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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시가
2019년 6월
2019년 6월 2일
원가 (천관원사(天官怨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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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가요(古代歌謠) 김유신(金庾信) # 신라가요
【학습】
(2019.06.02. 14:22) 
◈ 원가 (천관원사(天官怨詞))
신라 진평왕 때 기녀 천관녀가 지었다는 노래로《천관원사(天官怨詞)》라고도 한다. 확실한 연대와 가사는 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유래와 가명(歌名)만 전한다.
목   차
[숨기기]
 

1. 천관원사(天官怨詞)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커다란 공훈을 한 김유신(金庾信)이 젊어서 가까이한 천관(天官)이라는 여인에 얽힌 전설이다.
 
신라의 제일 공신 각간 김유신이 젊었을 때의 일로, 그는 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 파는 계집의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다. 유신의 어머니는 이것을 알고 매우 걱정하여 하루는 곁에 불러 앉히고 엄하게 훈계를 하였다. 그때 유신은 비로소 미몽(迷夢)에서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그런 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유신은 놀이를 갔다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고 오던 말이 멈추어서서 고함을 지르므로 벌써 집에 도착하였는가 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집은 자기의 집이 아니라 전날에 드나들었던 천관의 집이엇다. 이것은 말이 전날에 다니던 집이라 길이 익은 까닭에 길가에 있는 천관의 집으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유신은 노하여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찼던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이고 말안장도 그 마당에 내버린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집 문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본 천관은 뜻 밖에이와같은 변을 만난지라 놀라 까무러쳤다가 얼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뒤 말없이 탄식하다가 유신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노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출처 :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연구사))
 
 

2. 요점 정리

주제 : 자신을 버린 임에 대한 원망(실연)
 
 

3. 내용 연구

신라 진평왕 때 기녀 천관녀가 지었다는 노래로《천관원사(天官怨詞)》라고도 한다. 확실한 연대와 가사는 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유래와 가명(歌名)만 전한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金庾信)이 화랑 시절에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그 동안 정을 나누어온 천관녀와의 인연을 끊었다. 하루는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그를 옛 습관대로 천관녀의 집으로 인도하자 김유신은 칼로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섰다. 이를 보고 천관녀가 김유신의 무정함을 원망하여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4. 이해와 감상

이와같은 유신과 천관에 얽힌 사랑 이야기는 민간설화로서 전하는 것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김유신에 관한 기록에는 천관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유신과 천관 사이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는 민간설화로서 전하는것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김유신에 관한 기록에는천관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권41 열전 제1 김유신 상에의하면 "유신이 화랑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장차 삼국을 병합할웅지를 품고 있었는데 건복29년(612)에 이웃나라의 침략이 날로 극심하매공이 더욱 비장한 마음을 품고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 깊은 골짜기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맹세하듯이 빌었더니 천관신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영기를 주었다."고하는데 이 부분에서 천관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때의 천관신은 도가의삼관신 즉 천관·지관·수관 가운데 하나를 말함인데 두명칭 사이의 관련성은 알 수 없다. 천관이 죽자 유신이 그 영혼을 위로하기위하여 그 집 자리에 절을 지어 천관사라고 하였다고 하며, 또한 자기가탔던 그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은 자리를 참마항이라 불렀는데 뒷날 사람들이이르기를 김유신의 삼국통일의 큰 업은 그 참마항에서 움텄다고도 전하여진다.
 
 

5. 심화 자료

김유신(金庾信) (595~673)
 
본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些)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茂山: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 ·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太宗武烈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忠北 永同郡의 飛鳳山城)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泗姐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周留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太大舒發翰)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천관녀
 
생몰년 미상. 신라 진평왕 때의 기녀(妓女). 천관녀(天官女)라고도 한다. 소년시절의 김유신(金庾信)과 서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를 안 김유신의 어머니가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오직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기생집에나 드나들고 있느냐.” 하고 울면서 책망하자, 김유신은 크게 뉘우쳐 다시는 기방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서약하였다.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의 집으로 갔다. 천관은 한편 원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러나 천관을 보고 놀라 술이 깬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도 버린 채 돌아가 버렸다.
이를 본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 한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뒤에 김유신이 그녀의 옛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고 하였다. 이 절은 오릉(五陵)의 동쪽에 있었다.
뒤에 원성왕이 복두(邏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쓴 채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의 샘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미루어, 천관사는 신라 하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慶州市誌(慶州市史編纂委員會, 197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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