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2 ~ 1520]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호는 사서(沙西)이고,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1519년(중종 14년)에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 부제학· 대사성이 되었다.
조광조·
김안국 등과 도학(道學) 소장파를 이루어 제도 개혁과 민중 교화에 힘썼으나, 이 해
훈구파 남곤·
심정 등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조광조가 사사되고, 다시 외딴섬으로 옮겨진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피하여 「군신천세의」라는 시를 짓고 자결하였다. 시조 3수가 전한다.
소선(小船)에 그물 실을 제 주준(酒樽) 행여 잊을세라.
동령(東嶺)에 달 돋았다 배 어서 띄워스라.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이백(李白) 본 듯하여라.
창전(窓前)에 섰는 학이 절로 우즑하는고야.
저희도 봉래산(蓬萊山) 학이매 자연지음(自然知音)하노라.
사면을 돌아보니 이수중분(二水中分) 앞에 있다.
아이야 삼산(三山)이 어디메니 나는 젠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