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절의를 지킨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세 사람의 유학자들을 일컫는 이름. 세 사람의 호 모두에 '은(隱)'자가 들어 있는 데서 유래한 호칭이다.
'삼은'이 맨 처음의 기록으로 남은 것은 충청 남도 공주에 위치하는
동학사 안에 있는 '삼은각 비문'에서 이다. 충청 남도 기념물 제18호인 삼은각은 1394년 길재가 동학사의 승려들과 함께 단을 쌓아 만들었다. 그러고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로 초야에 묻혀 지내던 길재는 죽음으로써 고려를 지키려 하였던 정몽주의 혼령을 불러 제사를 지내었다.
그 뒤 1399년 유방택이 이 곳에 와 이색과 길재를 함께 모신 데서 '삼은'이라는 호칭이 비롯되었다. 그 이듬해 공주 지주사로 부임한 이정간이 길재 등이 쌓은 제단에 삼은각을 지어 목은·포은·야은 삼은을 제사 지내게 되면서부터 '삼은'은 전국의 유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삼은'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인 《동학사고적기》에는, 1400년 유방택의 아들 백순이 길재를 모시기 위하여 삼은각을 세웠으며, 그 뒤로 목은·포은·야은을 삼은으로 일컫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1954년 국사학자
이병도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야은 길재 대신 삼은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말 이숭인은 문장·경술로써 이색·정몽주 등과 나란히 겨루면서 당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함께 수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태학에서 경학을 강론하여 커다란 성황을 이루었다는 점을 들면서 삼은에 이숭인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고려 말의 3은은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조정에 나가 벼슬도 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켰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도 조선의 왕 태종 등이 거듭 청하여도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후진을 기르며 학통을 계승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