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 ~ 1648]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호는 북저(北渚)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순천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무장
신립의 부대에서 종군하다가
탄금대 전투에서 죽은
여물이다. 아버지 여물은 죽은 뒤, 그 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봉해졌으며, 그는 아버지의 공으로 과거도 보지 않고 참봉에 봉해졌다. 그러나 부모의 공에 의한 음직에 만족하지 않고, 1596년 과거 시험을 보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 문서를 맡아 보던 관아인 승문원 권지 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복수소모사 김시헌의 종사관으로 호서· 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자신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서 주연을 벌였다는 내용의 사헌부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 검열로 복직되었다. 이어 대교· 주서·봉교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정인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탄금대의 일로 다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해에 봉교로 복직되고 형조 좌랑으로 승진되었으나, 그 후로는 중앙 관직을 맡지 못한 채 충청도 도사· 전주 판관 등, 주로 지방관을 맡아 보았다.
1610년 시강원 사서· 부교리를 지내다가 강계 부사를 맡았으며, 1614년에는 가선 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사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동지사란 해마다 동짓달에 보냈던 사신이며, 성절사는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하였던 사신이다.
1617년 역적을 두둔한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정인홍 등 북인들에 의하여 폐모론이 제기된 후, 그는 광해군과 그 조정에 통분을 느끼고, 1620년부터 이귀 등과 반정을 꾀하였다. 마침내 그는
김귀·
이괄 등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 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모시는
인조 반정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이가 인조이다.
인조 반정의 성공으로 그는 정사 1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병조 참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곧 병조 판서로 승진되면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승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인조의 절대적 신임 속에 그는 이조 판서· 좌의정· 도체찰사· 영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인조 시대의 초·중반을 이끌어 나갔다.
인조 당시에는 북쪽으로 후금 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후금이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과 함께 일본과의 전쟁에 힘쓰고 있는 동안 힘을 키운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그러한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철산 가도에 진을 치고, 조선의 조정에 후금을 치도록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당시 조선의 힘으로는 한창 세력을 키우고 있던 후금을 칠 수가 없었다. 후금은 얼마 뒤 명나라를 쳐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었으며, 조선에도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킨 강한 나라였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무리한 요구에 김류는 스스로 철산 가도로 찾아가 모문룡의 횡포를 막고, 불만이 많았던 명나라 사신들을 시를 지어 달램으로써 존경을 받는 등, 외교 부문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에 오른 뒤, 1635년에는 영의정이 되어 전반적인 국정을 펴 나갔다. 그러면서 도체찰사로 평안 남도 안주 를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를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안주가 무너질 경우를 대비하여,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정하여 중요한 산성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렇게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비하였으나, 1636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때는 청나라에서 우리의 산성 중심의 방어 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 와 실효를 볼 수 없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삼전도에서 굴욕스러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류는 처음에는 강화도로 들어가 청나라에 저항하는 쪽을 주장하다가 사태가 불리해지자, 주화파의 뜻에 따라 삼전도 강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에 항복을 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저항하자는 척화파 사이에서 일관되지 못한 입장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전란 당시 방어를 총책임진 도체찰사의 임무를 소홀히 하였을 뿐 아니라, 아들 경징이 당시 소현 세자를 비롯하여 왕족과 비빈들이 피란한 강화도의 방어를 책임진 검찰사의 임무를 맡았음에도, 안일하게 처신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된 일로 그에 대한 비난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난 이후 아들 경징은 처형되었고, 김류 자신도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이후 정국이 불안하자 다시 기용되었다.
1644년 심기원의 역모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영국 공신 1등에 순천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로는 뚜렷한 정치적 입장에 따르거나 행하기보다는 왕 가까이에서 원만하게 맡은 바 일을 해 나갔다.
학문은
이이·
성혼의 계열을 이었으며, 문장은 법도가 엄격하였고,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문집에 《북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