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지켜야 하는 것은 그럴만한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사료(史料)의 내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는 사료에 따라 복원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임의로 만들어질 수도 없고 추상적인 체계에 맞추어 사료의 내용이 변경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문헌사료나 유물 ․ 유적사료, 무형의 사료를 총괄) 더구나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유물(遺物) ․ 유적은 문헌에 따른 고증에서 간혹 일어나고 있는 혼란 또는 왜곡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이 유물이나 유적의 고증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문헌이 고증하여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경우가 많다. 이와는 반대로 문헌상의 문제를 유물이나 유적의 사료가 입증하여 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헌과 사적이 뚜렷하게 일치하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이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제부터 전개하려는 직산위례성이다.
문헌에도 뚜렷하게 하남위례성이고 사적의 이름도 위례성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사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원로학자들에 의하여 일정한 곳이 비정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절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료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외국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들 자신이 왜곡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더구나 고대사가 재조명되고 최근에는 고조선사(古朝鮮史)가 활발하게 연구되어 고대사 부분의 재편찬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 마당에 본 위례성의 연구는 매우 뜻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전개하려는 위례성에 대한 조사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들과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서 밝혀 볼까한다.
하나의 국가가 건국되면 그에 따라서 수도 즉 도읍지가 설치되는 것은 필수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도 인류가 서식하면 그들이 모여 살았던 모듬살이 터가 있듯이 민족과 국가와 수도(首都)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삼국(三國) 중에서 가장 먼저 건국이 되었다는 신라는 건국에서 멸망까지 동일(同一)지역(地域)이 수도였으므로 초도니 천도를 논할 필요가 없으나 고구려와 백제는 그렇지가 않다. 고구려는 졸본지방(卒本地方)에 건국하고(BC 37) 그로부터 4년뒤인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축조한 사실이 밝혀져 있으며 그 지역이 혼강 유역의 환인지방이라고까지 밝혀졌고 이미 그 도성 승골성에 대하여는 많은 조사가 된 것으로 학계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그렇지 못하다.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이 아직도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아서 혹왈혹설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서울 강동구의 방이동에 있는 호석식 백제고분을 문화재관리국이 복원하고 그 입구에 관리사무소 측이 세운 안내판의 내용을 보면 “백제는 한강의 남쪽인 어디에선가 건국을 하고.... ”라는 글이 우선 백제의 첫 서울이 어딘지 확실치 않음을 밝혔고 아직은 그곳이 여기다라고 뚜렷하게 밝혀진 곳은 없다는 뜻이다.
경기도 광주(廣州)지방을 비정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서울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한 방이동 일대를 가리키는 학자 또는 충남의 직산지방을 가리키는 학자도 있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또 잘못 알고 있는 백제의 첫 서울 하남위례성을 바르게 밝힐 필요를 느껴 현재의 직산면, 입장면, 성환읍, 목천면, 성거읍, 안성의 서운지방, 평택의 남쪽 지방과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을 두루 살펴보고 실제 답사하여 보고 느낀 것을 향토의 여러분에게 밝혀 관심 있는 향토인이 더욱 많이 모여서 이에 대한 연구는 물론 여러 방향의 협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라며 본 연구의 문제를 제기하는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