이 만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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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참 잘 사 먹었다. 그 추운데 할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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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아녀, 나만 안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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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참 희한한 세상이야. 여전 솜뭉치 같은 그것이 사탕이겠지. 그래 동전 한 푼을 주고 샀더니 날더러도 그걸 좀 먹으래. 그 커다란 뭉치를 큰길 거리에서 이 늙은 할애비더러. 백죄 자꾸 먹어보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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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의 얼굴을 기웃이 들여다 보며) 온 고거 참 신통하기라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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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애    그래 "이런 걸 엄마가 알면 흉볼테니 집에 가선 아무 말도 말자." 고 할아버지가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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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온 고거 참, 그런 말까지 어찌 다 ― 하하하.
92
(이 씨는 바느질 인두를 다 ― 치워서 개여 보에 싼다)
93
여인    모두 얼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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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저고리 하나에 열 냥씩만 내구려. 거기는 처음이고 또 바느질도 좀 서툴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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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그럼 둘에 스무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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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렇지.
97
여인    그럼 이걸 어떡하나……. (괴침에서 돈을 꺼내며) 가지고 온 것은 스물 닷냥 거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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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글쎄 ― 바꿀 돈이 없는데요.
99
여인    그럼 아무튼 이걸 받어나 두슈.
100
이씨    (돈을 받으며) 받아나 두면?
101
여인    아따 그럼 내 이따가라도 아범 바지감을 하나 가지고 올테니 그거나 좀 꼬매 주시구려. 댓냥은 너무 싸지만 좀 생색 좀 보아서.
102
이씨    아따 아무러면 대수요. 그렇게 하지요.
103
여인    (옷보퉁이를 들고) 그럼 갑니다. (미닫이를 열며) 이제 벌써 낼이면 새해니 새해에 세배 나옵지요. 그럼 새해엔 부자될 꿈이나 꾸십시오. 묵은 해의 모든 근심 걱정일랑 액맥이 연 띄우듯 다 ― 떠나 보내시고…….
104
이씨    왜 이따라도 또 올테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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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웃으며) 참 이따가 또 옵지요.
106
이씨    어둔데 조심하오.
107
여인    네 ―.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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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미닫이를 닫고 앉으며) 여편네가 퍽 수다도스러웁다.
109
정수    행랑 것들도 이제는 시속이 달라져서 전에는 사부집 하인들이 상전의 전갈하는 말씨라니 참 제법이었는데……. 양반이면 남의 집에 가 "이리 오너라"하고 찾고 구실아치는 "별감 별감"상놈은 "하님 하님"하던 것을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합쇼"공대를 또박또박 해야 한다. 참 고약한 세상도…….
110
이씨    시방이야 어디 양반 상하가 있는 세상입니까.
111
정수    하긴 그도 그렇지. 그런데 그 해가는 것은 설빔 옷인게지?
112
이씨    아마 그런게지요.
113
정수    하긴 우리 집만 이렇게 쓸쓸하지. 밖에는 그래도 설이라고 야단 들이더라. 세찬 김이 오락가락 집집마다 떡 치는 소리를 철썩철썩.
114
이씨    아마 이 동네는 요전 살던 데보다는 퍽 부촌인가 보아요. 겉으로 보아도 모두 풍성풍성한 것이…….
115
정수    (담배를 담아 피우며) 그렇지 북장동 여기가 옛날부터 부명(富名) 하는 이가 많이 살던 곳이지. 그러나 우리 네가 이런 부촌에서 사는것은 좀 덜 좋아. 남부끄럽게 내 흉만 잡힐 뿐이지. 남들은 모두 드난꾼을 두고 매우 흥청거리고 사는데 나는 내 손으로 물 긷고 밥 짓고 해야지 또 거기다 봉지쌀 푼거리 장작 툭 하면 열 냥 스무 냥 짜리 전당질 외상값 등쌀, 더구나 그악한 집주인이나 잘 못 만나면 온 동네가 떠달아나도록 거친 목소리로 눈깔을 부라리고 집세 내라고 재촉 조련질 에 ― 창피해. 아무튼 우리 네같이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만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좋아.
116
이씨    하긴 그래요. 남의 일 보고 내 꼴 보면 없던 심정만 저절로 나고……. 저런 어린 것을 기르는데도 남의 집 자식들은 호사스럽게 고운 옷을 입 히고 잘 멕여 잘 가꾸는데 내 자식은 이런 명일 때 도일 년의 한 번인 설이것만은 잘 멕이지도 못하고 입히지 못 하니…….
117
정수    그러니 어쩔 수 있나.
118
가애    엄마 나 설에 꼬까옷 해줘 ― . 때때댕기하고.
119
이씨    저것 보십시요. 어린 것이라도 무슨 말이든지 듣기가 무섭게 장 ― 저런 답니다.
120
정수    그러니 그런 걸 해주구는 싶지만 무어 돈이 어디 있나.
121
가애    그래도 난 몰라…… 때때댕기…… 목화댕기.
122
정수    목화댕기는 또 무어야. 왜 제비추리에다 면화 송이를 다나.
123
이씨    (웃으며) 시체(時體) 비단에 목하부다이란 게 있는데 그걸 걔는 목화 란답니다. 아따 가만 있거라. 내 이따 때때댕기 하나 사줄게. 아까 바느질삯 받은 거 스물닷 냥 있으니 번쩍번쩍하고 좋은 넓다란 금박 댕기 내 사다 주마.
124
가애    아이 좋아. 때때댕기 나는 좋아.
125
정수    온 그렇게 좋담. 고거 참, 하하하.
126
가애    엄마 그럼 시방 사다 줘 ―. 때때댕기 ―.
127
이씨    온 아이도 참 글쎄, 시방이 무어야 내 이따가 설겆이나 다 ― 하고나서 나가 사다줄게.
128
가애    그럼 할아버지 이딴 꼭 사다주?
129
정수    암 ― 사다 주고 말고.
130
가애    아이 좋아. 그럼 엄마 이따 얼른 사다 줘 ―.
131
이씨    그래 꼭 사다 줄게. 걱정 말고 거기 조신이 좀 앉았어. 할아버님 고단 하신데 좀 누으시게. (일어선다) 내일 아침은 또 무얼 끓이누.
132
가애    왜 할아버지 눈썹 세시게.
133
이씨    (윗방으로 내려가며 웃는다)
134
정수    눈썹이 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135
이씨    (윗방에서) 걔가 아까 오늘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세는 법이라고 그랬더니 그 말을 할아버님께다 옮겨씁니다 그려.
136
정수    옳 ― 아, 참 그도 그러렸다.
137
가애    그럼 어른들은 자도 눈썹이 안 세우.
138
정수    그렇지. 그런 법도 있지. (목침을 베고 눕는다)
139
가애    무 얼 할아버지 눈썹이 저렇게 세였는데 할아버지도 잠은 퍽 많이 잤구려.
140
정수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잠만 자다 늙어서 이렇게 터럭이 허 ― 옇게 세었단다.
141
가애    왜 ― 늙으면 털이 세우.
142
정수    암 ― 그렇지.
143
가애    그럼 할아버지 이제 자지 말어. 저 눈썹이 더 세면 보기 싫어 어떡해.
144
정수    벌써 잠자다 다 ― 세인 눈썹을 이제서 잠만 안 자면 무얼 하나.
145
가애    그래도 보기 싫어. 자지 말고 일어나 얘기나 해……. (정수를 끌어 일으킨다)
146
정수    (억지로 일어나며) 온 고거 참, 얘기는 별안간 또 무슨 얘긴고.
147
가애    왜 옛날 얘기.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올라가 해 되고 달 되고 그런 얘기.
148
정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나.
149
가애    왜 아까도 썩 좋은 옛날 얘기 해주마고 그랬지.
150
정수    내가 언제 그랬던가…….
151
가애    그럼 안 그랬어?
152
정수    온 그거 참. 그럼 가마 ― ㄴ 있자. 온 무슨 얘기를 하노.
153
가애    아무 거라도 얼른.
154
이씨    온 얘기는 또 무슨 얘기야. 할아버님 편히 좀 누워 계시게 조신 히 좀 앉았으라니까.
155
정수    아따 아무려면 대수……. 가마 ― ㄴ 있자. 그래 옛날에 한 사람이 있구나.
156
가애    할아버지 왜 옛날에는 똑 한 사람만 살우.
157
정수    응 글쎄 얘길 들어야지 무슨 얘기든지 옛날엔 첫번에 다 ― 한 사람이란 다. 그래 옛날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임금님이야 임금님이란 너 무엇인지 아니?
158
가애    몰라.
159
정수    임금님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야.
160
가애    높은 사람? (한 팔을 높이 들며) 저 ― 하늘 꼭대기의.
161
정수    아니 하늘 위가 아니라 하늘 아래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야.
162
가애    (저 혼자 무엇이 신기하였는지 신이 나서) 할아버지 저 ― 기 뒷산에 솔개미가 날라가다 앉은 맨꼭대기 산에서 벌써 그 때 ― 그 때 ― 어떤 사람이 총을 '탕’ 하고 놓겠지.
163
정수    온 고거, 그런 게 아냐.
164
가애    아마 그 사람이 솔개미를 잡으려던게지 할아버지.
165
정수    글쎄…….
166
가애    그 사람이 솔개미를 잡았을까 못 잡았을까.
167
정수    몰라 ― .
168
가애    할아버지도 그건 모르우.
169
정수    몰라 ―. 나는 그걸 어떻게 아나.
170
가애    그럼 할아버지도 총 놔 봤수.
171
정수    아니 나는 총두 놀 줄 모른단다.
172
가애    이런, 총두 놀 줄 모르고.
173
이씨    그거 참 버르장머리 없이 할아버님께 막…….
174
정수    글쎄, 이제 내 옛날 얘기나 들어야지.
175
가애    그래.
176
정수    그런데 그 임금님은 여왕이야. 너와 같이 계집애 임금.
177
가애    할아버지 나도 임금님이우?
178
정수    그렇단다. 너도 임금님이란다. 그래 그 임금님은 아주 착하고 영리하고 또 퍽 어여쁜 임금님인데 그 임금님은 늙은 할아버지도 있고 임금님을 귀여워해 줄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단다. 신하도 많고 백성도 많고 갑옷 투구한 군사도 많고 나쁜 놈 잘 잡아가는 순검도 많고, 또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얻기도 어려운 온갖 좋은 보물도 그는 퍽 많이 가졌었더란다.
179
가애    때때댕기도 가졌었나.
180
정수    암 ― 그까짓 거야 얼마든지 많이 가졌지.
181
가애    나는 이따가 하나만 살텐데…….
182
정수    그런데 그 임금님은 한 가지를 갖지 못했어.
183
가애    무엇 꼬까옷?
184
정수    아니 꼬까옷이 아니라 무엇이더라……. (무엇을 생각하는 듯) 옳 ― 아, 참 그는 거짓말을 갖지 못했어. 거짓말을 들을 줄 몰랐단다.
185
가애    나도 몰라.
186
정수    그래 그 거짓말이 날마다 임금님에게로 도적질을 하러 가는데 그것이 무엇 같을고. 옳지 참, 그것이 가만히 똑 바람처럼 아주 저렇게 부는 바람이 되어서……. 그래 솨 ― 하는 그 얄궂은 바람이 한 번 임금님 대궐에 스르르 불 적마다 무엇이든지 영락없이 없어져 버리는구나. 솨 ― 하는 바람이 맨 첫 번 불 적에는 늙은 할아버지가 죽고 두 번째 솨 ― 하고 불 적에는 귀여워해주던 아버지가 죽고 세번째 솨 ― 하고 불 때에는.
187
(창 밖에서 멀리 "여보시요"부르는 소리) 무척 사랑하던 어머니가 죽고.
188
창밖에서  (남자목소리) 여보 주인 계시오.
189
가애    할아버지 누가 찾아요.
190
정수    무어 누가 왔어?
191
가애    응.
192
정수    거기 누가 왔오.
193
창밖에서  (차차 가까이) 네 ― 주인 좀 봅시다.
194
정수    온 그 놈의 바람 소리 때문에 세상 무슨 소리가 들려야지 귀는 어둡고.
195
가애    아마 그 바람이 무얼 또 도적질하러 왔남.
196
정수    (가만히) 온 고거 아냐. 그런 것은 얘기에나 그렇지. (창을 열며) 누구를 찾으시오.
197
창밖에서  댁이 이 방에 주인이시오.
198
정수    네 ―, 그렇소.
199
창밖에서  뉘댁이시요.
200
정수    나는 김정수란 사람이오.
201
창밖에서  어떻게 쓰시오.
202
정수    (좀 거북하게) 바를 정자 빼어날 수자요.
203
창밖에서  예 ― 김정수 씨. 그럼 당신이 분명 이 방의 주인이시죠.
204
정수    그렇소. 그런데 당신이 그건 왜 물으시오.
205
창밖에서  아따 물을 만하니까 묻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시나 보구려.
206
정수    내가 알 수 있소. 당신도 아마 나를 모르는가 보기에 그렇게 이 늙은이를 별안간 어린 애 성명 묻듯한 것이 아니요.
207
창밖에서  모르긴 왜 몰라. 그래 당신이 이 방에 든 주인이라면서……. 그러면 당신이 이 방에 왜 들었오.
208
정수    그게 무슨 말이요. 이 방에 왜 들다니. 왜 드는 것도 있오.
209
창밖에서  아따 이런 답답한 말 보았나. 이 방에는 어떻게 와 들었느냐 말이요.
210
정수    세 들었오.
211
창밖에서  세요? 누구한테.
212
정수    이 집 임자한테서요.
213
창밖에서  이 집 임자? 이 집 임자가 누구란 말이요.
214
정수    그건 모르지요.
215
창밖에서  그건 모르다니. 여보 그게 말이요 절이오. 그래 이 집에 와 살면서 이 집 임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단 말이오. 터럭이 허―연 노인네가 어째 그렇소.
216
정수    글쎄 터럭만 센 것이 죄일는지는 몰라도 그저 저절로 세인 이 터럭을 어찌하오. 이 집에서 이도(移徒)를 왔으면서 미처 주인도 찾아보지 못한 것이 내 실수일는지는 모르나 늙은 몸뚱이가 이로 찾아디니며 "이렇게 왔습니다"하고 인사 여쭐 수도 없고 또 이 집을 내가 얻어 온 것이 아니라 내 아들 놈이 저희들 친구 발련으로 어떻게 얻어 온 것이니까…….
217
창밖에서  여보. 보아 하니 그래도 그렇지 않은 노인네가 어째 그렇소. 당신은 남의 정신에 살우. "아들이니 손자니"점잖치 못하게 남에게 의거릴 하고 앉았으니. 아들 둔 이들 매우 팔자 좋구려. 툭하면 밀어버리기에. "나는 몰루. 아들이 알리."하며…….
218
정수    그럼 당신은 남의 애비 자식 사이도 믿지 않는단 말이요.
219
창밖에서  당신네 민적등본을 내여가지고 오지 않는 바에야 당신의 부자간 어찌 된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 까닭이 있소. 그 따위 덜 된 수작은 다 ― 고만 두고 내가 이 집 주인 최태영이니 바로 내가 이집의 임자야. 그러니 어서 세돈이나 내시오.
220
정수    이런 제 ― 길 이를 어쩐담.
221
이씨    (장지를 방싯 열며) 여보셔요. 바깥 양반들 말씀하시는데 이런 여인이 참견하는 것은 매우 안 됐습니다만은……. 이도 와서 이때껏 세 돈을 내지 못한 것은 퍽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집으로 이사오 기는 사랑에서 친구들 발련으로 알아 한 일인데 시방 마침 사랑에서…….
222
창밖에서  여보시요. 저 분이 노인의 부인이십니까.
223
정수    아니오. 내 며느리오.
224
가애    우리 할아버지야.
225
창밖에서  (온순하게) 그래 정말 너의 할아버지야.
226
가애    응.
227
창밖에서  그럼 다소간 노인께 실례가 되었습니다.
228
정수    천만에…….
229
창밖에서  그래 너 몇 살이냐.
230
가애    여덟 살.
231
창밖에서  (가애를 보고) 응…… 그래
232
(정수를 보고) 여보시오. 그럼 어서 세돈을 주십시요. 몸도 떨리고 발도 몹시 시려서 이렇게 오래 서서 얘기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233
이씨    글쎄 그러니 사정을 좀 보아주셔야 하겠습니다. 시방 마침 사랑에선 어디 출입하고 없으니까 들어올 동안까지만 댁에 가셔서 기다려주시면 이따는 기별해드리겠습니다.
234
창밖에서  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이따는 이따 사정이고 시방은 시방 경웁 니다.
235
이씨    그렇지만 잠깐만 기다려주셨으면…….
236
창밖에서  안 됩니다. 그렇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발도 시리고 얘기도 좀 길어질 모양 같으니까 잠깐 들어가 앉겠습니다.
 
237
(최태영은 방에 들어와 앉는다)
 
238
정수    잠깐만 기다려주우.
239
최태영   글쎄 그것은 못 되겠습니다.
240
정수    그러나 시방은 돈이 없으니 어떡허우.
241
최태영   천만에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설마 돈 없이야 세 드셨을라 구……. 또 벌써 며칠째 드셨으니 시방 세돈을 내신대야 그리 선금도 아닙니다만은……. 그것도 몇 달째 들어오던 끝이면 더러 몰라도 이렇게 처음부터는 선금이 아니면 도 ― 저히 할 수 없습니다.
242
정수    그렇지만 세상 일이란 매양 사정이라는 것도 있지 않소. 더구나 이렇게 공교히 된 형편에는.
243
최태영   아니올시다. 사글세 선금 받는 데 사정이 무슨 사정입니까.
244
정수    아따 그야 옳거나 그르거나……. 아무리 경찰서 법이라 한들 이런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좀 보아주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겠소.
245
최태영   그러나 이것이 또 무슨 그런 경찰서 법률도 아닙니다. 그저 복덕방 규칙 이지요.
246
정수    글쎄 나는 늙은 사람이 되어서 그런지 시체(時體)에 툭하면 "무슨 규칙 무슨 규칙"하는 그런 훌륭한 규칙도 잘 모르오만은……. 그리고 또 이것이 어디 복덕방 가승에게 부탁해 얻은 것이오.
247
최태영   허 ― 이런 딱한 말씀 보았나. 그것이 노인장이 점점 오해의 말씀 이지요. 가승(家僧)이고 집주름이고 간에 이 세상에 선돈을 아니 받고 집세 놓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또 복덕방 소개가 아니란 말씀을 하니말이지마는 이 집이 비어 있기는 이 겨울 접어들며 벌써 석 달째나 거저 비어 있기는 있었었오. 그래 사글세나 또 좀 놓아 볼려고 벼르던 차에 일전에 누가 나없는 동안에 이 집 까닭으로 몇 번인지 찾아오기는 찾아왔더랍디다. 그러나 나에겐 이때껏 직접 대해 아무 말도 없었으니 댁에선 혹 그와 아무러한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말 없이 집부터 들여놓은 그가 물론 큰 잘못이고…… 또 그가 나를 찾아왔다가 나는 만나 보지도 않고 그런 짓을 해놓았을 때는 아직 누군지는 모르나 필시 나와 매 ― 우 친하기도 하던 사람일런지도 모르겠소.
248
그러나 제 아무리 친한 친구이기로 쇠뿔도 각각이고 염주도 몫몫이라고……. 나도 그리 과히 빽빽한 벽창호는 아니올시다만은…….
249
이씨    (애교있게) 참 퍽 너그러웁고 착한 양반이시여.
250
최태영   (간사한 어조로) 아 ― 니 내가 무어 그리 썩 착한 사람도 되지는못 합니다마는 그저 이런 집이라고 몇 채 있으니까 그거나 가지고 선돈만 내는 자리면 어렵고 구차한 사람들에게 더러 빌리어 줄 뿐이오. 이때껏 그리 자선사업을 한 일은 없으나 돈만 얼른 내면은 그 리더 길게 차리고 앉아서 지긋지긋이 조르는 그런 못된 성미를 가진 놈은 아니올시다.
251
정수    (일부러 꾸미는 어조로) 아무튼 이 세상에서는 더 볼 수 없는 갸 ― 륵한 친구요.
252
최태영   네 ― 무얼 그리 너무 칭찬만 해주실 것도 아닙니다. 어떻든 시방 세 돈은 내셔야 하니까요.
253
정수    글쎄 시방은 돈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오.
254
최태영   (목소리가 거칠어져서) 아 ― 니 그럼 여보, 왜 세돈도 없이 염치 좋게 남의 집에 와 들었습니까. 이건 누구에게 흑작질로 떼쓰러 다니우 늙은이가.
255
정수    글쎄 이 집을 내가 어디 얻어 들은거요.
256
최태영   이이가 정신이 있나 없나. 그럼 시방 이 집에 누가 들어 있단 말 이오.
257
정수    글쎄 내 아들이 친구 발련으로…….
258
최태영   여보 그런 쓸데없는 소린 말어요. 세상에 이런 흑작꾼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당신 말은 믿을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소.
259
또…… 당신을 이도(移徒)시켜 주었다는 그 사람이 이때껏 나도 안만 나볼 때는…… 그만하면 다 ― 알조지 무어요. 온 이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딨어서. 당신도 그만 나이나 잡쉈으니 세상 풍정도 다 ― 겪어 알 만하겠구려. 여태껏 조선사람들은 남만 의뢰하다 망했다는데 당신도 터럭이 저렇게 허 ― 연 노인이 아직껏 누구를 좀 의뢰 해가지고 더 살아 보랴드우?
260
정수    (한숨을 쉬며) 나는 이때껏 아무 죄도 없이 늙은 사람이오. 또 누구에게 의뢰라는 것도 그리해 본 일은 없겠지만 그만 작은자식 하나 잘못 둔 탓으로 그 놈이 난봉을 피워서 이 지경이 되었소.
261
최태영   (정수의 앞으로 바싹 다가 앉으며) 아 ― 니 이건 또 자기의 잘못을마저 작은아들에게다 의뢰를 하려드우.
262
정수    (떨리고 슬픈 어조로 가만히) 아가 너는 저 엄마한테로 가…….
263
가애    싫어.
264
이씨    그래라. 이리 내려온.
265
가애    (몸짓을 하며) 싫어. 나는 할아버지한테 얘기 들을 껄.
266
정수    얘기가 무슨 얘기야.
267
가애    왜 옛날 얘기.
268
정수    옛날 얘기도 그렇게 하나.
269
가애    그럼.
270
정수    이제 이따 아가가 잘 적에 할아버지가 천 ― 천 ― 히 생각해 가며하지.
271
가애    싫어. 이따가 안 잘걸. 눈썹 센다며…….
272
정수    온 이걸 어떻게 하노.
273
이씨    그래도 그러거든 이리 내려오라니까.
274
가애    나는 좀 싫어……. 그래 할아버지 그 임금님 어머니마저 죽었는데?
275
이씨    (힘없이) 어린 애도 참…….
276
정수    아따 가만 둬 ― . (잠깐 있다가 떨리는 어조로) 그래서 그 임금님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그 몹쓸 거짓말 바람이 자꾸자꾸 솨 ― 하고 불 적마다 모든 보물도 죄 ― 다 없어지고 나중에는 커 ― 다 란 대궐 집마저 없어져서 집도 없이 거지가 된 임금님이 길거리로 이리 ― 저리 ― 떠돌아 다니게 되었단……다……. (힘없이 가슴에 무엇이 복받치는 듯)
277
가애    (입에 침이 없이) 아이 참 ―.
278
정수    그래서.
279
최태영   (분노한 음성으로 크게) 여보.
280
가애    (소스라쳐 놀라서) 엄마 ― 응……. (정수의 무릎으로 엎어질 듯 덤빈다)
281
정수    왜 그래 응? 아가 놀랬니?
282
이씨    그러기에 내가 진작 이리 내려오라고 그랬지.
283
최태영   (잠깐 자기의 태도가 좀 무색함을 느끼면서) 아 ― 니 여보. 오늘이 섣달 그믐이고 나도 바쁜 사람이요. 그래 남은 세돈 달라고 옆에 앉았는데 당신은 어린 애 재롱 보고 앉았소. 배포 유하게.
284
정수    아니 무슨 내가 배포가 유한 것이 아니라 세돈 졸리는데 이 어린 것이야 무슨 죄란 말이요. 이 지긋지긋한 꼴을 이 철 모르는 어린 것의 눈에는 보여주고 싶지 않구요.
285
최태영   그러니 어여 세돈을 내요.
286
이씨    여보셔요.
287
정수    (기운 없이) 글쎄 없는 돈을 어떻게 냅니까.
288
최태영   (추근추근하게) 그럼 왜 멀쩡하게 남의 집을 들었어요.
289
정수    온 이를 어쩐담. 잠깐만 기다려주오.
290
최태영   (얼른) 안 돼요.
291
정수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292
최태영   돈을 내시우.
293
정수    온 이걸 어째. 목을 베면 피나 나지 마른 나물 꺾으면 무슨 수야…….
294
최태영   (어근목을 써서) 아 ― 니 그래, 당신 아들을 정말 기다리면 또 무슨 수요.
295
정수    (힘없이) 돈을 가지고 올터이니까…….
296
최태영   (비꼬는 어조로) 흥 돈! 돈을 가지고 와요? 그럼 왜 입때 아니 들어오 ― . 아직도 시간이 못돼서 그러우? 시방은 밤이라 은행문도 닫혔어요. (혼잣말로) 담구멍을 뚫으러 다니나, 무슨 돈을 밤에 구 하러 갔담. 이거 정말 흑작질 판이로군.
297
정수    (애걸하는 어조로) 아니 잠깐만 더 기다려주구려. 이제 곧 들어올것이니까…….
298
최태영   (고개를 돌리며) 안 돼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다시 와서 말 하더라도 할 수 없소. 어여 내슈.
299
이씨    여보셔요.
300
최태영   (새삼스럽게 딴전을 피우는 듯한 간사한 어조로) 네 ― 무슨 말씀 계셔요.
301
이씨    네 ― 사랑에서 들어올 동안까지만 잠깐 더 기다려주셔요.
302
최태영   댁에서 무슨 사랑 쓰셔요. 이 곁방살이가…….
303
이씨    (엄숙하고도 흥분된 어조로) 아 ― 니 여보셔요. 살인죄수도 죽을 때에는 소원도 묻고 말미도 준다는데 그래 다 ― 같이 인정 쓰고 서로 사는 이 인간에서 그만 사정이야. 더구나 잠깐만 기다리면 돈을 곧 드린다는 걸. 그거야 아무리 도척이 같은 이 세상 인심이기로 못 듣겠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304
최태영   법이요? 내가 무슨 법률로 잘못한 것이 있어요?
305
이씨    (열에 뛰여) 내가 법이랬소. 법률이랬지. (용기가 차하여) 아니 참 법 이랬지.
306
최태영   (픽 웃으며) 여보 법이 법률이지 무어요. (거칠고 크게) 그래 내가 무슨 법률 저촉된 일이 있습디까. 무엇을 잘못했기에……. 강도 질을 했소, 사기취재를 했소, 응. 내가 법률 저촉된 것이 무엇이야.
307
이씨    (독기 있는 어조로) 이건 너무 심하구려. 괜히 생트집을 해 가지고.
308
최태영   (크게) 내가 무슨 트집을 했소.
309
이씨    (분노에 띤 거친 음성) 여보 여편네에게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소.
310
최태영   (마저 크게) 왜 아낙네가 사내들 얘기하는데 참견은 무슨 참견이야.
311
이씨    (더 크게) 내 집안 일이니까 그렇지.
312
정수    (허둥지둥) 얘 ― 아따 너는 가만히 좀 있거라. 여편네가 이런 데 참견하는 것이 아니야. 온 이게 무슨 모양……,
313
(최태영의 손을 잡으며) 여보 우리 사내끼리는…… 이런 늙은이하고 얘기하는 것이 좋지.
314
최태영   참 나중엔 별 도깨비 같은 꼴을 다 ― 보겠네.
315
(정수를 보고) 당신은 어떡할테요.
316
정수    (어리둥절해) 어떡하다니 무엇을 말이요.
317
최태영   무엇을? 돈 말이요 세돈.
318
정수    글쎄 잠깐만…….
319
최태영   안 돼요. 시방으로 세돈을 내고 곧 이 방도 내 놓오. 이제 이 따위 꼴은 더 보기도 싫고…….
320
(한 팔을 걷어 올린다. 무슨 시비나 하려는 것처럼)
321
정수    또 방을 내노라?
322
최태영   네 ― . 시방으로 얼른 내놓아요. 그리고…… 당신네가 이 집엘 온지 며칠 됐소.
323
정수    아마 오늘까지 사흘째지.
324
최태영   사흘째. 그러면 세돈은 얼마로 정하고 왔소.
325
정수    그건 모르지…….
326
최태영   여보 그건 모르다니. 정말 당신은 바지 저고리로만 사는구려. 그래 자기가 세든 집의 세돈이 얼만 줄도 몰라?
327
정수    글쎄 그것은 그렇게 된 것이라니까…….
328
최태영   (어이가 없는 듯이) 그렇게 된 것이라니? 아무튼 당신하고 밤새도록 떠들어야 그 소리가 그 소리고 또 나도 덩달아 미친 놈만 되는 셈이니까. 이제 그까짓 수작은 고만 둡시다.
329
정수    네 ― . 그러게 잠깐만 더 기다려주오.
330
최태영   아무튼 이 집을 전에 한 달에 오 원씩 세를 놓았으니까. 가만 있자…… 한 달 30일을 하고 오륙 삼십이라. 엿새 동안에 일 원씩이니까 일원을 반을 때리면 50전. 그러면 50전이 그동안 사흘치 세전(貰錢) 이요. 무어 이런 때라고 내가 무슨 흑심을 써서 한 푼인들 에누리 해 없는 사람에게 더 받는 것은 아니요. 노랑돈 한 푼 더 붙히지 않고 내가 꼭 받을 돈만 또박또박 받는 것이니까 어서 50전만 내 고 나가시요. 그 동안 일은 당신네가 좀 잘못 됐지만 아무튼 50전만 내고…… 또 아무리 없기로서니 설마 그거야 없겠소.
331
정수    그러나 아직은 그것도 없구려.
332
최태영   (큰 목소리로) 무엇, 그것도 없어. 아 ― 니 그래 돈 한 푼도 없이 정말 도적놈의 배짱 먹고 여기 왔구려.
333
정수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도적놈의 배짱이라니. 돈만 주면 고만 이지.
334
최태영   그럼 돈을 어서 내요.
335
정수    글쎄 이따가 주어요.
336
최태영   무어 이따가 주어요? 여보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이따가 주어? 무얼 이따가 주어.
337
정수    돈을 이따가 주어요.
338
최태영   돈을 이따가 주어? 왜 시방은 못주고 이따가 주어. 참 괴상한 뱃장이로군. 뻔뻔스럽게 이따가 준다.
339
정수    글쎄 내가 그까짓 것을 떼먹을 사람은 아니오. 이따가 줄 터인데 무얼……. 이 늙은 놈이 설마 거짓말 하겠소.
340
최태영   흥, 말은 좋지. 아무리 속 검은 놈이라도 말로야 아니 낸다는 수가 있나.
341
정수    사람을 너무 괄시를 마시오. 우리가 몹시 빈한은 하오마는 근본 이그리 상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또 하다 못해 덮고 자는 이부자리를.
342
최태영   (영리하게) 아―니 내가 무어 그런 것을 집세로 차마 터 갈 사람 도아 니요.
343
정수    글쎄, 무엇으로든지 고까진 50전쯤이야 설마 못되겠소.
344
최태영   그럼 어서 돈을 내요. 고까진 50전이니.
345
정수    글쎄, 조금만 있으면 돼요.
346
최태영   흥, 조금만 있으면 돼? 그러면 돈은 아무 때 되더라도 좋으니…… 이따든지 내일이든지 생기거든 갚고 또 정 ― 히 못생기거든 영영 고만 두더라도 시방으로 이 집이나 내어 놓으시요. 그것도 못 하시겠소?
347
정수    ………….
348
최태영   왜 대답이 없으시우. 집세 놓아먹는 영업자로서는 이 집 까닭에 대 관계가 있으니까. 나도 당신네의 돈 없는 사정을 보아주는 것이니 당신네도 나의 사정을 좀 보아주어야지요. 안 그렇소? 이것은 내가한 몫 늦구어 드리는 너그럽고 넉넉한 경우요. 안 그렇소.
349
정수    ………….
350
최태영   어서 좀 그 경우를 대답하시요. 그렇게 하면 내가 무어 그르게 하는것도 아니지요. 또 아무더러 물어보더라도 내가 섭섭치 않게 한 것이라 할 것이고…….
351
정수    글쎄 당신의 그 관대하고 고마운 처분은 감사하오만은 그러나 나도 또 당신의 돈을 떼여 먹고 가려는 사람은 아니니까 만일에 나가더라도 당신의 그 돈 50전은 갚고야 나가겠소.
352
최태영   (펄쩍 뛸 듯) 그건 또 무슨 어림 없는 경우야. 왜 나는 당신네에게 자선 사업만 해주는 사람일 줄 아오? 돈도 안 내고 집도 안 내놓는다. 여보 그런 뱃심이 어디 있소. 돈은 그만 두더라도 집이나 어서 내어놓으라니까 그것마저…….
353
이씨    (공손하게) 여보셔요, 그럼 시방이라도 돈을 드리면 받기는 받으시겠어요.
354
최태영   (간사하게) 암 ― 그야 주시기만 하면.
355
이씨    그럼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356
최태영   아따 우선 한 달치 5원만 주십시오 그려. 워낙은 두 달씩 선세를 받는 것이지만은…….
357
이씨    아니 시방 급한 형편으로 말씀하면.
358
최태영   아따 그럼 일 원만 주십시오 그려. 아주 엿새치로 잘라서…….
359
이씨    아니지요. 시방 서로 다투던 얘기는 50전 까닭이 아닙니까.
360
최태영   네 ― 그럼 50전이라도 주시면…….
361
이씨    네 ― 그럼 있습니다. (50전 은화를 방바닥에 밀어놓는다)
362
최태영   (돈을 얼른 집으며) 네 ―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이 자리의 경우는 이만 하면 끝이 났습니다. 괜 ― 히 서로 얼굴만 붉혀서…….
363
(일어나다가 방바닥을 만져 보며) 방에 불이나 잘 들이는지요. 이리 더운데로 내려 앉으십시요. 그럼 갑니다. 이렇게 돈만 받으면 싹싹하게가는 성미이니까요.
364
(미닫이를 연다)
365
이씨    이제는 곧 나가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366
최태영   아무렴 별 말씀을 다 ―. 안녕히 계십시요.
367
(미닫이를 닫고 간다)
368
정수    온 어째 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나…….
369
최태영   (미닫이를 열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온 정신머리가…… 수대(手袋) 를 거기 놓고 나왔어요. 좀 이리 집어 주십시요. 장 ― 집에서 하던 버릇으로……. (수대를 받아 옆에 끼며) 또 그리고 아무튼 올해는 이 집에서 보내셨습니다. 오늘이 섣달 그믐, 자정까지는 오늘이니까 조금 이따 자정까지 집에 가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기별 해주십시요.
370
정수    네 ― 편히 가시요.
371
(최 퇴장, 이씨 아랫방으로 내려와 앉으며 길게 한숨을 쉰다.)
372
정수    이런 제 ― 길 전에는 그믐날이면 묵은 세배꾼들이 득시글 득시 글들이 미었더니 이제는 외상 사글세 방에서 빚쟁이 치르기에 늙은 뼉다귀가 다 ― 녹아. 에 ― 이그 되지 못한 부자놈들 보기 싫어 보기 싫어.
373
가애    할아버지, 부자가 나쁜 사람? 바람?
374
정수    그렇단다. 부자도 나쁜 사람이고 가난뱅이도 나쁜 사람이고 그리고 또 바람이지.
375
가애    그럼 할아버지도 나쁜 사람?
376
정수    아마 그렇지. 할아버지도 필연 나쁜 사람이던게지.
377
가애    그럼 순사가 잡아가게 나쁜 사람은.
378
정수    응 그러나 아니지. 할아버지는 순검이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염라국 사자가 와서 잡아가거나 그 몹쓸 거짓말 바람이 솨 ― 하고 와서 무섭게 잡아가거나 할 터이지.
379
가애    할아버지 아까 그 옛날 얘기 마저 해.
380
이씨    (무엇을 귀 여겨 들으며) 가만 있거라. 발자취 소리가 나는구나. 누가 또 아마 오나보다. 이제는 밖에서 무슨 소리가 자칫만 해도 가슴이 덜렁해서.
 
381
(김인식 등장)
 
382
이씨    어디 가 있다 이제 오 ― 밤중까지.
383
인식    밤중은 무슨 밤중 아직 일곱 시 치고 네 시간밖에 안 됐는데.
384
이씨    이때껏 그렇게만 됐을까? 나는 그래도 열 점은 지났을 줄 알았지.
385
그 지겹게 조련질 당하던 동안에 한 시가 십 년만 같아서…… 조금만 좀더 일찍오지요.
386
인식    왜.
387
이씨    왜가 다 ― 무엇이요. 그 집주인인가 하는 것이 와서 어찌 야료를 하고 갔는지.
388
인식    옳지 참. 오늘 그 사람을 만났는데 집 임자를 일곱 번이나 그 동안 찾아 갔다가도 못 만났다나. 주인이 없어서 온 일도 공교롭게만 되니까……. 아마 그 동안에 왔던 게로군. 그래 어떻게 됐어.
389
이씨    그 동안 봉변만 당한 얘기는 이루 다 ― 말할 수도 없고…… 간신히 그 동안 사흘치로 50전을 변통해 주었으니까 아마 오늘 밤 자정까지는 이대로 사는 셈이지. 그래 저의 집에 가서 자정까지만 더 기다릴테니 다시 기별을 해달라고 참 기가 막혀……. (애교있게 호소 하는듯이) 나하고 다 쌈을 했다우.
390
인식    (빙긋 웃으며) 흥 여편네가 쌈은 ―. (일어서며) 그럼 내가 지금 곧그 사람을 다시 좀 가보아야겠군. 그 사람도 이때까지 나 돈 1원 얻어 주느라고 같이 돌아니다가 시방 막 ―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갔는데.
391
이씨    저녁은 안 잡수?
392
인식    아따 저녁은……. (일어선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는 아니되니까 그 사람하고 얼른 집주인한테 다녀와서 먹지. 그럼 그 동안에 (손에 쥐었던 돈을 보이며) 이 돈 1원 가지고 나가서 흰떡 50전 어치만 하고고기 50전 어치만 사다 놓우. 그래도 그렇지 않어 노인 계신데. (돈을 이씨에게 준다)
393
정수    얘 ― 나 그 떡국 싫다.
394
인식    그래도 섭섭하니까 그렇지요.
395
이씨    그런데 낼 아침 땔 나무도 한 알갱이 없이 똑 떨어졌으니 어떻하면 좋소. 그럼 고기는 30전 어치만 사고 나무를 20전 어칠 살까.
396
인식    아따 그것은 좋도록 하구려.
397
창밖에서  여보 ― 김인식 씨, 김인식 씨.
398
이씨    저를 어쩌우. 벌써 자정이 되었나.
399
창밖에서  김인식 씨 ―.
400
이씨    저게 아까 그 집주인의 목소리야.
401
창밖에서  김인식 씨 계시오.
402
인식    (크게) 네 ― 나가오.
403
(이씨를 보고) 응 저게 집주인이면 우선 봉변은 톡톡이 당했는데…….
404
이씨    아이 또 그 지긋지긋한 소릴……. 차라리 까마귀 소릴 듣는 것이 났지……. 아무거나 우선 이거라도 주어보냅시다 응.
405
인식    떡 사올 것은 어떻게 하고.
406
정수    얘 ― 나 그 떡국 싫다. 떡국이 아니라 욕(辱) 국이지. 원수의 나이만 더럭더럭 먹는 것.
407
인식    그럼 이렇게 하지 아까 50전은 주었다니까 시방 나가 아주 1원 머리로 50전만 더 주고 50전은 거슬러서 흰떡 30전 어치, 고기 10전 어치, 나무 10전 어치 그렇게만 삽시다.
408
이씨    아무려나 좋도록 합시다그려.
409
인식    (나가면서 크게) 50전 거스를 돈 있소.
410
창밖에서   있소.
 
411
(인식 퇴장)
 
412
정수    하루 두 끼 밥도 얻어 먹기가 어려운 사람이 꼴에 또 이면 치레를 한다.
413
이씨    그러믄요. 아무튼 이런 곳에 살면은 내가 굶으면서도 저절로 배부른 척 해야 됩니다그려.
 
414
(인식 등장)
 
415
인식    (입맛을 다시며) 응 그거 참 1원 한 장을 온통으로 그만 올려 발렸지.
416
이씨    (놀라며) 무어요.
417
인식    (고소(苦笑)를 하며) 참 고나마 부지를 못할라니까 별 일이 다 ― 많어……. 아이고 집주인 놈인 줄만 알고 나갔더니 가가쟁이야 저 위 그 전 살던 데의.
418
이씨    저런.
419
인식    그래 외상값이 꼭 4원50전인데 아마 5원짜릴 가지고 거스를 돈을 물은 줄 았았다나. 그러니 돈 뵈고 아니줄 수 있어야지. 온 그거 참 집 쥔 놈에게 실컷 분풀이나 하고 50전쯤 내던져 줄려고 나간 노릇 이 그만…… 음.
420
이씨    저런…… 그가 쥔 같으면 아직 안 갚아도 괜찮은 걸……. 접때 이도(移徒) 오던 날 내가 사정 말을 했더니 아무튼 그럼 세(歲) 안으로 집이나 알러 한 번 가마고 그랬던 걸 그랬지.
421
인식    그래 "그것을 주어서 매우 고맙다고"그러며 얼른 가던 걸.
422
정수    흥 사람이 서로 그 돈이라는 쇠 끝을 개도 아니 먹는 그 돈을 주고받고 하는데 우스운 일 슬픈 일이 쏟아져 나온다. 참 괴이한 세상이야 아무튼 내가 그 지겨운 욕국을 안 먹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로군. 그러나 어떻든 이런 어려운 사람은 암만 무슨 분한 일에 알아도 돈을 가지고 어떻게 그 분풀이를 좀 해보려고 한대야 그건들 그리 만만하게 마음대로 썩 잘되는 것도 아닌게야.
423
인식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딴 힘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부자가 든든한 복이 있는 건너편에는 가난한 사람의 앙세인 힘도 있으니까. 한 놈은 덤비고 한 놈은 뻗설 때에 뚱뚱한 놈이 질른지 말라꽁이가 질른지 아무튼 부자가 가장 싫어 하고 무서워 하는이도 가난뱅이들이니까요.
424
정수    아무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만 모여 사는 것이 좋 ― 지.
425
(눈물을 지은다)
426
가애    할아버지 울우.
427
정수    아 ― 니.
428
가애    그럼 왜 저렇게 눈물이 나우.
429
정수    (눈물을 씻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구슬프게) 응 이런 것은 이 할 아비는 늙은이가 되어서 날만 조금 추워도 그저 눈물이 나지. 아니 그 거짓말 바람이 솨 ― 하고 불 적마다 이 늙은이의 눈물마저 뺏아서 가려고…….
430
가애    할아버지 참 그 옛날 얘기 마저 해.
431
정수    (한숨을 쉬고 가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응 하지. 하지 말고. 이제다 ― 해주지. 우리 아가를 신통한 아가를……. (우는 듯이 목이 메인다)
 
432
(잠깐 고요하다)
 
433
이씨    참 대문이나 잘 걸지요.
434
인식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응, 걸기는 단단히 걸어놓았어…….
435
정수    그런데 그 얘기를 무엇이라고 하다가 말았더라.
436
가애    왜 임금님이 거지가 되어 댕긴다고 그랬지.
437
정수    옳지 참. 그런 말까지 했지……. 그래서 아가, 그 모진 바람이 또한 번 솨 ― 하고 불 적에 그만 그 임금님마저 귀여운 임금님마저 잃어버렸단다.
438
가애    저런 그럼 그 고운 때때댕기는?
439
정수    그것도 마저 하는 수 없이……. 그만 ―. (목이 메인다)
440
가애    참 엄마 이제 나가 때때댕기 사 와.
441
정수    아니 아니 그것도 마저 우리 아가 때때댕기도 그만 그 몹쓸 바람이지 겹게 지겹게 잡어먹어버렸단다. (운다)
442
가애    (몸부림을 하며) 안 돼. 난 몰라 난 몰라. 어서 가 찾아 와…….
443
인식    (큰 소리로) 가만 있어.
444
(이씨를 보고) 그럼 어떡하나 밤도 늦었는데…….
445
이씨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힘없이) 글쎄요…….
446
인식    (부시시 일어나 정수에게 공손히 절을 한다)
447
이씨    (정수에게 절하고 나서) 아버님 새해는…….
448
정수    글쎄 새해에는 어서 죽을 꿈이나 꾸었으면.
449
이씨    가애야 너도 이제 이런 것 해 버릇해야지. 어서 일어나 절 해라. 묵은 세배로 할아버님께.
450
정수    (손을 저으며) 아니 아서라. 그 따위의 짓은 지각 없는 어른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착한 아가야. 그까짓 쓸데없는 짓을 무엇 하러…….
 
451
(밖에서 멀리 최태영의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
 
452
이씨    (놀라며) 저게 정말 집주인이야 벌써 자정이 됐는게지?
453
인식    (가만한 목소리로 또 급히) 가 가 가만히 있어…….
 
454
(인식과 이씨는 허둥지둥 부산히 서로 눈짓 손짓으로 반짓그릇 화로 기타 방에 늘어놓인 기구를 되는대로 윗방으로 옮기어 놓는다. 무슨 폭풍우를 상징하는 듯한 광경, 정수와 가애는 물끄럼이 그것을 볼 뿐, 인식은 방안을 한 번 휘휘 둘러보고 등잔불을 입으로 불어 끈다. 무대 암흑 밖에서는 어지러운 바람 소리에 섞이여 거칠게 부르는 집주인의 목소리는 매우 분노에 띠인 듯 발구르는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나다가 그친다)
 
455
정수    (어둡고 고요한 속에서) 이것이 우리집의 섣달 그믐이다…….
 
456
(방 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웃음 소리가 한꺼번에 우렁차게 또 무섭게 일어난다.)
 
 
457
(『佛敎[불교]』 56호, 1929년 2월)
【원문】제석(除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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