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성계 설화를 찾아
주로 명산을 찾아 기도터를 찾아보면 대체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웅장한 바위가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위가 있다는 것은 기도터와 상당한 인연과 상관성이 있다는 증거인 셈이고 영험함이 따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땅속으로 흐르는 기운인 지기地氣는 바위가 많은 곳에 모여 있으므로 이런 곳에서 특별한 기운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험한 신력神力을 지닌 곳을 찾아서 기도처로 삼는 것이 우선이다. 세상만사 만물중생 속에 모든 것들은 인연법이 있듯이 누구나 자기에게 인연의 줄이 있어 잘 맞는 기도터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당 기도처와 자신의 인연 줄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기도처는 자신은 물론 地氣지기, 지령地靈과 인연因緣줄이 있는 기도명당을 만나야만 비로소 자신이 바라는 바의 소원성취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험하고 신령한 기도처는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기도를 함에도 기도발이 세고 불가사의한 효험과 영험함을 지닌 기도명당의 터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영험도량, 신령도량이란 기가 센 도량이다. 성수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영험한 도량은 영기가 강하게 서려있는 곳이다. 자신이 바라는 바의 소원을 세우고 기도하면 원하는 바람대로 이뤄지는 도량이 바로 영험한 기도도량이다. 기도터의 영험함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는 방식으로 꿈에 미리 선몽, 현몽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도명당에서 기도를 하면 원하고 바라는 뜻이 잘 성취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 앞선 祈禱기자에게 영험함이 있었다고 해서 그 기도터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이 영험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기도터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함의 이유는 바로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운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기도터와 기도자간의 연대가 잘 맞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영험한 기운을 모으는 행위이다. 기도터는 기가 웅 집 된 곳이어야 한다. 기가 웅집된 곳에서는 영험하고 속효 함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똑같은 명산이라고 하더라도 장소가 어느 곳이냐에 따라 기도 덕과 신덕이 있고 없고가 다르다. 기도처로 적합한 장소는 우선 청결하고 산만하거나 오염이 되지 않으면서 부정이 기지 않아야 한다. 상급 기도처는 오랜 세월 기자祈子들이 공과 정성을 드린 곳이다. 입지요건은 암석이 많고 물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거대암석이 있으면서 맑고 청결한 곳에서는 풍부한 기가 발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변 계곡이나 용소가 있다면 수화의 균형을 갖춤이기에 더욱 좋은 기도명당이다. 이러한 곳은 누구라도 편안하고 평온하다는 느낌의 안온감이 든다. 바로 이러한 장소가 기가 충분하게 웅집 되어 있는 곳이다. 상급기도명당은 어떤 종교 던 간에 종교적인 힘은 기도발의 힘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 기도발이다. 기도함에 시대와 대상은 달라도 인간들이 염원하는 바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기도발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하는 물음이 강한 사람들은 집을 나와서 세상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큰 공부였다. 불가의 승려들은 이를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등에 바랑하나 짊어지고 구름과 물처럼 세상을 정처 없이 돌아다닌 다는 의미이다. 도교의 도사들은 이를 표주라고 한다. 맨주먹으로 삼년 이상 돌아다녀봐야 그 바닥의 민심을 알고 기인과 달사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좋은 기운과 명당이 어디에 뭉쳐있는지 좋은 수도처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게 된다. 도선국사, 무학대사 이들이 주유천하를 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성수산 이러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생각하면 날마다 백배 천배로 절하고 싶어진다. 구름에 쌓인 명산의 웅혼한 기상을 느껴보고 석양과 안개에 쌓인 골짜기를 보고 알게 모르게 주유천하 경험이 쌓인 것이다. 대자연의 장엄한 광경을 봐야만 심량이 커지고 아울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이 길러지게 된다. 주유천하는 산을 올라가봐야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다. 산마다 모두 기운이 다르고 전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풍수도참가로 유명한 도선국사는 전국을 두루 다니다가 꿈에 성수산이 선몽을 했다. 이곳에 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두루 살피니 꿈에서 본 산 그대로였다. 도참설에 유명한 도선은 무릎을 꿇고 천상을 올려보며 읊조렸다.
“천자봉조지상에 상봉이 별립別立하니 차차 출현이라, 하늘이 만든 지상에 봉우리가 각각 다르나 서서히 큰 인물이 나오리라. 천자를 맞이할 길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로다.”
이렇게 말한 뒤 도선은 아홉 골짜기가 모여들어 하나의 점이 되는 곳에 암자를 짓고 도선암이라 했다. 도선국사는 심통 천안통이 모두 열려 있는 도사로서 개경으로 올라가 새 나라를 창건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왕건은 삼국통일을 한 후 도선국사의 권유로 팔공산 도선암을 찾게 되었는데, 어딘가 낯익은 곳이었다. 전투 중에 자신이 몸을 다쳐 피신하여 쓰러져 있을 때 암자에서 스님이 보살펴 준 바로 그 도선암이었다. 왕건은 다시 이곳에 올 줄 꿈에도 생각지 않은 곳이었다. 왕건은 도선국사와 함께 운수(임실의 별호)의 팔공산에 이르러 대업을 이루기 위해 도선의 뜻에 따라 잠시 외지에 나오게 되었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관음의 게시를 얻어 기쁜 마음으로 이 연못을 환희담이라 하여 바위에 새겼다.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중생의 삼업을 씻어냈을 때 비로소 관음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는 상이암 사적 기록에 남겨졌고 이 같은 설화는 당나라 문헌인 당일선사기에도 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개경으로 올라가 관심법으로 무지한 살생을 감행하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궁예를 물리치고 새 왕조 고려를 창건했다. 이때 왕건 나이 42세였다.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북한 분단까지 천 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건을 실질적인 민족의 통일자로 본다고 한다.
최치원이 인생 말기에 은둔하면서 예언을 하나 했었다
"계림(신라)의 솔잎은 누렇고 송악(고려)의 솔잎은 푸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고려 태조 왕건이 918년에 태봉왕(후고구려) 궁예를 치고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이는 곧, 최치원이 신라는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리라고 예언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풍수학의 명당과 기도터는 어떻게 다른가. 한마디로 기도발의 영험함에는 세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을 한다. 예컨대 인간의 의지 하늘의 뜻 땅의 지기이다. 지기가 뭉쳐있는 장소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늘이 그에 응답을 한다고 믿고 있다. 지기가 강하게 뭉쳤다는 것은 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도처는 모두 바위산이다. 기도발의 힘은 바위에서 발생한다. 지구 자체는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이기에 자연 기가 계속 방출되고 있다. 이 지자기가 지상으로 나올 때에는 바위 또는 암반을 통해서 방출된다.
바위는 토속 신앙적 관점과 불교적 관점 그리고 풍수적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므로 그 해석이 다양하다. 토속신앙에서 바위는 견고성과 영원성에 기인하여 미륵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는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에서 바위가 물을 생산하는 모체로 인식되었다고 추정 할 수도 있다. 바위에 미륵을 새겨 넣는 것이 미륵신앙으로 발전되었다고 본다. 미륵신앙은 토속신앙의 대상을 불교의 미륵으로 대체한 것이다. 불교에서도 목불, 견칠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석불의 영원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공을 초월하여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바위를 배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 영원성과 견고성이다.
바위는 풍수적으로 벼슬을 상징한다. 그런 이유로 유난히 바위를 좋아하는 풍수를 돌풍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수가 불교를 만나면 불교풍수가 된다. 불교풍수에서 바위는 기도도량의 상징이다. 밀교에서도 수행자가 머물며 기도하는 장소로 바위가 있는 곳을 선호했다. 영험한 바위는 천지의 기운이 응결된 것으로 본다. 웅장하고 위엄을 갖춘 바위의 형상은 그 자체로 신앙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수덕사 대웅전 뒤의 바위는 부처님이 숨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바위를 찾아서 사찰 터로 활용한 고승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지형지물이 곧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공간을 형성하기도 한다. 공간은 비어있는 것을 말하지만 그 공간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정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세가 만든 공간만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가진 곳을 종교적 공간으로 선택한 것이다. 자연 공간 자체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곳에 건축물을 세워 더욱 경건한 공간을 만들었고 천년고찰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뿐이다. 이것이 지형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신령한 영험이 서려 있는 기도명당은 지령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기도를 하는 장소가 특별히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장소에 개의치 않고 시시때때로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 오랜 세월 타인의 기도를 대행하는 기자祈子들이 많았던 장소가 바로 영기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런 장소를 옛 선인들이 많이 찾았던 이유는 바로 영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젊었을 적에 팔공산 근처 어느 외딴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해몽이 필요하여 수소문하여 부근에 해몽을 잘 하기로 소문난 노파가 있다하여 찾아가 꿈 해몽을 부탁했다. 그러자 노파는 꿈 해몽대신 이렇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산 밑에 도사님이 계시니 친히 찾아가서 물어 보시오”
하면서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이성계는 노파가 가르쳐 준대로 산길을 헤치고 암자를 찾아가니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방인에게 거부감 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정중히 예를 올리고 어느 노파가 이곳을 알려주어 찾아왔노라고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난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한 후 해몽을 부탁했다. 눈을 감고 염주를 돌리며 가만히 듣고 있던 스님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꿈 해몽을 하여 풀어주었다.
“첫째 일천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으로 닭이 천이면 봉이 하나라고 여러 사람들 중에 고귀하다는 뜻이요.
둘째는 다듬이소리가 난 것은 많은 사람이 장차 호응해 주리라는 뜻이요.
셋째는 꽃이 떨어진 것은 반듯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넷째는 거울이 깨지고 몸이 부서진 것은 팔도에 이름을 떨치리라는 뜻이요.
다섯째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왕이 되리라는 뜻이요.
여섯째는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장차 용상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스님은 꿈 해몽을 하고나더니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본 뒤에 말을 이어 당부를 했다.
“그러나 이는 천기를 얻을 꿈이라 두고두고 삼가하고 삼가 할 것이나 이제 지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공께서는 이 산을 의지하여 정성껏 치성을 올리고 말없이 때를 기다리시지요.”
강한 어조의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려 있고 함구무언으로 지키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이처럼 기이한 이성계의 꿈을 거침없이 풀이해준 스님은 훗날 조선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바로 무학 대사였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바로 고려 공민왕 초기로 무학이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해 팔공산 도선암에 일시 은둔해 있었던 시기였다. 신돈이 왕권을 휘두르는 시기에 이미 무학대사는 세상이 수상하다 생각하고 이곳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시류에 휘말리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왕기가 흐르는 이성계의 안위를 위해 생암산으로 오게 만들었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무학대사를 찾아서 해몽을 얻고 그의 인도로 이 산에서 기도하고 또 연못에서 목욕하는데 홀연히 이상한 동자가 나타나 등을 세 번 씻어 주었다. 해동천지 성수만세를 노래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관음보살이 현신한 것이었다.
길조를 얻어 삼청동이라는 글자를 각자 하였다. 또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이성계가 보위에 오르자 팔공산을 성수산이라 하고 도선암을 상이 암이라 불렀다. 진실로 상上의 귀에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산에는 고려태조와 조선태조가 머물렀던 곳이기에 즉 일초일목도 차마 벨 수 없으며 하물며 돌 위에 새긴 각자가 일월과 더불어 다투며 휘황하고 또 산 이름과 암자 이름으로 그 사적이 소상히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이성계는 도선암을 찾아 백일기도를 작심하고 왔지만 암자의 목탁소리도 번거롭고 갈증이 나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 토굴에 홀로 묻혀서 삼업을 씻고 정진을 한 것이었다. 토굴 양 옆으로 큰 바위가 좌청룡, 우백호로 자리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백호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호가 웅비하려는 자세였다. 호랑이가 물을 먹고 있는 입 모양 밑에서 물이 솟았다. 시작은 아주 작지만 이 물줄기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여 서해로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 지류원천이었다.
이상한 것은 칼바위 형상이었다. 마치 칼을 뽑아 그 어떤 것을 치고 칼끝을 땅에 꽂아 세운 것처럼 생겼다. 바위가 날카로운 칼처럼 직각이었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범상치 않은 장수가 깊은 뜻이 있어 이곳에 들어와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축을 뒤흔드는 하늘의 괘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를 피할 수 없었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불기둥이 장수에게 달려들었다. 장수는 순간 칼을 들어 불기둥을 내리쳤는데 산이 갈라지는 괴성이 나면서 온 몸에 불기둥 전류가 흘러들어 감지되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하늘도 멀쩡하고 산도 멀쩡했다. 장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위가 반으로 갈라져 한쪽만 남아있었다. 벼락 맞아 두 동강으로 갈라진 바위 하나는 이곳에 있고 한쪽은 아래로 굴러와 절 입구에서 멈췄다는 전설이 있다. 장수는 언제든지 분신 같은 무기를 곁에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면 그 장수는 젊은 시절 이성계가 아닌가. 불기둥을 단숨에 내리 긋는데 저 불기둥 씨알들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번뇌를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은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세상에 모두가 다 부처요, 보살 아닌 것이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화 되어 수 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토굴 뒤로 병풍바위가 직각으로 펼쳐져 있다. 독불공을 하면서 삼업을 씻어내는데 흉악한 것들을 막아주는 방패막이를 했던 병풍바위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 나라가 어지럽고 민심이 흉악하고 또 신돈의 난으로 위험한 시기였다. 신돈의 난을 피해 잠시 무학대사의 인도로 성수산에 들어와 천지신명에게 백일치성을 드린 곳이라는 전설 같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칼바위와 백호바위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에 칼바위 전설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토굴을 지어 기도처를 만들었고 그 칼바위가 마치 이성계의 혼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생각에 갇혀있는 자들은 지금도 혼자서 찾아와 독 불공을 하는 곳이었다. 완강한 침묵으로 손댈 수 없는 냉담함으로 숲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측 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대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 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 진데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들을 기지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었다.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 후로 그가 탔던 여덟 필의 헌걸산 명마들이 뒤를 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얻고 풍악을 울리며 돌아가는 개선군의 길은 위엄이 넘쳤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쇄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대첩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을 비울대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하게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성수산은 해동천지 여러 산중에서 명산 중에 하나로 널리 알려진 팔공산 줄기로서 장수와 임실을 경계 짓고 있는 호남정맥의 웅산이다. 동시에 예로부터 천하의 명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옛날 무학대사를 만나 백일치성을 올리고 성수만세소리를 세 번 들었던 도선암을 찾아가는 그 속내를 누가 알리라 없지만 이성계는 성수만세 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늘의 뜻이라고 천명이라고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묘하게도 그 이치를 눈치 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정성을 다하면 심오하고 정밀한 이치를 통달할 것이다. 어찌 다른 행적을 따르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삼업三業이 맑은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무학을 만나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운봉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하고 개선하는 길에도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을 들었기 때문에 두고두고 성수만세의 감응이 생생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몸은 산속에 있고 마음은 이미 북궐에 돌아가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할 상황이 되면 인간은 하늘에 기도를 올린다. 상이암은 주변 산세가 구룡쟁주형이다.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투며 내려오는 형국이다. 법당 앞에 바위봉우리가 여의주다. 구룡의 최대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옛적부터 이곳은 기도발이 세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있었다. 소문 듣고 물어서 찾아오는 야인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 발걸음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 받았을 때에도 상이암은 보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게시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신라 말 도선국사 이래로 영검한 기도터라고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다만 팔공산 도선암이 팔공산에 있으리라는 가능만으로 생각되었는데 막상 닥치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군사 중 누구를 앞 세워도 쉽게 찾을 수 없을뿐더러 또 섣불리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낮 모를 백성을 앞세워 찾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아침 재를 넘어서자 마침 안개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성계 일행은 이처럼 짙은 안개에 묻혀 자취를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도선암을 찾느라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자비로운 무학 대사의 얼굴을 그리며 장사진을 이끌고 그저 전에 본 듯한 계곡 길만을 따라 올랐다. 그때 이성계 앞에 어슴푸레 무엇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안개를 헤치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써서 찾던 도선암이 아니고 무학 대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든 이성계가 안개를 조금 더 젖이고 앞을 주시해 보니 그것은 무학 대사의 모습이 아니고 낮 익은 군사들의 모습이었다. 안개가 걷히자 이런 순간적인 일들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성계는 그때서야 자신이 여태껏 안개 속에서 무학 대사만을 그리며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가늠만으로 도선암을 찾으려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 번 더 깨달았던 것이다.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 운심불지처雲心不知處
를 여러 번 반복하며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의 방황 끝에 애써서 찾은 팔공산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도선암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성계는 일천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의 상이요 임실에서의 다듬이 소리는 산오속응의 세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결과자연의 운이며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서해의 성이고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을 뜻하며 또한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용비어천의 명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의 자비스런 모습을 떠 올렸다. 그 꿈이 익어가는
오늘 천하 대 원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팔공산 도선암을 찾는 이성계의 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형언할 수 없이 상쾌하고도 가뿐했다.
“산은 어디에 감출 것이요? 산은 산 속에 감춰들 수밖에 없고 먼 항해를 앞둔 배는 다만 깊숙한 골짜기에 감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좋은 때를 줄 것이나 만사는 오지 유비무한이오, 장차 삼한의 너른 강토를 새롭게 추슬러 갈 강한 힘을 기르고 얻자면 이만한 골짜기도 없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독백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넌지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던 무학대사의 얼굴, 그 얼굴이 새삼 더욱 그리워지는 까닭은 다만 도선암이 가까워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무한한 자연의 호연지기를 내 몸속에 축적하여 솟을 자리에서는 한없이 솟고 자취 없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힘을 내 몸속에 함축해 두자는 것이 지난날의 내 꿈이 아니었던가. 이성계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자신이 실제 꾸었던 꿈들이 되살아나면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물이 맑을 수밖에 없고 골이 깊으면 물의 흐름이 길 수밖에 없다. 팔공산을 두고 동쪽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이오, 서쪽은 운심수청雲深水淸의 운수가 아닌가. 산은 언제나 땅을 사방으로 가르지만 물은 항상 사방의 것을 하나로 모아 끊임없이 흐른다. 이는 저절로 흐르고 가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또한 우주안의 무한한 기운이 역연히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산은 솟고 물은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이 무한한 자연의 호연지기를 몸속에 축적하여 솟을 자리에서는 한없이 솟고 자취 없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힘을 함축해 두자는 것이 지난날의 내 꿈이 아니던가?”
팔공산 초입에 들어서자 가을하늘에 성긴 빗줄기가 쏟아졌다. 숲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숲길을 따라 오르는데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숲속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내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전생과 같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아득한 기억 속에서 이 숲과 계곡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낯선 풍경을 본 순간 그것이 인식 속에서 순간적으로 미리 경험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숲을 따라 늘어진 나무들, 계곡에 박혀있는 나무와 암벽들, 그 모든 풍경이 분명히 낯이 익었다. 분명 이 길은 처음 가는 산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산길이 낯설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분명히 한 번 왔던 숲길이 분명했다. 산세가 깊고 험하고 굽이굽이 서린 안개 속에서 무엇이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환상인가 어렴풋한 기억이긴 하나 분명히 이 숲길은 낯이 익었다. 저 계곡들은 궁곡이었을 것이다. 산 능선도 낯설지 않았고 도선암주변 풍경도 낯이 익었다. 향로봉 솔 송도 눈에 익었다. 다만 나무의 키가 더 자랐고 몸통이 굵어졌을 뿐이다. 그럼 무학대사의 인도로 왔었던 도선암이 여기란 말인가.
성큼 코앞에 다가선 암자는 그 옛날 그가 젊은 시절 무학대사를 만나 도선암을 왔을 때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였다. 유난히도 맑은 가을하늘에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그 가운데서 한줄기 영롱한 빛이 뻗히는 게 아닌가. 대낮인데도 흰 무지개가 나타나 길조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사계는 어김없이 순환하고 만물은 때를 따라 영고성쇄를 반복 하나니.······”
무한한 기쁨을 안고 한걸음에 도선암에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아, 성수만세, 성수만세, 대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만세.”
역력히 귓가에 울려오는 이 소리는 그 옛날 무학과 함께 젊은 시절에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울림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광풍에 흔들려 ‘쨍그렁 쨍그렁’ 하며 울리는 듯 요란하고도 역력했다. 순간 저 빛 이른 아침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 빛 하며 문득 조명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에 장차 새벽빛이 비치리라”
새로운 다짐이 가슴에 불현 듯 박혔다. 성계는 그 간절하고 절실했던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념무상 속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 욕계 색계를 떠난 무색계의 세계였다. 자기마음이 부처와 다르지 않아서 미흡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인데 아미타불이나 극락정토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자기 마음자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욕계를 벗어나 무색계로 들어서는 길은 멀기도 하다. 인간이 차지하려고 하는 소유욕의 한계 모든 업보와 업장을 닦고 또 닦아서 맑게 헐어내는 것이 여래의 법체가 아닌가. 세상만사 만물중생 속에 모든 것들은 인연 법이 있듯이 누구나 자기에게 인연의 줄이 있어 잘 맞는 기도터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당 기도처와 자신의 인연 줄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기도처는 자신은 물론 지기와 지령과 인연 줄이 맞는 기도명당을 만나야만 자신이 바라는 하늘의 뜻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 앞선 선지자에게 영험함이 있었다고 해서 그 기도터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이 영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운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기도터와 기도자간의 연대가 잘 맞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선암은 나와 인연이 맞는 곳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성수만세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된비알 오르막길은 쉬엄쉬엄 걷지 않으면 힘든 고비였다.
계곡물은 낮은 소리로 내려오고 숲속은 적막하다. 좁은 산길 나뭇잎위로 햇살이 튕겨 나왔다. 아늑한 길 위에서 바람에 걸리지 않은 구름처럼 편안했다. 어젯밤 칼끝 바람이 서리발이 군데군데 허물어져 발길이 더디었다. 천년을 살아도 함부로 소리를 팔지 않은 오동나무처럼 견디어낸다는 것이 어디 그게 쉬운가. 밤사이 나도 검푸른 어둠속에 엽엽한 삶을 보채다 몸살을 앓지 않았겠는가. 고요를 밟으며 숲의 향기로 기억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나무들이 잎을 내려놓는다. 초록물이 마지막 수분을 나무에게 주고 퇴화되어 풀기하나 없이 메마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낙하를 한다. 잎은 ㅉ떨어져 나무 밑 둥에서 삭을 대로 삭아 양분이 되고 나무를 보호한다. 사람 사는 이치나 자연의 이치는 다를 게 없다.
간간이 바람이 불었다. 푸른 바람이었다. 산언덕을 칡넝쿨이 먼저 길을 막았다. 칡넝쿨은 잔머리를 굴리며 산자락을 타고 죽죽 기어 다녔다.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는 욕심 많은 중생이었다. 가을인데도 거친 잡초들이 성깔을 죽이지 않고 발을 묶었다. 올망졸망 열매를 달고 있는 맹감나무는 가시가 억세어져 더 장애물이었다. 이 모두가 자연의 생존법칙이 아니던가.
조릿대 사이를 걸었다.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가만가만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조릿대 잎들이 바람결에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조릿대는 우리나라 각처의 산 중턱 이하의 숲에서 자라는 상록 관엽식물이다. 댓잎은 옷감 천을 만드는 실처럼 잘 짜여 있다. 잎맥은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과 양분이 지나가는 길이 되고 모든 양분을 끌어올려 식물이 자라도록 한다. 나무 잎사귀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데 숨구멍이다. 공기나 수증기가 드나들면서 동화작용을 하는데 모든 식물들에게는 햇빛이 아주 중요하다. 식물도 동물과 같이 밤이나 낮이나 숨을 쉬고 있다. 조릿대들이 무성하여 산사태를 막아주고 동물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칼바위 주변에 또 다른 어떤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다. 생각을 다른데 두고 걷다가 다래덩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올무 같은 덩굴에 산짐승들도 이렇게 당하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잘 피해 다닐 것이다.
팔공산이란 왕기를 여덟 번 내려줄 명산이란 뜻이다. 왕건이 기도 하던 중 하늘의 게시를 받고 나가 고려를 세웠고 이성계도 천상의 게시를 받고 나가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두 왕조의 염원과 천명이 흐르는 귀한 터 상이 암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애써 찾은 팔공산 도선암의 입구 수천리에서 굳이 또 깊은 계곡을 따라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팔공산은 해동천지 여러 산중에서 十二대 명산중의 명산이다. 새 왕조에게 여덟 번이나 왕기를 내려 줄 천하의 명산이라 일러온 산으로 실제 고려태조도 도선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왕기를 얻어 고려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 아지발도 군을 물리치고 이성계가 휘하 장수를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그리운 무학 대사를 찾듯 애써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도선암에 들어서자 골짜기에서 울려 퍼진 성수만세 삼창이 울려 퍼지면서 새나라 태동을 암시하고 있었다.
옛날 앞선 선지자에게 영험함이 있었다고 해서 그 터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험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터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이유는 바로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운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터와 사람 간의 연대가 잘 맞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입지요건은 암석이 많고 물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거대암석이 있으면서 맑고 청결한 곳에서는 풍부한 기가 발사되기 때문에 기가 충분하게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생암은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암자여서 수행하는 스님도 이름을 피해 혼자서 독 불 공을 하거나 은밀한 기도처로 삼아오던 터였기에 당시로써는 쉽사리 찾기 힘든 곳이었다.
삼청동三靑洞 산청, 기청, 수청 삼업이 맑은 삼청동, 이곳은 도가에서 말하는 청정 그 자체의 도량이었다. 이미 태조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환희담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홀연히 나타난 동자승이 등을 닦아주면서 노래를 했다.
“성수만세, 성수만세, 해동천지 성수만세”
이렇게 세 번 외치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도량이 맑고 이성계의 심신이 비로소 맑으니 부처를 만난 것이다. 이성계는 기쁨을 내색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산은 어디에 감출 것이요. 산은 산속에 감출 수밖에 없고 먼 항해를 앞둔 배는 다만 깊숙한 골짜기에 감춰두어야 할 것이오. 하늘이 장차 좋은 때를 줄 것이나 만사는 오직 유비무한이오, 장차 삼한의 너른 강토를 새롭게 추슬러 갈 강한 힘을 기르고 얻자면 이만한 골짜기도 없소,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이 기운을 한 몸에 받았으니 장차 앞으로 큰 뜻을 실현하는 것이 내 꿈이 아니었던가.”
하며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길과 자연의 운을 타고났고 용비어천의 명을 받을 군계일학의 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기운이 없으면 그것은 허상일 뿐이오.”
“명진서해의 산속오응의 세를 지녔을지라도 다시 하늘로부터 이미 얻어진 성세를 곱게 비춰주는 빛이 없다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그의 뇌리에는 지난날 백일기도를 마치고 연못에서 목욕하던 그때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왠지 온 몸에 충만한 상쾌함에 이끌려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산도 맑고 물도 맑고 하늘마저 맑다”
하며 외쳤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천공을 휘감고 용틀임하는 산 아홉 마리 용들은 결국 한곳으로 머리를 모으며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용은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지상으로 모여들어 천변만화 온갖 조화를 부리며 능히 못할 일이 없다. 이성계가 백일기도 후 용의 기운을 한 몸에 받았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성수산은 구룡쟁주형으로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향해 달려오는 형국이다. 달려와서 멈춘 곳이 구룡지지 절 마당이다. 이 보다 더한 기운은 없을 것이다.
훗날 이성계는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그 상쾌한 기분을 산청·기청·수청이라 하여 삼청이라 했고 하늘 바라 뵈기로 아늑한 못 환희담 주위를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삼청동이라 명명했다.
황산대첩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면서 도선암을 찾았다. 성큼 코앞에 다가선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옛날 그가 젊은 시절 무학대사를 만났던 때에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런 기억을 되살리며 향로봉 앞에 이르자 이날도 역시 안개 걷힌 날 하늘아래 지난날 자신이 치성을 마치고 정성껏 쌓았던 돌무더기가 그대로 있었다.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였다. 유난히도 맑은 가을하늘에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그 가운데서 한줄기 영롱한 빛이 뻗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이성계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사계는 어김없이 순환하고 만물은 때를 따라 영고성쇄를 반복 하는 것이다.”
무한한 기쁨을 속으로 안고 한걸음에 도선암에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아, 성수만세, 성수만세, 대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만세.”
역력히 귓가에 울려오는 이 소리는 그가 젊었던 시절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울림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광풍에 흔들려 ‘쨍그렁 쨍그렁’ 하며 울리는 듯 심히 요란하고도 역력했다.
“아, 저 빛, 이른 아침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 빛! 하며 문득 조명早明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리는데 언뜻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에 장차 새벽빛을 비치리라”
순간 그는 새로운 다짐이 가슴에 불현 듯 박혀왔다. 이런 연유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등극한 후 삼청동三淸洞’ 세 글자를 내렸다. 지금까지 이 글씨는 어필각에 각자로 모셔져 있다. 동시에 팔공산을 성수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의 그 자세한 전말이 성수산 상이암사적기에 적혀 있다.
그 일예로 태조 이성계가 잠시 이곳 도선암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로 등극 후 팔공산을 성수산으로, 도선암을 상이암으로 부르게 하고 조선개국 이듬해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다 하며 따라서 뒷사람들은 이 글씨를 바른 돌에 새기고 어필御筆 비를 보존하여 오다가 상이암 경내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어필을 몇 년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하도록 신청을 한 바 있으나 당시 문화재 위원들은 정확한 검증도 없이 어필이 아니라고 부결시켜 버렸다하여 아쉬움으로만 남아있다.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가 어필이 아니라면 삼청동 글씨를 새기고 어필각을 세운 주체가 전주이씨 종친들이란 사실과 민중들이 그동안 어필이라고 불러 전해오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내버려 두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며 뒤집어서 당시 임금과 관련된 용어를 서민들이 마음대로 사용했을 때는 조정에서 그냥두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삼청동 비는 태조 이성계의 친필이라는 사실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상이암사적기에는 상이암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 어느 대목에서 이성계의 글씨이야기가 있었다. 사적기에는 상이암, 향로봉, 환희담, 삼청동 글씨 이야기가 있었다. 몇 번의 재화로 소실되어 다시 사적기를 만들어 보관을 한 것이다. 향로봉 앞 삼청동글씨를 확인했다.
가을 가뭄이 계속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거무스름한 구름장이 모여들다가도 해가 지면 거짓말 같이 그만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아홉 골짜기 용 구렁에 안개가 자욱해도 헛일이었다. 아침놀 물 빛 갈바람은 더군다나 말도 안 되고 어쨌든 사람들이 수백 년 전해오고 믿었던 골짜기의 천기조차 온통 믿을만한 게 없었다. 감나무 잎뿐 아니라 뒷산의 갈참나무 떡갈나무 잎도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가을, 묵중했던 숲이 나뭇잎을 버리면서 나무사이로 햇빛이 강렬하게 비집고 들어섰다. 성수산은 불 담 좋은 참나무장작을 태워 잉걸불을 뿌린 듯 저릿저릿 가슴조이는 단풍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저기 큰산이 우는 것처럼 맑고 서러운 갈바람이 불었다. 가을은 귀가 예민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절 마당 향로봉 주변에 있는 은행잎이 쏟아지고 있었다. 은행잎은 예쁘지 않은 적이 없다. 새순이 돋아서 질 때까지 내내 눈길을 끌었다. 순이 돋을 때에는 연두 빛 고움으로 예쁘다. 잎이 자라서 넓어지면 짙푸름의 시림이 되고 단풍물이 들면 노랑 빛의 투명이 떨어질 때조차 수북이 쌓이는 모양새가 특별한 영감을 주었다. 은행나무는 땅속 깊은 곳의 수맥을 더듬으며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화석식물이다. 골짜기에서는 차가운 기류가 올라오고 있었다. 잎이 진 빈가지에 텅 빈 충만감이 차올랐다. 아무것도 지닐 것 없는 빈가지이기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하고 맑은 날은 탁본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오래전에 삼청동 비 글씨를 탁본하기로 했었다. 습도가 적은 가을에 하자고 미뤘던 일이기도 했다. 도반과 함께 일찍 상이암을 방문했다. 주지스님은 손님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찻물을 끓이고 있었다. 스님은 벌써 추워졌다며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서둘지 말라며 차를 마시면서 모든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지라는 의미였다. 승복에는 나무 타는 냄새가 배여 있었다.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삼청동 글씨는 자연석으로 우둘투둘한 바위 면에 새겨져 있었다. 비각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노지에서 풍마우세로 깎이고 깎였지만 오래전에 비각 안에 보관하여 형태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삼청동비 앞에서 먼저 예를 올렸다. 스님을 따라서 두 손 모아 합장을 했다.
장구하기 그지없지만 바위에는 뚜렷한 글씨로 힘이 넘쳐보였다. 나는 조교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 했던 것처럼 글씨 홈 속에 자리 잡은 바위이끼를 파내고 먼지를 털어냈다. 우둘투둘한 바위에서 좋은 작품을 뽑아낸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기초 작업이 끝나고 도반은 탁본을 시작했다. 나는 먹물 주머니를 들지 않고 곁에서 작업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은 골짜기에서 일어섰고 그 안에서 잦아들었다.
사람의 손끝이 이처럼 독하고 여물던가. 무감한 바위덩이하나에 심혈을 다 쏟아서 불어놓고 산 사람 생기보다 더 지극한 염력을 뿜어내는 이 조물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먹물주머니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바위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음각은 전아하고 호방했다. 불립문자가 드러났다. 삼청동三凊洞 ... 자연형의 돌에 새긴 완전한 형태의 각석이었다. 이 각석이 조선태조 이성계의 육필이었다.
도반은 표정 없이 먹물 두드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바위 면이 고르지 못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탁본은 시간적 여유가 없는 작업이어서 도반은 좁은 비각 안에서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드디어 바위가 생명을 얻어 막 음각을 드러냈다. 글씨의 혼을 불러내는 초혼의 의식이 막 이루어지고 있었다. 작은 점 하나까지 모두 완벽하게 찍어냈다. 감동이었다. 절 문에 들어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신비한 이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글자에서 강렬한 숨결이 느껴졌다. 태조의 마음이 스며있어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돌토돌한 바위 면에 고여 있던 저 먼 조선태조의 강렬한 눈빛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사내대장부라면 한번쯤 웅기를 펼 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선강호 산천초목 흔하고 흔한 저 무심한 무정물이 죽어서도 살아서 현신하여 후손들에게 그 정신을 부여하는 숨결을 강렬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설화로만 전해오던 이성계 글씨가 남아 실제 그 글자를 탁본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상이암 사적기에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 내용과 삼청동 글씨가 맞아 떨어졌다. 상청·태청·옥청 삼청이 맑은 가운데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고 사적기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그림이나 글로 남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살아간다. 선사시대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는 바위에 여러 종류의 동물과 인간, 그리고 다양한 기하하적 문양을 새겨놓았다.
여의주 바위의 존재는 범인凡人을 능가하는 힘과 지략을 지닌 장수가 나타나 이상적인 세상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영웅기대 심리와 일상적인 평범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또한 바위가 지금까지 전승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 기대심리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미래로 이어진다. 바위는 불변의 전승 물이므로 유한한 인간들의 기대를 여기에 의탁하여 대대로 후손에게 전승하여 희망과 자극을 주는 이로운 조물인 것이었다.
천명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금빛이 묻어나는 오돌토돌한 바위 면에 그분의 강렬한 눈빛과 체온이 육화되어 묻어났다. 바위는 그분의 몸이었다. 이 한갓진 깊은 산중 상이암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천지신명님께 빌고 빌어 뜻을 받았으니 이 보다 더한 충만감은 없으리라. 글씨가 새겨진 바위에 금가루가 섞였는지 용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몸체도 득실하며 날카롭지만 빛깔 또한 검거나 목마르듯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윤기가 흐르고 석질도 단단하여 차고 울퉁불퉁했다. 향로봉은 선승이 쌓아놓은 경전이었다. 흠집과 이끼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으로 파고들었다. 이끼는 어디든지 스미는 습관이 있어 수백 년 동안 바위를 덮고 있었을 것이다. 겹겹이 시간을 덮고 벽 한 귀퉁이에 흔적으로 북에서 남으로 천구를 가로 지를 태양의 흔적이 새겨 있었다. 그 외형에 있어서나 글씨에 있어서나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글씨는 힘이 넘쳤다. 숨결 같은 온갖 표정이 첩첩이 쌓여 결이 되었다. 구절양장의 험한 음달 기슭에 침묵의 영토 한 점이 고요한 여백으로 있었다.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고 있었다. 층층마다 무량한 중생의 업보가 새겨져 있었다.
북벽과 남벽 사이에 미래를 새기고 나머지는 훗날 채워야 할 여백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바위에 뚜렷한 글씨 삼청동三淸洞, 그 음각의 달필은 전아하면서도 호방하다. 글씨에서 강렬한 숨결이 느껴졌다. 마음이 스며있는 글씨여서 그럴 것이다. 사람의 손끝이 이처럼 독하고 여문 것인가. 무감한 바윗덩이에 심혈을 다 쏟아 불어넣어 산사람 생기보다 더 지극한 염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용무리가 여의주를 향해 공간을 휘감고 기운을 뿜으며 상서로운 것을 이성계에게 바쳤다. 웅혼한 용틀임의 숨결을 한 몸에 받은 것이다.
산줄기마다 광채 나는 푸른빛들이 상서로움을 더하고 이 바위 정수리에 돋은 날카로운 끝은 포효하듯이 혹은 무엇이든지 단번에 베어버릴 것 같은 칼날 속에 저 피가 도는 것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조선강호 산천초목 흔하고 흔한 풍경 속에서 무심한 바윗돌 저 무정물이 세월 가면 흔적도 없어질 것인데 글자로 스미어서 현신하고 죽어서도 살아서 만나는 정신의 뿌리였다.
내 조상을 잊지 않은 것이 나를 잇는 길이다. 나는 조상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우리가 훗날 어느 누군가의 조상이 될 때 자손에게 어떤 존재로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내 생애의 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무엇이라 새길 수 있을까? 그 어느 후손에게 이런 그리움을 만지게 해 줄 수 있을까? 이토록 흩어져버린 정신에 무엇이 살아서 세월이 가도 마모되지 않고 남을 한 획을 얻을 수가 있을까? 팽팽히 당겨진 심줄 끝이 저려왔다.
삼청은 본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이상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옥청, 상청, 태청을 상징한다. 성수산 부근에 삼청리가 있는데 산과 물과 돌이 맑음으로 삼청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미루어볼 때 성수산 삼청동비의 삼청의 의미는 신선이 사는 것 같은 선계 같고 맑고 깊은 산골과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씻어내 심신이 맑아질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가 동자승을 만나 삼 일간 목욕하여 심신을 깨끗이 하고 돌에 삼청이라고 새겼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한다. 상이암은 18세기 여지도에서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는 1757년 영조33년 각 읍에서 읍지를 모아 묶은 전국 읍지다. 임실현 산천조에 용요산이 이어 성수산이라는 산명과 함께 장수 팔공산에서 뻗어 나온다. 사찰조에는 상이암은 관아 3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1872년 호남읍지에 성수산상이암 기록이 있다.1904년 운수지 상이암 조에는 사적기와 달리 불우조에 이전과 달리 실려 있다. 상이암조는 여신스님이 창건했고 현감 조성희와 참찬 윤태일이 중수한 현판문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위에 서울과 지방 및 전라도사람들 이름이 새겨져 잇다. 1935년 읍지 조선환여승람 임실읍지에 고려태조 환희담 필적 조선 삼청동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인군수 손병호가 삼청동비는 암자 앞에 옮기고 어필각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향로봉 바위에 조선 말 전라감사 이헌직, 민정식, 김문현, 임실현감 조성희, 민영대, 민충식, 박시순, 임용현, 손병호, 남원부사 최석두, 임실출신 참봉 심진표, 참봉 이광의, 초시합격자 양기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선 초기에는 임실 성수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임실성수산 진안성수산, 백운성수산이 있는 것은 조선설화의 무대가 된다. 산신각 중수시주 참봉 진재석 시혜비 석조는 조선말에 황태윤이 시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고려 말 인물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남원 지리산황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왜구를 전멸시키고 크게 승리를 했다. 당시 고려의 마지막 장군 이성계까지 아지발도에게 패했더라면 고려왕실 개성도 왜구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산대첩은 이성계 일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였던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할 상황이 되면 인간은 하늘에 기도를 올린다. 상이암은 주변 산세가 구룡쟁주형이다.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투며 내려오는 형국이다. 법당 앞에 바위봉우리가 여의주다. 구룡의 최대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옛적부터 이곳은 기도발이 세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있었다. 소문 듣고 물어서 찾아오는 야인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 발걸음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 받았을 때에도 상이암은 보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게시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신라 말 도선국사 이래로 영검한 기도터라고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성수산은 역사의 숨결이 묻어있는 산이다. 이성계회군로를 보면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하고 귀경하는 길에 남원을 거쳐 여덟 마리 준마와 비범한 장수를 데리고 그 옛날 무학대사와 함께 와서 백일기도를 올려 하늘의 게시를 받았던 상이 암을 찾아가기로 맘먹고 나섰다. 남원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지사면 현계·영천·관기·조치·왕방리·수철리·상이암을 오게 된다. 기쁨으로 가득 찬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의지를 확실하게 이곳에서 찾았다. 귀경 길에 갈 골을 거쳐 지주 골을 경유하여 대운재를 넘어 갔던 길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란 역사를 이끄는 인물이 있게 마련이고 그 인물이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듯이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이곳 성수면 이성계회군로에 관련된 역사의 흔적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 개선 군이 이 지역을 지나가면서 붙여진 지명을 찾아보았다.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관군들을 해체하고 여덟 마리 준마와 여덟 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을 지나 지사에 들어서니 가을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어 가는데 도선암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더구나 앞에는 큰 고개가 가로막혀 있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첩첩산중 고개 밑에 제법 큰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계 일행은 그곳을 찾아 일단 하루의 노독을 풀기로 했다. 이처럼 팔공산 도선암을 찾기 하루 전 단잠을 잤던 마을을 이 산중에 살기 좋은 곳이 있다면서 관기館基 라고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하여 그 후로 관기라고 불렀다. 장군송이 있고 장군이 앉았던 바위와 갑옷을 벗어 걸쳐놓았던 갑의 암이 남아있다. 이 지명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러지고 있다.
산골마을 관기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성계 일행은 군사들을 독려해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어제 밤의 편안한 휴식으로 장수들의 피로와 노독은 거의 풀린 듯싶었고 장졸 간에 지켜야할 예의 이상의 그 어떤 깊은 신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이 시점에서 자신이 팔공산 도선암을 애써 찾는 이유를 여러 군사들에게 대강 귀띔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그러나 이를 즉시 말하지 않고 망설이는 참에 마침 길을 안내하던 비장이 말을 했다. “합하, 오늘의 행군은 마땅히 저 고개를 넘어 전라 감영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다. 내 개선의 영광을 안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니 그곳이 곧 팔공산 도선암이다. 이제 가면 언제 도선암을 다시 오겠는가. 여기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니 그곳으로 가자.”
군사들은 이 말을 의아해 하면서도 도원수의 명령이라 지체 없이 관기 뒤에 있는 재를 넘어 팔공산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도선암으로 향하여 넘어가는 고개를 이성계가 아침에 넘어갔다 하여 아침재(조치:朝峙)라고 불러지고 지금까지 이름이 바뀌지 않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팔공산 도선암은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된 고찰이기는 하나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암자여서 수행하는 스님도 이름을 피해 혼자서 독불공을 하거나 은밀한 기도처로 삼아오던 터였기에 당시로써는 쉽사리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장수 중 누구를 앞 세워도 쉽게 찾을 수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이성계는 다만 도선암이 팔공산에 있을 것이라는 가능만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산허리에 걸려있던 안개가 일찍 재를 넘어서자 안개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성계 일행은 이처럼 짙은 안개에 묻혀 자취를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도선암을 찾느라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무학 대사의 얼굴을 그리며 그저 전에 본 듯한 계곡 길만을 따라 올라갔다. 그때 이성계의 앞에 어슴푸레 무엇이 보이는 듯 했다. 안개를 헤치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써서 찾던 도선암이 아니고 무학 대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든 이성계가 안개를 조금 더 젖이고 앞을 주시해 보니 그것은 무학 대사의 모습이 아니고 낮 익은 장수들의 모습이었다. 이성계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여태껏 안개 속에서 무학대사만을 그리며 헤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늠만으로 도선암을 찾으려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 운심불지처(雲心不知處)를 반복하며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성급함에 탄한 곳이라 하여 허리를 굽혔다. 이리하여 팔공산 도선암을 찾다가 산을 여러 차례 돈 채 한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그 곳을 굽을왕枉에 찾을訪자를 붙여 왕방(枉訪:왕방리)라 하여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이성계 일행은 안개 속에서 헤매던 왕방리의 경험을 통해 가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탁 트인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는 사람, 즉 도에 능한 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내놓을 말이라는 것을 익히 깨달았다. 팔공산 도선암은 고려의 태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팔공산이란 이름은 이미 도참을 제대로 공부하여 알만 한 사람에게는 다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만 원수가 이처럼 애써 찾는 정확한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수들은 그저 뒤만 따를 뿐이었다. 가을이라 하지만 아직도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나는 안개는 밤부터 새벽까지 짙게 깔려 있다가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어김없이 걷혀진다는 것을 알았다. 안개가 걷힌 반나절이 지나 다시 도선암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계 일행들은 그 날 오후 석양 무렵쯤 북재에 이르렀다. 비로소 이성계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부하 장수를 향해 물었다.
“황산에서 여기가지가 몇 리나 될꼬.”
그러자 장수하나가 엉겁결에
“수천리(數千里)나 되는 듯합니다.”
대답을 했다. 지금까지 수천리는 그대로 변함이 없이 불러지고 있다.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 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둘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그는 새 왕조창업의 게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왔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개선 길에 올랐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 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 산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 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듯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 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 재 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이다. 개선 군이 고개 마루에 다 달았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넌지시 의중을 헤아려 보려고 말을 건넸다.
“옛말에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復疑無路 라더니 호남에는 평야 뿐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 정몽주는 맞장구를 치듯
“그야 유음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 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
말을 받으며 이성계가 건네준 정을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태속 깊숙이 담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은 뒤늦게 이를 후회 했으나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대방에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쳐 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아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고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준 것이었다.
이성계가 대운 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 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이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 수 간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을 이루는 일이다.
역사란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인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듯이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이곳 상이암에 관련된 역사의 흔적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삼업이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는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개국 이듬해에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뒷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고 상이암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대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한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를 조금만 올라가 보면 고적 선양에 대한 열정이 곧 자주 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 달사들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벽봉碧峰 최중두가 펴낸 풍수지리학원론의 부록으로 펴낸 선사유산록의 임실부분 비결을 보면 여러 명혈이 소개되어 있는데, 예컨대 북사십리상이암동구北四十里上耳庵洞口에 명당이 있는데 자봉귀소형雌鳳歸巢形이다. 어미새[雌鳳]가 둥지로 돌아가는 형국이라 했으니 이름부터가 천하명당임을 풍긴다. 과연 이곳은 용호龍虎가 중중히 회포 한다 했고 여기에 묘를 쓰면 백자천손하고 문과오대하며, 부귀가 천지에 동행한다고 했다. 그곳이 어디일까. 속인의 마음으로 궁금증을 드러냈다.
북사십리에 선여등공형仙女登空形의 명당이 있는바 이 역시 용호가 회포 한다. 선녀가 하늘에 오르는 형국인데다 용호가 얼싸안고 있으니 천하명당이 분명하다. 북사십리에 명당이 또 있다. 이번엔 연꽃 모양인 연화형이 있다. 북삼십리에도 명당이 있다. 이는 군신회조형群臣會朝形으로 임금 앞에 여러 신하가 조례를 하는 형국이니 성수산이 바로 왕 혈이다. 성수산은 산세가 그토록 지기와 생기가 넘쳐 있으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