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학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사료가 증거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이었음을 증거로 하는 사료를 다음과 같이 엮어본다. 유물이나 유적은 그 나라의 국사요, 국민의 것이며 국민은 모두가 그것을 바르게 알 권리가 있으며 향토사를 하는 우리들은 향토에 사는 모든 이에게 옳고 바른 향토의 역사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어 여기에 1989년에 실시한 간단한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한다.
5월 19일부터 5월 28일까지 10일간에 걸쳐서 실시되었던 직산위례산성(현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에 있는 산성)의 지표조사는 KBS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과 현지에 있는 단국대학 역사학과 학생들 및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방의 향토사학가들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금번 실시된 지표조사가 가지는 뜻은
(1) 첫째로 이제까지 문헌에만 나타나고 있는 백제의 초도 직산위례성이 얼마만큼 이곳과 사실에 접근하고 있으며
(2) 둘째로 산성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규명하고(축성방법, 축성년대, 성의규모)
(3) 셋째로 보존상태와 앞으로의 발굴방법 및 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며 문화재로서의 가치판단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다.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피해 갈 수 없는 첫 관문인 직산위례성 초도설은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진가위가(眞可僞可)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고문헌인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지, 목천현지 등에 기록되어 있는 하남위례성 직산설은 다산이나 두계에 의하여 인정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심지어 어느 학자는 직산위례성의 백제초도설은 위전이라고까지도 하였다. 또 전설상의 산성이며 나대(羅代)나 여대(麗代)에 축성된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앞에서 밝힌 옛 기록은 무엇이냐 말이다. 고인(古人)들이 할 일 없이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물론 옛 기록이라고 전폭적으로 믿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으로만 보고 위전(僞傳)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국의 연대가 대방고지인지 한강변에서인지 또는 직산지방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후에 서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나아가서는 고대 문화를 일본에 건네주는 스승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던 백제의 초도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서울의 강동구 올림픽경기장 앞에 대형의 길 안내판을 세우고 ‘위례성길’이라고 쓴 까닭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밝혀지지도 않은 곳에 사실처럼 위례라는 길을 만들어 놓고 많은 시민이 더구나 배우는 학생들이 오가는 길목에 세워진 까닭은 무엇인지..?
그길로 아무리 가도 위례성은 없다. 위례성이라는 도읍 명칭이나 위례산성이라는 성명(城名)이나 위례산이라는 산명(山名)은 이곳 직산지방 밖에 없다. 위례성이 옛 문헌에 직산으로 밝혀진 것은 삼국유사가 처음이다. 이미 800여년 전의 일이다. 일연이 800여년 전에 장난삼아 지은 이름이 아님을 더욱 힘주어 말하는 바다. 고구려의 졸본지방을 떠나온 온조 일행은 삼국사기의 기록 그대로 대방고지에서 잠시 머물다가 주변의 토착세력에 못 견디어 뱃길로 남하하여 서해안을 통하여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와 직산지방에 이르러 개국건도(開國建都)하고 BC 6년에 변란을 치르고 난 뒤에 다음해인 BC 5년에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도읍을 옮기는 사실이 모든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증이 충분하다고 본다.
고문헌에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음은 오늘날의 직산지방을 말함이요, 위례산에 쌓여진 성은 산성이다. 500m가 넘는 산의 정상 부분에 거성(居城)이 있을 까닭은 없다. 이 부분은 두계선생이 한국사에서 밝힌 바와 동감이다. 산성(山城)은 전쟁용이요, 방어용이다. 거성의 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여진 것이다.
위례산성은 토성과 석성의 혼성으로 여지승람에는 길이가 1690척(尺) 높이가8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그보다 훨씬 크고 긴 성임이 밝혀졌다. 몇 개의 망루(望樓)가 있었음은 출토된 백제와당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수성(守成)하던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었으며 때로는 전란이나 내란으로 옮겨왔던 도성민(都城民)이 장기간 군거(群居)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산성의 내부는 약 10만평 가량이나 그 중 5천평 가량의 평지가 있어 인간활동에 편리하였고 성내에 큰 우물이 있어서 수백명의 사람이 물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성문도 이번 지표조사에서 나타난 것은 두 곳이다. 북문과 동문이며 북문은 세전(世傳)되어 내려오는 문다라니 고개(현문령 : 懸門嶺)이고 동문은 부소무이 고개(부소문령 : 扶蘇門嶺)이다.
문다라니 고개에 있었던 북문은 입장 호당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대단한 험로이며 성문에서 군졸이 지키면 일당백(一當百)의 요새 중의 요새이다. 이곳의 이름은 문다라니 고개로 불리운 까닭은 문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문다라니 고개이다. 한편 동문은 부소문이 고개로 북면 납안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통하는 고개로 이곳에는 동문로이면서 망루로 이용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터가 이번 지표조사에서 나타났다. 동문터는 위례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현재 건설부에서 방향표식판이 세워져 있다.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얻은 큰 성과는 토성의 성격을 찾아냈다는 데 있다. 대개의 백제토성은 평지에 판축으로 이루어진 성이나 위례산성은 높은 산의 정상부에 있기 때문에 판축이 어려웠던지 밑넓이가 6m나 되는 토성 속에 두 줄로 석심(石心)을 박아 산성의 표토(漂土)가 경사면으로 쏠려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은 축성법이다.
석성은 성의 원초적인 방법으로 축성되어 크고 작은 자연석을 혼성(混成)하여 큰 돌은 아랫부분에 작은 돌은 윗부분에 배치하였으며 열(列)과 면(面)을 맞추지 않았다. 토성을 길게 쌓고 급경사가 된 곳이나 만곡(彎曲)부분을 석성으로 연결시킨 희귀한 성이다. 나대(羅代)나 여대(麗代)에 쌓여진 것이 아니고 백제 초기의 성임이 확인되었으며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평양 부근에 있는 고구려의 성인 대성산성(大城山城)의 축조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백제 초기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므로 위례산성은 백제초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더구나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 성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돌과 돌 사이의 구멍에서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회색연질토기편(灰色軟質土器片)이 발견되어 백제초기에 축조된 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성에 trench를 걸고 절개(切開)작업을 하다가 성의 최하단부에 아토부분(亞土部分)에서 승석문토기(繩蓆文土器)편이 오, 육점 출토되었다. 이는 금번 실시되었던 지표조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승석문토기의 사용 연대와 성의 축조연대가 비교되기 때문이다.
승석문토기는 대체로 중국의 주대(周代)에서 한 대(漢代)에 결쳐서 널리 제작 사용되던 토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가 열리는 BC와 AD가 갈리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때에 발달하였던 토기로 기면(器面)을 굳고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승석(繩蓆)과 같은 것으로 그릇의 표면을 두들겨 굳혀서 만들었기 때문에 노끈이나 자리때기 무늬가 남게 된 것이다. 승석문토기 사용의 하한연대(下限年代)가 언제까지인지 정확하지 않아도 4C경 까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으로 보아도 직산위례산성의 축조연대는 4C 이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보아 이제까지의 주장보다는 연대(年代)가 상회(上廻)하는 백제 초기의 것임이 증명되었다고 보겠다.
승석문토기가 출토된 약 50cm 가량의 원토층(原土層)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사용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철창과 철겸(쇄낫)이 출토되었다. 창은 무기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고 낫도 수확용의 농기구로 보기보다는 전쟁용의 무기로 보는 편이 좋을 듯싶다. 이와 같이 승석문토기나 철제무기류는 모두 초기철기 시대의 것으로 따라서 직산위례산성이 백제초기에 쌓아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 하겠다.
산성의 남쪽산 기슭에 백여기(百余基)의 석곽적석묘(石槨積石墓)가 발견되었다. 시굴(試掘)한 결과 백제의 묘제임이 확인되었다. 토광을 깊이 파고 광벽을 돌로 곽을 쌓아 뚜껑돌을 올려놓았으며 뚜껑돌 위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묘임을 표시하였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은 묘지로 특이한 묘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백여기의 군락(群落)을 형성하고 있음은 전란으로 인한 전사자를 같은 시간에 매장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BC 6년에 있었던 전사자의 무덤인 듯하다.)
이때까지 문헌상으로만 밝혀졌던 백제의 초기 위례성이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았다. 문헌과 유물이 합치된 셈이다. 직산지방이 백제의 초도로 틀림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 확대된 종합발굴이 실시되어 더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이것에 대한 편년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설(設)이 설(設)로만 끝나지 말고 하루속히 정설(定說)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1989년 4월 23일 문화재 관리국 김기웅 박사의 위례산성 답사
▷ 4월 25일 KBS 보도부 권혁부 기자 및 보도팀 답사
▷ 5월 19일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임효재 박자 위례성 답사
▷ 5월 21일 서울대학교 박물관팀 도착(4명). 시굴장소 선정
▷ 5월 22일 A지구(문지석 장소), B지구(망루 장소) → trench 가설, 시굴
※ A지구에서 : 백제와당, 백제토기편, 승석문토기편, 철창, 철낫 출토 ※ KBS 9시 News에 백제초도 위례성은 직산지방일 가능성 발표 ※ MBC 9시 News에 지표조사 상황 발표
▷ 5월 23일 C지구(남문지), D지구(동문지) → trench 설치. 백제와당 및 토기편 출토
▷ 5월 24일 산성재조사. 성문지 발견. 석성에 대한 정밀조사. 출토품에 대한 종합 검토. 적석묘 2기 시굴.
▷ 5월 27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문헌조사
▷ 5월 28일 김기웅 박사 초청 적석묘 시굴.(백제의 묘제임이 확인되었음.) 지표조사 완료.
▷ 6월 4일 KBS에서 백제초도 위례성에 대한 방영(르뽀 60에서)
① 와당(瓦當 : 기와)
대체로 몽촌토성이나 석촌동 고분지역에서의 출토품과 흡사하다. 고려 이전의 와당이 지니고 있는 특징과 같이 기와의 내면에 마포문(麻布紋)이 새겨져 있고 색깔이 황토색이며 다른 기와에 비하여 매우 얇다.(일반적인 기와 두께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은 파문(波紋)이 세로로 여러 개 있어서 빗물이 흘러내리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백제 초기 와당은 지표부분에서부터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토성은 백제초기에 쌓여진 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철겸(鐵鎌 : 쇠낫)
토성의 아토 층에서 출토되었다. 쇠 낫은 수확용이라고 보기보다는 전쟁의 무기로 이용되었으리라고 본다. 토성 내에서 농사를 지었을 까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긴 자루에 낫을 꽂아 산성에 기어오르는 적을 무찔렀던 전쟁무기다.
③ 철창(鐵槍 : 쇠창)
순수 전쟁용의 무기다. 역시 아토 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축성 당시의 병사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끝이 뾰족하고 창의 한편이 날카롭다. 초기 철기시대의 창은 양쪽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어서 땅에 짚는 쪽도 예리하게 뾰족하며 앞뒤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 토성에서 출토된 것은 어느 쪽의 것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뒤의 것에 가깝다.
④승석문토기편(繩蓆文土器片)
중국의 주(周)나라 때에 시작되어 한 대(漢代)의 중기(中期)에 소멸된 토기다. 중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져 철기시대에 없어졌으나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와 AD 4C경에 소멸되었다. 그릇에 표면은 4~5단으로 나누고 노끈이나 새끼의 문양을 그릇의 표면에 박거나 두들겨서 그릇을 단단하게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7C이다. 승석문토기가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AD 4C경이라고 볼 때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에 쌓여진 성이 분명하고 위례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산성이다.
⑤성채(城砦)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조에 위례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위례성의 둘레는 1,690척(자)로 약 460m나 되는 장성이다. ㄱ자나 ㄷ자의 형이 아니고 원형의 성이다. 높이는 8자로 약 2.4m 정도이고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기록은 되었으나 사실은 토성과 석성의 혼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은 두 곳으로 북쪽의 것은 28m 길이에 높이가 약 3m 정도이고 남쪽의 것은 길이가 22m 높이가 3m 정도다. 성채도 두께 20cm 정도의 돌을 포개서 쌓아 올렸고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괴어가며 쌓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채로는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백제초기의 축성임이 수차에 걸쳐서 밝혀졌다.
백제 축성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쌓는 예가 많으며 본 위례성도 토성을 길게 쌓아 가다가 갑자기 굽어져 만곡(彎曲)을 이룬 부분은 돌로 곧게 쌓고 돌 뒤를 흙으로 메꾸어 토성을 연결시켰다. 성돌은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하였고 인공을 가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석질은 대개 화강암이며 두 곳의 석성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토성으로 되었으며 이천년이 지난 지금은 나무가 우거지고 토사가 밀려 간혹 허물어진 곳이 있지만 아직도 성곽의 대부분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적의 침입방향인 북서쪽(입장쪽)에서 볼 때 지금도 선명하게 토성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반대편인 동남쪽(북면쪽)에서는 정상부분까지 경사가 완만하여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토성부분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제거했을 경우에는 토성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1983년과 1986년에 국립지도원에서 발행한 1 : 25,000의 지도에 위례성의 성지가 뚜렷하게 항공사진으로 촬영되어 지도상에 성곽의 표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토성과 석성은 연결되어 원형을 이루면서 위례산의 정상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성내의 넓이도 약 10만평이나 된다 하니 가히 장성임을 짐작한다. 여지승람의 1,690자는 현재의 지도에 표시된 부분의 1/5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 성채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는 이제껏 주장한 것과 같이 백제의 첫 서울이며 온조왕에 의하여 축성된 성으로 백제의 건국연대와 그 연대를 함께하는 백제 최고의 성으로 주장하는 설이 있으며
둘째는 백제 20대 개로왕(AD 475) 때 고구려의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고구려 세력이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면서 문주왕(개로왕의 아들)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백제군의 최북단(最北端)의 성으로 웅천(熊川 : 안성천)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고 있을 때 백제의 요충지(要衝地)로 주장하는 설이 있고
셋째는 삼국의 항쟁시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지역으로 알려진 도살성(道薩城)의 위치가 바로 지금의 위례성의 위치로 현재 천안시 북면 납안리와 도촌(都村) 등을 중심해서 있었던 성지로 주장하고 있다. 즉 도살성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세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첫 번째의 주장이다. 그 이유는
▷ 성채 자체가 BC 1C ~ AD 1C의 작품으로 볼 수 있고
▷ 축성 당시부터 위례산성이다. 위례산에 쌓았다고 해서 위례산성이 아니라 당시의 도시 이름이 위례성이며 지금은 도시 이름은 간 곳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으로 남았을 뿐이고 위례성의 성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었던 위례산성이다.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위례라는 이름은 간데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사산성(蛇山城 : 직산)은 토성으로 둘레가 2,984자이고 높이는 13자라고 하였다. 이것도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산성 이전에 위례성이다.
본시 위례성이었던 것이 고구려에게 공취당하고 난 뒤에 사산성이 되었으며 오늘에 이어져 직산이 되었다. 마을(도시)의 이름은 바뀌었어도 산의 이름과 산성의 이름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전국에 위례라는 낱말이 존재하는 곳은 여기뿐이다. 아주 소중한 이름이다. 최근에 와서 서울의 강동구에 위례성 가는 길이라는 새로운 도로 명칭이 붙었고 위례마을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이름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 위례마을 가는 길이 닿는 곳이 어딘가. 아무리 가보아도 위례마을은 없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위례산 가는 길로 가면 분명히 위례산이 있고 위례성 가는 길로 가면 위례산성이 있지 아니한가. 억지로 꾸미고 가꾸지 말았으면 한다.
몽촌토성이 있다고 그 앞의 마을이 위례마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위례성과 사산성은 같은 것으로 옛날에는 위례마을의 이름이요, 또 그 마을을 둘러쌓았던 성이다. 사산성은 현재의 직산면사무소로 쓰고 있는 관아의 뒷산 즉 성산(城山)의 정상부분을 둘러 마을 둘레에 쌓고 남쪽의 부엉바위(남산바위)까지를 말한다. 백제의 축성이 거의가 토성이며 사산성도 예외는 아니다.
86년 여름에 충남대학교에 의하여 이 사산성의 일부가 발굴되었으나 신문에서는 이것을 목지국의 관청벽이라고 고증 발표한 사실이 있다. 필자의 소견에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사산성이고 그보다 옛날에는 위례성이다. 분명한 성곽과 성채가 있는데도 백제의 첫 서울을 한강변이니 금강변이니 해서야 되겠는가.
⑥ 적석총(赤石冢)
위례산성의 서북쪽으로 약 20m되는 성 아래에 위례성 우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약 20m 지점에 원시의 덤불 속에 장방형의 돌무지가 눈에 띈다. 길이가 5m 20cm 넓이가 3m 80cm 땅 위에서 높이가 1m 10cm의 적석총이다. 한강변 지금의 강동구 석촌동에 있는 대형 적석총의 축소판이다. 마치 침대 형으로 되어 위쪽이 약간 높고 아래쪽이 낮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적석총이 만들어진 것은 청동기 시대로 되었으나 남부지방에서는 그 후까지도(철기시대의 초기) 나타나고 있다. 원시의 숲속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원형은 과히 훼손되지 않았다고 보겠으나 최근에 그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바뀐 이유는 민간신앙(Shamanism)을 하는 부녀자들과 무녀들에 의하여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본 돌무지를 답사하고 이것이 적석총이라고 분명하게 고증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돌무지는 민간신앙의 제단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적석총인 확률이 50%정도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 내 발굴하여 확인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을 민간신앙의 제단용 돌무지나 성황당의 돌무지로 보기에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첫째 성황당(城隍堂)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나 고개의 마루턱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리고 서낭은 반드시 당의 뒤쪽에 신수(神樹)가 있어야 한다. 헌데 여기의 돌무지는 길가도 아니고 고개도 아니다. 해발 500m나 되는 높은 산의 9부 능선이다. 그리고 길이 없는 계곡의 바로 옆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어느 곳과도 통하는 길이 없다. 나무꾼이나 사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난 길이 아닌 길이 있을 뿐이다. 또 최근에 산성 조사 관계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자국 정도 남긴 길이다. 이토록 비탈지고 궁벽한 곳에 서낭을 두었을 까닭이 없다.
둘째로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서낭의 돌무지는 던진 돌이어서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 돌무지는 그렇지 않다. 떡의 켜를 쌓듯 하였고 사다리꼴로 올린 것이 예사 돌무지와는 다르다. 돌무덤의 머리 부분이 쌓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적석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아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 것을 보면 덩굴에 가려서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특별한 어느 인물의 무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성호씨는 저서 ‘비류백제의 일본 국가의 기원’에서 백제 초기의 적석총으로 보고 온조의 어머니(동명왕 주몽의 두 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의 무덤인 듯하다고 하였다.
⑦ 석곽적석총(石廓積石塚)의 군락지
위례산성의 뒤쪽 천안시 북면에는 앞서 말한 적석총과는 약 500m 떨어진 산비탈에 규모가 좀 작은 적석총이 수십기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돌로 지표를 누르고 있으며 거의 타원형으로 되었고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많은 돌로 쌓아놓은 일반적인 적석총 형태다. 숱하게 많은 적석총으로 보아 필시 어느 전화에 피해를 입고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인 듯하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BC6년의 여러 가지 사건 노구화위남(老嫗化爲男)이니 오호입성(五虎入城) 등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여 본다.
전란에 희생된 군인들이 함께 묻힌 백제의 국군묘지와 같다.
※ 참고적으로 가필하여 둘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서(史書)에 위례성에 대하여 논하였고 논문이나 연구보고서가 나왔으나 적석총이나 돌무지에는 한 마디의 논술이 없었음을 실어 둔다.
⑧ 위례산성 우물
동국여지승람에 위례성내 유일정금양퇴(有一井今羊頹)
위례산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지가 약 500년 전으로 볼 때 그때 이미 반이 허물어졌다는 글로 보아 세월이 흐른 지금쯤은 전폐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사실과도 다르다. 우물가에 잡초가 우거지고 낙엽이 떨어져 물속에서 부패되어 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반폐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우거진 풀을 베어버리고 부패된 낙엽을 긁어내면 되는 것이다. 현재도 우물은 완전한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여지승람을 편찬한 학자들이 위례성에 올라서 우물을 직접 확인하고 쓴 글이 아니고 직산고을 사람들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어느 고서(古書)에 있는 그대로를 옮겨 썼을 가능성이 높다.
1985년 여름 필자는 우물을 직접 퍼내고 인부들과 함께 우물 내부에서부터 조사하였으나 반폐도 전폐도 아니다. 최초의 모습 그대로 보존상태도 지극히 양호한 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우물을 퍼서 밥도 짓고 하였는데 최근에 와서 오염이 심하여 사용하기가 어렵다. 오염의 원인은 산제나 용왕제(우물제)를 지내고 제물을 우물에 던져 부패되기 때문이다.
우물의 넓이는 지름이 2.8m의 원형으로 길이는 약 2.2m정도이나, 퇴적되어 쌓인 흙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어도 밑바닥의 돌을 쌓기 시작한 지점은 찾지 못했지만 대개 약 15cm 정도의 돌을 15~16개 포개서 쌓아 올렸다. 일명 용(龍)샘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뭄이 심할 때도 마르지 않는 것이 용샘의 특징이다. 수백 명의 군사들이 취사 용수로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음료수로 사용을 하여도 그 양이 남을 정도이다. 지금도 깨끗하게 가리고 정수를 해서 사용하면 식수로 사용해도 별다른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최근 천안시 공보실의 배려로 우물가에 사적의 표시로 비석을 세워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음을 부언한다. 명주실 꾸러미를 몇 개를 풀어도 밑이 닿지 않는다는 전설과 우물 밑의 구멍이 부여 백마강에 통한다는 많은 전설을 지닌 위례산성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예부터 산성 속에는 우물이 있는 것이 필수로 되었고 그 우물은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적의 침입이나 포위로부터 장시일간 견디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 보겠다. 그러나 어느 산성이나 우물은 비교적 낮은 곳이나 산골짜기를 막아 이용하였으나 위례산성의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그것도 해발 400m나 되는 곳이라면 우리나라의 여러 산성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⑨ 망대(望臺)
토성과 석성으로 섞여 쌓여진 위례성은 길이가 약 2500m로 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쌓았고 가다가 우뚝 솟은 봉우리를 만나면 봉우리를 뭉겨서 펑퍼짐하게 만들어 멀리 서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망대를 만들었다. 지금 찾아 볼 수 있는 망대는 여섯 군데다. 망대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아산만이 한눈에 들고 경기평야의 남쪽 끝인 소사평야(素沙平野)가 성환읍에 연결되어 남쪽으로 치닫는다. 눈 아래에는 직산 옛 고을과 입장이 손에 잡힐 듯하며 산 아래 호당리에서 직산의 성산까지는 낮은 구름조차 볼 수 없는 평야지대이며 엽돈령(葉沌嶺 : 입장에서 진천으로 가는 고개)에서 근원이 되어 흐르는 물과 성거산을 수원으로하는 한천(寒川)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안성천(安城川)의 대하가 도도히 흘러 백석포에 잠긴다. 서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은 이곳 망대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7~8km 전방에서 식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BC 6년(온조왕 13년)에 있었던 오호입성의 사건을 하나의 전쟁으로 볼 때 아마도 그때에 사용되었던 전망대라고 본다. 네 번째까지의 망대는 성보다 약간 높게(2~3m) 대를 쌓았으며 망대겸 전투 지휘소로 사용한 듯 보인다. 망대의 뒤편에는 움집(땅을 파고 거적을 두른 집)을 지었던 자취가 지금도 우묵하게 파여 있다. 망대를 지키던 병사들이 번병제로 교대하기 위하여 쉬었던 곳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1989년 5월에 실시한 지표조사 당시 앞의 ①~④에서 백제 초기의 와당이 많이 출토되었다.
성문석(구숫돌)
위례성 정상 부분인 해발 524m에 구숫돌이 두 동강이 나서 부러진 반쪽이 남아 있다. 제3의 망대나 움집터 어디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 뒹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구수 모양의 돌이었으나 그 후에 두 개로 갈라져서 그 반쪽만이 남아있고 반쪽은 간 데 없다고 한다. 반쪽도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근처 땅속에 묻힌 것으로 보이나 찾을 길이 없다. 원형 그대로 있다면 무게가 약 1t 가량의 화강암이다. 일반 농가에서 소나 말의 먹이를 담은 구숫통과 같다하여 근처의 주민들은 구숫돌이라고 부른다. 5백여m나 되는 산의 정상에 인공으로 가해진 돌이 있음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넓은 장방형의 돌을 구수모양의 흠을 정(釘)으로 쪼아냈다. 이 돌에 인공이 가해진 시대는 찾을 길이 없으나 위례성 쌓았던 당시의 작품으로 본다면 약 2000년 전의 작품이다. 1986년 가을에 있었던 문화재관리국의 답사시에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이 돌의 용도가 석문석이라고 하였다. 성문(城門)을 세우기 위하여 문기둥의 아래에 받혔던 돌이다. 성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려면 기둥 아래에 홈이 파여져야 하고 그 홈에 기둥의 아랫부분이 박혀서 돌아가면서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돌이다. 문화재 관리위원의 말에 의하면 돌은 하나가 아니고 몇 개 또 있어야 한다고 하나 아직껏 지상에 노출된 것은 하나뿐이다. 앞으로의 발굴에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문석은 실제 성문을 열고 닫는 밑받이 돌인지 아니면 용도가 전혀 다른 데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후세에 누가 묘지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성내에 고인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하여 성채 밑에 놓았던 물받이 돌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돌이 있는 북쪽으로 약 300m쯤에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를 잇는 부소문(扶蘇門)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고개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만약 이것이 분명히 석문석이면 이 부소문이 고개에 있었던 문에 쓰여진 돌이 아닌가 한다. 전설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오랜 옛날에는 부소문 고개에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돌의 주변에는 그리 많지는 않아도 약간의 돌이 있으나 모두 불에 그슬린 검은 흔적이 있다. 아직도 풀 수 없는 몇 가지 의문이 이 돌에 남아 있다. 5백여m나 되는 산정에 이런 돌이 있다는 점, 인공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점, 용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완전하게 풀리지 않은 점 등이다.
제원루지(濟源樓址)
직산객관 동쪽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이 영남지방에 사신으로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객관 동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좀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의 이름이 무어냐고 하였더니 주인은 알지 못한다고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손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곳인데 사서(史書)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만한 곳을 찾다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고 한다. 서거정이 지난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상고하여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것은 의심할 바가 전혀 없다고 하면서 제원루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를 한 수 지었다.
백제유허초자평 아래감개일상정 百濟遺墟草自平 我來感慨一傷情 백제의 옛 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했네
오룡정파천안부 쌍봉명잔위례성 五龍淨罷天安府 雙鳳鳴殘慰禮城 다섯 용이 천안부에서 싸워 파하고 봉황새 한 쌍이 위례성에서 울었네.
시조사심홍수합 성거산옹벽운횡 始祖祠深紅樹合 聖居山擁碧雲橫 시조의 사당은 깊은 단풍나무에 가리워졌고 성거산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등루다소추풍사 하처취잔철적성 登樓多少秋風思 何處吹殘鐵笛聲 누각에 올라 가을바람에 나는 생각 어디서 쇠피리 소리만 들려오는가
이상은 제원루에 대한 서거정의 시다. 제원루는 지금의 직산초등학교 교정에 있고 이곳에는 당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長大石)이 흐트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온조왕 묘
직산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조11년(1465년)에 세웠고 봄과 가을에 국가에서 향(香)과 축(祝)을 내력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온조왕 묘는 조선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소실되고 순조18년(1818년)에 현감 이의선(李義先)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사년(1881년)에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 같이 온조 묘나 제원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초도는 천안시 직산지방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