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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행상, 부보상負褓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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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전통행상, 부보상負褓商,
부보상(負褓商,통칭 보부상)은 등짐장수인 부상(負商)과 봇짐장수인 보상(褓商)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며 해당 유형의 상인 단체를 총칭하기도 한다
부보상(負褓商,통칭 보부상)은 등짐장수인 부상(負商)과 봇짐장수인 보상(褓商)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며 해당 유형의 상인 단체를 총칭하기도 한다
 
 
 
 
●유래
등짐을 진 부상은 삼국시대 이전, 보따리를 인 보상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지만 19세기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단이 형성될 만큼 활발한 경제활동을 한 경제주역이었다. 등짐장수나 봇짐장수로도 부르고 5일장을 돈다고 해서 장돌뱅이로도 불리는 이들은 규율이 엄격한 상인집단이었다.
 
●일제의 교묘한 변칭 왜곡
보부상은 조선총독부(1925)에서 억상이간책략抑商離間策略으로 변칭한 왜곡명칭이고, 부보상은 조선태조(1392)가 중상육성정책重商育成政策으로 하사한 고유명사이다. 보부상은 일제가 박은 쇠못이고 부보상은 한국의 뿌리인 셈이다. 따라서 보부상의 명칭을 퇴출시키고 부보상의 명칭을 회복시켜야 한다.
 
대한제국(1897.10.12 ~ 1910.8.29)을 집어 삼킨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경술국치를 거친 1910년 10월에 조선통감부(1906년 2월 서울 남산 소재)의 뒤를 이어 내렸다. 그 후 15년 뒤인 1925년 조선총독부는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졌지만 서울의 광화문 경복궁 앞에 청사를 신축하고 입주하였다. 여기에 맞추어 조선의 역사를 왜곡 축소하는 선봉기구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총독관방 문서과의 촉탁인 일본사람 선생영조善生永助를 통하여 <조선의 상업>이라는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 78쪽에서는 한국의 전통행상傳統行商인 부보상을 보부상으로 교묘하게 변칭 왜곡시키었다.
 
 
 
 
남북통일과 북남통일의 의도가 다르듯이 부보상과 보부상의 숨겨진 의미는 크게 다르다. 부보상은 조선왕조 이성계 태조대왕(58세)이 1392년 건국과 더불어 하사한 고유 명칭이다. 조선총독부가 극성을 부리던 1925년 이전의 주요 국내문적國內文籍에는 모두 부보상이라는 명칭으로 착근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왕조 유통경제의 진귀한 보배로서 건재했던 부보상을 찌그려 트리고 보부상으로 변조하여 천덕꾸러기로 전락시켜 놓았다. 부보상은 우리 전통행상의 대명사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헷갈리도록 보부상으로 비틀어서 표현했고 천민의 대명사로 판박이 시켰다. 여기에는 일제의 간교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둔갑한 이유
1894년 당시 조선왕조 상리국에 납부된 전국 부보상 25만 명의 신표대금(신분증 발급비) 50만 냥의 절반인 25만 냥은 호조戶曹 세입금 54만 냥의 50% 규모였다. 조선의 시장지배권을 잠식하고 판갈이 하려는 일제의 경제침탈 술책이 엿보인다. 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렬했고 민심을 주도했던 부보상을 보부상으로 폄하시켜서 다목적의 식민 침탈 적 일본상인이 주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여기에는 태조 이성계의 중상정책重商政策을 탈색시키려는 일제의 의도 또한 담겨져 있었다. 사농공상은 일본과 그리스에서는 직업과 신분의 서열개념이었으나 조선왕조에서는 사민주의四民主義에 입각한 생업의 균등개념이었다
 
 
 
 
태조는 나라와 백성의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행상단行商團의 대표자인 백달원에게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는 옥도장을 하사하여 부보상의 명칭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도리로서 위상애당爲上愛黨 병구사장病救死葬의 여덟 글자의 교서를 내려 훈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부보상들에게 목기, 토기, 가마솥, 소금, 어물의 다섯 가지 식필품食必品의 전매특허를 내렸고 전국각처에 임방任房을 설치하여 부보상들의 숙식 건강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이러한 중상정책은 동서고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태조가 조선왕조를 건국할 무렵에 전국의 행상인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해야하는 절박한 국가적 상황에서 전폭적으로 지지 협조하였다. 이에 일본식 서열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천민개념의 비뚤어진 시각으로 접근해 부보상들이 협력해 일궈낸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역성혁명의 세력으로 깔아뭉갰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 땅에서 석굴암해체(1907), 창씨개명(1940), 동해변조(1929), 지명변조 등과 더불어 명당산천에 쇠말뚝박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의 일환으로 멀쩡한 부보상을 보부상으로 변조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고려왕조 때인 1380년 이성계 장군의 전북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과 조선왕조 때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의 남해대첩으로 한국침략이 좌절되어 절치부심했던 것이다.
 
일제는 태조 이성계가 애착을 가졌던 부보상을 어떻게든지 소탕시킬 심산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세뇌교육을 주도하여 조선의 굳건한 상인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책략을 전개하였다. 조선통감부(1906), 조선총독부(1910), 조선사편찬위원회(1921), 조선사편수회(1925), 이왕직장관(1927) 등의 조직기구에서 이를 주도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남성과 여성을 이간시키고자 술책을 도모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부인은 안방마님으로, 남편은 사랑방주인으로 행세하여 각각 독자적인 평등성을 도모해 왔었다. 부상(負商 등짐장수)은 남자이고 보상(褓商 봇짐장수)은 여자인 점을 남존여비로 왜곡, 꼬집어 내어 부보상의 순서를 보부상으로 둔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예와 덕을 중시했던 호국의 상인들
부보상負褓商은 등짐장수[負商]와 봇짐장수[褓商]를 합성하는 행상行商이다. 행상은 팔 물건을 가지고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장사인데 점포에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물건을 파는 좌상坐商과 구별된다. 이러한 부보상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속마음을 상량商量하고 예의禮義바른 따뜻한 정감情感을 가진 상인이었다. 부보상은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사람살이를 음미하는 동시에 상도商道를 실천에 옮기면서 살았던 유무상통의 줄기세포였다. 농경사회에서 멸시받아 온 상인들은 스스로 직업의 신성성을 지키고 천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정해 상거래 질서를 유지해왔다.
 
 
 
 
위계질서와 상도의를 세워 민중들에게 신용을 얻어 자존을 지켜 온 것이다. 사방팔방의 부보상들이 모두 형제 가족처럼 신의성실信義誠實로써 살았기에 지난 날 그들의 행적이 현대에 이르러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부보상은 전통적으로 사람다운 덕망을 갖추도록 노력했다. 부보상의 전통적 특질 중 하나인 인덕상仁德商에는 그들이 지켜온 사대강령四大綱領이라는 것이 있다. 물망언勿忘言, 물패행勿悖行, 물음란勿淫亂, 물도적勿盜賊이 그것이다. 망령된 말을 하지 말고, 패륜적인 행동을 하지 말며, 음란한 짓을 하지 말고,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이 기본적인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스스로의 각성으로서, 태조가 교시했던 윗사람을 받들어 주고 동료를 사랑하라는 위상애당爲上愛黨과 일맥상통한다. 부보상들의 질병을 구료해 주고 사망하면 장례지내 주라는 태조의 마음 씀씀이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부보상은 유통경영의 줄기세포로서 신의성실信義誠實을 바탕으로 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가교역架橋役을 수행했다. 부보상들은 시장의 울타리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고 하여 <장돌뱅이>로 불리었고, 시장과 시장의 연결흐름을 원활하게 돌려냈다고 하여 <장돌림>이라고도 불렸다. 행상이 직업인 부보상들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할지라도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다. 그들은 석왕사중건(1392)과 암행어사수행, 황국협회활동(1898) 등에 정성을 다했다. 또한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의 국가적 변란에는 상병활동을 통하여 뜨거운 물과 불 속에도 뛰어 드는 호국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보상 출신의 근현대적 주요 인물들
부보상 출신의 근현대적 주요 인물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이용익 이승훈 김수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이다.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본래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한때 울산에 내려가 무명행상木花行商을 직업으로 삼아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조선왕조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은 최측근인 충숙공 이용익(1854~1907) 대신은 17세부터 20세까지 무거운 소금 짐을 등에 지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연변까지 떠돌면서 장삿길을 다녔고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성냥을 받아 북청과 회령 일대에 팔기도 했다.
 
이용익은 궁내부 내장원경을 비롯한 탁지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냈고 반일反日의 선봉장이었으므로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풀려 귀국한 후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은 15세부터 24세 때까지 유기행상鍮器行商을 생업으로 지속한 진취적인 평양상인平壤商人이었다. 남강은 1919년 삼일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유기공장을 열어 큰돈을 번 뒤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이다.
 
2009년 2월 타계한 김수환 추기경은 부보상 출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김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의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인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행상甕器行商과 포목행상布木行商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행상인 부보상은 인덕仁德으로써 인륜도리를 숭상하였고 진충보국하는 국가관이 투철한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유무상통의 중심역할을 수행 하였으므로 세계적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 500여 년을 지탱하여 온 상업문화의 지킴이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
 
 
 
 
글·이훈섭 경영학박사, 전 경기대학교 교수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연합콘텐츠, 엔싸이버 포토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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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