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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 6. 위례성 주변의 전설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곳에는 그것에 따르는 전설이 있게 마련이다. 원래 전설이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서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고 귀담아 듣기 싫은 때도 있으나 할머니 무릎에 누인 손자를 잠재울 때나 깊은 겨울밤 사랑방 노인들이 한담거리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목   차
[숨기기]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곳에는 그것에 따르는 전설이 있게 마련이다.
 
원래 전설이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서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고 귀담아 듣기 싫은 때도 있으나 할머니 무릎에 누인 손자를 잠재울 때나 깊은 겨울밤 사랑방 노인들이 한담거리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또 유적이나 유물은 실제 조사함에 있어서 먼저 이루어야 될 것은 현지에 전해오는 전설의 청취다.
 
현지에서 전설을 듣다 보면 그곳의 유물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있으며 또 유적의 내력은 어떠한가 하는 등 문헌 조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내용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문헌과 유적과 유물 그리고 전설 등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어 우리나라 모든 기록의 신빙성을 재평가하게 되고 현지의 유물이나 유적의 고증에 더 크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1. <전설 1>

 
옛날 백제군과 고구려군이 싸워 피비린내 나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라 조화를 잘 부려서 고구려 군사를 잘 물리쳤다. 백제 임금은 낮에는 용으로 변신하여 웅진(공주)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땅 속으로 뚫린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 위례성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고구려 군사들과 전쟁을 하고 밤에는 용샘으로 들어가 웅진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가서 모든 정치를 처리하였다.
 
그러던 중 임금 자리를 탐내던 처남이 임금이 용왕의 아들임을 알고 제비를 낚시 미끼로 하여 용샘에서 돌아오는 왕을 낚아채어 죽여 없앴다. 백제 임금이 죽은 후 백제군은 전멸 당하였으며 위례성 주변에 있는 모든 산은 위례성을 향하여 울었다고 한다.
 
 
 

2. <전설 2>

 
위례산은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울었다고 해서 위례산이라 하였다. 울다와 위례를 같은 음으로 보았고, 울다가 변해서 위례로 된 것으로 전한다.
 
위례산 부근에는 지금도 옛날 백제의 서울을 말해 주는 성이 있는데 그 산 위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고 이 용샘은 서해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메워져서 바닥이 드러나 보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또 비가 많이 와도 넘치는 일이 없다. 명주실을 몇 타래씩 풀어도 끝이 닿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용들이 놀아서 이곳에 와서 놀고 많은 조화를 부렸다고 한다. 용들이 놀아서 산 위에는 언제나 오색의 무지개가 떠 있고 위례성 주변을 지나던 역대의 제왕들은 꼭 산신제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3. <전설 3>

 
옛날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에는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남매가 살았는데 오빠 이름도 백제이고 동생이름도 백제였다. 동생 백제가 위례성에서 “나는 여기서 도읍을 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오빠 백제가 여기는 “물이 없어서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말하기를 “여기 참 직산이 금방석”이라고 하는데 만인이 깔고 앉으면 만인이 쓸 수 있는 물, 즉 자연수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도읍을 정해도 무방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빠 백제는 “언제든지 용상지지(임금이 앉을 땅)가 앉으면 수만명이 모여 살게 되며 모여 살려면 그 물은 웅수(금강) 뿐이다. 그러므로 부여 백마강을 끼고 도읍을 정하거라” 하고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안됩니다. 나는 여기서 언제고 도읍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해야 삼국통일이 됩니다.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여기입니다.”라고 간곡히 권했으나 오빠 백제는 물을 끼지 않아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동생 백제는 하는 수없이 오빠의 말에 따라 부여 백마강을 끼고 부여에 가서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언짢았다. 그의 마음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오빠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이곳 부여까지 왔으나 낮에는 백마강이 있는 부여에서 지내다가 밤에는 용으로 변하여 백마강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와서 이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자 오빠 백제는 부여 사람들이 임금 없는 백성이요 장군 없는 군졸인지라 나라의 백성들이 아우성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동생에게 “밤낮 이곳에만 있으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듣지 않고 위례성 도읍을 계속 고집하였으며 듣지 않고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부여와 위례성 왕복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오빠는 동생을 죽일 결심을 하고 제비 한 마리를 잡아 구워서 낚시의 미끼로 하여 밤새 굶고 돌아오는 동생을 꼬여 제비고기를 먹도록 하여 낚시로 낚았다. 동생 백제는 낚이어 죽어가면서도 통일천하를 이룰 도읍지는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4. <전설 4> 도영지와 천석군

 
옛날 중국 땅에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추남이라고 해서 쫓겨났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기묘하게 생겼으며 머리는 한쪽이 절벽이며 몸 여기저기에 털이 나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었다.
 
그는 중국 땅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우리나라로 우연히 들어와 남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마침 지금의 직산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들에서 야생식물을 먹고 살다가 넓은 들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무를 깎아 연장을 만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질퍽거리는 곳에다 논을 만들고 메마른 곳은 밭을 만들었다. 들에는 물이 흔하고 풀이 흔하고 풀이 썩어서 땅이 기름져 있었다. 그는 논과 밭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심을 곡식이 문제였다. 그는 그의 고향인 중국 땅으로 달려가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얻어 등에 지고는 강과 산을 넘어 직산 땅에 돌아와 정신없이 씨를 뿌렸다.
 
그는 농사 이외는 아무것도 몰랐다. 생업에만 착실히 종사할 따름이다. 그 넓은 들을 차지하고 착실하게 전답을 일구다 보니 자기 혼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넓은 경작지가 되어 이곳에 흘러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반타작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직산의 이곳저곳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들이 거의 농경지로 변하자 도적들이 가끔 몰려 들어와서 괴롭히므로 그들은 마을을 지키는 협동체를 구성하기로 하고 서로가 창과 활을 만들어 도적들을 대적하기로 하였다.
 
자기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은 무슨 말이든 잘 들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불행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무도 자기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가 없었고 그뿐 아니라 여자들이 자기만 보면 짐승이라고 모두 도망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오십이 넘도록 혼자였고 가장 쓸쓸한 생활을 하는 큰 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나이를 들수록 외로움에 사무치게 되었다. 그가 심한 고통 속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자기 마을의 북쪽에 많은 군사들이 찾아왔다. 군사들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남쪽에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왕은 온조라고 하며 앞으로 많은 협조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나는 도적이 아닌 사람은 누구든 좋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내를 얻어 살고 싶습니다.”고 하소연 비슷한 말을 군사들에게 하였다. 군사들은 그 딱한 사정을 알아차린 듯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그길로 달려가서 다음날 아침에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 앞에 나타난 여인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그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싫다는 표정도 없이 동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주었으며 아내는 그 많은 곡식을 백제의 온조왕에게 헌납을 했다.
 
산성에 도읍을 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지켜가던 온조는 그로부터 많은 곡식을 헌납받고는 크게 나라의 세력을 늘릴 수 있어 그에게 벼슬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 아내를 맞이하여 아내를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온조가 보낸 군사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가 묻힐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천둥과 비가 요란하더니 하늘이 쪼개지는 듯하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며 마치 천지개벽을 하는 듯하였다.
 
이틀 동안을 그렇게 큰 비가 오고 무서운 천둥이 치더니 사흘 만에 날이 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동안 꼼짝도 못하던 사람들이 비가 개이자 그를 파묻었던 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묘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묘는 간 데 없고 큰 바위가 섰고 바위 모양이 죽은 그를 닮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말하였고 그의 아내는 그 위에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하나 그가 죽은 뒤에는 매년 여기만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계속 되었다. 땅이 기름져서 부자 부락으로 통했던 이 부락이 이제는 오랫동안 가난에 허덕이는 마을이 되었다.
 
그렇던 세월이 흘러 고려 때에 도사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러 말하기를 “흉년이 드는 까닭이 저 바위가 한 해에 4천석의 곡식을 먹어치우니 가난할 수밖에”하였다. 그리고 나선 바위 아래에 못을 파서 바위가 마을을 쳐다보지 못하고 연못에 그 모습이 비치면 다시 부자 마을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못을 넓고 깊게 파서 바위의 모습이 연못에 비추게 하였다. 그 해부터 이 마을에도 풍년이 들기 시작하였다. 바위가 못생겨서 부엉바위라고 불렀고, 못생긴 바위가 남산에 있다 해서 ‘남산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 아래에 팠던 연못은 바위가 거꾸로 보이게 하는 연못이라고 하여 도영지(倒影池)라고 한다. (천안실록)
 
 
 

5. <전설 5> 유왕(留王)골과 온조왕(溫祚王)

 
목천면 덕전리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오르면 유왕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남쪽으로 옮겨와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을 때 봄과 여름이 되면 이 마을에 머물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안위하였다 하여 유왕골이라고 부른다. (韓國地名總覽)
 
 
 

6. <전설 6> 세성산(細城山)과 온조

 
천안군 성남면 화성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약 200m의 낮은 산이다. 산 위에 성터가 있고 성채는 흩어져 있고 동학혁명때 수백 명의 교도들이 이곳에서 죽어 일명 시성산(屍城山)아라고도 한다. 삼한시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농성(農城)이 있는 곳이며 산의 동쪽에는 방어책으로 된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이 성에 옛날에 사람이 살 때에는 쌀을 찧던 곳이라고 한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처음 한참 동안은 마한에 속해 있다가 온조가 농경에 세심한 관심을 두면서 새롭게 나라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백제를 따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백제를 따르게 된 마한의 성이다.
 
※ AD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해서 58개의 성을 공취한 기록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바 그 58개의 성 중에 세성이 들어 있어서 이 지방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필요하며 그것이 밝혀지므로 해서 광개토왕비문 연구가 가일층 선명하게 될 것으로 본다.
【논문】 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 5. 유적과 유물로 본 위례성
• 6. 위례성 주변의 전설
• 7. 위례성 주변의 지명
(2023.02.01. 17:51)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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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