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동학과 상이암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이곳 임실은 동학세상을 이루었다. 민충식 임실군수는 김개남 장군의 포덕으로 동학에 입도를 했다. 김개남 장군이 상이암에 들어와 있을 때 민충식 군수는 개남 장군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었다. 이 때문에 민충식 군수는 전라감사 이도재의 청으로 파탈되었다. 임실은 전북 제일의 천도교세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감사 이도재가 임실현감 민충식을 고해바쳤다.
“민충식 임실군수는 수령으로서 동학무리에 들어갔으니 우선 파출하고 금산군수 이용덕은 수령노릇을 한심하게 한데다가 부신을 차고 도망쳤으니 파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죄상은 모두 해당 아문에서 품처하게 하소서.”
라고 아뢰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김개남 장군이 1894년 5월 남원 성을 점령한 후 임실 성수산에 자리한 이곳 상이암을 오르내리면서 왕을 꿈꾼 기도처이다. 고려태조 왕건과 조선태조 이성계의 건국설화 및 신화가 깃든 암자인 상이암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 또한 왕을 꿈꾸었던 것이다.
김개남의 행적에서 임실 상이암에 갔던 일이 눈에 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김개남이 칠월 하순 정기마병 백 여 명을 데리고 임실 성수산 산중으로 들어가 상여암에서 더위를 피했다고 했다. 칠월초엿새 전봉준이 전라감사 김학진과 제2차 전주회담을 한 결과 관민상화 원칙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치안질서를 바로잡고 도내의 안정을 추구하기로 합의하고 칠월 중순 전봉준과 김개남이 남원대회를 연 뒤였다.
‘상여암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전집가운데 전라북도 편에서 임실군의 도선과 이성계가 기도한 상이암 항목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백삼일 동안 상이암에서 기도를 하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매천 황현이 상이암을 상여암으로 잘 못 알았고 김개남이 상이암으로 간 것은 단순이 행적이 아니라 상이암에 깃들인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수산의 상이암은 왕건과 이성계가 그들 사부인 도선과 무학의 권유로 기도를 하여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곳들에 얽힌 설화가 정사에는 안 나오지만 고려와 조선 건국과정에서 왕건과 호족세력의 관계 이성계의 인월 쪽의 황산대첩관계등과 연결시켜 보면 황당한 설만은 아니다.
김개남은 본명이 영주이고 자는 기선이며 흔히 김기범이라고 불렀다. 개남이라는 이름은 동학과 관계하면서 지은 이름이었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손바닥에 개남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이다. 개남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정감록류도 참 비기사상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정감록은 조선왕조 대신에 정씨왕조가 일어나고 진인이 출현해 남녘 조선을 구원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후천개벽을 꿈꾼 조선후기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개남이라는 이름을 동학에 입도하면서부터 썼는지 아니면 농민전쟁이 전개되면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김개남은 19세 때 전주 구이면 연안이씨를 처로 맞이했으나 그해 가을 상처를 했다. 그 뒤 일 년도 못되어 임실의 전주이씨와 재혼을 하고 청웅 향교리 성밭에서 훈장을 했다. 어떤 자료에는 임실사람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김개남은 이십대 때 임실에서 상이암을 제집 드나들 듯 자주 다니면서 왕건과 이성계가 상이암에서 기도하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집강소시기에 김개남이 상이암에 들어갔던 까닭은 개남이라는 이름에 상이암의 전설을 덧붙여 좀 더 근본적인 변혁의 꿈 아니면 역성혁명의 뜻을 다지고 자신의 권력의지를 상징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상이암에 머무는 동안 김개남은 임실현감 민충식을 동학에 입도시키고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 구례현감 조규하는 상이암으로 김개남을 찾아와 사촌을 데리고 와서 자신은 입도하여 서로 접장이라고 부르면서 교류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예를 보듯이 상이암은 집강소를 뛰어넘어 새로운 농민정치를 꿈꾸던 김개남이 펼쳤던 또 다른 정치공간이었다.
한 달 여 상이암 활동을 마치고 김개남은 남원으로 들어와서 지지 세력을 결지하여 몇 만 명이 모인 농민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농민군을 전·후·좌·우·중 체제로 정비를 했다. 각 군영의 농민군의 수는 오륙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참서를 근거로 사십구일동안 남원에 머물다가 시월에 농민군부대를 이끌고 전주로 떠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개남이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김기범이란 자가 개남 왕이라 참칭하고 남원 부를 분할하여 점거하였다고 한다거나 〈세장연록〉 이때 호남의 동학괴수 김개남이 군사 수 만 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점거한후 칭호를 참칭하고 좌상·우상과 5조의 장관을 설치하고 붉은 일산을 쓰고 여덟 명이 메는 교자를 탔다.
〈나암수록〉 일설에 의하면 김개남은 김씨가 왕이 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 하였고 이미 대신 이하 관료들을 임명해 두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판조일신문)는 기록들은 그냥 헛소문은 아닐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