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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다시는 전쟁이 나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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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문수의 세상이야기     오문수의 지식창고 2018.02.05. 14:14 (2018.02.05. 14:14)

【소식】"인자 다시는 전쟁이 나서는 안 돼

"곡성 9.30사건 유공자의 증언
▲ 곡성 9.30사건의 생존 증언자 오상수(88세)씨 모습. 당시 마을 청년이었던 그는 대한청년단원으로 이현상부대가 마을에 쳐들어오자 총을 쏘며 밤새워싸웠다고 한다. ⓒ 오문수
 
내 고향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다. '오지리'라고 하니까 첩첩 산골 오지를 상상하겠지만 반듯한 평야 가운데 있는 큰 마을이다. 오동나무 '오(梧)', 가지 '지(枝)', 마을 '리(里)'라는 뜻이니 오동나무가 많은 동리라는 의미다.
 
내 어릴 적 오동나무가 꽃을 피우는 5~6월이면 온 동네가 오동나무 향으로 진동했다. 조상들이 동네 곳곳마다 오동나무를 심은 이유가 있었다. 딸이 시집갈 때 준비해갈 장롱 재료로 오동나무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4대문이 있었던 오지리
 
곡성읍 내에서 2㎞ 정도 떨어진 마을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 예전에는 큰 마을이라는 뜻의 '대리(大里)'라고도 불렸다. 오죽했으면 4대문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오지리는 몰라도 곡성 섬진강기차마을은 안다. 곡성 섬진강기차마을 역은 오지리에 속한다. 필자가 살던 '동동'에는 4대문 중 동문이 있었고 동문을 지키는 동문지기 집이 있었다.
 
내 어릴 적 동문지기 집 주변은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한데 동문지기 집 외벽이 좀 이상했다. 밖으로 향한 흙돌담 외벽 두께가 거의 1m 정도 두꺼웠다. 외벽과 5m쯤 떨어진 곳에는 5m쯤 간격을 두고 커다란 나무그루터기가 썩어가고 있었다. 동네아이들은 그 그루터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진똘이'를 하며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진똘이는 '진놀이'의 방언으로 전봇대나 큰 나무를 진(陣)으로 삼아 서로 상대편을 잡아 오거나 진을 빼앗는 놀이다. TV와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 동네친구들과 가장 재미있게 하던 놀이가 '진똘이'다.
 
틈만 나면 친구들과 '진똘이'를 하며 동문지기 집으로 숨었던 필자는 어느 날 동문지기 집 외벽과 그루터기가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이 많은 큰형님에게 "동문지기 집 외벽은 왜 그렇게 두꺼우며 두 개의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를 물었다. 형님에게서 돌아온 답이다.
 
▲ 1951년 9월 30일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단 병력 600여명이 마을을 습격하자 안학선 대장이 지휘하는 대한청년단원 65명이 밤새 싸우다가 1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충혼탑. 이현상 부대가 물러가자 진압군이 들어와 뒤에 보이는 '금천교' 다리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불순분자를 색출해 처형하려했지만 안학선 대장의 만류로 살아났다 ⓒ 오문수
 
▲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있는 충혼탑에 새겨진 내용을 기록한 글. 1951년 9월 30일 밤 600여명의 공비가 마을을 습격해 안학선 대장이 이끄는 대한청년단원 65명이 용전분투하다가 다음날 9시 30분경 1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 오문수
 
"여순사건이 발생한 후 국군토벌대에 쫒긴 빨치산 병력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상하지 못한 북한 인민군 잔류병들이 지리산에 은거하면서 마을을 습격했지. 동네 주민들은 마을이 습격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 동네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4대문을 만들었는데 그 때 남은 대문 그루터기가 그대로 남아 썩어가고 있는 거야. 동문지기 집 외벽이 두꺼운 것은 총알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 거야"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곡성 읍내에서 2㎞ 떨어진 오지리는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단이 곡성읍내를 습격하는 와중에 습격한 곡성군 오곡면 소재지이다. 며칠 전 친척 형님으로부터 "죽기 전에 9·30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당시 전투 현장에서 총을 쏘며 격전을 치렀던 얘기를 듣기 로 했다.
 
오상수(88세)씨. 참전유공자로 경우회 이사이기도 한 그는 현재 곡성군 오곡면 구성리에 살고 있다. 9.30사건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 문서연락병 역할을 하며 이현상부대가 오지리를 습격하자 총을 쏘며 격전을 치렀지만, 중과부적으로 마을에서 철수해 살아남았다.
 
"빨치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 주변에는 수류탄을 던져도 넘어오지 못하도록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세운 목책을 둘렀지. 밤마다 대한청년단원들이 죽창을 들고 목책 주변에 보초를 섰는데 그날은 빨치산들이 너무 많아 철수했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락 논에 숨었던 사람들이야.
 
마을이 빨치산들에게 점령당한 다음 날 빨치산들이 동네 사람들을 강제동원해 오곡지서에 있는 책상과 집기들을 부숴버렸지. 10월 1일 남원에 주둔했던 진압군이 들어와 다리 위에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불순분자를 색출해 총살하려 하자 대한청년단장이던 안학선씨가 서남지구사령관한테 '동네 사람들을 죽이려면 나부터 먼저 죽여라'고 항의하자 처형을 그만뒀지"
 
"당시 빨치산이 된 사람들은 가난하고 배움도 적어 꾐에 넘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총도 별로 없었다"고 말한 그는 그 후 경찰관으로 17년간 봉직 후 퇴직해 국가유공자와 노령연금으로 살고 있다.
 
4.19가 일어나던 해에 성북경찰서에 근무했던 그가 경찰관의 직업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찰관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어요"라며 "인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돼. 전쟁나면 옛날처럼 몇 명만 죽는 세상이 아니지 않아?"
 
 
<곡성군 향토사>에 기록된 '곡성 9.30사건'의 전말
 
기왕 나선 김에 자세한 전말을 알기 위해 곡성군청 문화관광과에 들러 <곡성군 향토사>에 기록된 '곡성 9.30사건'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한청년단은 비정치적 반공애국단체로 중앙에 총본부, 도에 도본부, 시군에 시군본부, 읍면에 읍면단부, 동리에 분단으로 조직되어 여순사건 때부터 6.25전쟁까지 지방치안의 부족한 경찰력을 도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곡성 9.30사건'이란 1951년 9월 30일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단 주력부대가 곡성을 점령하려 시도했던 전투를 말한다.
 
9월 30일 밤 11시 40분. 지리산에 은거해 있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단 주력부대 2300명이 곡성을 삼면으로 포위 공격했다. 적습에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곡성경찰서장 구서칠과 전투대원은 피난 오는 우익인사와 부녀자, 어린이들을 경찰서에 수용하고 용전분투했으나 대부대의 공비 역습에 중과부적이었다.
 
포위당한 경찰서에 실탄이 떨어져갈 즈음에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 신상묵 일행과 구례경찰서장 김원용이 이끄는 구원군의 도착으로 공비들을 역포위하여 곡성읍내를 탈환했다.
 
형제봉과 천덕산으로 퇴각한 공비잔당을 물리치는 데는 군산기지에서 출격한 미공군 전폭기 편대의 대지공격까지 있었다. 3일 간의 전투결과는 공비사살 506명, 포로 31명, 투항 5명, 박격포 노획 5문, 기관총 8정, 소총 153정을 노획했지만 경찰도 전사 24명, 부상 17명의 손실이 났다.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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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