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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도입과 민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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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한국야구 도입과 민족혼
●3·1운동의 여진 속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야구팀, 한용단
 
 
●3·1운동의 여진 속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야구팀, 한용단
 
1920년,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며 매일 서너 시간을 함께 보내던 인천의 소년들이‘한용단’(漢勇: 용감한 남자)이라는 야구팀을 만들었다. 바로 한 해 전 3·1운동의 물결을 경험하며 조숙해진 16,7세 소년들의 의기와 포부와 딱 그만큼의 낭만이 녹아든 이름이었다. 그 팀은 결성 자체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3·1운동 때 선전물을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뒷날 독립운동가로, 또 정치가로 성장하여 1~5대 의원을 지내게 되는 곽상훈이라는 청년이 주도해 도서관을 짓고 문예지를 발간하는 등의 문화사업들을 벌이겠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야구를 각지의 청년단체들과 교류하며 뜻을 모으는 수단으로 설정한 민족주의 단체가 바로 한용단이었기 때문이다.
 
창단 초기 서울, 개성 등의 청년단체들과 친선경기를 하며 경기경험을 쌓고 기틀을 다진 한용단은 창단 2년째인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 팀들에 도전장을 내 주말마다‘웃터골’이라는 공터에서 결전을 치르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야구가 뭔지도 잘모르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한용단을 응원하곤 했다. 야구는 당시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장戰場이었고, 한용단은 그 싸움에서 이따금이라도 승리를 맛보게해주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서러움과 분노 속에서 시작된 한일전의 역사
 
특히 본격적인‘한용단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다시 이듬해인 1922년이었다. 한국인 팀 3개, 일본인 팀 7개가 참가했던 그 해 5월 ‘전인천춘계야구대회’에서 한용단이 한국인 팀 중 유일하게 1회전을 통과해 결승전까지 진출하자 다시 수천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 열광했다.
 
그 날 한용단은 이미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국가대표팀이나 다름이 없었고, 연전연승하며 우승 목전에 도달한 그 모습은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서 좌절한 식민지 백성의 눈앞에 펼쳐진 재기와 희망의 이미지였다.
 
일본의 ‘동지同志’라는 팀과 맞붙은 결승전에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주최측과 심판은 편파판정을 남발했지만, 한용단은 9회 말까지 꿋꿋이 6대 5로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9회 말 마지막 수비의 2사 3루, 2스트라이크 3볼 풀카운트 상황에서 한용단의 투수가 동지 팀의 마지막 타자에게 던진 공에 승리와 우승의 주인공을 동시에 결정하는 마지막 3번째 스트라이크가 선언됐고, 순간 한용단의 모든 선수들은 마운드 위로 몰려들어 뒤엉킨 채 감격을 나누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일본인 심판은 조용히 스트라이크 판정을 볼로 번복했고, 한용단 선수들이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사이 3루에 있던 동지 팀의 주자가 도둑처럼 홈을 밟아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해괴한짓을 벌이고 말았다. 한용단 선수들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끼고 얼싸안았던 팔을 풀었을 때, 점수는 6대 6, 주자 1루의 상황에서 동지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관중들이 그걸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노한 수천의 관중들이 심판을 향해 쇄도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심판은 냅다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관중들의 격렬한 항의는 일본인 경찰들이 출동해 한바탕 몽둥이찜질이 이어지고또수십 명이 잡혀간 뒤에야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한용단은 강제 해산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한국인들이 뭉치는 단초가 된다면 무엇이든 일단 자르고 봐야겠다는 총독부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땅에 뿌려진 야구의 씨앗 한알은 바로 그 날 그런 분노 속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야구, 전설과 영웅과 삶의 힘을 길러내다
 
그렇게 해방 전 조선 땅에도 야구가 있었다. 한용단의 슬픈 전설이 있었고, 또한 조선 반도 출신으로 전일본 대표로 선발돼 베이브 루스와 일합을 겨룬 홈런왕 이영민의 장한 소식도 있었다. 전설은 씨앗이 되어 영웅을 불러내고, 그 영웅은 다시 세월과 함께 전설이 되며, 고단한 삶의 힘이 되어주는 역사가 그렇게 이 땅에서도 시작됐던 것이다.
 
글. 김은식(저술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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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