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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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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육우정은 일명 봉산에 건립하여 봉남정(鳳南亭) 이라고도 불리운다. 건립 시기는 1919년이다. 육우정은 지역에 사는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 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 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 우계 노학규, 우당 이광의(愚堂 李光儀), 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이 뜻을 같이하여 건립하였다. 이들 여섯 인물의 호는 한자로 모두 어리석을 우자(愚字)로 지었기에 육우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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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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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광제정은 연산군 때 매당(梅堂) 양돈(楊墩, 1461∼1512)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삼계면 후천리 광제마을에 있었으나, 현 건물은 양돈의 후손인 양성모가 1871년에 세심리로 이건하였다. 광제(光霽)는 양돈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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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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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월파정은 1927년 덕치면 물우리에 거주하던 밀양박씨 종중 밀성군 파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선조들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하여 정자을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월회정(月會亭)이라고 하였는데, 1966년 대종회에서 박씨의 중시조 계행공이 4백년전 전남 창평에서 이곳으로 이주 했다는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따서 월파정(月波亭)으로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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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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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만류당기 / 나는 지난 갑진(甲辰)년 봄으로부터 어느덧 3년을 이 서당에서 생도들을 가르쳐왔다. 이 서당은 곧 만류당(萬流堂) 이선생(李先生)의 영혼이 깃든 곳이며, 예전의 남애사(南涯祠)로 신평(新平) 마호(馬湖)의 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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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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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구우정은 관촌면 복흥리 횡암(橫巖)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1926년 인근에 거주하던 아홉 사람 즉 이옥현(李玉鉉), 한규정(韓圭井), 김여생(金麗生), 임병식(林秉植), 임병태(林秉台), 이병하(李炳厦), 한규엽(韓圭燁), 이영식(李榮植), 최인필(崔仁弼)이 벗들이 되어 정자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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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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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에 있는 정자. 안하마을 뒤 덕수암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저수지가 있고 그 옆에 노양정(蘆陽亭)이 있다. 노양정은 1937년에 마을주민들이 자력으로 저수지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위하여 1940년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크기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에 기와집으로 천정이 우물정자이며, 1940년에 지은 노양정기와 노양정의 계원 114명의 명단이 적힌 현판 등 1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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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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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성수면 오류(五柳)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봉강리 신계월 마을에 들어서면 회관을 지나 마을 안에 정자가 있다. 비비정(飛飛亭)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선조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영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는데, 영길의 10세손 창렬(滄烈)이 1930년 이곳 계월 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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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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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오수면 둔덕리 삼계석문 입구 오수천 아래 오른 쪽 산기슭에 있다. 구로정(九老亭)은 팔작지붕아래 기와를 얹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네 귀에 추녀받침이 있다. 창건연대는 효종 7년 丙申年(1656)이며, 처음에는 구로정이 아닌 단구정(丹邱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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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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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덕옥재는 지사면 계산리 옥산마을 입구 좌측에 위치해 있다. 팔작지붕 너와집으로 정면2칸, 측면2칸이며 난간이 있고, 바위 위에 자연스럽게 정자를 얹혔으며, 그 주위를 적송이 둘러싸고 있다. 너와 지붕으로 된 정자는 극히 보기 드문 것으로서, 너와는 성수면 왕방리에서 가져다가 지붕을 입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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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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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추모정은 지사면 소재지인 방계마을 앞 동산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목조 팔작 기와지붕으로 전주최씨 종중에서 연촌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에 건립하였다. 정자 내에는 甲辰(1964)년 5월에 서흥 김규태가 짓고, 홍주 이환용이 쓴 추모정기와, 1961년 1월에 종중대표 최규재가 짓고, 최용호가 쓴 미담을 칭찬하는 포미기(褒美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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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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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청계정은 지사면 방계리 실곡 마을 앞에 위치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 복재 김혁성(復齋 金赫聲)이 선비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정자로 이용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김혁성은 간재 전우 선생의 제자로서 많은 서적을 남긴 김일현의 부친이다. 정자의 정면에는 청계정(聽溪亭) 편액과 김혁성의 호를 따서 복재소장(復齋小庄)이란 편액이 청계정 편액과 같은 크기로 동호(東湖)의 글씨를 양각하여 같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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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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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에 있는 정자. 안하마을 뒤 덕수암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저수지가 있고 그 옆에 노양정(蘆陽亭)이 있다. 노양정은 1937년에 마을주민들이 자력으로 저수지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위하여 1940년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크기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에 기와집으로 천정이 우물정자이며, 1940년에 지은 노양정기와 노양정의 계원 114명의 명단이 적힌 현판 등 1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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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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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팔초정은 관기마을 뒤쪽 재실 앞 논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1950년에 지은 정자로서 팔작 시멘트 기와지붕에 정 측면 각각 2칸이다. 팔초정(八樵亭)이란 명칭은 노초 안병용(老樵 安炳龍), 관초 전병두(冠樵 全秉斗), 벽초 이명복(碧樵 李命福), 가초 안성수(可樵 安晟洙), 덕초 이점용(德樵 李占龍), 만초 전병택(晩樵 全秉澤), 석초 안도수(石樵 安道洙), 은초 안명진(隱樵 安明鎭) 등 8명의 계원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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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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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월파정은 1927년 덕치면 물우리에 거주하던 밀양박씨 종중 밀성군 파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선조들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하여 정자을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월회정(月會亭)이라고 하였는데, 1966년 대종회에서 박씨의 중시조 계행공이 4백년전 전남 창평에서 이곳으로 이주 했다는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따서 월파정(月波亭)으로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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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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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구우정은 관촌면 복흥리 횡암(橫巖)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1926년 인근에 거주하던 아홉 사람 즉 이옥현(李玉鉉), 한규정(韓圭井), 김여생(金麗生), 임병식(林秉植), 임병태(林秉台), 이병하(李炳厦), 한규엽(韓圭燁), 이영식(李榮植), 최인필(崔仁弼)이 벗들이 되어 정자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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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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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육우당은 삼계면 어은마을 안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 연산군 때에 육우당 한경생(韓慶生)이 지었다고 한다. 정자 상량문에 ‘광해8년병진중수(光海8年丙辰重修)’라는 글이 적혀진 것으로 보아 1616년에 중수했으며, 다시 357년 뒤 임자(壬子)년에 재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인 1972년에 다시 한 번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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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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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월파헌은 경주 김 만옹선생(晩翁先生)이 은둔(隱遯)한 곳이다. 경안도(慶安道) 역승(驛丞)으로 있을 때 관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이곳에 들어와 작은 헌(軒)을, 문수(文殊)의 쌍암(雙巖)에 얽어짓고, 편액(扁額)을 ‘월파(月波)’라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삼계면 세심리에서 학정리로 가는 길 중간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월파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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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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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삼계면 삼은리 산49번지 월촌 마을 북쪽 도로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오괴정(五槐亭)은 명종 즉위년(1545)에 해주오씨 오양손이 처음 지었다. 오양손은 김광필의 문인으로 기묘사화를 피해 이곳에 은거하고, 정자 주변에 5그루의 괴목을 심었다. 이에 오괴정(五槐亭)이란 명칭이 있게 되었는데 편액의 글씨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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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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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광제정은 연산군 때 매당(梅堂) 양돈(楊墩, 1461∼1512)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삼계면 후천리 광제마을에 있었으나, 현 건물은 양돈의 후손인 양성모가 1871년에 세심리로 이건하였다. 광제(光霽)는 양돈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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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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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만취정은 형조참의 예문관을 지낸 경주김씨 김위(金偉) 선생이 선조 5년(1572)에 지은 정자이다. 만취정은 선조5년(1572)에 짓고 선조23년(1590)에 단청을 하였다. 순조14년(1814)과 순조34년(1848)에 중수되었으며, 상량에 '숭정기원후정유'(丁酉)라 씌어 있는 것을 보아 1897년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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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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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수운정중수기(睡雲亭重修記)에 쓴다 / 천하의 일은 유무(有無)가 서로 교대할 뿐이다. 유무(有無)를 따르는 것에는 잠깐의 멀고 가까움이 있어서 움켜 쥔 것도 순식간이지만 얻고 잃는 것[得喪]과 영화롭고 욕된 것[榮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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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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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오수면 둔덕리 삼계석문 입구 오수천 아래 오른 쪽 산기슭에 있다. 구로정(九老亭)은 팔작지붕아래 기와를 얹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네 귀에 추녀받침이 있다. 창건연대는 효종 7년 丙申年(1656)이며, 처음에는 구로정이 아닌 단구정(丹邱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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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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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대정(大井)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중앙에 큰 우물이 나오고 우물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위에 정자가 보인다. 정자에는 청세정(淸洗亭)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기문에 오연경(吳璉卿)이 정자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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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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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관란정은 오수의 대정리 대말 저수지 옆에 위치하고 있다. 4차선 국도를 따라 남원 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둔기와 대정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에 풍치 좋고 아담한 저수지가 보인다. 관란정은 저수지 동편에 위치하여 저수지의 풍광을 멋들어지게 꾸며 주고 있으며, 가을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풍치를 더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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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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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반환정은 오수면 용정마을 동쪽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높직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반환정(盤桓亭)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네 귀에 추녀받침이 있다.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천거로 광릉참봉을 지낸 한양오(韓養吾)가 만년을 보낸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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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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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성수면 오류(五柳)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봉강리 신계월 마을에 들어서면 회관을 지나 마을 안에 정자가 있다. 비비정(飛飛亭)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선조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영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는데, 영길의 10세손 창렬(滄烈)이 1930년 이곳 계월 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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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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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육우정은 일명 봉산에 건립하여 봉남정(鳳南亭) 이라고도 불리운다. 건립 시기는 1919년이다. 육우정은 지역에 사는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 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 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 우계 노학규, 우당 이광의(愚堂 李光儀), 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이 뜻을 같이하여 건립하였다. 이들 여섯 인물의 호는 한자로 모두 어리석을 우자(愚字)로 지었기에 육우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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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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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왕방리에서 원증마을로 가는 길 2km정도 중간지점에 가다보면 여산 송씨 재실이 있고 그 앞 왼쪽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임실에서는 제일 아름답고 산수가 빼어난 왕방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임실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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