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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저작물 (목치)
【소설】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 7. 고려의 멸망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이 등장을 한다. 신돈은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의 천한 신분 때문에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절집에서 살았다.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받들었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7. 고려의 멸망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이 등장을 한다.
 
신돈은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모계의 천한 신분 때문에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절집에서 살았다.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받들었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난도 있었고 심지어 정세운은 신돈을 요승(妖僧)이라 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왕이 피신을 시키기도 했다.
 
그동안 몸을 감추고 있던 신돈이 두타행자가 되어 신돈을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 두타승이 되어 정치 표면에 나섰다. 두타승이란 버린다·떨어버린다·씻는다·닦는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출가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이나 속성을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참기 어려운 고행을 능히 참고 행하는 것을 두타 또는 고행자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두타 행 또는 두타행자라고 한다. 공민왕을 만나 비로소 궁 안에 들어와 권세를 부리게 되었다. 이 때 왕으로부터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사부가 되어 국정을 자문했는데 왕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집권 초창기에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을 포함한 조정 내의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신돈이 이렇게 등용된 배경은 도를 얻고 욕심이 적으며 미천해 친당이 없으므로 큰일을 맡겨도 소신껏 국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개혁 지향적인 공민왕의 판단이었다. 신돈이 영도첨의사사가 된 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세의 왕으로 알려졌고 백관들에게는 영공으로 불려졌다.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외의 권력을 총관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대신해 백관들의 조하를 받고, 출입할 때는 의위가 왕의 승여와 비슷할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
 
신돈의 등용은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신돈의 골상은 옛날 흉인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해 왕에게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 시기 공민왕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하던 신돈에게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혼이 반쯤 나간 상태여서 실권을 신돈에게 맡겼다는 설도 난무했다.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사업 강행으로 국가재정의 궁핍과 이때 발생한 기근은 일반민들에게 곤궁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일이 초래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그가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죽자 그녀를 위해 따로 궁궐을 짓고 공주의 화상에 직접 제를 올리고 호악을 연주하게 하고 술잔을 주고받는 일을 공주 생전처럼 했었다. 얼마나 마음이 병들었는가는 고려사절요, 공민왕 편에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한편, 궁 밖에서 신돈은 처첩을 거느리며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졌다. 술과 고기, 음악과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공민왕을 대할 때만큼은 채소와 과일만 먹고 차를 마셨다. 믿음을 주기위한 전략이었다. 그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할 뜻을 밝히고 신돈이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접하게 되었다. 밀직제학 이달충이 신돈에게 많은 사람이 공은 주색을 너무 밝힌다고 말한다고 지적하고 신돈을 비판한 상소문을 공민왕에게 올렸다. 왕에게 직접 고하지 않으면 신돈의 전횡이 날로 흉포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신돈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고발을 듣고 참수해버렸다. 머리는 개경 동문에 효수되고, 사지는 지방에 돌려졌다. 후에 싸움은 우왕이 되는 모니노와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에 있었다. 공민왕은 모니노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언급했지만, 신돈은 공민왕이 모니노의 생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후사가 없어 그 모니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싶은 공민왕은 그런 신돈이 꺼려져서 참수를 한 것이었다.
 
또한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훗날 이성계를 주축으로 한 급진개혁파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워 폐가입진의 명분 아래 창 왕을 내쫓고 공양 왕을 추대 했다. 이로써 조선의 건국 과정을 통해 신돈의 집권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간섭할 때마다 관료들을 장악하지 못했던 선대왕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인물이다. 게다가 후사가 없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언제든 왕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권세가에게 점탈된 토지와 농민을 되찾아주는 전민변정도감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문세족의 힘을 빼는 작업이었다. 신돈을 등용하고, 신하들끼리 모함을 눈감아 주는 등 기이한 용인술을 펼친 것도 누구 하나 두드러지는 인물을 키우면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 나왔다. 그러나 환속한 천출 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다.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그를 불신했다. 특히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을 반역죄로 죽여 신진사대부와도 등을 돌렸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다. 무력을 가졌던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였다.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모 투서에 의해 역모 죄로 유배를 떠났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당했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
 
 
신돈이 죽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자신의 측근들인 자제위들에 의해 시해 당한다.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최후의 개혁 시도였던 것. 공민왕이 죽은 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이 되었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에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원동력이 된다.
 
 
신돈은 자기가 아끼는 여종이었던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반야에게서 모니노(훗날의 우왕)가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신돈의 아들)와 신창(신돈의 손자)이라고 부르며 고려사 반역 열전에 집어넣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 500년 내내 신우라고 불렀다.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로 공민왕의 서자이자 외아들이다. 7세의 나이로 비로소 입궐하여 태후전에서 지냈다. 우 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에 봉작되었다 공민왕이 시해 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여 이인임의 섭정을 받았다.
 
우왕은 신돈의 비첩婢妾이었던 반야라는 사람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궁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그의 출생에 대해 의혹이 상당했다. 비록 반야는 처형되었으나 이는 나중에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왕의 근신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측근들과 함께 온갖 부정, 부패 및 비리를 일삼았고 우왕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파국적 국정 운영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강제 은퇴 후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과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등에 의해 경산부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은 이인임의 퇴좌 후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자신에게 실권이 박탈된 우왕을 퇴위시키고 우왕의 외아들인 창을 왕위에 올렸다. 이성계, 정도전 등은 후임자로 다른 왕족의 자손을 추대할 것을 주장했으나, 목은 이색은 전왕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다 하여 신진사대부 세력은 그의 아들인 창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창왕의 이름은 창昌으로 우왕의 외아들이며 그때 나이 9세였다. 위화도 회군 사건 직후 이성계 정몽주정도전 등에 의하여 우왕이 강제 폐위되고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가 재위한 1389년에서 1392년까지 수문하시중 이성계가 실권을 맡았다. 정몽주가 암살된 후에 1392년 폐위가 되어 고려 국새를 백관들에게 넘기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1389년 초 이성계, 정도전 등은 창왕 역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씨라 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공양왕으로 영립하는데 동조를 했다. 이성계는 창왕을 내쫓은 후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후 다시 공양왕을 내쫓고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고려 태조의 개국 이래 34대 474년 만에 멸망을 했다. 1392년(공양왕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가 양위되어,고려는 멸망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켰다. 친명파 신진 사대부인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1389년(왕창1년)에 왕창을 폐위시킨 직후에 공양왕을 옹립했다. 정몽주 등의 신하들은 공양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정도전 등은 역성 혁명을 꾀하고 있었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온건 개혁파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소설】 강명자의 성수산이야기
• 6. 왕건 설화를 찾아서
• 7. 고려의 멸망
• 8. 이성계 건국 설화를 찾아서
(2023.12.26.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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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