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의 숲 겨울
아직은 봄이라 해도 곳곳에 잔설이 있는 이른 봄이었다. 집 주변에 터를 잡고 사는 새들만이 봄을 끌어당기고 있고 언 땅을 밀고 올라와 개별꽃이 피고 있었다. 개별꽃은 복수초보다 더 지독한 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꽃잎이 확인 되는 아주 작은 꽃이다. 오래전에 계획을 했던 생암산 생 왕 처 이야기를 쓰면서 한가한 농한기에 설화로 전해지는 지역 지명을 찾아 답사를 다녔다. 마을회관에는 연세 높은 어른들이 계셔서 자료를 수집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이야기를 녹취하여 그것을 원고지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생암산 주변 지명을 확인하러 사전답사를 나섰다. 바람이 제법 세어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당초처럼 매웠다.
버드내 집에서 자동차로 출발하여 매바우를 지나는데 진안방향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길이 갈라졌다. 삼거리 도로 옆으로 성수산 이성계기도처 상이암 가는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이 매바위, 응암鷹巖이다. 매바우라고 순수 우리말로 쓰고 있는 마을이다. 매바우는 도로 옆으로 매의 형상 바위가 있다. 매바우에서 볼 때 건너편 산이 황새처럼 깃을 펼쳐있는 형국이라 황새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매가 황새를 잡으려고 노리고 있고 그것을 알아챈 황새는 언제라도 날아갈 기세로 깃을 펼치고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건너편 황새골은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다. 황새골은 응달이라 늦은 봄까지 늦도록 얼음이 있는 곳이다. 매바우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서 산이 좁아졌다. 산 밑 양지바른 곳에 지추바우 마을이 새 집처럼 모여 있다. 지암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데 본래 이 마을에 지초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원이 변형되면서 지추바우가 된 것이다. 마을 앞으로 언덕을 일궈 갈치처럼 길게 만들어진 다랑이 논 몇 평이 마을 형편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 위로 저수지가 있는데 성수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두어 만든 저수지이다. 겨울이라 농번기가 아니어서 저수지는 만수였다. 물색이 파랗다 못해 시퍼런 빛을 띠고 있어 보기만 해도 중압감이 들었다. 물 가운데 원앙 몇 쌍이 물그림자를 만들며 유유히 떠서 물고기를 찾고 있었다. 그들만의 생존방식이다. 저수지 앞산이 뾰족하여 산 그림자가 깊었다. 산길이지만 크고 작은 골짜기가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길이 이어져 있고 골짜기마다 한두 채씩 민가가 있었다. 좁은 협곡을 벗어나자 산중도방처럼 너른 지형이 나타났다. 저수지가 시작되는 곳에 마을이 있고 너른 들판은 아니지만 중중첩첩 산중에서 이 정도 전답이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조들이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산허리를 깎아내어 만든 전답을 후손들이 잘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형이 편편(평평)하여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어 넓어보였다. 마을은 저수지를 비켜 산 아래쪽으로 형성되어 있고 양달이면서 평안해 보이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의 모습이었다. 수천리 마을안에 천주교 공소가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니 다시 산이 좁혀들었다. 마을 끝으로 작은 시내를 건너 산중 도로에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식재되어 있었다. 옛날부터 이곳을 벚남쟁이라고도 하고 뻔남쟁이라고도 하는 지명이 있었다. 옛날에 이쪽저쪽 산에 산 벚나무가 많아 봄이면 산 전체가 벚꽃이 피어 골짜기가 환했다고 한다. 총각들은 거름을 지게에 지고 와서 바쳐놓고 산 벚꽃에 취해 손을 놓고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처녀들은 나물 캐러 나왔다가 벚꽃에 마음을 빼앗겨 놀다가 나물을 캐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벚남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산촌마을 사람들은 산허리나 아래를 일구어 밭을 만들고 논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다. 그런데 전답이 제각각 모양이다. 마치 삿갓 덮어놓은 것 같은 작은 다랑이도 있고 길게 이어진 갈치처럼 생긴 다랑논도 있었다. 가재가 발 씻는 다랑이도 있었다. 얼마나 논이 작으면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이름 지어 붙여서 기억을 했는지 듣기만 해도 정겹고 재미있는 전답 이름이었다. 길옆으로 통나무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울도 담도 없이 개방된 집이었다.
이곳은 도장골이다. 골짜기에 좋은 흙이 있어 그릇의 질이 좋았다. 천주교박해 때 신자들이 이곳으로 피난 들어와서 숨어 살면서 그릇을 만들어 팔러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었다. 갈골 입구에도 사기 굽던 곳이 발견되고 지금도 밭가에 그릇을 구을 때 받치는 도침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더 깊은 골짜기에도 사기그릇 파편이 많아 도요지 자료에도 나와 있었다. 몇 년 전 모 대학교 박물관장, 문화원장과 함께 도요지 터를 찾느라 조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자료에는 도장골 점토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찾아보자고 길을 나섰다.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은 공사 장비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었다. 주차장 끝으로 컨테이너사무실이 몇 개 들어서 있었다. 일제 때 금가루를 긁었다는 강 금 바위가 있고 계곡 건너편으로 요즘 새로 만들어진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데크 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평소 절벽이어서 보는 것만으로 대신했는데 실제로 이 길을 걸어보니 한가롭고 새로웠다. 도로에서는 자동차가 다니기 때문에 늘 비켜야 하고 조심스러웠는데 한가롭고 여유로웠다. 계곡의 극치도 한몫을 했다. 단풍나무 숲 부근을 지나자 정자가 있었다. 삼나무 숲이 잘 조성되어 있는 이곳이 사근이다. 사근이는 절이 가깝다는 의미이다. 길은 이곳에서 끊어지고 다시 도로로 나왔다. 예전에 있던 호수를 다시 더 넓게 만들고 구룡천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구룡호수 옆으로 높고 높은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름재 정상까지 등산로를 조성해서 성수산 경관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걸어보지 않아서 그 거리를 알 수가 없었다. 캠핑장 설치자리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좀 더 걸어가니 휴양림 본관이 나왔다. 계곡 옆으로 감나무가 있는 이곳이 맨 처음 천주교 공소가 있던 자리였다. 예전에 개인이 휴양림을 운영할 때에는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은 휴양림 주인이 임실군으로 바뀌면서 오래된 휴양림 옛 건물들을 헐고 정비를 하고 있었다.
석문동 입구 양쪽에 돌문바위가 있고 그곳을 통해 골짜기로 올라가면 삼 십 여명이 들어가서 비를 피 할 수 있는 굴이 있다고 하여 답사를 했는데 큰 바위 아래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굴이 메워져서 좁아졌다. 석문동은 계곡이 협곡이라 은둔 생활하는 데는 그만인 장소도 없었던 것 같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숯을 굽던 곳인데 이곳의 숯은 참나무 숯이라 질이 좋아 주로 서울로 팔려나갔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성수면과 지사면 주민들의 학살 장소였다. 성수산 주변 주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서 무차별하게 죽음을 당했다. 지사면 삼산리 마을 주민 사 십 여명을 하룻밤에 학살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탄환을 아끼려고 갖은 방법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골짜기 안으로 더 들어가면 옛날에 둥구 절터로 골짜기 안이 소쿠리 속처럼 둥글다. 중중첩첩골짜기로 독불공 홀로 들어와 도를 닦을 수 있는 기도처로 둥구 절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곳이다. 통시 골은 상이암에서 동쪽으로 해우소가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임실군과 진안군의 경계선이 있고 넘어가면 백운면 남계리다. 절 골은 상이암 법당 뒤쪽 골짜기이다. 기도처는 칠성각 뒤쪽으로 약 이십분 거리에 있다. 지금도 작은 토굴이 있어 가끔 스님들이 홀로 들어와서 며칠씩 기거를 하며 독불공 하는 곳이기도 하다. 번뇌를 묻은 흔적이던가. 암자로 가는 길은 수행자들의 흔적들이 돌이 되어 화석으로 남아 있다. 불교에서는 번뇌는 중생으로 하여금 출세선심出世善心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에서 번뇌를 독이라고도 하는데 탐·진·치의 세 가지 마음작용은 이러한 작용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삼독三毒이라고도 한다. 또한 윤회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여 고苦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 즉 삼계에 속박된 상태로 중생을 묶어 놓고 있으며 이 속박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삼독三毒이라고도 한다.
아침이면 불구사물로 산을 깨우고 저녁에는 연화봉 노을로 공양을 짓는 스님이다. 상이암 앞 화백나무가 백년이면 어떻고 오백년이면 어떠랴, 스님은 부처를 향해 있고 부처님도 스님을 바라보며 도반처럼 조용히 늙어가고 있는 상이암이다. 저 침묵의 그늘은 세월을 거부하는 천년의 푸른 잠이다. 처마 난간 끝 풍경이 울릴 때마다 암자 앞엔 개별꽃이 피어난다. 푸른 멍 같은 계곡물에 부르튼 발로 자맥질하며 바위 위에 암자를 세운 저 새는 누구일까. 진정한 석가의 제자라고 스스로 인정한다면 누구나 마음속에 불도의 집 암자 한 채 정도는 짓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가 아니면 어떤가. 편백나무 아래에서 망중한忙中閑속에 졸고 있는 스님 모습이 선정에 들어있다. 무량수전 억겁 공간 속 연꽃무늬 문살에 잠자리도 열반에 들었는지 미동이 없다. 쇠 붕어는 바람을 먹고 산다. 법전 처마 끝 쇠 붕어도 지금은 묵언수행 중이다. 이 아미타의 시간을 누가 함부로 들어와 수만 년의 고요를 깨뜨리겠는가. 여름이 지나가면 나무는 송진 속에 나이테를 감추고 무성했던 숲의 허물을 벗어 내리라.
생암에 올 때마다 알 수 없는 힘 같은 걸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땅속에 있다가 누군가의 염력으로 찾아낸 매몰되었던 불상처럼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수천 수백 년을 어둠속에서 세월을 기다려온 매몰 불같은 강렬한 힘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