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 ~ 1587] 조선 시대의 문인. 호는 백호(白湖) 또는 겸재(謙齋)이다.
선조 10년(1577년)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예조 정랑과 지제교를 지냈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이를 한탄하여 이름난 산들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으며, 그 당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검(劍)과 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한편, 한문소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