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탁본을 배우다.
도반은 지역을 두루 다니며 탁본에 집중하면서 연락이 뜸했다. 나는 그간 쓰다만 몽골오지취재 원고를 다시 꺼내어 정리하고 있었다. 원고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 도반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지역에 금석문을 탁본하여 전시 할 계획이라며 탁본을 배우고 싶으면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탁본에 대해 상식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평소 배우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식과 상식을 걷어 들이는 성격이라 절호의 기회가 온 것 같아 참여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금석문 전문가인 문화재 위원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이라고 한다.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글을 명銘이라한다. 비음부분에 새겨진 글을 음기陰記 또는 비음이라고 한다. 비의 종류에는 능에 세우는 능비, 묘에 세우는 묘비,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그 외로 순수비, 기념비 등이 있고 최근에는 시비, 노래비 등이 있다. 이러한 비에 쓰인 문장들은 대체로 한자를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한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과 이수이首·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또 자연석의 일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 마애는 바위에 조각을 했다는 뜻이다. 마애불磨崖佛은 바위에 새긴 불상이다. 삼존불은 세 분의 부처나 보살상이란 뜻이지 서 있다는 뜻은 입상立像이라고 한다. 마애磨崖·摩崖라는 것은 암벽에 부조평면상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기법으로 선각 즉 선으로 새기는 그림이나 무늬 방식으로 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글자를 새기거나 불상을 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글자를 새기는 것을 마애명磨崖銘 불상을 새기는 것을 마애불磨崖佛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그림이나 글 등으로 남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살아간다. 선사시대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는 바위에 여러 종류의 동물과 인간, 그리고 다양한 기하하적 문양을 새겨놓았다. 암각서巖刻書는 바위에 새긴 글씨로 문인들이나 학자들에 의해 쓰여 진 것이 대부분이다.
비문 탁본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고려 때 의견 이야기가 새겨진 암각화를 먼저 선정했다면서 우선 탁본 과정을 지켜보라고 했다. 우둘투둘한 바위 면에 새겨진 암각화는 오랜 풍마우세로 지워져 일반인들이 식별하기에는 애매 모호한 그림이었다. 금속성을 이용하여 점을 새겼는지 철분성분이 겉으로 드러나 점으로 남아 있었다. 바위 면에 개 한마리가 누워 있는 형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개의 형상을 찾아 맞추려고 나는 나름 애를 썼다. 탁본이 시작되면서 한지에 박혀 있는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문가가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그림이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각석 비는 두 자 정도의 높이로 넓이는 한 자 정도로 일반 자연석을 깎아 새긴 그림이었다. 이물질 제거 작업이 끝나고 두 번째 작업으로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그림면에 한지를 바르고 각자마다 부드러운 옷솔로 살살 두들겼다. 한지 속으로 각자가 스며들도록 세밀하게 작업을 하는 과정은 마치 신전에 경견한 제사를 올리는 것처럼 신중하고 엄숙했다. 붙여진 한지는 바람 때문에 빠르게 마르고 있었다. 수분이 부족하면 한지가 뜨기 때문에 그 위에 광목천을 덮었다. 그리고 각자 홈에 남은 수분을 옷솔로 부드럽게 두들기면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탁본 할 대상에 따라 농도 희석이 달랐다. 서숙을 광목천에 주먹만 하게 싸서 고무줄로 팽팽하게 묶었다. 그리고 조 방망이를 먹물에 살짝 찍어 베어 들면 신문지나 폐지에 찍어 농도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먹물을 글씨에 대고 두들겼다. 서서히 그림상태를 살펴가면서 바위의 혼을 빼내기 시작했다. 때로는 벌새처럼 빠르게 또는 느리게 두들겼다. 바위의 그림이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섬세한 솜씨였다. 먹물의 농도에 따라 음영의 차이는 크게 달랐다. 담묵의 예술작품이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 탁본이었다. 나는 완성된 그림을 받아서 햇빛 좋은 곳에 펼쳐 남아있는 수분을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지사면 영천에 가서 빨래판 성혈을 탁본하고 관곡서원에 가서 비를 탁본했다. 바위에서 묘비에서 그곳에 깃들어 있는 혼을 빼내는 탁본작업은 처음 접하는 내게는 신비스러웠다. 이번 기획탁본은 주로 묘비에 새겨진 글씨를 본 뜨는 일이 대부분이고 암각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문중 묘비나 신도비에 새겨진 암각서, 암각화를 한지에 베껴 내는 일이었다. 과거 벼슬이나 관직에 있었던 선비들의 행적이나 업적을 칭송한 글을 새겨 남긴 것이 금석문이고 글씨는 당대 어느 명필이 썼는가에 따라 그 집안의 위력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천민이 나눠 있어서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만 해도 권위의 상징인 비를 세웠다. 또는 누군가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바위에 좋은 글귀를 새긴 암각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탁본은 대체적으로 양지바른 장소는 그늘이 없어 작업이 수월하지만 응달에서는 바위가 물기를 머금고 있어 제거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 여름 삼복염천에는 산속에서 바람도 없고 그늘도 없어 숨이 컥컥 막혔다. 신도비는 사면을 떠야 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백 년 된 신도비는 글자 속에 이끼가 자라고 있어 작업이 더디었다. 나는 금석문 전문가들과 신도비 묘비·암각서·암각화 당대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찾아 지역 곳곳을 따라다녔다. 다크투어 즉 사후세계를 찾아 순례를 한 것이었다. 한동안 탁본에 미쳐서 계절이 가는 줄도 몰랐다. 탁본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