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궁예와 왕건관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인물로 본래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다.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왕위 다툼에서 밀린 궁예는 궁에서 쫓겨나 미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후에는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 세상이 혼란해지자 궁예는 당시 강원도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양길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활약해 세력을 키운 궁예는 결국 양길을 무너뜨리고 후고구려를 세운다.
궁예의 출생을 두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의 국왕 경문왕과 그의 빈어(嬪御) 사이에서 태어난 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당시 단오에 태어난 아이를 불길하게 여기던 문화와 궁예의 이런 특성을 두고 불길하게 여긴 일관이 아버지인 왕에게 궁예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한 쪽 눈을 실명했고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키웠다고 한다. 이런 출생의 사연 때문인지 궁예는 평생 신라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렸다.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 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키웠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
유모가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궁예는 하직인사를 올리며 고했다.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해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고 이름 지었다.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그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승려 활동보다는 무예 등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궁예의 측근으로 같이 축출된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궁예는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무태 2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 궁예는 이후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한다. 이때부터 초심을 잃은 것일까. 한때 백성들로부터 미륵으로 불러지던 궁예는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폭정을 일삼는다. 남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관심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 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것의 정확한 이야기는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 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 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득달 같이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 했구나 탄식하며 성을 버리고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 지리적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설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종종 곰보 돌로 부르는 것 같다. 또 궁예의 정치적 고향인 철원의 민간전승에도 사실상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역사서 들의 기록들보다 더 악독한 만행도 전해지고 있고 또 이와는 반대로 광산이씨 소고에 따르 면 궁예왕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 방면으로 도주 중 수풀 속에 숨은 백성들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 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군주의 예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 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기존의 학설은 삼국사기에 궁예 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 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 때 왕건을 황제로 만드는데 1등 공신들이였던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을 보면 이중에 홍유는 신라 지역인 경북 의성 출신이고, 배현경은 본관이 경주 배씨인 것을 감안하면 잘 알 수 있다. 궁예가 신라 출신 귀순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면 이들이 궁예가 다스리던 나라의 고위급 장군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楓川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궁예가 강성해졌다며 자만하고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에서부터 귀순해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고 한다.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와 나주 지역의 해상 군소 해상 세력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해전과 해상 무역에 대한 계책들을 진언을 했다.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 만 하겠는가?"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했지만,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 궁예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궁예에게서 이탈한 일부 청주인들이 주동이 되어서 패서 지역 호족들과 유학자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서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가 역성혁명을 성공시켰다.
또한 직접 불교 경전 20권을 짓기도 했다. 경전에는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지침들이 있었다. 유학자들은 직접 말을 못하고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석총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평을 했다.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
혹평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죽이고 말았다.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었다.
궁예 정권에서 왕건 지지 세력들이 논공행상에 명단이 보이지 않자 일부가 왕건을 죽이기 위해 암살모의를 했다. 환선길이 군사 50여명을 거느리고 왕건에게 다가갔다. 왕건은 태연하게 말했다.
“짐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비록 너희들 덕분이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너희가 이럴 수 있다는 말이냐”
호통을 치니 도망을 갔다.
궁예에 호의적인 학자들의 말대로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존재했지만, 패서 지역 호족들을 등에 업은 궁예의 황후 강씨의 사건이 진압된 이후 큰 충격을 받았다. 궁예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위세력들을 잘 이용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감시하고 숙청한 관계로 이들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 뿐만이 아니라 기타 왕건을 지지하는 반 궁예 세력들이 왕건의 역성혁명 때까지 제대로 결집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장기간의 지나친 폭정으로 인해 민심과 군심, 그리고 신료들의 이반으로 인해 반 궁예 세력 일부가 궁예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을 했다. 수많은 전쟁으로 단련된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시중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민심과 군심의 지지를 얻은 왕건이었다.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고 관리로서의 실무에 밝고 익숙했던 태평 같은 인물을 막지 못하고 결국 민심을 잃은 궁예는 휘하 장수였던 왕건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몰락하고 만다.
신라효공왕 3년(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지만 왕건의 이 첫번째 전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이를 사전에 간파한 궁예의 선제공격으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 901년에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을 것이다. 궁예가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물었다.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뜸을 했다.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빠르게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왕건은 곧 최응이 시키는 대로 고했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거짓으로 자복을 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흔쾌하게 웃으며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라고 한다. 후삼국 시대 영웅은 궁예는 관심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개성 지방의 대 호족이었던 왕건 세력과 손을 잡은 궁예는 송악을 수도로 하고 세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근거지인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작업을 착수한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꾼 궁예는 왕건의 근거지가 아닌 자신의 근거지에서 철원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철원이 산지이고 수운이 발달하지 않아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무장지대인 궁예의 왕궁 터를 가보면 드넓은 평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산지라고만 알고 있는 철원에 이런 평야가 있나 할 정도로 드넓은 평야이다. 지금도 철원 평야는 알아주는 곡창지대로 유명하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 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하여 호족들은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이 심했다. 918년 시중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궁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삼국사기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고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궁예의 정치적 고향인 철원과 그 근처 지역들의 민간전승에는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울 때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안내까지 해줬다는 궁예의 최후에 대해 호의적인 민간 전설들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