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온 이 땅, 전라도의 이름이 지어진지 어연 천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주는 영산강과 드넓은 나주평야로 호남의 교육·행정·경제·정치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지역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와는 전혀 다른 해양문화를 가진 마한 54국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 14년(995년) 지금의 전북을 ‘강남도’라 명하고, 전남을 ‘해양도’라 하였습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이르러 두 도를 다시 합쳐 큰 도시였던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 하였습니다.
나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전쟁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였고,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였으며, 온갖 진귀한 물산을 생산하는 국가의 보물 창고였습니다.
나주의 인구는 1966년에 25만 명에 이르렀지만 도시화·산업화의 영향으로 2004년 8만 명까지 줄었다가,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의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정책으로 2014년 광주전남혁신도시와 한국전력공사, 한국농어촌공사, 국립전파연구원, 우정사업정보센터를 비롯한 16개 공공기관이 이전하고 한전 연관 에너지기업 42곳이 이전하면서 이제는 인구 11만 명을 넘어 화려했던 천 년의 옛 명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다도면 마산리 1구에서 살아오다가, 1975년 나주댐 건설로 방산리 닭금마을로 이주를 하여 새롭게 터전을 잡고 살아왔습니다. 나주댐이 완성되면서 당시 17개 마을이 수몰되고 고향을 떠난 이주민이 무려 3천명에 달했습니다. 이주민들은 다도면에 남은 사람도 있고, 전라도 가까운 마을로 떠난 사람도 있지만 전국 8도로 모두 흩어졌습니다. 나주댐이 건설된 지 어연 40여년이 지나고 보니 어릴 적 친구도 보고 싶고, 옆집아저씨도 만나보고 싶고, 앞집에 살던 누님도 모두 보고 싶은데 이제는 도저히 소식을 전할 길도 찾을 방법도 없어졌습니다. 정답게 지내던 그 많은 다도면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요?
저는 다도면민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다도우체국장을 32년간 봉직하고, 다도주민자치위원장, 다도양민희생자 위령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았습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면서 하루하루 느끼는 것이 더 늦기 전에 우리 땅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 땅에 머물렀던 많은 선조님들의 기록을 찾아 조사하고 남겨서 바르게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집 앞 밭에 있는 거대한 고인돌을 돌아볼 때마다 이 땅의 역사가 수 만 년이나 오래되었지만 아무도 그 역사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고, 백제가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있었던 마한 54국의 이름들이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연구를 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나주국립박물관이 최근에 나주시 반납면에 건립되어 나주 여러 지역의 고분과 문화재를 발굴하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인원과 예산 부족으로 아직 확실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주지역은 1998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조사팀들이 실시한 동강면, 왕곡면, 공산면 지표조사에서 다량의 구석기 유물이 산포되어 있음을 밝혔습니다. 몸돌, 양면주먹도끼, 칼형도끼는 이 지역이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3~6만 년 전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다도면 나주호 수몰지역 주변에는 선사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활발한 조사 연구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 고장 다도면의 역사를 조사하여 면지를 만들어보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금번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대표와 많은 향토사학자의 도움으로 다도면 향토사를 만들게 되어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가 구술한 향토사는 이제 걸음마 단계로 계속 수정, 보완하여 완벽한 다도면지로 완성시켜 나가겠습니다.
2018년 4월 27일은 우리 민족에게 아주 역사적인 날로 남과 북의 정상이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에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TV생중계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선언’을 한 날입니다.
통일의 그날까지 우리 민족의 앞날에 평화와 번영이 영원하기를 소망합니다.
2018년 5월
다도면 유금마을 임동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